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4

한무제漢武帝

8. 와해와 붕괴에 관한 서악의 주장은 고금의 성패에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서악(徐樂)은 “천하가 근심하는 것은 토대가 무너지는 것[土崩]이지 기와가 떨어지는 것[瓦解]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고금의 성패에 통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토대가 무너지든 기와가 떨어지든 간에 망하는 것은 똑같지만, 구체적인 형세는 다르다. 기와가 떨어지는 것은 결함을 보충하고 구제하는 일을 더불어 할 사람이 없어서 나라의 운명이 소진되는 모습을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토대가 무너진다는 것은 누군가 지탱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진나라는 토대가 무너진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나서서 소리치자 천하가 벌떼처럼 일어나 호응한 결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사직이 멸망하고 종묘의 제사가 끊어졌으니, 멸망이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므로 기와가 무너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들보가 본래 견고하지 않고 서까래가 본래 불안하여 동서남북이 분열하여 추락하니 순식간에 나뉘고 붕괴하여 기왓장 하나 남지 않았지만, 천하 사람들 모두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서서 구하려 하는 이가 없었다. 그 기와가 잘 얹혀 있을 때 이미 서로 의지하고 묶어 줄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수나라와 원나라도 이와 같았다.

주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지자 도읍이 있던 삼천(三川) 땅이 비로소 진나라에 병탄되었고, 한나라는 누차 위험을 겪은 후 위(魏)나라에 찬탈당했고, 당나라의 경사는 세 번이나 함락되고 천자가 네 차례나 경사 밖으로 도피한 뒤에 양(梁)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송나라는 먼저 변경에 도읍을 정했다가 다음에는 항주(杭州)로, 다시 복건(福建)으로, 광주(廣州)로 도읍을 옮긴 뒤에 결국 천자가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것들이 바로 토대가 무너진 경우이다. 간혹 황족의 지파(支派)가 먼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했고, 외로운 신하가 여전히 맡은 지역을 사수(死守)하기도 했다. 경사가 함락되어도 들판에 피난할 만한 평안한 건물이 있다면 사직이 바뀌어도 아래에는 새 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피해 사는 충신이 있기도 했다. 대개 왕조의 토대가 지극히 깊고 두텁게 다져졌다 해도 세월이 지날수록 부식이 심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토대가 무너지면 반드시 수백 년 후에 기와가 떨어지는 상황으로 이어지며, 기와가 다 떨어지고 나면 천하는 다시 안정되기 시작한다. 기와가 떨어질 무렵이면 하늘은 기운을 해치고, 사람은 사망하며, 천륜은 손상을 입는 일이 극에 이른다. 그 왕조가 무너지고 나서 다시 왕조를 세운 군주와 재상은 이런 점을 매우 중시하지만, 본래 뜻있는 인사들은 천륜을 바로잡고 혼란을 바르게 되돌리지 못해 자책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9. 주보언이 중용되고 나서 일을 논한 것은 처음 상서를 올렸던 때와 자체로 모순이 된다

주보언은 처음 상소를 올렸을 때 이렇게 말했다.

“몽염(蒙恬)이 북방 오랑캐를 공격하여 강역을 천 리나 개척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으면서 병력을 드러낸 채 주둔한 바람에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군량을 신속히 운송하느라 백성들이 피폐해져서 천하가 진나라에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논리가 매우 엄정하다. 그런데 그가 낭중(郞中)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이렇게 말을 바꿨다.

“내몽고 하투(河套) 황하 이남은 토지가 비옥하고 밖으로 황하가 막아 주고 있어서 몽염이 그곳에 성을 쌓아 흉노를 쫓으면서 중국의 영토를 넓히고 오랑캐의 뿌리를 없앴사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무제에게 힘껏 청원하면서 다른 이들의 논의를 배제한 채, 몽염이 쌓았던 요새를 수리하고 황하를 이용해 견고하게 수비하도록 하면서 산동(山東)의 물자를 운송하게 함으로써 백성을 고생시키고 나라의 창고를 비워 버렸다. 같은 사람이 같은 사안을 얘기했는데 몇 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몽염의 공과 죄, 황하 이남의 흥성과 피폐가 달라졌으니, 자체의 모순이 이처럼 심했다. 이것으로 보면 간사한 자를 변별하는 것이 어찌 어렵다고 하겠는가? 말을 듣고 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여러 가지를 참조하여 짐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미 환하게 보고 바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무제는 주보언의 말을 두 번 듣고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강충(江充)에게 미혹되어 부자지간의 은정을 해치게 된 것도 당연했구나!

10. 가의의 책략이 주보언의 시대에 시행되다

번국(藩國)을 나누어 제후왕의 자제를 열후(列侯)에 봉하는 정책은 주보언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가의에게서 시작되었다. 가의의 주장이 이때에 이르러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 환경 때문이었다. 가의의 시대에는 제후왕의 세력이 강하고 천하가 막 평정된 상태여서 오나라와 초나라가 모두 무척 사납고 교만하여 천자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으니, 그 정책을 시행할 수 없었다. 무제는 일곱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한 뒤를 이었는데, 당시는 제후왕들의 기세가 이미 사그라들어서 주보언이 홀로 수레를 타고 제나라에 가자 제나라 왕이 두려워 자살해 버렸다. 그러니 다른 제후왕들이 겁을 집어먹고 죄를 피하기 위해 자제에게 분봉(分封)해 줌으로써 안위와 영화를 유지하려 했으니, 주보언의 주장은 이런 시대 환경을 타고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봉건제는 반드시 폐지되어 다시 회복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추세가 이미 누적되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되었던 것이다.

고조가 같은 성씨의 제후왕을 대대적으로 봉해 준 것은 주나라의 여파였다. 무제가 여러 명의 제후왕을 세워 그 세력을 약화시킨 것은 당·송 시대의 정책에 앞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을 일개 주보언이 어찌 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늘이 힘을 빌려주고 사람이 거기에 익숙해져서 봉건제가 점차로 쇠락하여 끝내 완전히 없어지게 된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이가 천하의 벼슬자리에 천하의 현자를 앉히는 것이 바로 선왕이 남긴 뜻이 아닌가? 사마씨는 조위(曹魏) 종실(宗室)이 고립무원의 곤경에 처했던 데에서 교훈을 얻어 옛날과 반대로 다섯 오랑캐의 변란을 불러들이려 했으니, 그 지혜가 어찌 주보언보다 못했기 때문이겠는가? 그저 시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