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대기서’의 평점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대기서’의 평점이다. 이것은 ‘사대기서’가 중국소설사에서 가장 널리 출판되고 평점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로, 복잡하게 잇달아 나오던 ‘사대기서’ 간본(刊本)의 텍스트가 틀을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에 《서유기》를 제외하고 《수호전》과 《삼국연의》, 《금병매》 모두 이 시기에 각자의 평점의 전 과정이 완료되었고, 진성탄(金聖嘆)과 마오 씨(毛氏) 부자, 장주포(張竹坡) 삼가의 평본이 강희제 이후의 통행본이 되어 널리 유행했다. 당연하게도 《금병매》의 경우 이후에도 원룽(文龍)의 비본(批本)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간행되지 않은 채 문인이 스스로 감상하기 위해 만든 평본으로 근년에야 발견되었다. 《수호전》의 경우는 옌난상성(燕南尙生)의 《신평수호전(新評水滸傳)》이 있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사대기서’라는 명칭은 비교적 이른 것으로는 리위(李漁)가 강희 18년(1679년)에 《삼국연의》에 쓴 서문에 나타난다.
예전에 왕스전(王世貞) 선생이 우주에 ‘사대기서’가 있다면서, 《사기》와 《장자》, 《수호전》, 《서상기》를 들었다. 펑멍룽에게도 ‘사대기서’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삼국연의》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가 그것이다. 두 사람의 논지는 서로 다른데, 나는 책의 기이함은 그 부류를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호전》은 소설가로 경사와는 같지 않고, 《서상기》는 사곡이니 소설과도 다르다. 이제 이러한 부류로 그 기이함을 안배한다면, 펑멍룽의 설이 옳은 듯하다.(昔弇州先生有宇宙四大奇書之目, 曰《史記》也, 《南華》也, 《水滸》也, 《西廂》也. 馮夢龍亦有四大奇書之目, 曰《三國》也, 《水滸》也, 《西遊》也, 《金甁梅》也. 兩人之論各異. 愚謂書之奇, 當從其類. 《水滸》在小說家, 如經史不類. 《西廂》系詞曲, 與小說又不類. 今將從其類以配其奇, 則馮說爲近是.)[리위(李漁), <고본삼국지서(古本三國志序)>, 《성산별집(聲山別集)》 본]
이 네 권의 소설이 당시에 이미 명성을 누렸던 것은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사상과 예술적 품격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지만, 평점자가 광범하게 주목하고 힘을 다해 고취한 것 역시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바로 이 백 년 간의 평점이 ‘사대기서’ 텍스트의 함의와 전파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시기의 ‘사대기서’ 평점 상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삼국연의》는 평본이 7종이 있는데, 순서대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리줘우선생비평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명말 졘양(建陽) 우관밍(吳觀明) 간본, 예저우(葉晝) 평점], 《리줘우 선생 평 신간 삼국지(李卓吾先生評新刊三國志)》[명말 바오한러우(寶翰樓) 간본, 무명씨 평점], 《중보징 선생 비평 삼국지(鍾伯敬先生批評三國志)》(명 천계 간본), 《신준교정경본대자음석권점삼국지연의(新준 校正京本大字音釋圈點三國志演義)》[명 천계 숭정 연간 졘양 바오산탕(寶善堂) 간본, 무명씨 평점], 《회상삼국지(繪像三國志)》[청초 이샹탕(遺香堂) 간본, 무명씨 평점], 《사대기서 제일종 삼국연의(四大奇書第一種三國演義)》[청 강희 18년 쭈이겅탕(醉耕堂) 간본 마오 씨 부자 평점], 《리리웡 비열 삼국지(李笠翁批閱三國志)》(청 순치 14년 간본).
《수호전》은 주료 3종의 평본이 있는데, 각각 《중보징선생 비평 충의수호전(鍾伯敬先生批評忠義水滸傳)》[명말 쓰즈관(四知館) 간본],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명 숭정 14년 관화당 간본), 《쭈이겅탕 간 왕스윈 평론 오재자 수호전(醉耕堂刊王仕雲評論五才子水滸傳)》(청 순치 14년 간본)이다.
《금병매》 평본으로는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와 《제일기서금병매(第一奇書金甁梅)》(청 강희 연간 간본, 장주포 평점)가 있다.
《서유기》 평본으로는 《리줘우선생 비평 서유기(李卓吾先生批評西遊記)》[명말 간본, 예저우(葉晝) 평점]와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청초 간본, 왕샹쉬(汪象旭), 황저우싱(黃周星) 평점]이 있다.
상술한 평본 가운데 ‘사대기서’는 각각 그 나름의 평점 시리즈를 형성하고 있는데,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비교적 많은 공통성을 띠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개괄된다.
우선 ‘사대기서’의 평점은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소설 텍스트에 대해 수정했고, 아울러 각자의 평점 계열 중에서 점차 정형화된 소설 텍스트를 형성해 나갔다. 이것 역시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수정한 텍스트와 평점 문장이 함께 완전한 전체를 구성해 이후의 통행본을 이룬 것으로 《수호전》의 진성탄(金聖嘆) 비본(批本)과 《삼국연의》의 마오 씨 부자 비본, 《금병매》의 장주포(張竹坡) 비본이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수정한 텍스트가 후대 독자와 평점가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 평점 문장은 소설 텍스트와 함께 널리 유전되지 못한 것으로, 이를테면 《금병매》의 리위(李漁) 평본과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가 그것이다. 소설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은 명말청초 소설평점의 비교적 보편적인 현상으로 특히 ‘사대기서’의 평점 중에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소설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유전에 대해 말하자면, ‘사대기서’의 텍스트 수정은 일종의 문인화의 개조(改造)로, 이로 인해 소설 텍스트가 더욱 정교해졌고, 이렇게 해서 통속소설의 유통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문인과 보통의 독자가 공동으로 사랑하는 소설 텍스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소설의 창작에 대해 말하자면, 개정한 ‘사대기서’는 고대소설사에서 모종의 텍스트의 ‘모델’이 되어 이로부터 이후의 소설 창작이 영향을 받았다.
다음으로, ‘사대기서’의 평점은 소설평점사에서 앞선 것을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작용을 했다.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은 리줘우(李卓吾)에게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는데,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의 《수호전》 평본 중에서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전파가 결합된 것은 이후 소설평점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사대기서’의 평점은 바로 이러한 평점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이러한 ‘결합’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평점의 형태로 말하자면, 진성탄이 확립한 종합형의 평점 형태, 곧 ‘독법’, ‘미비’, ‘협비, ’총비‘ 등으로 구성된 평점 형태가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독서 지도(導讀)적인 성격이 서로 결합한 비평 형식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마오 씨 부자와 장주포 등의 진일보한 발전을 거쳐 소설평점사상 가장 격식이 갖춰진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사대기서‘의 평점은 근본적으로 통속소설을 ’소도(小道)‘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을 포기하고 소설을 《장자》와 《사기》 등과 같은 우수한 문화 전적과 같은 수준에서 논했다. 이것을 전제로 그들은 작품의 감정상의 함의를 탐구하고 작품의 형식 기교를 꼼꼼히 따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설을 비점(批點)하는 일은 가치 있고 일정한 문화적 품위가 있는 작업이 되었다. 청 중엽 이후의 《서유기》와 《홍루몽》, 《유림외사》와 《요재지이》 등과 같은 소설의 평점은 이런 틀에 따라 앞으로 발전해 나간 것들이다.
명말청초 ‘사대기서’의 평점 중에서 특히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과 마오 씨 부자가 비한 《삼국연의》, 장주포가 비한 《금병매》가 가장 뛰어났는데, 각각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도록 하겠다.
《제오재자서수호전》은 관화탕(貫華堂) 간본으로 1권은 <서(序) 일>과 <서(序) 이>, <서(序) 삼>이고, 2권은 <송사단(宋史斷)>이며, 3권은 <독제오재자서법(讀第五才子書法)>이고, 4권은 <관화탕 소장 고본 수호전 앞에 스스로 서 한 편이 있는데, 지금 그것을 기록했다(貫華堂所藏古本水滸傳前自有序一篇, 今錄之>이며, 5권 이하가 [소설] 본문이다. 평자는 작품에 대해서도 자못 많이 수정했다. 이 책이 만들어지고 간행된 연대는 일반적으로 진성탄의 <서 삼>의 말미에 서명된 시간에 근거하면 숭정 14년으로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 씨는 같은 편의 서에서 그가 《수호전》을 비점한 것은 일정한 시간 동안이라 했다. “오호! 사람은 [나이] 열 살에, 이목이 점차 떠져, 동쪽에 뜬 해처럼, 광명이 발휘된다. [그러니] 이와 같은 책을 내가 금지하여 너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한들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제는 서로 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앞장서서]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가한 것을 내어 드러내놓고 네 손에 건네주겠다,(嗟乎!人生十歲, 耳目漸吐, 如日在東, 光明發揮.如此書, 吾卽欲禁汝不見, 亦豈可得?今知不可相禁, 而反出其旧所批釋, 脫然授之于手也.)” 이것은 《수호전》의 비점이 곧 그가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해당 문장에서는 또 그가 열두 살 때 이미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술회하고 있다. 이 말은 당연히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수호전》을 비점한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이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은 숭정 14년 관화탕 간본이다. ‘관화탕’은 진성탄의 가까운 벗인 한주(韓住)의 당호이다. 진성탄은 그때 당시 34세였다. 진성탄(1608~1661년)은 우 현(吳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차이(采)이고, 자는 뤄차이(若采)이며, 뒤에 런루이(人瑞)로 개명하고 호를 성탄(聖嘆)이라 했다. 청 순치 18년에 한 시기를 뒤흔들었던 강남(江南) 땅의 ‘곡묘안(哭廟案)’에 연루되어 청 조정에 의해 피살되었으니 당년 54세였다. 진성탄은 어려서 우 현의 제생(諸生)이 되고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에 보임되었다가 “세시(歲試)에서 지은 글이 괴탄하고 불경하다” 하여 “퇴출”되었다[무명씨의 《신축기문(辛丑紀聞)》]. 뒤에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접고 벗들과 담론하는 것말고는 “오로지 관화탕에 들어앉아 독서하고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랴오옌(廖燕), <진성탄 선생전(金聖嘆先生傳)]
진 씨는 평생 지은 저서가 풍부했고, 내용은 광범위했으니, 문학 비평만을 놓고 본다면 후대 사람들에게 10종의 저작(미완의 원고를 포함해)을 남겼다. 그것은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 《관화탕 제육재자서 서상기(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창징탕 두시해(唱經堂杜詩解)》, 《창징탕 석소아(唱經堂釋小雅)》, 《창징탕 고시해(唱經堂古詩解)》, 《창징탕 비 어우양융수 사 십삼수(唱經堂批歐陽永叔詞十三首)》,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 《좌전석(左傳釋)》, 《서 이소경 유인(序離騷經有引)》으로, 시와 문장, 사, 소설, 희곡 등 5대 문체를 아우른다. 이렇듯 광범위한 비평 행위는 중국문학비평사에서 자못 드물게 보이는 것이다.
상술한 10종의 비평 저작들은 실제로는 양대 계열을 이루고 있는데, ‘육재자서’가 그 비평의 커다란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고,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등과 같은 ‘육재자서’ 이외의 비평이 또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 ‘육재자서’는 진성탄 문학 비평의 주체로(비록 전부가 완성된 것은 《수호전》과 《서상기》에 불과하지만) 진성탄 문학 비평의 특색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으면서, 비평자 개인의 감정과 의취(意趣), 그리고 인생의 이상을 융합한 것이다. 이를테면 《서상기》의 비평에 대해 진성탄은 스스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서상기》는 어떻게 하다가 간행하고 비(批)한 것인지요? 나는 [그 질문에] 사뭇 감회가 어려 조용히 일어나 그에게 대답했다. ‘아! 나 역시 그렇게 한 까닭을 모르오. 다만 내 마음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 그리한 것이라오(或問于聖嘆曰: 《西廂記》何爲而刻之批之也? 聖嘆悄然動容, 起立而對之曰: 嗟乎! 我亦不知其然, 然而于我心則不能自已也.)”[《관화탕 제육재자서 서상기(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 <서일(序一)>]라 말했다. 진성탄의 친척 형뻘 되는 진창(金昌) 역시 <서제사재자서(叙第四才子書)>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내가 일찍이 두푸(杜甫)의 시를 반복해 보다가 당 이래로 지금까지 살펴보면, 두푸가 지을 수 없었던 시가 없었고, 진성탄이 비(批)할 수 없었던 내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핵심을 파내고 골수를 발라내었기에 절묘한 뜻을 넓고 깊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허위를 제거하고 바른 것을 보존하였기에 천기의 간절하고 진지함을 얻을 수 있었다. 대개 두푸는 충과 효를 아는 선비라, 충효의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망연히 길을 잃어 그의 깊은 뜻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余嘗反復杜少陵詩, 而知有唐迄今, 非少陵不能作, 非唱經不能批也.……乃其所爲批者, 非但剜心抉髓, 悉妙意之宏深, 正復袪僞存眞, 得天機之剴之. 蓋少陵忠孝士也, 匪以忠孝之心逆之, 茫然不歷其藩翰.)” 이것으로 이것이 자신의 정감을 융합한 문학 비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계열의 비평은 ‘교과서’ 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는 “아들과 조카들에 훌륭한 문장을 짓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역시 그러하다. 진성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치 17년 2월 8일, 내 아들인 융이 칠언 율시에 대해 대충 이야기해달라고 보채 거절할 수 없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 해 여름 4월 보름까지 앞뒤로 모두 해서 이야기해준 시가 만 육백 수 정도 되었다(順治十七年二月八之日, 我子雍强欲余粗說唐詩七言律體, 余不能辭. 旣受其請矣, 至夏四月望之日, 前後通計所說過詩可得萬六百首.)”[《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서(序)>] 진성탄의 문학 비평의 가치는 주로 ‘육재자서’ 계열에 표현되어 있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의 사상 경향은 텍스트에 대한 수정과 구체적인 평술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표현되어 있는데, 주로 평술에 나타나 있다. 함의상으로는 주로 ‘도적질(盜)’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는데, 곧 《수호전》의 기본 정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진성탄은 분명히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한 편으로는 ‘도적질’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반대하고 있다. <서 이(序二)>에서 그는 이 책을 평점하는 것이 ‘당대의 근심(當世之憂)’, 곧 천하가 분란에 빠져 기치를 들고 이곳 저곳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그가 《수호전》을 평점하고 수정한 것은 곧 “이전 사람들의 이미 죽어버린 마음을 주살하고(誅前人旣死之心)”, “후대 사람들이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뒤끝을 방비하기(防後人未然之後)” 위함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구체적인 평술 중에는, 특히 《수호전》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흥미로운 현상은 진성탄이 《수호전》을 평점하는 가운데 가장 찬미했던 인물은 공교롭게도 반란 의식이 가장 강력했던 리쿠이(李逵), 루다(魯達), 우쑹(武松), 롼샤오치(阮小七) 등과 같은 인물들이었고, 가장 미워했던 것은 오히려 힘을 다해 초안(招安)하고자 했던 쑹쟝(宋江)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러한 모순 속에서 평점의 사상 일치를 추구했는가? 진성탄은 대체로 두 가지 방식을 채용했다. 인물에 대한 평판 속에서 진성탄은 인물 행위의 정치적인 가치판단을 개개의 인물과 인물 개성의 도덕적인 가치 판단과 분리했다. 정치적인 가치에서 출발해 진성탄은 《수호전》 인물의 반란 행위를 반대했지만, 도덕적인 가치로부터는 인물의 ‘진짜와 가짜(眞假)’가 인물의 고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준칙이 되었던 것이다. 전자는 전체를 통괄하는 것이고, 후자는 구체적인 것으로, 그런 까닭에 《수호전》 평점 중에서는 비록 작품 전체의 함의에 대한 부정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구체적인 평술에 들어가면 충심에서 우러나온 찬미가 평점 문장 속에 관통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적질을 하게 된” 기인(起因)에 대해서 진성탄은 “반란은 위에서 비롯된 것(亂自上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그들이 “부득이하게 녹림에 이른 것(不得已而至于綠林)”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해 대량의 평술과 분석을 통해 가오츄(高俅)와 같은 무리가 량산보(梁山泊) 영웅들에 가한 박해를 두드러지게 했다. 총결하자면, 진성탄이 이른바 ‘도적질(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에는 모순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천하가 청명한 상태를 소망하면서 천하의 도가 분란에 빠진 것을 걱정했기에, ‘반란’이라는 행위 자체는 반대했지만, 사람들을 핍박해 ‘도적질을 하게’ 만든 사회적 환경은 깊이 증오했고, 그럼으로써 이것을 그들이 책임을 벗어나는 빌미로 삼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평술 가운데 그는 《수호전》의 영웅들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들 개개인의 성격을 찬미했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의 가치는 다방면에 이른다. 그가 《수호전》 텍스트를 개정하고, 《수호전》의 예술 수법과 창작 경험을 총결하고, 대량의 이론적 관점을 제출한 것은 모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여러 제현들의 논술이 자못 많으나 재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가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할 것이다.
우선 평점 형태로 말하자면, 진성탄 비 《수호전》이 확립한 평점 형태, 곧 ‘서(序)’나 ‘독법’, ‘미비’, ‘협비’, ‘총비(總批)’ 등이 구성하고 있는 평점 형태가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독서 지도(導讀)적인 성격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비평 형식이다. 이러한 종합적인 성격의 평점 형태는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이 터를 잡고 이후에 마오 씨 부자와 장주포 등을 거쳐 진일보하게 발전해 소설평점사상 가장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냈다.
다음으로 소설평점의 함의상,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은 실제로 고대 소설 비평의 새로운 틀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문학적인 각도에서 소설의 인물 형상과 정절 구조를 평가하고 판단하며, 문장학의 각도에서 소설의 문장을 짓고 포국을 정하며 단어와 구절을 만들어내는 것을 분석했다. 그러므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중요한 함의는 ‘인물 성격’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구조와 장법’을 분석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은 그 구체적인 평점 가운데 이치를 분석하고 의론하며 평술하는 것이 하나로 융합되어 소설 텍스트의 구체적인 평술을 중시했던 동시에 다시 구체적인 평술의 기초 위에 이론 사상을 다듬고 개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이론 사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풍부함을 얻었는데, 이를테면 소설과 역사서를 비교하는 가운데 《사기》의 “글로써 사건을 운용해가는 것(以文運事)”과 《수호전》의 “글로써 인하여 사건이 일어나는 것(因文生事)”이 다르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소설은 “글로써 인하여 사건이 일어나기에”, 그 창작이 “오직 붓 가는 대로 따라가 긴 것을 짧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게 된다(只是順着筆性去, 削高補低都繇我.)” 이것은 소설 예술의 허구적인 특성을 명백하게 긍정한 것으로 이로부터 소설 창작 중에 [현상은 근원적이고 부차적인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인연생법(因緣生法)”이니 “격물(格物)”이니 “동심(動心)”이니 하는 등 일계열의 소설의 창작 관념과 이론적인 사상이 탐구되었다.
진성탄은 자신이 비한 《수호전》에서 의론에 뛰어났으니, 소설의 구체적인 정절과 사회 현실과 역사적 함의가 결합되어 ‘어느 하나를 구실 삼아 또 다른 것이 생겨나고(借題生發)’, ‘비분을 풀어내며(抒發悲憤)’, ‘당시의 폐해를 지적해 질책하는(指擿時弊)’ 등 그와 같은 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평점자가 소설 비평 중에 [자신의] 감정을 그 안에 융합해 그것을 인생 사업의 중요한 요인으로 삼았던 것이며, 동시에 독자가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하나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진성탄 비 《수호전》은 비평적 사유와 문장의 풍격 상에서도 그 나름의 특색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평점의 과정 중에 평자의 주체적인 감정이 충만하고 또 그것이 작품 속에 투입되었으며, 평론의 언어가 생동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조정과 정국(政局)에 대한 비판과 탐관오리에 대한 공격할 때 진성탄은 감정을 듬뿍 담아 강렬한 사회 참여의식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드러냈다. 아울러 《수호전》의 영웅에 대해서, 특히 성격이 솔직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찬미의 감정이 언표 상에 넘쳐났으니, 이를테면, 루다(魯達)를 평하며, “루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쓴 것을 묘사하니 한 줄기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른다. 사람들이 이것을 읽으면 세상을 헛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부끄러움이 일어난다(寫魯達爲人出力, 一片熱血直噴出來, 令人讀之深愧虛生世上, 不曾爲人出力.)”고 하였다. 진성탄 비 《수호전》의 평점 언어 역시 개성이 강해 혹은 먹을 흩뿌리듯 듬뿍 묻혀내(潑墨如注) 시원시원하니 거침이 없고, 혹은 해학이 넘치고 가볍지만 붓끝에 날카로움을 담아내고 있으니(詼諧佻達, 筆含機鋒), 이것은 고대 소설평점사상 그 짝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대량의 묘사와 서술의 필법을 채용해 평점 문장에 생기와 활력이 넘치게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진성탄 비 《수호전》의 상술한 특색들은 각각 장점과 폐단을 갖고 있다. 그가 가득한 주관적인 감정의 발휘와 구실을 만들어 평론을 한 것 역시 후대의 소설평점에 소극적인 영향을 초래해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진성탄 비 《수호전》의 영향은 매우 커서, 이후의 소설평점은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마오 씨 부자의 《삼국연의》 평점과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 즈옌자이(脂硯齋) 등의 《홍루몽》 평점은 그 체제와 사상 면에서 모두 진성탄 비 《수호전》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성탄외서(聖嘆外書)’는 특히 후대의 소설 평본들 가운데 유행해서, 서상들이 자신들의 소설을 판매할 때 그것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진성탄 비 《수호전》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는 청대의 《수호전》 간본은 진성탄 비본이 주류를 이루어 기본적으로 《수호전》 유통 시장을 점거했다.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 쭈이겅탕(醉耕堂) 간본의 표지 상란(上欄)에는 “성산별집(聲山別集)”으로 새겨져 있고, 하란(下欄)의 우상귀에는 “고본삼국지(古本三國志)”라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사대기서제일종”이라 새겨져 있으며, 첫머리에 리위(李漁)의 서(序)가 있고, 말미에는 “강희 세차 기미 12월, 리위 리웡 씨가 우산의 청위안에서 제하다(康熙歲次己未十有二月, 李漁笠翁氏題于吳山之層園)”이라 서(署)했다. 각 권마다에는 “룽위안 마오쭝강 쉬스 씨 평, 우먼 항융녠 쯔넝 씨 평정(蘢園毛宗崗序始氏評, 吳門杭永年資能氏評定)”이라 제하였다. 앞에는 독법이 있고 본문 중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과 쌍행소자(雙行小字)의 협비가 있다.
마오 비본(批本) 《삼국지연의》의 평자는 역대로 제(題)와 서(署)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쭈이겅탕(醉耕堂) 본 표지에는 “성산별집”이라 새겨져 있고, 본문에는 “룽위안 마오쭝강 쉬스 씨 평, 우먼 항융녠 쯔넝 씨 평정(蘢園毛宗崗序始氏評, 吳門杭永年資能氏評定)”이라 제하였고, 건륭 34년 스더탕(世德堂) 본 비혈(扉頁)에는 “마오성산 평 삼국지(毛聲山評三國志)”라 제하였으며, 청 다쿠이탕(大魁堂) 비혈 상란에는 “진성탄 외서(金聖嘆外書)”라 제하고, 오른쪽에는 “마오성산 평 삼국지(毛聲山評三國志)”라 제하였으며, 동치 2년 쥐성탕(聚盛堂) 본 비혈에는 “마오성산 비점 삼국지(毛聲山批點三國志)”라 제한 것 등이 그러하다. 마오성산, 마오쭝강, 진성탄, 항융녠 네 사람을 언급한 것 가운데, 진성탄은 서방(書坊)에서 가탁한 것으로, 청 각본 《제일재자서》의 “진성탄 서(金聖嘆序)” 역시 학계에서는 이미 쭈이겅탕 간본 리위의 서를 삭제하고 개정해서 만든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항융녠이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마오성산의 학생으로 추측되는데, 일찍이 《삼국지연의》의 비점에 참여했고, 뒤에 몰래 자기 것으로 하고자 했다가 마오성산의 질책을 받아 평본 간행이 중도에 취소되었다. 마오성산이 세상을 뜬 뒤, 마오쭝강이 간행을 주재하자, 절충을 보아 간본의 비혈에 “항융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린(黃霖)의 <마오쭝강 비평 삼국연의․전언>(齊魯書社, 1991년)과 천훙(陳洪)의 《중국소설이론사》(安徽文藝出版社, 1992년)에 모두 고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마오성산과 마오쭝강, 그리고 항융녠 세 사람이 공동으로 완성했으나, 마오 씨 부자가 주역을 맡은 것이다. 이에 대해 마오성산은 <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뤄관중 선생이 《통속삼국지》 모두 120권을 지었는데, 그 사실의 기록이 오묘하여 쓰마쳰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 훈장에 의해 개악된 것을 내가 깊이 애석해 하였다. 작년에 그 원본을 얻어 볼 수 있어 그로 인해 교정을 했는데, 나의 우둔함과 고루함을 생각지 않고 힘써 절을 나누고 풀이하고는 매 권의 앞에 또 총평 몇 단락을 새겨 넣었다. 또 후배들에게도 미약한 논의나마 첨부하도록 해 함께 이 책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책이 이미 만들어졌을 즈음에 난징에 있는 친한 벗이 보고 칭찬을 하며 간행하고자 했는데, 뜻하지 않게 스승을 배신한 무리가 있어 몰래 이 책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해 이 책을 간행하는 일이 중도에 허공에 떠버려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이제 《비파기》를 먼저 내놓고 《삼국연의》는 나중에 출간할 것이다(羅貫中先生作《通俗三國志》, 共一百二十卷, 其紀事之妙, 不讓史遷. 却被村學究改壞, 余甚惜之. 前歲得讀其原本, 因爲校正, 復不揣愚陋, 爲之務分節解. 而每卷之前, 又刻綴以總評數段, 且許兒輩亦得參附末論, 共贊其成. 書卽成, 有白門快友, 見而稱善, 將取以付梓. 不意忽遭背師之徒, 欲竊冒此書爲己有, 遂使刻事中擱, 殊爲可恨. 今特先以《琵琶》呈敎, 其《三國》一書, 容當嗣出.)”
마오 씨 부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푸윈커쯔(浮雲客子)의 <제칠재자서서(第七才子書序)>와 추런훠(褚人獲)의 《견호집(堅弧集)》 등의 기록에 의하면 마오성산은 본명이 룬(綸)이고, 자는 더인(德音)이며, 쟝쑤(江蘇) 창저우[長洲; 지금의 쑤저우(蘇州)] 사람이다. 50여 세에 실명하여 “이에 호를 성산으로 바꾸고 쭤츄밍(左丘明)을 본받아 책을 짓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 삼았다.”(푸윈커쯔의 <제칠재자서서>) 그의 평점은 극히 고생스러운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다.
“근년 들어 병든 눈이 멀어, 빗장 걸고 마른 나무토막처럼 앉아 소일거리가 없었다. 예전처럼 《비파기》를 취해 아들에게 읽어달라 하여 그것을 듣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즐기는 사이에 또 문득 들었던 생각을 동호인들에게 공개하고자 했다. 이에 흥이 나는 대로 거칠게나마 평을 하고 순서를 매겨 내가 말을 하면 아들이 손으로 받아 적었다(比年以來, 病目自廢, 掩關枯坐, 无以爲娛, 則仍取《琵琶記》, 命兒輩誦之, 而後听之以爲娛.自娛之余, 又輒思出以公同好.由是乘興粗爲評次.我口說之, 兒輩手錄之,)”[<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
《견호보집(堅瓠補集)》에는 그가 60세 때 왕샤오인(汪嘯尹)을 위해 지은 축수시(祝壽詩)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기아와 추위 두 낱말에 찌든 한 고루한 서생, 하릴없이 만권 장서를 한탄하노라. 세상 사람들 장쓰예를 몰라보니, 그 누가 호의로 주머니 열어 보화를 선사할꼬(兩字飢寒一腐儒, 空將萬卷付嗟吁. 世人不識張司業, 若個纏綿解贈珠.)”, “오랜 병마와 가난에 늙도록 벼슬도 못하니, 하늘도 사람도 정의도 날 저버렸구나! 가난 길에 그저 남은 몇 방울의 눈물, 두 눈동자 안보여도 절로 흩뿌리누나.(久病長貧老布衣, 天乎人也是耶非!止餘幾點窮途淚, 盲盡雙眸還自揮.)” 이것은 그 생활의 진실한 면모를 그려낸 것이라 할 만하다.
마오쭝강(1632~1709년 이후)는 자가 쉬스(序始)이고, 호는 졔안(孑庵)으로 마오룬의 아들이다. 문재(文才)가 있어 일찍이 훈장 노릇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추런훠(褚人獲)와 유퉁(尤侗), 진성탄(金聖嘆), 쟝찬(蔣燦), 쟝밍(蔣明), 쟝즈쿠이(蔣之逵), 쟝선(蔣深) 등과 교유하며 아비를 도와 《삼국연의》, 《비파기》를 평점한 외에도 필기 《졔안잡록(孑庵雜錄)》 및 약간의 시문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그의 제자 쟝선이 소장한 《치원공무진주권병유촉수적합장책(雉園公戊辰硃卷幷遺囑手迹合裝冊)》의 제발(題跋) 문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불초해서 헛되이 아버지의 책을 읽고 늙도록 아무런 성취도 없었다.(予不肖, 空讀父書, 迄于老而無成)” 이것으로 그가 평생 우울하게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자세한 것은 천샹화(陳翔華)의 <마오쭝강의 일생과 《삼국지연의》 마오 평 본의 진성탄 서 문제(毛宗崗的生平與《三國志演義》毛評本的金聖嘆序問題)>, 《문헌(文獻)》, 1989년 제3기를 볼 것]
마오 씨 부자가 평점한 《삼국지통속연의》는 작품이 “시골 훈장에 의해 개악된 것”에 느낀 바 있어, “모두 고본에 의거해” “속본”에 대해 교정과 삭제 개정을 진행하는 한편 평점을 가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속본’이란 “리줘우 선생 비열(批閱)이라 가탁한” 본으로, 일반적으로는 예저우(葉晝)가 가탁한 것으로 여기는 《리줘우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다. 마오 씨 부자가 보기에 ‘속본’은 문장이나 정절, 회목, 시사(詩詞) 등의 방면에서 모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고본에 의거해 개정했던 것”이다. 아울러 평론 중에서도 “류베이(劉備)를 거스르고 주거량(諸葛亮)을 매도하는 말이 많았기에”, 이것 역시 “모두 삭제하고 새로운 평으로 바로잡았다.”(<범례>) 마오 씨의 이른바 ‘고본’이라는 것은 사실 가탁한 것이었기에 “리줘우 평본”에 대한 삭제 개정은 순전히 그것과 별도로 고쳐 쓴 것으로 비교적 높은 텍스트 가치를 갖고 있으면서 그들의 사상 정감과 예술 취미를 체현하고 있다.
마오 씨가 비평하고 개정한 《삼국연의》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류베이를 옹호하고 차오차오(曹操)에 반대하는(擁劉反曹)” 정통적인 관념을 진일보하게 강화한 것으로 그 <독법>의 첫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국지》를 읽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통(正統)과 정통이 아닌 왕의 통치(閏運), 나라를 찬탈한 것(僭國)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정통을 이룬 자는 누구인가? 촉한(蜀漢; 221~263년)이다. 나라를 찬탈한 자는 누구인가? 오(吳)나라(222~280년)와 위(魏)나라(220~265년)이다. 정통이 아닌 왕의 통치는 누구인가? 진(晉)나라(265~317년)이다.……천서우(陳壽; 233~297년)의 《삼국지》는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주시(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에 맞추어 《삼국연의》에다가 이 점을 덧붙여 바로잡았을 뿐이다.(讀三國志者, 當知有正統、閏運、僭國之別. 正統者何? 蜀漢是也. 僭國者何? 吳、魏是也. 閏運者何? 晉是也.……陳壽之《志》未及辨此, 余故折衷于紫陽《綱目》, 而特于演義中附正之.)
이런 관념에 바탕해 마오 씨는 《삼국연의》에 대해서 비교적 많은 첨삭을 가했고, 정절의 배치와 사료의 운용, 인물 형상의 소조에서 개별적인 용사[用詞; 이를테면, 원작에서 차오차오를 ‘차오 공(曹公)이라 칭한 것을 대부분 바꾸어버린 것]에 이르기까지 마오 씨는 모두 이러한 관념과 정신에 따라 개조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제1회 중에서 류베이와 차오차오의 형상을 고쳐 쓴 것이다. 이를테면, 류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그 사람됨은 평생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되, 개와 말을 좋아하고, 음악을 애호했으며, 옷을 잘 차려입고, 말수가 적었으며,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되,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那人平生不甚樂讀書, 喜犬馬, 愛音樂, 美衣服. 少言語, 禮于下人, 喜怒不形于色.) (리줘우 평본)
그 사람됨은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은 너그럽고 온화했으며,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되, 평소 큰 뜻이 있어 천하의 호걸과 교유하는 것만을 좋아했다.(那人不甚好讀書; 性寬和, 寡言語, 喜怒不形於色; 素有大志, 專好結交天下豪傑.) (마오 비본)
차오차오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영웅 한 명이 앞으로 뛰쳐나왔는데, 신장은 칠 척이고, 가느다란 눈매에 긴 수염을 하고 담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고, 지모가 출중해 제 환공과 진 문공이 나라를 바로잡고 떠받칠 재주가 없음을 비웃고, 자오가오와 왕망이 종횡가의 계책이 부족했음을 논하였으며, 용병술은 쑨쯔(孫子)와 우치(吳起)와 방불하고, 가슴 속에는 《육도》와 《삼략》을 깊이 암송하고 있었다.(爲首閃出一個好英雄, 身長七尺, 細眼長髥, 胆量過人, 机謀出衆, 笑齊桓, 晋文无匡扶之才, 論趙高、王莽少縱橫之策, 用兵仿佛孫、吳, 胸內熟諳韜略) (리줘우 평본)
[한 장수가] 앞으로 나서는데, 신장은 칠 척이고 가느다란 눈매에 긴 수염을 하고 있었다.(爲首閃出一將, 身長七尺, 細眼長髥.) (마오 비본)
수정하는 중에 평자의 주관적인 의도가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지만, 작자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회전비어(回前批語) 중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바쁜 가운데 갑자기 류베이와 차오차오 두 사람의 전기로 들어가니, 하나는 어려서부터 됨됨이가 컸고, 하나는 어려서부터 됨됨이가 간사했다. 하나는 중산정왕의 후예이고, 하나는 중상시의 양손이니, 그 출신의 높고 낮음이 이미 판별된 것이다.(百忙中忽入劉, 曹二小傳, 一則自幼便大, 一則自幼便奸. 一則中山靖王之後, 一則中常寺之養孫, 低昻已判矣.)
이러한 평가와 개정은 마오 비본 《삼국연의》 중 거의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 이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는 장기간 자못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혹자는 마오 씨가 청 왕조의 정통적인 지위를 옹호하는 각도에서 작품에 표현된 사상 경향을 질책한 것이라 하고, 혹자는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각도에서 그가 남명을 위해 정통적인 지위를 다툰 것이라 여겨 그 말하는 바의 각도가 같지 않지만, 모두 마오 씨 비본에 명확한 정치적 경향과 민족 의식이 드러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사실 그 정치적 색채를 과도하게 강화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 비본 중의 정치적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명과 청 왕조가 바뀌는 각도에서 논의를 펼쳐나갈 필요는 없다. “류베이를 옹호하고 차오차오를 반대하는” 정통적인 관념이 실제로 체현하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유가 사상으로, 특히 일종의 이상적인 정치와 정치 인물의 이상적인 인격에 대한 작자의 동일시를 드러내고 있다. 곧 류베이가 대표하는 인애(仁愛) 형상을 찬미하고 차오차오를 전형으로 삼는 잔인하고 포악한 형상을 비판하는 까닭에 그의 평가와 개정이 정치와 인격의 이중적인 표준을 체현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마오 비본의 텍스트적 가치는 평자의 《삼국지연의》 텍스트에 대한 예술적 가공에 체현되어 있는데, 특히 문장의 수정과 회목의 정리, 시문(詩文)을 바꾸고, 고사와 정절을 첨삭하는 등에 자못 많은 공력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작품의 언어와 정절의 서술이 더욱 유창하고 간결해졌으며, 인물 성격 역시 더욱 선명해졌다. 총괄하자면, 마오 씨 부자의 수정을 통해 작품의 예술성이 크게 제고되었던 것이다.
마오 씨 비본은 이론 비평의 방면에서 직접적으로 진성탄 평점 《수호전》의 전통을 계승했는데, 특히 평점의 외재적인 형식과 평점의 필법에서 확실히 “성탄의 저술 의도를 모방해 그렇게 했다(仿聖嘆筆意爲之).” 하지만 비평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이론적인 관념에서도 새로운 견해를 비교적 많이 내놓았다. 이를테면 소설의 허구와 사실(史實)의 관계 문제가 그러하다. 역사연의 소설로서 《삼국연의》는 기타 소설과 다른 창작 법칙과 특성을 갖고 있는데, 곧 역사적 사실과의 관계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마오 비본이 ‘실록’의 준칙에 기울어 있으면서 작품이 “제왕의 일을 실제로 서술하여 진실되고 고찰이 가능하다”는 특성을 긍정하고 있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사실은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마오 비본에서는 《삼국연의》와 《수호전》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삼국연의》를 읽는 것이 《수호전》을 읽는 것보다 낫다. 《수호전》의 글이 가지는 진실함은 비록 《서유기”의 환상보다는 조금 낫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고, 멋대로 사건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니, 그 솜씨가 《삼국》보다 까다롭지 않다. 그러니 [《수호전》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을 서술하되 그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문장을 부리는 솜씨가 아주 어려운 경지에 이르게 된 《삼국지》만 못하다는 것이다.(讀《三國》勝讀《水滸傳》. 《水滸》文字之眞, 雖較勝《西遊》之幻, 然無中生有、任意起滅, 其匠心不難, 終不若《三國》敍一定之事, 無容改易而卒能匠心之爲難也.)”(<독법>)
이것으로 마오 씨가 긍정한 것이 사실은 이른바 ‘실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장인의 마음(匠心)’이라는 각도에서, 곧 《삼국연의》야말로 역사적 사실의 제약 하에 써 내려간 절묘한 문장이었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창작하는 일은 확실히 《수호전》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오룬(毛綸) 역시 <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에서 분명하게 표출한 바 있다.
“《수호전》의 제목은 《삼국지》에 미치지 못한다.……《수호전》에 묘사된 것은 갈대 우거진 호수에 도적들이 모여든 사건으로, 《송사》 중의 일단에 불과하며 허구에 기대어 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기왕에 허구에 기대 멋대로 만들어냈으니 그 사이사이의 곡절과 변환은 모두 작자가 일시에 교묘하게 생각해낸 것일 따름이다(《水滸》題目不及《三國志》,……《水滸》所寫萑苻嘯聚之事, 不過宋史中一語, 憑空捏造出來. 旣是憑空捏造, 則其間之曲折變幻, 都是作者一時之巧思耳.)”
그러므로 마오 비본 가운데 비자(批者)가 《삼국연의》를 절묘하다고 여겼던 것은 그 관건이 삼국 시기 역사 사건 자체의 절묘함에 있는 것이고, “이런 천연의 절묘한 사건이 있어 천연의 절묘한 문장을 이루어냈던 것이다(有此天然妙事, 湊成天然妙文.)”. “천연 그대로 이러한 파란이 있고, 천연 그대로 이러한 층차와 곡절이 있어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이루어냈던 것이다(天然有此等波瀾, 天然有此等層折, 以成絶世妙文.)”
다음으로 마오 비본은 한편으로는 《삼국연의》가 “천연의 절묘한 사건”으로 “천연의 절묘한 문장”을 써 내려간 것임을 긍정하는 동시에, 《삼국연의》를 “본래 임의로 첨삭이 가능한” 패관(稗官)과 대비시키면서, 이것은 절대 《삼국연의》과 같은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제2회의 총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나라의 장수가 일어나기 전에 세 어릿광대가 그들을 위한 미끼가 되어야 한다. 세 어릿광대가 이미 없어진 뒤에는 다시 여러 어릿광대가 그들을 위한 여파 노릇을 해야 한다. 종래의 실제 사실은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찌할 거나, 요즘 패관을 짓는 이들은 본래 멋대로 첨삭이 가능하지만 오히려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한가?(三大國將興, 先有三小丑爲之作引, 三小丑旣滅, 又有衆小丑爲之餘波. 從來實事, 未嘗徑遂率直, 奈何今之作稗官者, 本可任意添設, 而反徑遂率直耶?)”
이것으로 평자가 사실은 ‘허구’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허구’로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써낼 수 없었던 작자들을 나무란 것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또 그 다음으로 작품을 구체적으로 비하고 개정하는 가운데 평자 역시 “후대 사람이 날조한 사건”들을 삭제하긴 했으되, 인물 성격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지만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에는 위배되는 내용, 이를테면 관위(關羽)의 “단도부회(單刀赴會)”나 “천리독행(千里獨行)”, “의석화용도(義釋華容道)”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찬미했다. 이것으로 평자가 허구적인 내용을 첨삭하는 표준이 주로 예술적 가치의 높고 낮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연의》의 정절 구조에 대한 비평에서도 마오 비본은 가치 있는 견해를 많이 내놓았다. 이를테면, 명확하게 ‘결구(結構)’라는 개념으로 《삼국연의》를 비평하면서, 《삼국연의》의 구조는 ‘하늘이 만들고 땅이 늘어놓은 것(天造地設)’이고, 소설의 결구 예술은 “하늘과 땅 옛날과 현재의 자연스러운 글 가운데” 문득 깨달아 나온 것이라 여겼다(94회 회평). “하나의 실마리로 관통해(一線貫穿)” 작품의 결구 특색을 분석함으로써, 《삼국연의》가 “두서는 번다하지만, 하나의 실마리로 꿰뚫어(頭緖繁多, 而如一線穿却)” 예술 결구가 완미하고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관목(關目)’이라는 단어로 소설의 정절을 평했다. 이 ‘관목’이라는 것은 소설 정절 중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표현할 때의 관건이 되는 정절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류베이의 전(傳)에 앞서 갑자기 차오차오를 삽입해 서술하고, 또 류베이의 전 가운데 갑자기 쑨졘(孫堅)을 곁들여 묘사했으니, 하나는 위나라의 태조이고, 다른 하나는 오나라의 태조로, 세 나라가 정족지세를 이룬 까닭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정족지세를 이룬 것은 [쑨졘의 동생] 쑨췐이긴 하지만 그 복선이 이미 여기에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전체의 관건이 되는 대목이다(前于玄德傳中忽然夾叙曹操, 此又于玄德傳中忽然帶表孫堅. 一爲魏太祖, 一爲吳太祖, 三分鼎足之所以來也. 分鼎雖屬孫權, 而伏線則已在此. 此全部大關目處.)”(제2회 평어) 또 이를테면, “대개 [류베이의 아들] 아더우(阿斗)가 시촨(西川) 땅에서 40여 년 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시촨을 취한 것이 류씨 집안의 관건이 되는 대목이고, 아더우를 빼앗아 간 것 역시 류씨 집안의 관건이 되는 대목인 것이다(蓋阿斗爲西川四十餘年之帝, 則取西川爲劉氏大關目, 奪阿斗亦劉氏大關目.)”(제61회 평어)
‘결구’나 ‘관목’ 등과 같은 단어는 명말 이래의 소설 희곡 평점에서 차츰 사람들에게 중시되었던 것으로 특히 리위(李漁)가 《한정우기(閑情偶寄)》에서 “결구 제일(結構第一)”이라는 표제를 쓴 뒤 이들 단어가 매우 큰 영향을 주어 소설 희곡 역사에서 결구 예술이 중시되는 하나의 표지가 되었다. 하지만 리위가 지은 《한정우기》는 강희 5년보다 앞서지는 않고 강희 10년에는 아직 완성된 원고가 나오지 않았고, 마오 비본은 대략 강희 5년에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마오 비본이 소설 예술의 결구 비평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가치를 알 수 있다. 인물의 구체적인 비평에 대해서는 마오 비본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진성탄 비 《수호전》을 뛰어넘는 것은 없고, 그 도덕적인 평가는 성격 분석에 치우쳤다. 《삼국연의》 인물의 유형화 경향에 대해서도 그 특색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아주 적은 분량의 비평이기는 하지만 인물에 대한 파악은 비교적 정확하다.
마오 비본은 그 뛰어난 텍스트 개정과 이론 비평으로 《삼국연의》 유전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점하고 있다. 가정 본으로 시작해서 《삼국연의》는 매우 많은 평점자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서명이 된 평본으로는 위샹더우(余象斗) 평본, 리줘우(李卓吾) 평본, 중싱(鍾惺) 평본, 리위(李漁) 평본과 마오 씨 부자의 평본 등이 있다. 다만 마오 비본이 세상에 알려진 뒤의 《삼국연의》 판본사에서는 마오 비본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평본을 압도해 《삼국연의》의 정본(定本)이 되어 수백 년을 풍미했다.
《가호허탕 비평 제일기서 금병매(皐鶴堂批評第一奇書金甁梅)》의 판본은 매우 많고, 제서(題署) 또한 같지 않다. 이를테면, ‘짜이쯔탕 본(在玆堂本)’ 비혈(扉頁)에는 “리리웡 선생 저 제일기서(李笠翁先生著第一奇書)”이라 제(題)했고, “본아장판 본(本衙藏版本)” 표지에는 “펑청 장주포 비평 금병매 제일기서(彭城張竹坡批評金甁梅第一奇書)”라 제했으며, “잉쑹쉬안 장 판본(影松軒藏版本)”의 표지에는 “펑청 장주포 비평 수상 금병매(彭城張竹坡批評繡像金甁梅)”라 제한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실 평자인 장주포(張竹坡)의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를 저본으로 비(批)를 가해 만든 것들이다.
장주포(1670~1698년)는 이름이 다오선(道深)이고, 자는 쯔더(自得)이며, 호는 이싱(以行)이라 했다. 쟝쑤(江蘇) 퉁산(銅山) 사람으로 원적은 저쟝(浙江) 사오싱(紹興)이다. 본성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기로 향리에서 이름이 났다. 하지만 과거의 길은 그리 순탄치 못해 향시에 다섯 차례나 응시했으나 모두 떨어졌다. 강희 32년(1693년)에 경사(京師)에 놀러갔다가 시가 창작으로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생활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강희 34년(1695년) 장주포는 집안의 가오허차오탕(皐鶴草堂)에서 《금병매》를 평점했고, 그 뒤 강희 37년 봄에는 융딩허(永定河) 공사장에서 입신출세를 도모하였다. 융딩허 공정이 준공되었을 때 장주포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29살이었다. 장주포는 한평생 운명에 곡절이 많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재주를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해 비분강개하여, 항상 “인간의 정리가 반복되고, 세상사가 덧없이 변하는 것(人情反復, 世事滄桑)”을 한탄했다. 그는 이러한 개인의 감정을 비평에 융합시켜, 《금병매》 평점을 극히 개성적인 색채가 있는 평점 작품으로 만들었다.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위로는 진성탄과 마오쭝강을 계승했는데, 특히 진성탄 비 《서상기》의 영향을 매우 강렬하게 받았다. 그 주지(主旨)는 작품의 정감이 내포한 함의를 드러내 밝히고 작품의 정절의 실마리를 찾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비평은 진성탄이 그 단서를 열었으니 장주포에 이르러 그 흥취를 크게 떨쳤다. 그는 100회나 되는 장편을 단락을 따라 정리하고 촛불을 들고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탐구하여, 그의 개인적인 풍격이 느껴지는 해설서를 만들어내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서(序)>가 있는데, “때는 강희 년 을해 청명 중순, 친중줴톈저 셰이가 가오허탕에서 제하다(時康熙歲次乙亥淸明中浣, 秦中覺天者謝頤題于皐鶴堂)”이라는 서(署)가 있다. 일반적으로 “셰이(謝頤)”는 곧 장차오(張潮)의 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에는 장주포가 지은 ‘총론(總論)’적인 성격의 문장 10편이 있는데, <주포 한화(竹坡閑話)>, <《금병매》우의론(《金甁梅》寓意論)>, <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고효설(苦孝說)>,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제일기서《금병매》취담(第一奇書《金甁梅》趣談)>, <잡록(雜錄)>, <냉열금침(冷熱金針)>, <비평제일기서《금병매》독법(批評第一奇書《金甁梅》讀法)>, <범례(凡例)>, <제일기서목(第一奇書目)>이 그것이다. 본문에도 회전총비(回前總批), 협비(夾批), 방비(旁批)와 미비(眉批)가 있다. 이 평어의 형태는 명백하게 진성탄 비 《수호전》을 답습하고 있는데, <독법> 부분의 언어 풍격과 사유 방식은 그가 의식적으로 진성탄과는 상이한 비평적 특색을 드러내고자 했음에도 아주 흡사하다.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호전》에서 진성탄이 비(批)한 곳은 대체로 본문 중에서 작게 비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수호전》은 이미 이루어진 큰 단락이 모두 갖추어진 문장으로 이를테면, 108인은 모두 각자의 전(傳)이 있어 비록 삽입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분명하기에 진성탄이 그 자구에만 비했던 것이다. 《금병매》의 경우에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어 자구를 분별하는 정도라면 세심한 사람이면 모두 할 수 있지만, 도리어 그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은 잃게 된다.(《水滸傳》聖嘆批處, 大抵皆腹中小批居多.……《水滸傳》是現成大段畢具的文字, 如一百八人各有一傳, 雖有穿揷, 實次第分明, 故聖嘆止批其字句也. 若《金甁》乃隱大段精采於瑣碎之中, 止分別字句, 細心者皆可爲, 而反失其大段精采也.) [<범례(凡例)>]
장주포의 이러한 논지는 바로 정확하게 《수호전》과 《금병매》의 결구 예술상의 차이를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그 차이는 곧 《수호전》은 [등장인물] 108명 모두에게 각각의 전이 있는 선적(線的)인 결구를 갖고 있지만, 《금병매》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는 그물형 결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진성탄이 “자구에만 비했다”고 결론지은 것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닌데, 장주포는 교활하게도 자신의 작품 비평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했던 듯하다. 실제로 장주포는 소설평점의 방법에 있어 진성탄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해 《수호전》 평점뿐 아니라 《서상기> 평점에 대해서도 깊이 깨달은 바 있었다. 그래서 진성탄이 소설평점 가운데 체현해낸 주요한 정신은 장주포가 《금병매》를 비평한 기본 방법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승 관계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 표현되어 있다.
첫째, 진성탄의 문학비평은 비평자의 주체 의식을 강화했다. 곧 “진성탄이 《서상기》를 비한 것은 진성탄의 문장이지. 《서상기》의 문장이 아니다(聖嘆批《西廂記》是聖嘆文字, 不是《西廂記》文字.)”[<독제육재자서《서상기》법(讀第六才子書《西廂記》法)>]라고 여긴 것이다. 장주포 역시 분명하게 선언했다. “나는 내 자신의 《금병매》를 지은 것이다. 내 어찌 다른 사람과 《금병매》를 비평할 겨를이 있겠는가!(我自做我之《金甁梅》, 我何暇與人批《金甁梅》也哉!)”[<주포 한화(竹坡閑話)>] 이러한 비평 정신으로 그의 비평 문장은 자못 독특한 비평적 개성과 개인의 주관적인 색채를 드러낼 수 있었다.
둘째, 진성탄의 문장 비평은 “해의성(解義性)”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원래 모습의 흔적을 찾아내 그것의 신묘한 이치를 펼쳐내고자 했을 따름이다.(吾獨欲略眞形迹, 伸其神理.)” “내가 특히 슬퍼한 것은 독자의 정신이 일어나지 않아 작자의 뜻을 다 펼쳐내지 못하고 그 마음의 고통을 모르는 것인데, 실제로는 훌륭한 기교를 부린 것이었기에 나의 불민함을 사양치 않고 이렇게 비(批)한 것이다.(吾特悲讀者之精神不生, 將作者之意思盡設, 不知心苦, 實負良工, 故不辭不敏而有此批也.)” 이것은 문학 비평이 문장의 표면적인 현상을 뚫고 작품의 심층에 깔려 있는 함의를 탐구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장주포 역시 이것을 충분히 중시했다. 그는 《금병매》와 모든 소설을 ‘우언’으로 보았으니, 바로 이런 식으로 작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함의를 해독하기 위해 주관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을 거짓으로 날조해내고, 한 가지 사건을 허구로 만들어내었으니, 비록 바람이나 그림자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반드시 산에 의거해 돌을 그려내고 바다를 빌어 파도를 일으키니, 《금병매》에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 인물들은 백 명이 넘지만, 그 단서를 찾아보면 결국 밝혀낼 수 있다. 그 절반은 다 우언에 속하니, 모두 사물로 인해서 이름이 있게 되고 이름에 기탁해서 사건을 모음으로써 이 100회에 이르는 곡절 많은 책을 이룬 것이다.(其假捏一人, 幻造一事, 雖爲風影之談, 亦必依山點石, 借海揚波. 故《金甁》一部有名人物, 不下百數, 爲之尋端竟委, 大半皆屬寓言. 庶因物有名, 托名摭事, 以成此一百回曲曲折折之書.)”[<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이른바 “산에 의거해 돌을 그려내고, 바다를 빌어 파도를 일으키며”, 이른바 “사물로 인하여 이름이 있게 되고, 이름에 기탁해 사건을 모은다”는 것은 소설 속의 인명과 사물의 명칭에 모두 깊은 뜻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소설의 정절은 바로 이렇듯 독특한 함의를 갖고 있는 사물의 명칭과 인명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소설평점은 곧 이것에 근거해 작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사고의 갈피가 《금병매》 평점 중에 거의 관철되어 있다.
셋째, 진성탄의 문학 비평은 문학작품을 총결하는 문법을 중시했다. “원앙을 수놓는 것이 완료되면, 나는 그대에게 그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바늘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鴛鴦綉出從君看, 莫把金針度于君.)”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 역시 소설 창작 법칙에 대한 게시에 주의를 기울였다. “세상 사람들이 함께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할 것이다.(使天下人共賞文字之美.)”[장다오위안(張道淵),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
총괄하자면, 장주포의 소설평점은 대체로 진성탄의 전통을 계승하되, ‘주체성’과 문학 법칙에 대한 게시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기본적으로 대등하지만, ‘해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주포가 진성탄에 비해 훨씬 더 멀리 나아갔고, 그 주관적인 임의성 역시 더욱 강렬했다. 그러므로 그의 비점 중에는 견강부회와 주관적인 억견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장주포 평점 《금병매》의 주요한 동기는 무엇인가? 이 함의를 다룬 비평 자료는 대체로 아래의 몇 가지이다.
(1) 《금병매》 비점은 당시 독자의 작품에 대한 오독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세상의 독자들이 [마음을] 징치하고 권계하는 위현(韋絃)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을 행하는 부절로 여겼던 까닭에 음서로 보았던 것이다.……나는 작자의 고심을 가엾게 여기고, 동지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이 책을 비(批)한 것이다. <우의설>에서는 일부 간부(奸夫)와 음부(淫婦)를 모두 풀과 나무의 환영으로 비(批)했고, 일부 음탕한 말과 염정과 관련한 말은 모두 기복이 있는 기이한 문장으로 비했던 것이다.……나의 《금병매》는 위로는 음란함을 씻고 효제(孝悌)를 보존하며, 치부책에 불과한 것을 문장으로 변환시켰으니, 바로 《금병매》라는 책을 얼음이 녹고 기와가 무너지듯 [풀이한 것이다.](世之看者, 不以爲懲勸之韋絃, 反以爲行樂之符節, 所以目爲淫書,……予小子憫作者之苦心, 新同志之耳目, 批此一書. 其<寓意說>內, 將其一部奸夫淫婦, 恣批作草木幻影, 一部淫情艶語, 悉批作起伏奇文.……我的<金甁梅>上洗淫亂而存孝弟, 變帳簿以作文章, 直使<金甁>一書冰消瓦解,)”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2) 《금병매》 비점은 평점자 마음 속의 격분의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것이다.
“좀더 최근에는 빈곤과 슬픔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염량세태”에 부대끼다가, 시간을 보내기 힘들 때마다 내 자신이 세정서 한 권을 지어 답답한 소회를 풀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나는 몇 차례나 붓을 들어 책을 쓰려 하였으나, 전후 줄거리를 잡아나가는 데 많은 기획을 해야 했기에 이내 붓을 던지며 내 자신에게 말했다. “왜 나보다 앞서 ‘염량세태’를 다룬 책[《금병매》]을 쓴 이가 기획한 것을 세세히 풀이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첫째, 내 자신의 억눌린 소회를 풀 수 있을 것이며 둘째, 옛 사람의 책을 명료하게 풀이하는 일은 내가 지금 한 권의 책을 기획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邇來爲窮愁所迫, 炎凉所激, 于難消遣時, 恨不自撰一部世情書, 以排遺悶懷. 幾欲下筆, 而前後結構, 甚費經營, 乃擱筆曰:“我且將他人炎凉之書, 其所以前後經營者, 細細算出, 一者可以消我悶懷, 二者算出古人之書, 亦可算我今又經營一書.)”[<주포 한화(竹坡閑話)>]
“장주포는 펑청 사람으로, 열다섯에 아비를 잃고 지금까지 10년 동안 세속에 부대끼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두루 겪고난 뒤, 유랑에 지쳐 돌아왔다. 지난 날 친밀하게 지내던 지우들은 오늘날에는 모두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친한 벗이 백안시하고 태도에는 쓰라린 데가 있으니, 곧 구름을 넘나들던 뜻과 기상이 각별히 닳고 달아 그 때문에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책상을 치며 말했다. ‘옳거니.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진짜와 가짜는 내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에 을해년 정월 7일에 비(批)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3월 27일에 완성을 고하다.(竹坡彭城人, 十五而孤, 于今十載, 流離風塵, 諸苦備歷, 游倦歸來.向日所爲密邇知交, 今日皆成陌路.……親朋白眼, 面目含酸, 便是凌雲志气, 分外消磨, 不禁爲之淚落如豆.乃拍案曰:有是哉, 冷熱眞假, 不我欺也, 乃發心于乙亥正月人日批起, 至本月廿七日告成.)”[<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3) 《금병매》 비점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한 문장을 함께 감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형은] 일찍이 내게 말했다. ‘《금병매》는 매우 훌륭하게 짜여진 작품이지만, 진성탄이 죽은 이래로 이것을 알고 있는 이가 몇 명 살아남지 않았다. 나는 그것의 훌륭한 점들을 모두 짚어내어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어떤 이가 형에게 말했다. ‘이 원고를 서방(書坊)에게 넘기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형이 말했다. ‘내가 또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이 일을 한 것인가? 나는 장차 이 책을 간행해 세상에 내놓아 세상 사람들이 함께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 역시 옳지 않겠는가?’((兄)曾向余曰: 《金甁》針線縝密, 聖嘆旣歿, 世鮮知者, 吾將拈而出之.……或曰: 此稿貨與坊間, 可獲重價. 兄曰: 吾且謀利而爲之耶? 吾將梓以問世, 使天下人共賞文字之美, 不亦可乎?)” [장다오위안(張道淵),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
“그런즉 나는 어째서 《금병매》를 비(批)했는가? 나는 그 문장이 도도하게 100회에 이르되 천가지 만가지 실마리가 똑같이 하나의 실에서 나오고 또 천가지 만가지 우여곡절이 하나의 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한가로이 창 앞에 홀로 앉아 역사책을 읽고 제가들의 문장을 읽는 틈틈이 어쩌다 한번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이와 같은 절묘한 문장에 바늘을 내놓지 않는다면, 작자의 오랜 세월 고심한 것을 저버리는 게 되지 않겠는가!(然則《金甁梅》我又何以批之也哉? 我喜其文之洋洋一百回, 而千針萬線, 同出一絲, 又千曲萬折, 不露一線. 閒窓獨坐, 讀史, 讀諸家文, 少暇, 偶一觀之, 曰: 如此妙文, 不爲之遞出金針, 不幾辜負作者千秋苦心哉!)》 [<주포 한화(竹坡閑話)>]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이 중국소설사와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가? 필자는 이왕의 연구가 장주포 비 《금병매》를 중국소설이론사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대해온 것은 합리적이지만, 진정으로 장주포 비평의 가치 소재를 지적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주포 비 《금병매》의 주요한 가치는 전파에 있고, 평점자의 작품에 대한 독특한 독해에 있으며, 이로부터 독자에 대한 영향을 낳게 되었다.
소설 텍스트로 말하자면, 《금병매》에 대한 장주포의 수정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를 저본으로 했기에, 소설 텍스트에 있어서는, 《금병매》의 텍스트 변천 과정에 아무런 공헌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론적인 각도에서 말하자면, 《금병매》에 대한 장주포의 견해는 소설창작 법칙과 창작정신의 총결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제한적이다. 전체적으로는 진성탄 평점 《수호전》과 비교할 때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며, 심지어 이론적인 개괄의 방면에서 ‘룽위탕 본’ 《수호전》의 평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장주포 《금병매》 평점의 으뜸이 되는 가치는 《금병매》가 전파되는 가운데, 세정소설에 대한 감상 중에, 장주포가 독자들을 위해 훌륭한 범례들을 해부하고, 사람들의 몇 가지 감상 습관을 타파하여 독자로 하여금 《금병매》를 오독하는 데서 벗어나도록 인도한 데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방면에서 알아낼 수 있다.
(1) 장주포는 《금병매》의 정절 내용에 대해 비교적 심도 있고 주관적인 색채가 풍부한 분석을 가해, 《금병매》가 전파되는 가운데 줄곧 사람들로부터 음서로 치부되던 전통적인 관념에 대해 변호했다. 《금병매》를 ‘음서’로 보는 것은 명말 이래 자못 유행하던 관념으로, 독자들 가운데 비교적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확실히 작품 속에는 자연주의적인 성 묘사가 대량으로 존재한다. 이에 대해 장주포는 회피할 방법도 없고, 간단하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변호하는 가운데 장주포는 단순하게 진성탄이 《서상기》를 평점할 때 “글이라는 것은 그것을 보고 글이라 하는 것이고, 음탕함이라 함은 그것을 보고 음탕함이라 이른 것이다(文者見之謂之文, 淫者見之謂之淫)”라고 한 오래된 길을 걸어가지 않고, 의식적으로 그가 《금병매》의 “음욕 세계” 중에서 깨달은 “성현의 학문”을 천명했다. 곧 《금병매》는 음서가아니라 염량세태를 반영한 ‘세정서’이고, 현실을 깊고 통절하게 비판한 ‘태사공의 문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 장주포는 일계열의 이론적 관점들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설분(泄憤)’, ‘고효(苦孝)’, ‘기산(奇酸)’, ‘냉열(冷熱)’, ‘진가(眞假)’ 등이 그것으로, 그 가운데 ‘설분’과 ‘고효’, ‘기산’은 그 뜻이 《금병매》의 창작이 그 어떤 까닭이 있고,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 데 있으니, 작자가 “자신의 원수를 갚는” 일종의 수단인 동시에 이것을 빌어 작자의 마음 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비분과 쓰라린 고통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것이다. 이른바 “그 비분은 이미 112퍼센트에 달하고, 쓰라림 또한 120퍼센트에 달했으니, 《금병매》를 짓지 않고 어찌 소일할 것인가?(是憤已百十二分, 酸又百二十分, 不作《金甁梅》又何以消遣哉?)”, “작자는 불행히도 몸소 그 난관을 만나, 토해낼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고, 긁어낼 수도 없고, 슬프게 외쳐도 소용없으니, 이것을 빌어 스스로 풀어내려 했던 것이다. 그 뜻이 못내 슬프고, 그 마음이 가련하구나.(作者不幸, 身遭其難, 吐之不能, 呑之不可, 搔抓不得, 悲號無益, 借此以自泄, 其志可悲, 其心可憫矣.)” 그리고 “냉열”은 세태의 반복을 가리키고, “진가”는 인정의 허위를 드러낸다. 총괄하자면, 이것은 작자가 이렇듯 악랄하고 속된 세계와 음욕 세계에 대한 묘사를 빌어 마음 속의 비분을 풀어내고 현실의 추태를 비판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금병매》가 ‘음서’라는 관념을 깨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이미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장차오(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수호전》은 분노의 책이고, 《서유기》는 깨달음의 책이며, 《금병매》는 비애의 책이다(《水滸傳》是一部怒書, 《西遊記》是一部悟書, 《水滸傳》是一部哀書.)” 쟝한정(江含征)은 여기에 평을 덧붙였다. “《금병매》를 볼 줄 모르면 그 음탕함만을 배우게 될 것이니, 쑤스를 좋아하는 자가 단지 동파육만을 좋아할 따름인 것이다(不會看《金甁梅》而只學其淫, 是愛東坡者但喜吃東坡肉耳.)” 이에 대한 장주포의 분석은 가장 심각한데, 그 목적은 바로 사람들의 감상 습관을 깨서, 《금병매》에 은밀히 포함되어 있는 풍부한 생활과 현실적 함의가 드러나고 인식되도록 한 데 있었다.
(2) 장주포는 《금병매》의 표현 형식에 대해서도 비교적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평점하는 중에 한 편의 세정소설로서 《금병매》가 독특하게 갖고 있는 심미적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한 편의 세정소설로서 《금병매》는 독특한 예술적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왕왕 생활 속의 전형적인 사건을 잡아내 기이한 정절 묘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의 디테일들을 파노라마식으로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늘상 사람들이 늘어지고 번쇄하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명말 장우쥬(張无咎)는 <삼수평요전서(三遂平妖傳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병매》)는 총명한 하녀가 부인이 되듯이, 단지 날마다 사용하는 장부책을 기록하기만 할 뿐, 일찍이 집안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으니, 《수호》를 본받아 가난해진 것이다([《金甁梅》]如慧婢作夫人, 只會記日用帳簿, 全不曾學得處分家政, 效《水滸》而窮者也.)” 이러한 관점은 《금병매》가 전파되는 데 있어 비교적 큰 영향을 끼쳤다. 장주포는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우선 ‘장부설’에 반대하는 것으로부터 착수했다. 그는 일찍이 그가 평점한 《금병매》는 “장부책을 문장으로 바꾸어(變帳簿以做文章)”, 사람들이 번쇄한 정절 묘사 가운데서 작자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소설의 결구 장법을 파악하게 만듦으로써 세정소설이 독특하게 갖고 있는 심미적인 특색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금병매》가 ‘장부책’이 아니라 ‘문장’이라는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장주포는 《금병매》의 인물관계와 정절 구성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했다. 소설 속의 인물 관계와 정절 안배는 모두 하나의 유기적이고 질서 있는 총체로 앞뒤가 서로 맞물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복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주로 두 가지 작업을 하려 했다.
첫째, ‘우언’이라는 각도에서 출발해, 소설의 인물 명칭에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 밝히고, 소설의 정절 발전이나 심지어 총체적인 틀이 이러한 상징성 있는 인물 명칭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여겼다. 이를테면, “병은 경으로 인해 생겨나고(甁因慶生也)”, “매화는 또 병으로 인해 생겨났으며(梅又因甁而生)”, 심지어 쑨쉐어(孫雪娥)가 수비부(守備府)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 역시 “매화와 눈이 봄을 다툰 것(梅雪爭春)”이고 “매화와 눈이 서로 양보하지 않기에, 춘메이가 총애를 받으면 쉐어는 욕을 당하고, 춘메이가 정실이 되면 쉐어는 더욱 욕을 당하게 된다(梅雪不相下, 故春梅寵而雪娥辱, 春梅正位而雪娥愈辱.)” 총괄하자면, 작자가 볼 때, 소설 속 인물들은 크게는 시먼에서 여러 첩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노복이나 하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을 취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고, 이름에 기탁해서 사건을 모은 것(托名摭事)으로 인물과 정절 사이에는 엄밀한 내재적 관계가 있다.
둘째, ‘인과’의 각도에서 출발해, 소설 정절의 발전이 비록 “소의 터럭처럼 가늘지만, 천만 가닥이 모두 하나의 몸을 갖추고 있고, 혈맥이 관통한다(細如牛毛, 乃千萬根共具一體, 血脈貫通,)”[<주포 한화(竹坡閑話)>] 정절과 정절 사이에는 엄정한 인과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작품의 결구 장법에 대해 비교적 깊이 있는 분석을 가해 “초사회선(草蛇灰線)”이나 “대간가(大間架)”, “양대장법(兩大章法)” 등과 같은 결구 법칙을 제출했다. 이로부터 정절을 분석하는 가운데 작품이 “내력이 없는 사건은 하나도 없는” “절묘하고 근엄한 장법”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주포의 《금병매》 결구 장법과 인물 관계에 대한 분석은 이른바 ‘장부설’을 깨뜨리는 데 비교적 큰 작용을 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금병매》가 “번쇄한 가운데 정채로움을 감추고 있는”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는데, 이로부터 세정소설의 예술 풍격을 앙양하고, 동시에 완정하고 근엄한 분석으로 《금병매》를 위한 정절 발전의 ‘인과 사슬(因果鏈)’을 엮어냈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금병매》의 작자가 “집안 일을 처리할 줄(處分家政)” 모른다는 잘못된 인식을 깨뜨렸다. 공정한 마음으로 논하자면,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확실히 이러한 목적에 도달해 기본적으로 그가 예기했던 목표를 완성함으로써 《금병매》의 감상과 전파, 그리고 세정소설의 창작에 대한 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장주포의 이러한 비평 방법과 사유 방식은 확실히 진성탄의 영향, 특히 진성탄 비 《서상기》의 영향을 받았다. 진성탄은 《서상기》를 비평할 때, 왕왕 인물의 행위 하나 하나와 디테일한 부분 하나 하나에 대해 “그렇게 된 까닭”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서상기》 정절 구조의 틀이 하나의 엄밀한 인과의 틀 안에 있게 했다. 이러한 비평 방법은 이점과 폐단이 모두 있게 마련인데, 리위(李漁)는 이 점에 대해서 충분히 뛰어난 평을 한 바 있다.
“진성탄이 평한 《서상기》의 장점은 세밀한 데 있고, 단점은 얽매인 데 있으니, 얽매였다는 것은 곧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것이다. 한 구절 한 글자라도 근원을 추적하고 그 우의(寓意)를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세밀한 것이다. 하지만 작자가 이렇게 쓴 것은 의도한 대로 써 낸 것도 있지만 한편 모두 다 의도한 대로 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일까?(聖嘆之評《西廂》, 其長在密, 其短在拘, 拘卽密之已甚者也.無一句一字不逆溯其源, 而求命意之所在, 是則密矣, 然亦知作者于此, 有出于有心, 有不必盡出于有心者乎?)”[《한정우기(閑情偶寄)》 <사곡부(詞曲部)> <전사여론(塡詞餘論)>]
진성탄이 평술한 《서상기》는 정절이 단일하고 결구가 근엄한 희곡 작품을 추구했다. 이러한 평술은 오히려 이러한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장주포가 평한 것은 파노라마식으로 현실 생활을 묘사한 세정소설이라 그 가운데 드러나는 주관적인 억단과 견강부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당연하게도 장주포가 평점한 《금병매》 역시 이론적으로 창의적인 견해가 자못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당대의 학자들 논의가 비교적 많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겠다.
장주포가 평한 《금병매》는 그 당시 영향이 매우 컸다. 장다오위안(張道淵)의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의 기록에 의하면 장주포는 《금병매》를 평점한 다음해에 원고를 갖고 난징에 갔는데, “원근에서 구매하고자 해 [그의] 재주와 명성이 더욱 떨쳤다. 사방의 명사들이 난징에 와서 날마다 방문한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遠近購求, 才名益振, 四方名士之來白下者, 日訪以數十計.)” 그리고 강희 이후에 장주포 평본은 기본적으로 《금병매사화》와 《신각수상비평금병매》를 대신해서 사회적으로 유통되어 지금까지도 《금병매》의 통행본이 되었다.
‘사대기서’는 백여 년의 평점 역사를 거치면서 강희제 후기에 장주포 평 《금병매》가 나온 뒤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여러 평본에 대한 사람들의 취사선택 역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류팅지(劉廷璣)의 일단의 평술이 대표적이라 할 만한데, 통속소설에 대해 독특하면서도 자못 풍부한 감식안을 갖고 있던 이 관료 문인은 ‘사대기서’의 평점에 대해 뛰어나게 분석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수호전》의 경우] 진성탄은 구두와 단락을 나누되, 각각의 부분에 대한 평을 하는 동시 총평을 진행해, 서로 다른 모양의 꽃이 모이고 비단이 쌓인 것 같은 문장을 이루어냈고, 량산보(梁山泊)를 하나의 꿈으로 끝맺어, 사족을 붙이지 않았으니, 절묘하게 가지를 쳐냈다고 할 수 있다.([《水滸傳》]金聖歎加以句讀字斷, 分評總批, 覺成異樣花團錦簇文字, 以梁山泊一夢結局, 不添蛇足, 深得剪裁之妙.)”
“[《삼국연의》의 경우] 항융녠(杭永年)은 진성탄의 필치를 모방해 비(批)했으니, 효빈에 속하는 것 듯하지만, 또한 새로운 경지를 연 부분이 있다.[《三國演義》](杭永年一仿聖嘆筆意批之, 似屬效顰, 然亦有開生面處,)”
“[《서유기》의 경우] 이에 왕단이(汪憺漪)는 [비유컨대] 그로부터 미인을 묘사하되 시스(西施)를 거슬렀고, 그가 비평을 가한 곳은 대부분 피상적인 것만 더듬거렸으니, 책을 꿰뚫고 있는 태극, 무극을 어찌 한 마디 말로 설파할 수 있겠는가?[《西遊記》](乃汪憺漪從而刻畵美人, 唐突西子, 其批注處大半摸索皮毛, 卽通書之太極無極, 何能一語道破耶?)”
“[《금병매》의 경우] 펑청의 장주포는 우선 그 대강을 총괄하고, 다음에는 단락을 따라가며 주를 달고 비점을 가하여, 진성탄을 뒤따라 이었으니, 그 징벌과 권계가 일목요연해졌다.[《金甁梅》](彭城張竹坡爲之先總大綱, 次則逐段分注批點, 可以繼武聖嘆, 是懲是勸, 一目了然.)”[류팅지(劉廷璣), 《재원잡지(在園雜志)》]
류팅지의 이러한 평술은 총결적인 성질을 띠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사대기서’ 평점본이 상시에 유행한 상황을 개괄하고 있으며, 이들 평점본이 후대에 유포되는 추세를 자못 선견지명을 갖고 예시하고 있다. 강희 이후에는 진성탄과 마오쭝강, 장주포 3가의 평점이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고, 《서유기》 평점은 《서유증도서》의 기초 위에 평점의 붐이 한 차례 일어났다.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중에서는 진성탄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의 평점으로 말미암아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이 빛을 잃었고, 그의 영향 하에 소설평점의 명저가 잇달아 나왔으며, 평점의 기풍이 정점에 달했다. 그래서 명 천계 연간에서 청 강희 연간에 이르기까지 소설평점은 백년 동안 볼 만한 광경을 이루어냈으니, 이것은 소설평점사상 가장 풍성한 백년이었고, 중국 고대소설평점의 황금 시기였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4
4) ‘사대기서’의 평점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대기서’의 평점이다. 이것은 ‘사대기서’가 중국소설사에서 가장 널리 출판되고 평점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로, 복잡하게 잇달아 나오던 ‘사대기서’ 간본(刊本)의 텍스트가 틀을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동시에 《서유기》를 제외하고 《수호전》과 《삼국연의》, 《금병매》 모두 이 시기에 각자의 평점의 전 과정이 완료되었고, 진성탄(金聖嘆)과 마오 씨(毛氏) 부자, 장주포(張竹坡) 삼가의 평본이 강희제 이후의 통행본이 되어 널리 유행했다. 당연하게도 《금병매》의 경우 이후에도 원룽(文龍)의 비본(批本)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간행되지 않은 채 문인이 스스로 감상하기 위해 만든 평본으로 근년에야 발견되었다. 《수호전》의 경우는 옌난상성(燕南尙生)의 《신평수호전(新評水滸傳)》이 있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아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사대기서’라는 명칭은 비교적 이른 것으로는 리위(李漁)가 강희 18년(1679년)에 《삼국연의》에 쓴 서문에 나타난다.
예전에 왕스전(王世貞) 선생이 우주에 ‘사대기서’가 있다면서, 《사기》와 《장자》, 《수호전》, 《서상기》를 들었다. 펑멍룽에게도 ‘사대기서’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삼국연의》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가 그것이다. 두 사람의 논지는 서로 다른데, 나는 책의 기이함은 그 부류를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호전》은 소설가로 경사와는 같지 않고, 《서상기》는 사곡이니 소설과도 다르다. 이제 이러한 부류로 그 기이함을 안배한다면, 펑멍룽의 설이 옳은 듯하다.(昔弇州先生有宇宙四大奇書之目, 曰《史記》也, 《南華》也, 《水滸》也, 《西廂》也. 馮夢龍亦有四大奇書之目, 曰《三國》也, 《水滸》也, 《西遊》也, 《金甁梅》也. 兩人之論各異. 愚謂書之奇, 當從其類. 《水滸》在小說家, 如經史不類. 《西廂》系詞曲, 與小說又不類. 今將從其類以配其奇, 則馮說爲近是.)[리위(李漁), <고본삼국지서(古本三國志序)>, 《성산별집(聲山別集)》 본]
이 네 권의 소설이 당시에 이미 명성을 누렸던 것은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사상과 예술적 품격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지만, 평점자가 광범하게 주목하고 힘을 다해 고취한 것 역시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바로 이 백 년 간의 평점이 ‘사대기서’ 텍스트의 함의와 전파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시기의 ‘사대기서’ 평점 상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삼국연의》는 평본이 7종이 있는데, 순서대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리줘우선생비평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명말 졘양(建陽) 우관밍(吳觀明) 간본, 예저우(葉晝) 평점], 《리줘우 선생 평 신간 삼국지(李卓吾先生評新刊三國志)》[명말 바오한러우(寶翰樓) 간본, 무명씨 평점], 《중보징 선생 비평 삼국지(鍾伯敬先生批評三國志)》(명 천계 간본), 《신준교정경본대자음석권점삼국지연의(新준 校正京本大字音釋圈點三國志演義)》[명 천계 숭정 연간 졘양 바오산탕(寶善堂) 간본, 무명씨 평점], 《회상삼국지(繪像三國志)》[청초 이샹탕(遺香堂) 간본, 무명씨 평점], 《사대기서 제일종 삼국연의(四大奇書第一種三國演義)》[청 강희 18년 쭈이겅탕(醉耕堂) 간본 마오 씨 부자 평점], 《리리웡 비열 삼국지(李笠翁批閱三國志)》(청 순치 14년 간본).
《수호전》은 주료 3종의 평본이 있는데, 각각 《중보징선생 비평 충의수호전(鍾伯敬先生批評忠義水滸傳)》[명말 쓰즈관(四知館) 간본],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명 숭정 14년 관화당 간본), 《쭈이겅탕 간 왕스윈 평론 오재자 수호전(醉耕堂刊王仕雲評論五才子水滸傳)》(청 순치 14년 간본)이다.
《금병매》 평본으로는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와 《제일기서금병매(第一奇書金甁梅)》(청 강희 연간 간본, 장주포 평점)가 있다.
《서유기》 평본으로는 《리줘우선생 비평 서유기(李卓吾先生批評西遊記)》[명말 간본, 예저우(葉晝) 평점]와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청초 간본, 왕샹쉬(汪象旭), 황저우싱(黃周星) 평점]이 있다.
상술한 평본 가운데 ‘사대기서’는 각각 그 나름의 평점 시리즈를 형성하고 있는데,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비교적 많은 공통성을 띠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개괄된다.
우선 ‘사대기서’의 평점은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소설 텍스트에 대해 수정했고, 아울러 각자의 평점 계열 중에서 점차 정형화된 소설 텍스트를 형성해 나갔다. 이것 역시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수정한 텍스트와 평점 문장이 함께 완전한 전체를 구성해 이후의 통행본을 이룬 것으로 《수호전》의 진성탄(金聖嘆) 비본(批本)과 《삼국연의》의 마오 씨 부자 비본, 《금병매》의 장주포(張竹坡) 비본이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수정한 텍스트가 후대 독자와 평점가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 평점 문장은 소설 텍스트와 함께 널리 유전되지 못한 것으로, 이를테면 《금병매》의 리위(李漁) 평본과 《서유증도서(西遊證道書)》가 그것이다. 소설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은 명말청초 소설평점의 비교적 보편적인 현상으로 특히 ‘사대기서’의 평점 중에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소설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유전에 대해 말하자면, ‘사대기서’의 텍스트 수정은 일종의 문인화의 개조(改造)로, 이로 인해 소설 텍스트가 더욱 정교해졌고, 이렇게 해서 통속소설의 유통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문인과 보통의 독자가 공동으로 사랑하는 소설 텍스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소설의 창작에 대해 말하자면, 개정한 ‘사대기서’는 고대소설사에서 모종의 텍스트의 ‘모델’이 되어 이로부터 이후의 소설 창작이 영향을 받았다.
다음으로, ‘사대기서’의 평점은 소설평점사에서 앞선 것을 계승하고 후대를 열어주는 작용을 했다. 통속소설의 문인 평점은 리줘우(李卓吾)에게서 그 발단을 찾을 수 있는데, ‘룽위탕 본’과 ‘위안우야 본’의 《수호전》 평본 중에서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전파가 결합된 것은 이후 소설평점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 ‘사대기서’의 평점은 바로 이러한 평점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이러한 ‘결합’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평점의 형태로 말하자면, 진성탄이 확립한 종합형의 평점 형태, 곧 ‘독법’, ‘미비’, ‘협비, ’총비‘ 등으로 구성된 평점 형태가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상업적인 독서 지도(導讀)적인 성격이 서로 결합한 비평 형식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형식은 마오 씨 부자와 장주포 등의 진일보한 발전을 거쳐 소설평점사상 가장 격식이 갖춰진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사대기서‘의 평점은 근본적으로 통속소설을 ’소도(小道)‘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을 포기하고 소설을 《장자》와 《사기》 등과 같은 우수한 문화 전적과 같은 수준에서 논했다. 이것을 전제로 그들은 작품의 감정상의 함의를 탐구하고 작품의 형식 기교를 꼼꼼히 따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설을 비점(批點)하는 일은 가치 있고 일정한 문화적 품위가 있는 작업이 되었다. 청 중엽 이후의 《서유기》와 《홍루몽》, 《유림외사》와 《요재지이》 등과 같은 소설의 평점은 이런 틀에 따라 앞으로 발전해 나간 것들이다.
명말청초 ‘사대기서’의 평점 중에서 특히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과 마오 씨 부자가 비한 《삼국연의》, 장주포가 비한 《금병매》가 가장 뛰어났는데, 각각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도록 하겠다.
《제오재자서수호전》은 관화탕(貫華堂) 간본으로 1권은 <서(序) 일>과 <서(序) 이>, <서(序) 삼>이고, 2권은 <송사단(宋史斷)>이며, 3권은 <독제오재자서법(讀第五才子書法)>이고, 4권은 <관화탕 소장 고본 수호전 앞에 스스로 서 한 편이 있는데, 지금 그것을 기록했다(貫華堂所藏古本水滸傳前自有序一篇, 今錄之>이며, 5권 이하가 [소설] 본문이다. 평자는 작품에 대해서도 자못 많이 수정했다. 이 책이 만들어지고 간행된 연대는 일반적으로 진성탄의 <서 삼>의 말미에 서명된 시간에 근거하면 숭정 14년으로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 씨는 같은 편의 서에서 그가 《수호전》을 비점한 것은 일정한 시간 동안이라 했다. “오호! 사람은 [나이] 열 살에, 이목이 점차 떠져, 동쪽에 뜬 해처럼, 광명이 발휘된다. [그러니] 이와 같은 책을 내가 금지하여 너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한들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제는 서로 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앞장서서]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가한 것을 내어 드러내놓고 네 손에 건네주겠다,(嗟乎!人生十歲, 耳目漸吐, 如日在東, 光明發揮.如此書, 吾卽欲禁汝不見, 亦豈可得?今知不可相禁, 而反出其旧所批釋, 脫然授之于手也.)” 이것은 《수호전》의 비점이 곧 그가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해당 문장에서는 또 그가 열두 살 때 이미 “예전에 비평과 주석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술회하고 있다. 이 말은 당연히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수호전》을 비점한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이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은 숭정 14년 관화탕 간본이다. ‘관화탕’은 진성탄의 가까운 벗인 한주(韓住)의 당호이다. 진성탄은 그때 당시 34세였다. 진성탄(1608~1661년)은 우 현(吳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차이(采)이고, 자는 뤄차이(若采)이며, 뒤에 런루이(人瑞)로 개명하고 호를 성탄(聖嘆)이라 했다. 청 순치 18년에 한 시기를 뒤흔들었던 강남(江南) 땅의 ‘곡묘안(哭廟案)’에 연루되어 청 조정에 의해 피살되었으니 당년 54세였다. 진성탄은 어려서 우 현의 제생(諸生)이 되고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에 보임되었다가 “세시(歲試)에서 지은 글이 괴탄하고 불경하다” 하여 “퇴출”되었다[무명씨의 《신축기문(辛丑紀聞)》]. 뒤에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접고 벗들과 담론하는 것말고는 “오로지 관화탕에 들어앉아 독서하고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랴오옌(廖燕), <진성탄 선생전(金聖嘆先生傳)]
진 씨는 평생 지은 저서가 풍부했고, 내용은 광범위했으니, 문학 비평만을 놓고 본다면 후대 사람들에게 10종의 저작(미완의 원고를 포함해)을 남겼다. 그것은 《관화탕 제오재자서 수호전(貫華堂第五才子書水滸傳)》, 《관화탕 제육재자서 서상기(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창징탕 두시해(唱經堂杜詩解)》, 《창징탕 석소아(唱經堂釋小雅)》, 《창징탕 고시해(唱經堂古詩解)》, 《창징탕 비 어우양융수 사 십삼수(唱經堂批歐陽永叔詞十三首)》,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 《좌전석(左傳釋)》, 《서 이소경 유인(序離騷經有引)》으로, 시와 문장, 사, 소설, 희곡 등 5대 문체를 아우른다. 이렇듯 광범위한 비평 행위는 중국문학비평사에서 자못 드물게 보이는 것이다.
상술한 10종의 비평 저작들은 실제로는 양대 계열을 이루고 있는데, ‘육재자서’가 그 비평의 커다란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고,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등과 같은 ‘육재자서’ 이외의 비평이 또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 ‘육재자서’는 진성탄 문학 비평의 주체로(비록 전부가 완성된 것은 《수호전》과 《서상기》에 불과하지만) 진성탄 문학 비평의 특색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으면서, 비평자 개인의 감정과 의취(意趣), 그리고 인생의 이상을 융합한 것이다. 이를테면 《서상기》의 비평에 대해 진성탄은 스스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서상기》는 어떻게 하다가 간행하고 비(批)한 것인지요? 나는 [그 질문에] 사뭇 감회가 어려 조용히 일어나 그에게 대답했다. ‘아! 나 역시 그렇게 한 까닭을 모르오. 다만 내 마음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 그리한 것이라오(或問于聖嘆曰: 《西廂記》何爲而刻之批之也? 聖嘆悄然動容, 起立而對之曰: 嗟乎! 我亦不知其然, 然而于我心則不能自已也.)”[《관화탕 제육재자서 서상기(貫華堂第六才子書西廂記)》 <서일(序一)>]라 말했다. 진성탄의 친척 형뻘 되는 진창(金昌) 역시 <서제사재자서(叙第四才子書)>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내가 일찍이 두푸(杜甫)의 시를 반복해 보다가 당 이래로 지금까지 살펴보면, 두푸가 지을 수 없었던 시가 없었고, 진성탄이 비(批)할 수 없었던 내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핵심을 파내고 골수를 발라내었기에 절묘한 뜻을 넓고 깊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허위를 제거하고 바른 것을 보존하였기에 천기의 간절하고 진지함을 얻을 수 있었다. 대개 두푸는 충과 효를 아는 선비라, 충효의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망연히 길을 잃어 그의 깊은 뜻을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余嘗反復杜少陵詩, 而知有唐迄今, 非少陵不能作, 非唱經不能批也.……乃其所爲批者, 非但剜心抉髓, 悉妙意之宏深, 正復袪僞存眞, 得天機之剴之. 蓋少陵忠孝士也, 匪以忠孝之心逆之, 茫然不歷其藩翰.)” 이것으로 이것이 자신의 정감을 융합한 문학 비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계열의 비평은 ‘교과서’ 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천하 재자 필독서(天下才子必讀書)》는 “아들과 조카들에 훌륭한 문장을 짓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역시 그러하다. 진성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치 17년 2월 8일, 내 아들인 융이 칠언 율시에 대해 대충 이야기해달라고 보채 거절할 수 없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 해 여름 4월 보름까지 앞뒤로 모두 해서 이야기해준 시가 만 육백 수 정도 되었다(順治十七年二月八之日, 我子雍强欲余粗說唐詩七言律體, 余不能辭. 旣受其請矣, 至夏四月望之日, 前後通計所說過詩可得萬六百首.)”[《관화탕 선비 당재자시(貫華堂選批唐才子詩)》 <서(序)>] 진성탄의 문학 비평의 가치는 주로 ‘육재자서’ 계열에 표현되어 있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의 사상 경향은 텍스트에 대한 수정과 구체적인 평술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표현되어 있는데, 주로 평술에 나타나 있다. 함의상으로는 주로 ‘도적질(盜)’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는데, 곧 《수호전》의 기본 정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진성탄은 분명히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한 편으로는 ‘도적질’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반대하고 있다. <서 이(序二)>에서 그는 이 책을 평점하는 것이 ‘당대의 근심(當世之憂)’, 곧 천하가 분란에 빠져 기치를 들고 이곳 저곳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그가 《수호전》을 평점하고 수정한 것은 곧 “이전 사람들의 이미 죽어버린 마음을 주살하고(誅前人旣死之心)”, “후대 사람들이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뒤끝을 방비하기(防後人未然之後)” 위함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구체적인 평술 중에는, 특히 《수호전》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흥미로운 현상은 진성탄이 《수호전》을 평점하는 가운데 가장 찬미했던 인물은 공교롭게도 반란 의식이 가장 강력했던 리쿠이(李逵), 루다(魯達), 우쑹(武松), 롼샤오치(阮小七) 등과 같은 인물들이었고, 가장 미워했던 것은 오히려 힘을 다해 초안(招安)하고자 했던 쑹쟝(宋江)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러한 모순 속에서 평점의 사상 일치를 추구했는가? 진성탄은 대체로 두 가지 방식을 채용했다. 인물에 대한 평판 속에서 진성탄은 인물 행위의 정치적인 가치판단을 개개의 인물과 인물 개성의 도덕적인 가치 판단과 분리했다. 정치적인 가치에서 출발해 진성탄은 《수호전》 인물의 반란 행위를 반대했지만, 도덕적인 가치로부터는 인물의 ‘진짜와 가짜(眞假)’가 인물의 고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준칙이 되었던 것이다. 전자는 전체를 통괄하는 것이고, 후자는 구체적인 것으로, 그런 까닭에 《수호전》 평점 중에서는 비록 작품 전체의 함의에 대한 부정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구체적인 평술에 들어가면 충심에서 우러나온 찬미가 평점 문장 속에 관통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적질을 하게 된” 기인(起因)에 대해서 진성탄은 “반란은 위에서 비롯된 것(亂自上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그들이 “부득이하게 녹림에 이른 것(不得已而至于綠林)”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해 대량의 평술과 분석을 통해 가오츄(高俅)와 같은 무리가 량산보(梁山泊) 영웅들에 가한 박해를 두드러지게 했다. 총결하자면, 진성탄이 이른바 ‘도적질(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에는 모순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그는 천하가 청명한 상태를 소망하면서 천하의 도가 분란에 빠진 것을 걱정했기에, ‘반란’이라는 행위 자체는 반대했지만, 사람들을 핍박해 ‘도적질을 하게’ 만든 사회적 환경은 깊이 증오했고, 그럼으로써 이것을 그들이 책임을 벗어나는 빌미로 삼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평술 가운데 그는 《수호전》의 영웅들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들 개개인의 성격을 찬미했다.
진성탄이 비(批)한 《수호전》의 가치는 다방면에 이른다. 그가 《수호전》 텍스트를 개정하고, 《수호전》의 예술 수법과 창작 경험을 총결하고, 대량의 이론적 관점을 제출한 것은 모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여러 제현들의 논술이 자못 많으나 재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소설평점사의 각도에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가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할 것이다.
우선 평점 형태로 말하자면, 진성탄 비 《수호전》이 확립한 평점 형태, 곧 ‘서(序)’나 ‘독법’, ‘미비’, ‘협비’, ‘총비(總批)’ 등이 구성하고 있는 평점 형태가 소설평점의 문인적인 성격과 독서 지도(導讀)적인 성격을 가장 잘 체현하고 있는 비평 형식이다. 이러한 종합적인 성격의 평점 형태는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이 터를 잡고 이후에 마오 씨 부자와 장주포 등을 거쳐 진일보하게 발전해 소설평점사상 가장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냈다.
다음으로 소설평점의 함의상,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은 실제로 고대 소설 비평의 새로운 틀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문학적인 각도에서 소설의 인물 형상과 정절 구조를 평가하고 판단하며, 문장학의 각도에서 소설의 문장을 짓고 포국을 정하며 단어와 구절을 만들어내는 것을 분석했다. 그러므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중요한 함의는 ‘인물 성격’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구조와 장법’을 분석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은 그 구체적인 평점 가운데 이치를 분석하고 의론하며 평술하는 것이 하나로 융합되어 소설 텍스트의 구체적인 평술을 중시했던 동시에 다시 구체적인 평술의 기초 위에 이론 사상을 다듬고 개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의 이론 사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풍부함을 얻었는데, 이를테면 소설과 역사서를 비교하는 가운데 《사기》의 “글로써 사건을 운용해가는 것(以文運事)”과 《수호전》의 “글로써 인하여 사건이 일어나는 것(因文生事)”이 다르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소설은 “글로써 인하여 사건이 일어나기에”, 그 창작이 “오직 붓 가는 대로 따라가 긴 것을 짧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게 된다(只是順着筆性去, 削高補低都繇我.)” 이것은 소설 예술의 허구적인 특성을 명백하게 긍정한 것으로 이로부터 소설 창작 중에 [현상은 근원적이고 부차적인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인연생법(因緣生法)”이니 “격물(格物)”이니 “동심(動心)”이니 하는 등 일계열의 소설의 창작 관념과 이론적인 사상이 탐구되었다.
진성탄은 자신이 비한 《수호전》에서 의론에 뛰어났으니, 소설의 구체적인 정절과 사회 현실과 역사적 함의가 결합되어 ‘어느 하나를 구실 삼아 또 다른 것이 생겨나고(借題生發)’, ‘비분을 풀어내며(抒發悲憤)’, ‘당시의 폐해를 지적해 질책하는(指擿時弊)’ 등 그와 같은 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평점자가 소설 비평 중에 [자신의] 감정을 그 안에 융합해 그것을 인생 사업의 중요한 요인으로 삼았던 것이며, 동시에 독자가 진성탄이 비한 《수호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하나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진성탄 비 《수호전》은 비평적 사유와 문장의 풍격 상에서도 그 나름의 특색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평점의 과정 중에 평자의 주체적인 감정이 충만하고 또 그것이 작품 속에 투입되었으며, 평론의 언어가 생동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것이다.
조정과 정국(政局)에 대한 비판과 탐관오리에 대한 공격할 때 진성탄은 감정을 듬뿍 담아 강렬한 사회 참여의식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드러냈다. 아울러 《수호전》의 영웅에 대해서, 특히 성격이 솔직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찬미의 감정이 언표 상에 넘쳐났으니, 이를테면, 루다(魯達)를 평하며, “루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쓴 것을 묘사하니 한 줄기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오른다. 사람들이 이것을 읽으면 세상을 헛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부끄러움이 일어난다(寫魯達爲人出力, 一片熱血直噴出來, 令人讀之深愧虛生世上, 不曾爲人出力.)”고 하였다. 진성탄 비 《수호전》의 평점 언어 역시 개성이 강해 혹은 먹을 흩뿌리듯 듬뿍 묻혀내(潑墨如注) 시원시원하니 거침이 없고, 혹은 해학이 넘치고 가볍지만 붓끝에 날카로움을 담아내고 있으니(詼諧佻達, 筆含機鋒), 이것은 고대 소설평점사상 그 짝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대량의 묘사와 서술의 필법을 채용해 평점 문장에 생기와 활력이 넘치게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진성탄 비 《수호전》의 상술한 특색들은 각각 장점과 폐단을 갖고 있다. 그가 가득한 주관적인 감정의 발휘와 구실을 만들어 평론을 한 것 역시 후대의 소설평점에 소극적인 영향을 초래해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진성탄 비 《수호전》의 영향은 매우 커서, 이후의 소설평점은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마오 씨 부자의 《삼국연의》 평점과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 즈옌자이(脂硯齋) 등의 《홍루몽》 평점은 그 체제와 사상 면에서 모두 진성탄 비 《수호전》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성탄외서(聖嘆外書)’는 특히 후대의 소설 평본들 가운데 유행해서, 서상들이 자신들의 소설을 판매할 때 그것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진성탄 비 《수호전》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는 청대의 《수호전》 간본은 진성탄 비본이 주류를 이루어 기본적으로 《수호전》 유통 시장을 점거했다.
《사대기서제일종(四大奇書第一種)》 쭈이겅탕(醉耕堂) 간본의 표지 상란(上欄)에는 “성산별집(聲山別集)”으로 새겨져 있고, 하란(下欄)의 우상귀에는 “고본삼국지(古本三國志)”라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사대기서제일종”이라 새겨져 있으며, 첫머리에 리위(李漁)의 서(序)가 있고, 말미에는 “강희 세차 기미 12월, 리위 리웡 씨가 우산의 청위안에서 제하다(康熙歲次己未十有二月, 李漁笠翁氏題于吳山之層園)”이라 서(署)했다. 각 권마다에는 “룽위안 마오쭝강 쉬스 씨 평, 우먼 항융녠 쯔넝 씨 평정(蘢園毛宗崗序始氏評, 吳門杭永年資能氏評定)”이라 제하였다. 앞에는 독법이 있고 본문 중에는 회전총평(回前總評)과 쌍행소자(雙行小字)의 협비가 있다.
마오 비본(批本) 《삼국지연의》의 평자는 역대로 제(題)와 서(署)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쭈이겅탕(醉耕堂) 본 표지에는 “성산별집”이라 새겨져 있고, 본문에는 “룽위안 마오쭝강 쉬스 씨 평, 우먼 항융녠 쯔넝 씨 평정(蘢園毛宗崗序始氏評, 吳門杭永年資能氏評定)”이라 제하였고, 건륭 34년 스더탕(世德堂) 본 비혈(扉頁)에는 “마오성산 평 삼국지(毛聲山評三國志)”라 제하였으며, 청 다쿠이탕(大魁堂) 비혈 상란에는 “진성탄 외서(金聖嘆外書)”라 제하고, 오른쪽에는 “마오성산 평 삼국지(毛聲山評三國志)”라 제하였으며, 동치 2년 쥐성탕(聚盛堂) 본 비혈에는 “마오성산 비점 삼국지(毛聲山批點三國志)”라 제한 것 등이 그러하다. 마오성산, 마오쭝강, 진성탄, 항융녠 네 사람을 언급한 것 가운데, 진성탄은 서방(書坊)에서 가탁한 것으로, 청 각본 《제일재자서》의 “진성탄 서(金聖嘆序)” 역시 학계에서는 이미 쭈이겅탕 간본 리위의 서를 삭제하고 개정해서 만든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항융녠이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마오성산의 학생으로 추측되는데, 일찍이 《삼국지연의》의 비점에 참여했고, 뒤에 몰래 자기 것으로 하고자 했다가 마오성산의 질책을 받아 평본 간행이 중도에 취소되었다. 마오성산이 세상을 뜬 뒤, 마오쭝강이 간행을 주재하자, 절충을 보아 간본의 비혈에 “항융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린(黃霖)의 <마오쭝강 비평 삼국연의․전언>(齊魯書社, 1991년)과 천훙(陳洪)의 《중국소설이론사》(安徽文藝出版社, 1992년)에 모두 고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마오성산과 마오쭝강, 그리고 항융녠 세 사람이 공동으로 완성했으나, 마오 씨 부자가 주역을 맡은 것이다. 이에 대해 마오성산은 <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뤄관중 선생이 《통속삼국지》 모두 120권을 지었는데, 그 사실의 기록이 오묘하여 쓰마쳰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 훈장에 의해 개악된 것을 내가 깊이 애석해 하였다. 작년에 그 원본을 얻어 볼 수 있어 그로 인해 교정을 했는데, 나의 우둔함과 고루함을 생각지 않고 힘써 절을 나누고 풀이하고는 매 권의 앞에 또 총평 몇 단락을 새겨 넣었다. 또 후배들에게도 미약한 논의나마 첨부하도록 해 함께 이 책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책이 이미 만들어졌을 즈음에 난징에 있는 친한 벗이 보고 칭찬을 하며 간행하고자 했는데, 뜻하지 않게 스승을 배신한 무리가 있어 몰래 이 책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해 이 책을 간행하는 일이 중도에 허공에 떠버려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이제 《비파기》를 먼저 내놓고 《삼국연의》는 나중에 출간할 것이다(羅貫中先生作《通俗三國志》, 共一百二十卷, 其紀事之妙, 不讓史遷. 却被村學究改壞, 余甚惜之. 前歲得讀其原本, 因爲校正, 復不揣愚陋, 爲之務分節解. 而每卷之前, 又刻綴以總評數段, 且許兒輩亦得參附末論, 共贊其成. 書卽成, 有白門快友, 見而稱善, 將取以付梓. 不意忽遭背師之徒, 欲竊冒此書爲己有, 遂使刻事中擱, 殊爲可恨. 今特先以《琵琶》呈敎, 其《三國》一書, 容當嗣出.)”
마오 씨 부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푸윈커쯔(浮雲客子)의 <제칠재자서서(第七才子書序)>와 추런훠(褚人獲)의 《견호집(堅弧集)》 등의 기록에 의하면 마오성산은 본명이 룬(綸)이고, 자는 더인(德音)이며, 쟝쑤(江蘇) 창저우[長洲; 지금의 쑤저우(蘇州)] 사람이다. 50여 세에 실명하여 “이에 호를 성산으로 바꾸고 쭤츄밍(左丘明)을 본받아 책을 짓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 삼았다.”(푸윈커쯔의 <제칠재자서서>) 그의 평점은 극히 고생스러운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다.
“근년 들어 병든 눈이 멀어, 빗장 걸고 마른 나무토막처럼 앉아 소일거리가 없었다. 예전처럼 《비파기》를 취해 아들에게 읽어달라 하여 그것을 듣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즐기는 사이에 또 문득 들었던 생각을 동호인들에게 공개하고자 했다. 이에 흥이 나는 대로 거칠게나마 평을 하고 순서를 매겨 내가 말을 하면 아들이 손으로 받아 적었다(比年以來, 病目自廢, 掩關枯坐, 无以爲娛, 則仍取《琵琶記》, 命兒輩誦之, 而後听之以爲娛.自娛之余, 又輒思出以公同好.由是乘興粗爲評次.我口說之, 兒輩手錄之,)”[<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
《견호보집(堅瓠補集)》에는 그가 60세 때 왕샤오인(汪嘯尹)을 위해 지은 축수시(祝壽詩)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기아와 추위 두 낱말에 찌든 한 고루한 서생, 하릴없이 만권 장서를 한탄하노라. 세상 사람들 장쓰예를 몰라보니, 그 누가 호의로 주머니 열어 보화를 선사할꼬(兩字飢寒一腐儒, 空將萬卷付嗟吁. 世人不識張司業, 若個纏綿解贈珠.)”, “오랜 병마와 가난에 늙도록 벼슬도 못하니, 하늘도 사람도 정의도 날 저버렸구나! 가난 길에 그저 남은 몇 방울의 눈물, 두 눈동자 안보여도 절로 흩뿌리누나.(久病長貧老布衣, 天乎人也是耶非!止餘幾點窮途淚, 盲盡雙眸還自揮.)” 이것은 그 생활의 진실한 면모를 그려낸 것이라 할 만하다.
마오쭝강(1632~1709년 이후)는 자가 쉬스(序始)이고, 호는 졔안(孑庵)으로 마오룬의 아들이다. 문재(文才)가 있어 일찍이 훈장 노릇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추런훠(褚人獲)와 유퉁(尤侗), 진성탄(金聖嘆), 쟝찬(蔣燦), 쟝밍(蔣明), 쟝즈쿠이(蔣之逵), 쟝선(蔣深) 등과 교유하며 아비를 도와 《삼국연의》, 《비파기》를 평점한 외에도 필기 《졔안잡록(孑庵雜錄)》 및 약간의 시문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그의 제자 쟝선이 소장한 《치원공무진주권병유촉수적합장책(雉園公戊辰硃卷幷遺囑手迹合裝冊)》의 제발(題跋) 문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불초해서 헛되이 아버지의 책을 읽고 늙도록 아무런 성취도 없었다.(予不肖, 空讀父書, 迄于老而無成)” 이것으로 그가 평생 우울하게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자세한 것은 천샹화(陳翔華)의 <마오쭝강의 일생과 《삼국지연의》 마오 평 본의 진성탄 서 문제(毛宗崗的生平與《三國志演義》毛評本的金聖嘆序問題)>, 《문헌(文獻)》, 1989년 제3기를 볼 것]
마오 씨 부자가 평점한 《삼국지통속연의》는 작품이 “시골 훈장에 의해 개악된 것”에 느낀 바 있어, “모두 고본에 의거해” “속본”에 대해 교정과 삭제 개정을 진행하는 한편 평점을 가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속본’이란 “리줘우 선생 비열(批閱)이라 가탁한” 본으로, 일반적으로는 예저우(葉晝)가 가탁한 것으로 여기는 《리줘우 선생 비평 삼국지(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다. 마오 씨 부자가 보기에 ‘속본’은 문장이나 정절, 회목, 시사(詩詞) 등의 방면에서 모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에 “고본에 의거해 개정했던 것”이다. 아울러 평론 중에서도 “류베이(劉備)를 거스르고 주거량(諸葛亮)을 매도하는 말이 많았기에”, 이것 역시 “모두 삭제하고 새로운 평으로 바로잡았다.”(<범례>) 마오 씨의 이른바 ‘고본’이라는 것은 사실 가탁한 것이었기에 “리줘우 평본”에 대한 삭제 개정은 순전히 그것과 별도로 고쳐 쓴 것으로 비교적 높은 텍스트 가치를 갖고 있으면서 그들의 사상 정감과 예술 취미를 체현하고 있다.
마오 씨가 비평하고 개정한 《삼국연의》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류베이를 옹호하고 차오차오(曹操)에 반대하는(擁劉反曹)” 정통적인 관념을 진일보하게 강화한 것으로 그 <독법>의 첫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국지》를 읽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통(正統)과 정통이 아닌 왕의 통치(閏運), 나라를 찬탈한 것(僭國)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정통을 이룬 자는 누구인가? 촉한(蜀漢; 221~263년)이다. 나라를 찬탈한 자는 누구인가? 오(吳)나라(222~280년)와 위(魏)나라(220~265년)이다. 정통이 아닌 왕의 통치는 누구인가? 진(晉)나라(265~317년)이다.……천서우(陳壽; 233~297년)의 《삼국지》는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주시(朱熹)의 《통감강목(通鑑綱目)》에 맞추어 《삼국연의》에다가 이 점을 덧붙여 바로잡았을 뿐이다.(讀三國志者, 當知有正統、閏運、僭國之別. 正統者何? 蜀漢是也. 僭國者何? 吳、魏是也. 閏運者何? 晉是也.……陳壽之《志》未及辨此, 余故折衷于紫陽《綱目》, 而特于演義中附正之.)
이런 관념에 바탕해 마오 씨는 《삼국연의》에 대해서 비교적 많은 첨삭을 가했고, 정절의 배치와 사료의 운용, 인물 형상의 소조에서 개별적인 용사[用詞; 이를테면, 원작에서 차오차오를 ‘차오 공(曹公)이라 칭한 것을 대부분 바꾸어버린 것]에 이르기까지 마오 씨는 모두 이러한 관념과 정신에 따라 개조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제1회 중에서 류베이와 차오차오의 형상을 고쳐 쓴 것이다. 이를테면, 류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그 사람됨은 평생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되, 개와 말을 좋아하고, 음악을 애호했으며, 옷을 잘 차려입고, 말수가 적었으며,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되,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那人平生不甚樂讀書, 喜犬馬, 愛音樂, 美衣服. 少言語, 禮于下人, 喜怒不形于色.) (리줘우 평본)
그 사람됨은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은 너그럽고 온화했으며, 말수가 적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되, 평소 큰 뜻이 있어 천하의 호걸과 교유하는 것만을 좋아했다.(那人不甚好讀書; 性寬和, 寡言語, 喜怒不形於色; 素有大志, 專好結交天下豪傑.) (마오 비본)
차오차오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영웅 한 명이 앞으로 뛰쳐나왔는데, 신장은 칠 척이고, 가느다란 눈매에 긴 수염을 하고 담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고, 지모가 출중해 제 환공과 진 문공이 나라를 바로잡고 떠받칠 재주가 없음을 비웃고, 자오가오와 왕망이 종횡가의 계책이 부족했음을 논하였으며, 용병술은 쑨쯔(孫子)와 우치(吳起)와 방불하고, 가슴 속에는 《육도》와 《삼략》을 깊이 암송하고 있었다.(爲首閃出一個好英雄, 身長七尺, 細眼長髥, 胆量過人, 机謀出衆, 笑齊桓, 晋文无匡扶之才, 論趙高、王莽少縱橫之策, 用兵仿佛孫、吳, 胸內熟諳韜略) (리줘우 평본)
[한 장수가] 앞으로 나서는데, 신장은 칠 척이고 가느다란 눈매에 긴 수염을 하고 있었다.(爲首閃出一將, 身長七尺, 細眼長髥.) (마오 비본)
수정하는 중에 평자의 주관적인 의도가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지만, 작자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회전비어(回前批語) 중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바쁜 가운데 갑자기 류베이와 차오차오 두 사람의 전기로 들어가니, 하나는 어려서부터 됨됨이가 컸고, 하나는 어려서부터 됨됨이가 간사했다. 하나는 중산정왕의 후예이고, 하나는 중상시의 양손이니, 그 출신의 높고 낮음이 이미 판별된 것이다.(百忙中忽入劉, 曹二小傳, 一則自幼便大, 一則自幼便奸. 一則中山靖王之後, 一則中常寺之養孫, 低昻已判矣.)
이러한 평가와 개정은 마오 비본 《삼국연의》 중 거의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 이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는 장기간 자못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혹자는 마오 씨가 청 왕조의 정통적인 지위를 옹호하는 각도에서 작품에 표현된 사상 경향을 질책한 것이라 하고, 혹자는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각도에서 그가 남명을 위해 정통적인 지위를 다툰 것이라 여겨 그 말하는 바의 각도가 같지 않지만, 모두 마오 씨 비본에 명확한 정치적 경향과 민족 의식이 드러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사실 그 정치적 색채를 과도하게 강화한 것이다. 이렇듯 마오 비본 중의 정치적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명과 청 왕조가 바뀌는 각도에서 논의를 펼쳐나갈 필요는 없다. “류베이를 옹호하고 차오차오를 반대하는” 정통적인 관념이 실제로 체현하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유가 사상으로, 특히 일종의 이상적인 정치와 정치 인물의 이상적인 인격에 대한 작자의 동일시를 드러내고 있다. 곧 류베이가 대표하는 인애(仁愛) 형상을 찬미하고 차오차오를 전형으로 삼는 잔인하고 포악한 형상을 비판하는 까닭에 그의 평가와 개정이 정치와 인격의 이중적인 표준을 체현했던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마오 비본의 텍스트적 가치는 평자의 《삼국지연의》 텍스트에 대한 예술적 가공에 체현되어 있는데, 특히 문장의 수정과 회목의 정리, 시문(詩文)을 바꾸고, 고사와 정절을 첨삭하는 등에 자못 많은 공력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작품의 언어와 정절의 서술이 더욱 유창하고 간결해졌으며, 인물 성격 역시 더욱 선명해졌다. 총괄하자면, 마오 씨 부자의 수정을 통해 작품의 예술성이 크게 제고되었던 것이다.
마오 씨 비본은 이론 비평의 방면에서 직접적으로 진성탄 평점 《수호전》의 전통을 계승했는데, 특히 평점의 외재적인 형식과 평점의 필법에서 확실히 “성탄의 저술 의도를 모방해 그렇게 했다(仿聖嘆筆意爲之).” 하지만 비평의 대상이 달랐기 때문에, 이론적인 관념에서도 새로운 견해를 비교적 많이 내놓았다. 이를테면 소설의 허구와 사실(史實)의 관계 문제가 그러하다. 역사연의 소설로서 《삼국연의》는 기타 소설과 다른 창작 법칙과 특성을 갖고 있는데, 곧 역사적 사실과의 관계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마오 비본이 ‘실록’의 준칙에 기울어 있으면서 작품이 “제왕의 일을 실제로 서술하여 진실되고 고찰이 가능하다”는 특성을 긍정하고 있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사실은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마오 비본에서는 《삼국연의》와 《수호전》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삼국연의》를 읽는 것이 《수호전》을 읽는 것보다 낫다. 《수호전》의 글이 가지는 진실함은 비록 《서유기”의 환상보다는 조금 낫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고, 멋대로 사건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니, 그 솜씨가 《삼국》보다 까다롭지 않다. 그러니 [《수호전》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을 서술하되 그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는 일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문장을 부리는 솜씨가 아주 어려운 경지에 이르게 된 《삼국지》만 못하다는 것이다.(讀《三國》勝讀《水滸傳》. 《水滸》文字之眞, 雖較勝《西遊》之幻, 然無中生有、任意起滅, 其匠心不難, 終不若《三國》敍一定之事, 無容改易而卒能匠心之爲難也.)”(<독법>)
이것으로 마오 씨가 긍정한 것이 사실은 이른바 ‘실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장인의 마음(匠心)’이라는 각도에서, 곧 《삼국연의》야말로 역사적 사실의 제약 하에 써 내려간 절묘한 문장이었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을 창작하는 일은 확실히 《수호전》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오룬(毛綸) 역시 <제칠재자서총론(第七才子書總論)>에서 분명하게 표출한 바 있다.
“《수호전》의 제목은 《삼국지》에 미치지 못한다.……《수호전》에 묘사된 것은 갈대 우거진 호수에 도적들이 모여든 사건으로, 《송사》 중의 일단에 불과하며 허구에 기대어 멋대로 만들어낸 것이다. 기왕에 허구에 기대 멋대로 만들어냈으니 그 사이사이의 곡절과 변환은 모두 작자가 일시에 교묘하게 생각해낸 것일 따름이다(《水滸》題目不及《三國志》,……《水滸》所寫萑苻嘯聚之事, 不過宋史中一語, 憑空捏造出來. 旣是憑空捏造, 則其間之曲折變幻, 都是作者一時之巧思耳.)”
그러므로 마오 비본 가운데 비자(批者)가 《삼국연의》를 절묘하다고 여겼던 것은 그 관건이 삼국 시기 역사 사건 자체의 절묘함에 있는 것이고, “이런 천연의 절묘한 사건이 있어 천연의 절묘한 문장을 이루어냈던 것이다(有此天然妙事, 湊成天然妙文.)”. “천연 그대로 이러한 파란이 있고, 천연 그대로 이러한 층차와 곡절이 있어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이루어냈던 것이다(天然有此等波瀾, 天然有此等層折, 以成絶世妙文.)”
다음으로 마오 비본은 한편으로는 《삼국연의》가 “천연의 절묘한 사건”으로 “천연의 절묘한 문장”을 써 내려간 것임을 긍정하는 동시에, 《삼국연의》를 “본래 임의로 첨삭이 가능한” 패관(稗官)과 대비시키면서, 이것은 절대 《삼국연의》과 같은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를테면, 제2회의 총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 나라의 장수가 일어나기 전에 세 어릿광대가 그들을 위한 미끼가 되어야 한다. 세 어릿광대가 이미 없어진 뒤에는 다시 여러 어릿광대가 그들을 위한 여파 노릇을 해야 한다. 종래의 실제 사실은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찌할 거나, 요즘 패관을 짓는 이들은 본래 멋대로 첨삭이 가능하지만 오히려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한가?(三大國將興, 先有三小丑爲之作引, 三小丑旣滅, 又有衆小丑爲之餘波. 從來實事, 未嘗徑遂率直, 奈何今之作稗官者, 本可任意添設, 而反徑遂率直耶?)”
이것으로 평자가 사실은 ‘허구’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러한 ‘허구’로 “‘절세의 절묘한 문장”을 써낼 수 없었던 작자들을 나무란 것임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또 그 다음으로 작품을 구체적으로 비하고 개정하는 가운데 평자 역시 “후대 사람이 날조한 사건”들을 삭제하긴 했으되, 인물 성격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지만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에는 위배되는 내용, 이를테면 관위(關羽)의 “단도부회(單刀赴會)”나 “천리독행(千里獨行)”, “의석화용도(義釋華容道)”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찬미했다. 이것으로 평자가 허구적인 내용을 첨삭하는 표준이 주로 예술적 가치의 높고 낮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연의》의 정절 구조에 대한 비평에서도 마오 비본은 가치 있는 견해를 많이 내놓았다. 이를테면, 명확하게 ‘결구(結構)’라는 개념으로 《삼국연의》를 비평하면서, 《삼국연의》의 구조는 ‘하늘이 만들고 땅이 늘어놓은 것(天造地設)’이고, 소설의 결구 예술은 “하늘과 땅 옛날과 현재의 자연스러운 글 가운데” 문득 깨달아 나온 것이라 여겼다(94회 회평). “하나의 실마리로 관통해(一線貫穿)” 작품의 결구 특색을 분석함으로써, 《삼국연의》가 “두서는 번다하지만, 하나의 실마리로 꿰뚫어(頭緖繁多, 而如一線穿却)” 예술 결구가 완미하고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관목(關目)’이라는 단어로 소설의 정절을 평했다. 이 ‘관목’이라는 것은 소설 정절 중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표현할 때의 관건이 되는 정절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류베이의 전(傳)에 앞서 갑자기 차오차오를 삽입해 서술하고, 또 류베이의 전 가운데 갑자기 쑨졘(孫堅)을 곁들여 묘사했으니, 하나는 위나라의 태조이고, 다른 하나는 오나라의 태조로, 세 나라가 정족지세를 이룬 까닭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정족지세를 이룬 것은 [쑨졘의 동생] 쑨췐이긴 하지만 그 복선이 이미 여기에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전체의 관건이 되는 대목이다(前于玄德傳中忽然夾叙曹操, 此又于玄德傳中忽然帶表孫堅. 一爲魏太祖, 一爲吳太祖, 三分鼎足之所以來也. 分鼎雖屬孫權, 而伏線則已在此. 此全部大關目處.)”(제2회 평어) 또 이를테면, “대개 [류베이의 아들] 아더우(阿斗)가 시촨(西川) 땅에서 40여 년 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시촨을 취한 것이 류씨 집안의 관건이 되는 대목이고, 아더우를 빼앗아 간 것 역시 류씨 집안의 관건이 되는 대목인 것이다(蓋阿斗爲西川四十餘年之帝, 則取西川爲劉氏大關目, 奪阿斗亦劉氏大關目.)”(제61회 평어)
‘결구’나 ‘관목’ 등과 같은 단어는 명말 이래의 소설 희곡 평점에서 차츰 사람들에게 중시되었던 것으로 특히 리위(李漁)가 《한정우기(閑情偶寄)》에서 “결구 제일(結構第一)”이라는 표제를 쓴 뒤 이들 단어가 매우 큰 영향을 주어 소설 희곡 역사에서 결구 예술이 중시되는 하나의 표지가 되었다. 하지만 리위가 지은 《한정우기》는 강희 5년보다 앞서지는 않고 강희 10년에는 아직 완성된 원고가 나오지 않았고, 마오 비본은 대략 강희 5년에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마오 비본이 소설 예술의 결구 비평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가치를 알 수 있다. 인물의 구체적인 비평에 대해서는 마오 비본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진성탄 비 《수호전》을 뛰어넘는 것은 없고, 그 도덕적인 평가는 성격 분석에 치우쳤다. 《삼국연의》 인물의 유형화 경향에 대해서도 그 특색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아주 적은 분량의 비평이기는 하지만 인물에 대한 파악은 비교적 정확하다.
마오 비본은 그 뛰어난 텍스트 개정과 이론 비평으로 《삼국연의》 유전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점하고 있다. 가정 본으로 시작해서 《삼국연의》는 매우 많은 평점자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서명이 된 평본으로는 위샹더우(余象斗) 평본, 리줘우(李卓吾) 평본, 중싱(鍾惺) 평본, 리위(李漁) 평본과 마오 씨 부자의 평본 등이 있다. 다만 마오 비본이 세상에 알려진 뒤의 《삼국연의》 판본사에서는 마오 비본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평본을 압도해 《삼국연의》의 정본(定本)이 되어 수백 년을 풍미했다.
《가호허탕 비평 제일기서 금병매(皐鶴堂批評第一奇書金甁梅)》의 판본은 매우 많고, 제서(題署) 또한 같지 않다. 이를테면, ‘짜이쯔탕 본(在玆堂本)’ 비혈(扉頁)에는 “리리웡 선생 저 제일기서(李笠翁先生著第一奇書)”이라 제(題)했고, “본아장판 본(本衙藏版本)” 표지에는 “펑청 장주포 비평 금병매 제일기서(彭城張竹坡批評金甁梅第一奇書)”라 제했으며, “잉쑹쉬안 장 판본(影松軒藏版本)”의 표지에는 “펑청 장주포 비평 수상 금병매(彭城張竹坡批評繡像金甁梅)”라 제한 것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사실 평자인 장주포(張竹坡)의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를 저본으로 비(批)를 가해 만든 것들이다.
장주포(1670~1698년)는 이름이 다오선(道深)이고, 자는 쯔더(自得)이며, 호는 이싱(以行)이라 했다. 쟝쑤(江蘇) 퉁산(銅山) 사람으로 원적은 저쟝(浙江) 사오싱(紹興)이다. 본성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기로 향리에서 이름이 났다. 하지만 과거의 길은 그리 순탄치 못해 향시에 다섯 차례나 응시했으나 모두 떨어졌다. 강희 32년(1693년)에 경사(京師)에 놀러갔다가 시가 창작으로 사람들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생활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강희 34년(1695년) 장주포는 집안의 가오허차오탕(皐鶴草堂)에서 《금병매》를 평점했고, 그 뒤 강희 37년 봄에는 융딩허(永定河) 공사장에서 입신출세를 도모하였다. 융딩허 공정이 준공되었을 때 장주포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29살이었다. 장주포는 한평생 운명에 곡절이 많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재주를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해 비분강개하여, 항상 “인간의 정리가 반복되고, 세상사가 덧없이 변하는 것(人情反復, 世事滄桑)”을 한탄했다. 그는 이러한 개인의 감정을 비평에 융합시켜, 《금병매》 평점을 극히 개성적인 색채가 있는 평점 작품으로 만들었다.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위로는 진성탄과 마오쭝강을 계승했는데, 특히 진성탄 비 《서상기》의 영향을 매우 강렬하게 받았다. 그 주지(主旨)는 작품의 정감이 내포한 함의를 드러내 밝히고 작품의 정절의 실마리를 찾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비평은 진성탄이 그 단서를 열었으니 장주포에 이르러 그 흥취를 크게 떨쳤다. 그는 100회나 되는 장편을 단락을 따라 정리하고 촛불을 들고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탐구하여, 그의 개인적인 풍격이 느껴지는 해설서를 만들어내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서(序)>가 있는데, “때는 강희 년 을해 청명 중순, 친중줴톈저 셰이가 가오허탕에서 제하다(時康熙歲次乙亥淸明中浣, 秦中覺天者謝頤題于皐鶴堂)”이라는 서(署)가 있다. 일반적으로 “셰이(謝頤)”는 곧 장차오(張潮)의 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에는 장주포가 지은 ‘총론(總論)’적인 성격의 문장 10편이 있는데, <주포 한화(竹坡閑話)>, <《금병매》우의론(《金甁梅》寓意論)>, <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고효설(苦孝說)>,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제일기서《금병매》취담(第一奇書《金甁梅》趣談)>, <잡록(雜錄)>, <냉열금침(冷熱金針)>, <비평제일기서《금병매》독법(批評第一奇書《金甁梅》讀法)>, <범례(凡例)>, <제일기서목(第一奇書目)>이 그것이다. 본문에도 회전총비(回前總批), 협비(夾批), 방비(旁批)와 미비(眉批)가 있다. 이 평어의 형태는 명백하게 진성탄 비 《수호전》을 답습하고 있는데, <독법> 부분의 언어 풍격과 사유 방식은 그가 의식적으로 진성탄과는 상이한 비평적 특색을 드러내고자 했음에도 아주 흡사하다.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호전》에서 진성탄이 비(批)한 곳은 대체로 본문 중에서 작게 비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수호전》은 이미 이루어진 큰 단락이 모두 갖추어진 문장으로 이를테면, 108인은 모두 각자의 전(傳)이 있어 비록 삽입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분명하기에 진성탄이 그 자구에만 비했던 것이다. 《금병매》의 경우에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어 자구를 분별하는 정도라면 세심한 사람이면 모두 할 수 있지만, 도리어 그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은 잃게 된다.(《水滸傳》聖嘆批處, 大抵皆腹中小批居多.……《水滸傳》是現成大段畢具的文字, 如一百八人各有一傳, 雖有穿揷, 實次第分明, 故聖嘆止批其字句也. 若《金甁》乃隱大段精采於瑣碎之中, 止分別字句, 細心者皆可爲, 而反失其大段精采也.) [<범례(凡例)>]
장주포의 이러한 논지는 바로 정확하게 《수호전》과 《금병매》의 결구 예술상의 차이를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그 차이는 곧 《수호전》은 [등장인물] 108명 모두에게 각각의 전이 있는 선적(線的)인 결구를 갖고 있지만, 《금병매》는 “큰 단락의 뛰어난 부분이 부스러기 조각 사이에 감추어져 있”는 그물형 결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진성탄이 “자구에만 비했다”고 결론지은 것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닌데, 장주포는 교활하게도 자신의 작품 비평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했던 듯하다. 실제로 장주포는 소설평점의 방법에 있어 진성탄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해 《수호전》 평점뿐 아니라 《서상기> 평점에 대해서도 깊이 깨달은 바 있었다. 그래서 진성탄이 소설평점 가운데 체현해낸 주요한 정신은 장주포가 《금병매》를 비평한 기본 방법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계승 관계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 표현되어 있다.
첫째, 진성탄의 문학비평은 비평자의 주체 의식을 강화했다. 곧 “진성탄이 《서상기》를 비한 것은 진성탄의 문장이지. 《서상기》의 문장이 아니다(聖嘆批《西廂記》是聖嘆文字, 不是《西廂記》文字.)”[<독제육재자서《서상기》법(讀第六才子書《西廂記》法)>]라고 여긴 것이다. 장주포 역시 분명하게 선언했다. “나는 내 자신의 《금병매》를 지은 것이다. 내 어찌 다른 사람과 《금병매》를 비평할 겨를이 있겠는가!(我自做我之《金甁梅》, 我何暇與人批《金甁梅》也哉!)”[<주포 한화(竹坡閑話)>] 이러한 비평 정신으로 그의 비평 문장은 자못 독특한 비평적 개성과 개인의 주관적인 색채를 드러낼 수 있었다.
둘째, 진성탄의 문장 비평은 “해의성(解義性)”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원래 모습의 흔적을 찾아내 그것의 신묘한 이치를 펼쳐내고자 했을 따름이다.(吾獨欲略眞形迹, 伸其神理.)” “내가 특히 슬퍼한 것은 독자의 정신이 일어나지 않아 작자의 뜻을 다 펼쳐내지 못하고 그 마음의 고통을 모르는 것인데, 실제로는 훌륭한 기교를 부린 것이었기에 나의 불민함을 사양치 않고 이렇게 비(批)한 것이다.(吾特悲讀者之精神不生, 將作者之意思盡設, 不知心苦, 實負良工, 故不辭不敏而有此批也.)” 이것은 문학 비평이 문장의 표면적인 현상을 뚫고 작품의 심층에 깔려 있는 함의를 탐구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장주포 역시 이것을 충분히 중시했다. 그는 《금병매》와 모든 소설을 ‘우언’으로 보았으니, 바로 이런 식으로 작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함의를 해독하기 위해 주관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을 거짓으로 날조해내고, 한 가지 사건을 허구로 만들어내었으니, 비록 바람이나 그림자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반드시 산에 의거해 돌을 그려내고 바다를 빌어 파도를 일으키니, 《금병매》에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 인물들은 백 명이 넘지만, 그 단서를 찾아보면 결국 밝혀낼 수 있다. 그 절반은 다 우언에 속하니, 모두 사물로 인해서 이름이 있게 되고 이름에 기탁해서 사건을 모음으로써 이 100회에 이르는 곡절 많은 책을 이룬 것이다.(其假捏一人, 幻造一事, 雖爲風影之談, 亦必依山點石, 借海揚波. 故《金甁》一部有名人物, 不下百數, 爲之尋端竟委, 大半皆屬寓言. 庶因物有名, 托名摭事, 以成此一百回曲曲折折之書.)”[<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이른바 “산에 의거해 돌을 그려내고, 바다를 빌어 파도를 일으키며”, 이른바 “사물로 인하여 이름이 있게 되고, 이름에 기탁해 사건을 모은다”는 것은 소설 속의 인명과 사물의 명칭에 모두 깊은 뜻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고, 소설의 정절은 바로 이렇듯 독특한 함의를 갖고 있는 사물의 명칭과 인명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소설평점은 곧 이것에 근거해 작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사고의 갈피가 《금병매》 평점 중에 거의 관철되어 있다.
셋째, 진성탄의 문학 비평은 문학작품을 총결하는 문법을 중시했다. “원앙을 수놓는 것이 완료되면, 나는 그대에게 그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바늘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鴛鴦綉出從君看, 莫把金針度于君.)”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 역시 소설 창작 법칙에 대한 게시에 주의를 기울였다. “세상 사람들이 함께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할 것이다.(使天下人共賞文字之美.)”[장다오위안(張道淵),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
총괄하자면, 장주포의 소설평점은 대체로 진성탄의 전통을 계승하되, ‘주체성’과 문학 법칙에 대한 게시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기본적으로 대등하지만, ‘해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주포가 진성탄에 비해 훨씬 더 멀리 나아갔고, 그 주관적인 임의성 역시 더욱 강렬했다. 그러므로 그의 비점 중에는 견강부회와 주관적인 억견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장주포 평점 《금병매》의 주요한 동기는 무엇인가? 이 함의를 다룬 비평 자료는 대체로 아래의 몇 가지이다.
(1) 《금병매》 비점은 당시 독자의 작품에 대한 오독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세상의 독자들이 [마음을] 징치하고 권계하는 위현(韋絃)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을 행하는 부절로 여겼던 까닭에 음서로 보았던 것이다.……나는 작자의 고심을 가엾게 여기고, 동지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이 책을 비(批)한 것이다. <우의설>에서는 일부 간부(奸夫)와 음부(淫婦)를 모두 풀과 나무의 환영으로 비(批)했고, 일부 음탕한 말과 염정과 관련한 말은 모두 기복이 있는 기이한 문장으로 비했던 것이다.……나의 《금병매》는 위로는 음란함을 씻고 효제(孝悌)를 보존하며, 치부책에 불과한 것을 문장으로 변환시켰으니, 바로 《금병매》라는 책을 얼음이 녹고 기와가 무너지듯 [풀이한 것이다.](世之看者, 不以爲懲勸之韋絃, 反以爲行樂之符節, 所以目爲淫書,……予小子憫作者之苦心, 新同志之耳目, 批此一書. 其<寓意說>內, 將其一部奸夫淫婦, 恣批作草木幻影, 一部淫情艶語, 悉批作起伏奇文.……我的<金甁梅>上洗淫亂而存孝弟, 變帳簿以作文章, 直使<金甁>一書冰消瓦解,)” [<제일기서비음서론(第一奇書非淫書論)>]
(2) 《금병매》 비점은 평점자 마음 속의 격분의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것이다.
“좀더 최근에는 빈곤과 슬픔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염량세태”에 부대끼다가, 시간을 보내기 힘들 때마다 내 자신이 세정서 한 권을 지어 답답한 소회를 풀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나는 몇 차례나 붓을 들어 책을 쓰려 하였으나, 전후 줄거리를 잡아나가는 데 많은 기획을 해야 했기에 이내 붓을 던지며 내 자신에게 말했다. “왜 나보다 앞서 ‘염량세태’를 다룬 책[《금병매》]을 쓴 이가 기획한 것을 세세히 풀이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첫째, 내 자신의 억눌린 소회를 풀 수 있을 것이며 둘째, 옛 사람의 책을 명료하게 풀이하는 일은 내가 지금 한 권의 책을 기획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邇來爲窮愁所迫, 炎凉所激, 于難消遣時, 恨不自撰一部世情書, 以排遺悶懷. 幾欲下筆, 而前後結構, 甚費經營, 乃擱筆曰:“我且將他人炎凉之書, 其所以前後經營者, 細細算出, 一者可以消我悶懷, 二者算出古人之書, 亦可算我今又經營一書.)”[<주포 한화(竹坡閑話)>]
“장주포는 펑청 사람으로, 열다섯에 아비를 잃고 지금까지 10년 동안 세속에 부대끼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두루 겪고난 뒤, 유랑에 지쳐 돌아왔다. 지난 날 친밀하게 지내던 지우들은 오늘날에는 모두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친한 벗이 백안시하고 태도에는 쓰라린 데가 있으니, 곧 구름을 넘나들던 뜻과 기상이 각별히 닳고 달아 그 때문에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책상을 치며 말했다. ‘옳거니.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진짜와 가짜는 내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에 을해년 정월 7일에 비(批)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3월 27일에 완성을 고하다.(竹坡彭城人, 十五而孤, 于今十載, 流離風塵, 諸苦備歷, 游倦歸來.向日所爲密邇知交, 今日皆成陌路.……親朋白眼, 面目含酸, 便是凌雲志气, 分外消磨, 不禁爲之淚落如豆.乃拍案曰:有是哉, 冷熱眞假, 不我欺也, 乃發心于乙亥正月人日批起, 至本月廿七日告成.)”[<제일기서《금병매》우의설(第一奇書《金甁梅》寓意說)>
(3) 《금병매》 비점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한 문장을 함께 감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형은] 일찍이 내게 말했다. ‘《금병매》는 매우 훌륭하게 짜여진 작품이지만, 진성탄이 죽은 이래로 이것을 알고 있는 이가 몇 명 살아남지 않았다. 나는 그것의 훌륭한 점들을 모두 짚어내어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어떤 이가 형에게 말했다. ‘이 원고를 서방(書坊)에게 넘기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형이 말했다. ‘내가 또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이 일을 한 것인가? 나는 장차 이 책을 간행해 세상에 내놓아 세상 사람들이 함께 문장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 역시 옳지 않겠는가?’((兄)曾向余曰: 《金甁》針線縝密, 聖嘆旣歿, 世鮮知者, 吾將拈而出之.……或曰: 此稿貨與坊間, 可獲重價. 兄曰: 吾且謀利而爲之耶? 吾將梓以問世, 使天下人共賞文字之美, 不亦可乎?)” [장다오위안(張道淵),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
“그런즉 나는 어째서 《금병매》를 비(批)했는가? 나는 그 문장이 도도하게 100회에 이르되 천가지 만가지 실마리가 똑같이 하나의 실에서 나오고 또 천가지 만가지 우여곡절이 하나의 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한가로이 창 앞에 홀로 앉아 역사책을 읽고 제가들의 문장을 읽는 틈틈이 어쩌다 한번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이와 같은 절묘한 문장에 바늘을 내놓지 않는다면, 작자의 오랜 세월 고심한 것을 저버리는 게 되지 않겠는가!(然則《金甁梅》我又何以批之也哉? 我喜其文之洋洋一百回, 而千針萬線, 同出一絲, 又千曲萬折, 不露一線. 閒窓獨坐, 讀史, 讀諸家文, 少暇, 偶一觀之, 曰: 如此妙文, 不爲之遞出金針, 不幾辜負作者千秋苦心哉!)》 [<주포 한화(竹坡閑話)>]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이 중국소설사와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가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가? 필자는 이왕의 연구가 장주포 비 《금병매》를 중국소설이론사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대해온 것은 합리적이지만, 진정으로 장주포 비평의 가치 소재를 지적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주포 비 《금병매》의 주요한 가치는 전파에 있고, 평점자의 작품에 대한 독특한 독해에 있으며, 이로부터 독자에 대한 영향을 낳게 되었다.
소설 텍스트로 말하자면, 《금병매》에 대한 장주포의 수정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각수상비평금병매(新刻繡像批評金甁梅)》를 저본으로 했기에, 소설 텍스트에 있어서는, 《금병매》의 텍스트 변천 과정에 아무런 공헌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론적인 각도에서 말하자면, 《금병매》에 대한 장주포의 견해는 소설창작 법칙과 창작정신의 총결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제한적이다. 전체적으로는 진성탄 평점 《수호전》과 비교할 때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며, 심지어 이론적인 개괄의 방면에서 ‘룽위탕 본’ 《수호전》의 평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장주포 《금병매》 평점의 으뜸이 되는 가치는 《금병매》가 전파되는 가운데, 세정소설에 대한 감상 중에, 장주포가 독자들을 위해 훌륭한 범례들을 해부하고, 사람들의 몇 가지 감상 습관을 타파하여 독자로 하여금 《금병매》를 오독하는 데서 벗어나도록 인도한 데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방면에서 알아낼 수 있다.
(1) 장주포는 《금병매》의 정절 내용에 대해 비교적 심도 있고 주관적인 색채가 풍부한 분석을 가해, 《금병매》가 전파되는 가운데 줄곧 사람들로부터 음서로 치부되던 전통적인 관념에 대해 변호했다. 《금병매》를 ‘음서’로 보는 것은 명말 이래 자못 유행하던 관념으로, 독자들 가운데 비교적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확실히 작품 속에는 자연주의적인 성 묘사가 대량으로 존재한다. 이에 대해 장주포는 회피할 방법도 없고, 간단하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변호하는 가운데 장주포는 단순하게 진성탄이 《서상기》를 평점할 때 “글이라는 것은 그것을 보고 글이라 하는 것이고, 음탕함이라 함은 그것을 보고 음탕함이라 이른 것이다(文者見之謂之文, 淫者見之謂之淫)”라고 한 오래된 길을 걸어가지 않고, 의식적으로 그가 《금병매》의 “음욕 세계” 중에서 깨달은 “성현의 학문”을 천명했다. 곧 《금병매》는 음서가아니라 염량세태를 반영한 ‘세정서’이고, 현실을 깊고 통절하게 비판한 ‘태사공의 문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 장주포는 일계열의 이론적 관점들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설분(泄憤)’, ‘고효(苦孝)’, ‘기산(奇酸)’, ‘냉열(冷熱)’, ‘진가(眞假)’ 등이 그것으로, 그 가운데 ‘설분’과 ‘고효’, ‘기산’은 그 뜻이 《금병매》의 창작이 그 어떤 까닭이 있고,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 데 있으니, 작자가 “자신의 원수를 갚는” 일종의 수단인 동시에 이것을 빌어 작자의 마음 속에 깊이 침잠해 있는 비분과 쓰라린 고통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것이다. 이른바 “그 비분은 이미 112퍼센트에 달하고, 쓰라림 또한 120퍼센트에 달했으니, 《금병매》를 짓지 않고 어찌 소일할 것인가?(是憤已百十二分, 酸又百二十分, 不作《金甁梅》又何以消遣哉?)”, “작자는 불행히도 몸소 그 난관을 만나, 토해낼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고, 긁어낼 수도 없고, 슬프게 외쳐도 소용없으니, 이것을 빌어 스스로 풀어내려 했던 것이다. 그 뜻이 못내 슬프고, 그 마음이 가련하구나.(作者不幸, 身遭其難, 吐之不能, 呑之不可, 搔抓不得, 悲號無益, 借此以自泄, 其志可悲, 其心可憫矣.)” 그리고 “냉열”은 세태의 반복을 가리키고, “진가”는 인정의 허위를 드러낸다. 총괄하자면, 이것은 작자가 이렇듯 악랄하고 속된 세계와 음욕 세계에 대한 묘사를 빌어 마음 속의 비분을 풀어내고 현실의 추태를 비판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금병매》가 ‘음서’라는 관념을 깨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이미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장차오(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수호전》은 분노의 책이고, 《서유기》는 깨달음의 책이며, 《금병매》는 비애의 책이다(《水滸傳》是一部怒書, 《西遊記》是一部悟書, 《水滸傳》是一部哀書.)” 쟝한정(江含征)은 여기에 평을 덧붙였다. “《금병매》를 볼 줄 모르면 그 음탕함만을 배우게 될 것이니, 쑤스를 좋아하는 자가 단지 동파육만을 좋아할 따름인 것이다(不會看《金甁梅》而只學其淫, 是愛東坡者但喜吃東坡肉耳.)” 이에 대한 장주포의 분석은 가장 심각한데, 그 목적은 바로 사람들의 감상 습관을 깨서, 《금병매》에 은밀히 포함되어 있는 풍부한 생활과 현실적 함의가 드러나고 인식되도록 한 데 있었다.
(2) 장주포는 《금병매》의 표현 형식에 대해서도 비교적 깊은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평점하는 중에 한 편의 세정소설로서 《금병매》가 독특하게 갖고 있는 심미적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한 편의 세정소설로서 《금병매》는 독특한 예술적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왕왕 생활 속의 전형적인 사건을 잡아내 기이한 정절 묘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의 디테일들을 파노라마식으로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늘상 사람들이 늘어지고 번쇄하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명말 장우쥬(張无咎)는 <삼수평요전서(三遂平妖傳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병매》)는 총명한 하녀가 부인이 되듯이, 단지 날마다 사용하는 장부책을 기록하기만 할 뿐, 일찍이 집안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으니, 《수호》를 본받아 가난해진 것이다([《金甁梅》]如慧婢作夫人, 只會記日用帳簿, 全不曾學得處分家政, 效《水滸》而窮者也.)” 이러한 관점은 《금병매》가 전파되는 데 있어 비교적 큰 영향을 끼쳤다. 장주포는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우선 ‘장부설’에 반대하는 것으로부터 착수했다. 그는 일찍이 그가 평점한 《금병매》는 “장부책을 문장으로 바꾸어(變帳簿以做文章)”, 사람들이 번쇄한 정절 묘사 가운데서 작자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소설의 결구 장법을 파악하게 만듦으로써 세정소설이 독특하게 갖고 있는 심미적인 특색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금병매》가 ‘장부책’이 아니라 ‘문장’이라는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장주포는 《금병매》의 인물관계와 정절 구성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했다. 소설 속의 인물 관계와 정절 안배는 모두 하나의 유기적이고 질서 있는 총체로 앞뒤가 서로 맞물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복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주로 두 가지 작업을 하려 했다.
첫째, ‘우언’이라는 각도에서 출발해, 소설의 인물 명칭에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 밝히고, 소설의 정절 발전이나 심지어 총체적인 틀이 이러한 상징성 있는 인물 명칭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 여겼다. 이를테면, “병은 경으로 인해 생겨나고(甁因慶生也)”, “매화는 또 병으로 인해 생겨났으며(梅又因甁而生)”, 심지어 쑨쉐어(孫雪娥)가 수비부(守備府)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 역시 “매화와 눈이 봄을 다툰 것(梅雪爭春)”이고 “매화와 눈이 서로 양보하지 않기에, 춘메이가 총애를 받으면 쉐어는 욕을 당하고, 춘메이가 정실이 되면 쉐어는 더욱 욕을 당하게 된다(梅雪不相下, 故春梅寵而雪娥辱, 春梅正位而雪娥愈辱.)” 총괄하자면, 작자가 볼 때, 소설 속 인물들은 크게는 시먼에서 여러 첩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노복이나 하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을 취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고, 이름에 기탁해서 사건을 모은 것(托名摭事)으로 인물과 정절 사이에는 엄밀한 내재적 관계가 있다.
둘째, ‘인과’의 각도에서 출발해, 소설 정절의 발전이 비록 “소의 터럭처럼 가늘지만, 천만 가닥이 모두 하나의 몸을 갖추고 있고, 혈맥이 관통한다(細如牛毛, 乃千萬根共具一體, 血脈貫通,)”[<주포 한화(竹坡閑話)>] 정절과 정절 사이에는 엄정한 인과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작품의 결구 장법에 대해 비교적 깊이 있는 분석을 가해 “초사회선(草蛇灰線)”이나 “대간가(大間架)”, “양대장법(兩大章法)” 등과 같은 결구 법칙을 제출했다. 이로부터 정절을 분석하는 가운데 작품이 “내력이 없는 사건은 하나도 없는” “절묘하고 근엄한 장법”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주포의 《금병매》 결구 장법과 인물 관계에 대한 분석은 이른바 ‘장부설’을 깨뜨리는 데 비교적 큰 작용을 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금병매》가 “번쇄한 가운데 정채로움을 감추고 있는”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는데, 이로부터 세정소설의 예술 풍격을 앙양하고, 동시에 완정하고 근엄한 분석으로 《금병매》를 위한 정절 발전의 ‘인과 사슬(因果鏈)’을 엮어냈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금병매》의 작자가 “집안 일을 처리할 줄(處分家政)” 모른다는 잘못된 인식을 깨뜨렸다. 공정한 마음으로 논하자면, 장주포의 《금병매》 평점은 확실히 이러한 목적에 도달해 기본적으로 그가 예기했던 목표를 완성함으로써 《금병매》의 감상과 전파, 그리고 세정소설의 창작에 대한 공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장주포의 이러한 비평 방법과 사유 방식은 확실히 진성탄의 영향, 특히 진성탄 비 《서상기》의 영향을 받았다. 진성탄은 《서상기》를 비평할 때, 왕왕 인물의 행위 하나 하나와 디테일한 부분 하나 하나에 대해 “그렇게 된 까닭”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서상기》 정절 구조의 틀이 하나의 엄밀한 인과의 틀 안에 있게 했다. 이러한 비평 방법은 이점과 폐단이 모두 있게 마련인데, 리위(李漁)는 이 점에 대해서 충분히 뛰어난 평을 한 바 있다.
“진성탄이 평한 《서상기》의 장점은 세밀한 데 있고, 단점은 얽매인 데 있으니, 얽매였다는 것은 곧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것이다. 한 구절 한 글자라도 근원을 추적하고 그 우의(寓意)를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세밀한 것이다. 하지만 작자가 이렇게 쓴 것은 의도한 대로 써 낸 것도 있지만 한편 모두 다 의도한 대로 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일까?(聖嘆之評《西廂》, 其長在密, 其短在拘, 拘卽密之已甚者也.無一句一字不逆溯其源, 而求命意之所在, 是則密矣, 然亦知作者于此, 有出于有心, 有不必盡出于有心者乎?)”[《한정우기(閑情偶寄)》 <사곡부(詞曲部)> <전사여론(塡詞餘論)>]
진성탄이 평술한 《서상기》는 정절이 단일하고 결구가 근엄한 희곡 작품을 추구했다. 이러한 평술은 오히려 이러한 폐단이 있게 마련인데, 장주포가 평한 것은 파노라마식으로 현실 생활을 묘사한 세정소설이라 그 가운데 드러나는 주관적인 억단과 견강부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당연하게도 장주포가 평점한 《금병매》 역시 이론적으로 창의적인 견해가 자못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당대의 학자들 논의가 비교적 많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겠다.
장주포가 평한 《금병매》는 그 당시 영향이 매우 컸다. 장다오위안(張道淵)의 <중형 주포 전(仲兄竹坡傳)>의 기록에 의하면 장주포는 《금병매》를 평점한 다음해에 원고를 갖고 난징에 갔는데, “원근에서 구매하고자 해 [그의] 재주와 명성이 더욱 떨쳤다. 사방의 명사들이 난징에 와서 날마다 방문한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遠近購求, 才名益振, 四方名士之來白下者, 日訪以數十計.)” 그리고 강희 이후에 장주포 평본은 기본적으로 《금병매사화》와 《신각수상비평금병매》를 대신해서 사회적으로 유통되어 지금까지도 《금병매》의 통행본이 되었다.
‘사대기서’는 백여 년의 평점 역사를 거치면서 강희제 후기에 장주포 평 《금병매》가 나온 뒤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여러 평본에 대한 사람들의 취사선택 역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류팅지(劉廷璣)의 일단의 평술이 대표적이라 할 만한데, 통속소설에 대해 독특하면서도 자못 풍부한 감식안을 갖고 있던 이 관료 문인은 ‘사대기서’의 평점에 대해 뛰어나게 분석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수호전》의 경우] 진성탄은 구두와 단락을 나누되, 각각의 부분에 대한 평을 하는 동시 총평을 진행해, 서로 다른 모양의 꽃이 모이고 비단이 쌓인 것 같은 문장을 이루어냈고, 량산보(梁山泊)를 하나의 꿈으로 끝맺어, 사족을 붙이지 않았으니, 절묘하게 가지를 쳐냈다고 할 수 있다.([《水滸傳》]金聖歎加以句讀字斷, 分評總批, 覺成異樣花團錦簇文字, 以梁山泊一夢結局, 不添蛇足, 深得剪裁之妙.)”
“[《삼국연의》의 경우] 항융녠(杭永年)은 진성탄의 필치를 모방해 비(批)했으니, 효빈에 속하는 것 듯하지만, 또한 새로운 경지를 연 부분이 있다.[《三國演義》](杭永年一仿聖嘆筆意批之, 似屬效顰, 然亦有開生面處,)”
“[《서유기》의 경우] 이에 왕단이(汪憺漪)는 [비유컨대] 그로부터 미인을 묘사하되 시스(西施)를 거슬렀고, 그가 비평을 가한 곳은 대부분 피상적인 것만 더듬거렸으니, 책을 꿰뚫고 있는 태극, 무극을 어찌 한 마디 말로 설파할 수 있겠는가?[《西遊記》](乃汪憺漪從而刻畵美人, 唐突西子, 其批注處大半摸索皮毛, 卽通書之太極無極, 何能一語道破耶?)”
“[《금병매》의 경우] 펑청의 장주포는 우선 그 대강을 총괄하고, 다음에는 단락을 따라가며 주를 달고 비점을 가하여, 진성탄을 뒤따라 이었으니, 그 징벌과 권계가 일목요연해졌다.[《金甁梅》](彭城張竹坡爲之先總大綱, 次則逐段分注批點, 可以繼武聖嘆, 是懲是勸, 一目了然.)”[류팅지(劉廷璣), 《재원잡지(在園雜志)》]
류팅지의 이러한 평술은 총결적인 성질을 띠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사대기서’ 평점본이 상시에 유행한 상황을 개괄하고 있으며, 이들 평점본이 후대에 유포되는 추세를 자못 선견지명을 갖고 예시하고 있다. 강희 이후에는 진성탄과 마오쭝강, 장주포 3가의 평점이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고, 《서유기》 평점은 《서유증도서》의 기초 위에 평점의 붐이 한 차례 일어났다.
명말청초의 소설평점 중에서는 진성탄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의 평점으로 말미암아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이 빛을 잃었고, 그의 영향 하에 소설평점의 명저가 잇달아 나왔으며, 평점의 기풍이 정점에 달했다. 그래서 명 천계 연간에서 청 강희 연간에 이르기까지 소설평점은 백년 동안 볼 만한 광경을 이루어냈으니, 이것은 소설평점사상 가장 풍성한 백년이었고, 중국 고대소설평점의 황금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