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3 한무제漢武帝 1

한무제漢武帝

1. 봉건공사법(封建貢士法)은 군현제 세상에서는 시행할 수 없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제후들과 군수(郡守)가 매년 두 명씩 공사(貢士)를 추천하도록 하여 현량한 인재를 추천한 이에게 상을 내리고, 못난 자를 추천한 이에게는 벌을 내리라고 청했다. 그는 이것이 삼대에 향리(鄕里)에서 인재를 추천하던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론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정치에서 염려해야 할 점은 옛사람이 성공한 정책을 듣고 좋아하여 그 깊은 뜻을 자세히 살피고 시의(時宜)에 맞는지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일단 시험해 보고, 부적합하다고 판명되면 또 그것을 위해 법령을 만들어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법령이 어지러워지고 많은 폐단이 생기기 마련인지라 옛날의 도리가 결국 천하에서 멸절되고 만다.

군현제는 봉건제와 다르니, 마치 갖옷과 갈포(葛袍)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옛날 향학(鄕學)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인재를 선발해 빈례(賓禮)로 우대하여 국학(國學)에 들어가게 했으며, 공사는 오직 향대부(鄕大夫)만이 선발하도록 했으니, 봉건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주나라의 제도에서 육경(六卿)의 장관은 제후가 재상으로 임명되지 않는 한 주공과 소공(召公), 필공(畢公), 영공(榮公), 모공(毛公), 유공(劉公), 윤공(尹公), 선공(單公)만이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에서 추천한 인재들의 지위는 하대부(下大夫)에 그쳤으니, 각 지역에서 인재를 두 명씩 선발해 경사로 보내더라도 재능은 있으나 지위가 미천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경기는 사방 천 리지만 제후의 봉토는 더욱 좁았다. 땅은 좁고 세력은 가까이 있으니 향당(鄕黨)의 옳고 그름과 잘잘못은 금방 조정에 알려졌다. 쉽게 알고 발견할 수 있는 인재에게 백성들 사이의 말단 관리가 할 수 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맡기면 우열이 뚜렷이 드러나는 데에 비해 공적과 죄과는 아주 작다. 빈례로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그저 군주가 인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일 뿐, 모든 사직과 백성의 안위와 생사를 그렇게 천거된 인재에게 맡기는 것은 아니다.

군현제가 시행되는 세상에서는 중국 전체를 한 명의 군주가 다스린다. 멀리 떨어진 군과 제후국은 경사에서 거리가 수천 리나 된다. 군수는 3년 동안 그 지역을 다스리면 승진할 수 있다.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뇌물이 오가더라도 거리낄 게 없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면 현량한 사람이라도 그저 민간에 떠도는 얘기나 채집하고, 알현해야 할 높은 인사와 알게 되는 정도일 뿐 홀로 숨어 있는 탁월한 이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날 수는 없다. 또 나라에는 대대로 세습되는 경(卿)이 없고, 조정에는 고정된 지위가 없으니, 천하에 명성이 알려진 인재라면 짧은 기간 내에 승진하여 결국 군주가 수족처럼 여기는 심복에게 맡기는 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 한 차례 천거를 통해 곧바로 망외의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 교만하고 위선적인 인사들이 어찌 온갖 속임수와 매수를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군수가 하루아침에 그를 알아봐 준다면, 성실과 위선이 너무 뒤섞여 버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상벌을 내리는 법을 제정하여 관리들이 신중하게 살피도록 감독한다지만, 신중히 살핀다는 것을 또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명철하다고 하는데, 이는 요임금도 어려워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치수(治水)에 실패한 곤(鯀)이 처형되었을 때 다들 다시 시험해서 괜찮은 결과를 내면 죄를 묻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태어날 때 고향이 다르고, 공부할 때 스승이 다르고, 고상한 행실의 부화(浮華)함과 실질(實質), 효성과 우정의 진실성과 허위성은 모두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관찰하지 않고 우연히 하루 만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형벌과 상을 시행한다면 포상은 남발되고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이들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훌륭한 요임금도 어려워했던 일을 중간 정도의 평범한 재능을 가진 이에게 문책한다면 누가 문책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런 폐단은 늘 아첨하고 문제점에 대해 함구하며 몸을 사리기에 급급하면서, 공적은 세우지 못하더라도 그저 과실을 저지르지 않고 요행으로 벼슬을 유지하려는 자들을 즐겨 임용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심지어 천거한 자와 서로 보호해 주어서 문제를 적발한 사람이 쥐 잡으려다 항아리 깰까 염려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열악한 재주를 가진 자들이 승승장구하고, 간사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재앙을 피해 숨을 구멍을 파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나는 한 고을에서 인물을 품평하는 ‘월단평(月旦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았지만 천하에 공론(公論)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 고을에서 칭송하게 되면 그래도 향원(鄕願)이 있게 되지만, 천하가 칭송하면 먼저 위선적인 가짜 인사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므로 봉건 제후와 향리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방법은 군현제의 천하에서는 시행할 수 없다. 《주역》에서는 “변통하려면 시대를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삼대 시기의 군주가 설마 육국과 강력한 진나라 이후 조정과 재야의 형세를 미리 알고 만 년 동안 유지될 제도를 미리 제정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나중에 한나라가 정말 그것을 시행했으나 공익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거는 당파가 결성되는 재앙을 초래했고, 당·송 시대에 이르러서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신에게 현량한 인재를 천거할 책임을 지우고, 그것을 통해 각 분야의 과목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에게 반드시 천거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천거 결과에 따라 상벌을 시행한다면 이는 임시방편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으니 고집할 바가 아니다.

봉건과 학교, 향리의 천거라는 세 가지는 한꺼번에 시행하여 서로 보조하도록 해야 하는데, 어느 하나만 시행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인재를 임용하여 오늘날의 일을 맡기려 한다면 옛날의 제도에서 더하고 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중서는 이렇게 말했다.

“삼대의 왕들이 이룬 전성기의 모습은 쉽게 이룰 수 있고, 요·순의 명성도 따라잡을 수 있다.”

이것이 어찌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인가!

2. 동중서는 육예(六藝)와 공자의 학술만으로 인재를 선발하고자 했다

향리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방법은 태학(太學)과 서로 날줄과 씨줄의 관계를 이루나니, 향리에서 천거한 인재는 모두 향교(鄕校)에서 교육한 이들이었다. 학교 교육이 수십 년 동안 시행되었기 때문에 향리의 천거도 그에 따라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명분에 합당하지 않은 이를 천거하면 벌을 주는데, 이것은 잘못 가르친 것을 처벌하는 것이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동중서는 황제에게 올린 책문(策文)에서 가장 먼저 태학을 중시했으니, 그가 근본이 무엇인지는 알았다고 하겠다. 태학을 중시하지 않고 군과 제후국에만 학교를 세우고 나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인재를 천거했다고 문책한다면 잘못된 일이다.

천하를 경영하여 올바른 정권으로 귀속시키려면 반드시 똑같은 조리가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관철되어야 하는데, 잡다하게 뒤섞이면 설령 선왕의 행적을 규범으로 삼아 따르려 해도 진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오직 똑같은 조리를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관철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경영하고, 또 선왕의 깊은 뜻[精義]을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여 이용해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다. 동중서는 책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육예(六藝) 과목과 공자의 학술이 아닌 것은 모두 그 맥을 끊어야 하옵니다.不在六藝之科、孔子之述者, 皆絶其道.

이것이 삼대의 법은 아니지만 삼대의 깊은 뜻은 남아 있다. 왜냐? 육예 과목과 공자의 학술은 삼대의 정수를 합쳐서 거기에 숨겨진 오묘한 뜻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안석은 경의(經義)로 인재를 선발했으니, 바로 동중서의 뒤를 따라서 그 주장을 실천에 옮긴 것이며, 이것은 천 년을 바뀜 없이 시행해도 된다. 왕안석의 경학은 순수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순수함을 금할 수는 없었고, 그래도 후세에 경학을 비난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금지할 수는 있었다. 철종(哲宗)의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폐지할 때 경의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도 없애 버렸으니, 변통을 몰랐기 때문이다. 온체인(溫體仁)은 보천법(保薦法)을 시행해 인재 선발 체제를 어지럽히고 무과(武科)를 중시하여 대항했고, 양사창(楊嗣昌)은 사숙(私塾)을 설립하여 뒤섞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사인(士人)의 기개는 구차해지고 간사한 백성이 활개 쳐서 백성의 재앙이 극에 이르렀다. 이들은 모두 동중서에게 죄를 지은 자들이니, 아물며 공자에게는 어떤 존재이겠는가! 차림새만 학자처럼 꾸미고 내실이 없는 이들은 그들의 교육을 담당한 이들의 잘못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거침없이 화려한 말만 늘어놓으면서 뇌물로 환심을 사려는 악습에 젖은 채 기회를 엿보아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이나 이득을 챙기려는 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지 않은가? 경서는 구두점을 찍으며 읽을 줄 알아도 그 뜻은 대충 안다면 비록 소인이라 할지라도 밤공기에 맺힌 이슬이나마 마음을 적셔 교양을 늘릴 수 있으니, 가르침의 효과도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