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변천 1

무엇보다 다음의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중국 고대소설이 문언소설과 통속소설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부문을 형성한 이래로, 소설평점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문언소설인 《세설신어》에 대한 류천웡(劉辰翁)의 평점을 그 시조로 하고 있고, 청대 [대표적인 문언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도 역시 몇 가지 평점이 있긴 하지만, 주로 통속소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명청 양대의 문언소설은 이미 전체적으로 통속소설과 겨룰 힘이 없었고, 그 수량과 질에 있어서도 모두 통속소설에 훨씬 못 미쳤다. 동시에 소설평점은 명 만력 연간에 그 싹을 틔웠을 즈음에 이미 명백하게 상업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 통속소설의 유포 과정에서 일종의 ‘판매를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소설 부문이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일정 정도 소설평점의 존재 근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에 의거하면, 통속소설이 평점자의 광범위한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방면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로 소설평점이 어떻게 문언소설이 되살아난 명초에 움트지 않고 통속소설이 점차 흥기한 만력 시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점을 증명해주고 있다. 소설평점은 경학과 역사 주석 등의 주석학 전통을 계승했고, 또 시문평점의 영향하에 명 만력 연간에 싹이 텄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 3백 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으며 금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소설 비평의 영역을 벗어나 고대 소설의 전파와 창작에 모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고대 소설평점의 발전 역사를 종으로 바라보자면, 대체로 네 개의 시기를 획분할 수 있다. 명 만력 연간은 소설평점이 싹을 틔운 단계이고, 명말청초는 소설평점이 가장 번성한 단계이며, 청 중엽 이후는 소설평점의 ‘열기’가 하강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평온하게 발전했던 단계이고, 청말은 소설평점의 여파(餘波)로 평점의 함의에 있어 ‘전변’의 태세를 드러냈던 단계이다.

1) 만력 소설평점의 대세

  우리가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을 하나의 단계로 삼아 서술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려에 바탕한 것이다. 만력 시기는 중국 고대의 소설평점의 기원으로 소설평점의 발전에 자못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소설평점이 후대의 소설 이론비평과 소설의 유포에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게 된 까닭은 만력 시기의 소설평점이 문인 참여와 평점의 상업화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만력 시기의 소설평점은 또 상대적으로 완전한 단계였다. 한편으로 평점은 만력 시기부터 소설 영역에 인입되어 자못 흥성한 국면을 형성했는데, 이것은 고대 통속소설의 발전과 기본적으로 보조를 맞춘 것이다. 만약 만력 시기가 통속소설이 흥성하게 된 시점이라고 말한다면 이 시기는 마찬가지로 소설평점이 터를 잡은 단계이기도 하다. 동시에 만력 연간은 또 소설평점의 형태가 틀을 갖춘 시기였다. 그리하여 소설평점의 형태적인 특성과 종지(宗旨), 목적 등의 방면에서 모두 점차적으로 안정을 찾아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설평점은 만력 연간에 싹을 틔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만력 20년(1592년) 경에 시작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은 단지 27~8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듯 짧은 이십 여 년의 시간 동안 소설평점이 흥성했던 것이다. 완전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 시기에 출판된 소설 평본은 대략 20종으로 가정 이래 출판된 소설의 삼분의 일이 조금 넘는다.

  만력 20년(1592년) 경은 중국 소설평점 역사상 자못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소설사와 소설평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이 소설 방면의 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바로 유명한 문인인 리줘우(李卓吾)와 유명한 서방(書坊) 주인인 위샹더우(余象斗)이다.[위안샤오슈(袁小修),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과 위샹더우, 《신침주장원운창휘집백대가평주사기품수(新鋟朱狀元芸窓滙輯百大家評注史記品粹)》 <자서>]. 이 두 중요 인물은 동시에 소설평점 활동을 개시했는데, 우리에게 중국 소설평점의 두 가지 기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곧 서방(書坊) 주인이 주체가 된 소설평점의 상업성과 문인이 주체가 된 소설평점의 자기만족성이다. 소설평점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주요한 추세에 따라 발전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갖고 이야기하자면, 만력 연간의 소설평점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작품은 만력 19년(1591년)에 간행된 완췐러우(萬卷樓) 간본 《삼국지통속연의》이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지어(識語)>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이 책에서는 권점과 음주(音注), 석의(釋義)[1], 고증과 보주(補注) 등 다섯 가지 항목의 작업을 교정했다고 한다. 그 형식은 모두 쌍행의 협주(夾注)로 이루어졌는데, 본문 중 표식이 있는 비주(批注) 형식으로는 ‘석의(釋義)’, ‘보유(補遺)’, ‘고증(考證)’, ‘음석(音釋)’, ‘논왈(論曰)’, ‘보주(補注)’, ‘단론(斷論)’ 등 몇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비교적 단순한 주석이지만 뒤의 네 가지는 이미 평론적인 성질이 풍부했는데, 이를테면 “주거량이 보왕에서 둔전을 불태우다(諸葛亮博望燒屯)”라는 대목에서 쉬수(徐庶)는 쿵밍(孔明)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가 반딧불이라면, 그는 휘엉청 밝은 달과 같이 밝으니 내 어찌 그에 비할 수 있으리오(某乃螢火之光, 他如皓月之明, 庶安能比哉!)” 이에 대한 보주에서는 “이것은 쉬수가 군사들을 미혹하게 만든 계책이다(此是徐庶惑軍之計也)”라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비록 ‘평점’이라는 글자를 드러내놓고 쓰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평점의 성격을 갖고 있어, 소설 간본이 주본(注本)에서 평본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일 년이 지난 뒤 위샹더우는 《신각안감전상비평삼국지전(新刻按鑒全像批評三國志傳)》을 간행하면서 처음으로 ‘비평’이라는 글자를 드러내 놓고 썼다. 또 ‘전상(全像)’과 병렬로 내세웠는데, ‘전상’과 ‘비평’은 만력 이래 소설 간행의 두 가지 중요한 구성 성분이었으며, 그 목적은 소설의 유포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전서의 본문 페이지는 종으로 상평(上評), 중도(中圖), 하문(下文)의 세 칸으로 나뉘었는데, 이것은 위 씨가 간행한 소설의 특수한 형태로 이른바 ‘평림(評林)’의 체재였다.

  2년 뒤 위 씨는 다시 《수호지전평림(水滸志傳評林)》을 간행했다. 이 책의 외부 형태는 앞의 책과 똑같았으니, 아래의 세 가지 기본적인 특색을 만들어냈다. 우선 위 씨는 원서를 고의로 삭제하고 고쳤는데, 주로 본문 가운데 잘못된 부분과 ‘읽기에 불편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위 씨는 원서의 상단에 평어를 첨가해 《수호전》에 대한 감상평을 했다. 마지막으로 위 씨는 원서 가운데 “운이 맞지 않는 시사”를 삭제했는데, 다만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그것을 상층부에 그대로 두고 특별히 표시를 해두었다. 이것으로 위샹더우의 ‘평림’이 ‘고치고’ ‘평한 것’을 하나로 융합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고대 소설평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소설사에서 평점이 고대 소설 창작의 발전 과정에 어느 정도 개입하고 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으로 인해 소설 평본은 소설 비평 저작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발전하는 가운데 판본으로서의 가치가 생기게 했다. 위 씨의 《수호지전평림》은 이론 비평이라는 입장에서 보아도 자못 특색이 있다. 이 책의 평점은 모두 미비로 윗칸에 위치하는데, 매 칙의 비문에는 모두 “쑹쟝을 평함(評宋江)”, “리쿠이를 평함(評李逵)”, “시 구절을 평함(評詩句)” 등과 같은 표제가 달려 있어 매 회의 국부적인 내용을 장악하고 그것을 드러내 밝힌 뒤 평하고 판단을 내렸다.

  완췐러우(萬卷樓) 본 《삼국지전통속연의》에서 솽펑탕(雙峰堂) 본 《수호지진평림》에 이르는 동안 소설평점은 차근차근히 주석에서 평론으로 넘어갔다. 다만 위샹더우는 결국 서방(書坊)주인의 신분으로 소설평점에 종사했기에, 자신의 예술적 소양과 상업성의 제약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평점 이론의 품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소설평점은 그 자체의 이론 생명을 펼쳐나가면서 발전해야 했기에 비교적 높은 자질을 갖춘 문인의 참여가 기대되었다. 이때 리줘우가 《수호전》에 심취해 비점을 가한 것은 소설평점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리줘우 평점 《수호전》은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 책을 접한 것은 대략 만력 16년(1588년)이었다. “《수호전》이라는 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별 생각 없이 그것을 얻고자 하여 다행히도 그것을 기증 받았는데, 비록 원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聞有《水滸傳》, 無念欲之, 幸寄與之, 雖非原本亦可.)”[리줘우, 《리원링 집(李溫陵集)》 4권 <복초약후(復焦弱侯)>] 4년 뒤 위안샤오슈(袁小修)가 리줘우를 방문했을 때, “바야흐로 승려인 창즈에게 명해 이 책을 필사하라 명하여, 글자에 따라 비점을 하고 있었다(正命僧常志抄寫此書, 逐字批點).”[위안중도(袁中道), 《유거시록(游居柿錄)》 9권] 또 4년 뒤에도 리줘우는 여전히 《수호전》의 감상평을 쓰는 데 빠져 있었는데, “《수호전》의 비점도 사람을 무척 상쾌하게 만들지만, 《서상기》와 《비파기》의 가필과 수정 작업은 더한층 오묘합니다[2](《水滸傳》批點得甚快活人, 《西廂》, 《琵琶》涂抹改竄得更妙.)”[리줘우, 《속분서(續焚書)》 1권 <여초약후(與焦弱侯)>]라고 하였다. 한 편의 작품을 두고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평점을 가한 것으로 그의 평점이 어떤 공명심이나 이익을 도모해서가 아니고 자기만족의 차원에서 행한 예술 감상 활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문인들이 통속소설을 평점한 최초의 동기였다. 리줘우는 만력 30년에 옥에서 자결했는데, 그가 평점한 작품은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다. 이것은 이후의 소설평점 역사에서 최대의 의문으로 남았다.

  초기의 소설평점자로서 리워우와 위샹더우는 소설평점에 문인 참여와 서방 주인의 통제라고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틀을 확립했다. 동시에 그들은 평점 대상을 골라 선택하는 데에도 비교적 특색이 있었다. 곧 《삼국연의》와 《수호전》이라고 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오면서 지명도가 상당히 있는 작품을 평점했다는 것인데, 새롭게 창작된 소설로 평점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 까닭은 문인의 측면에서는 그들이 작품을 선택할 때의 까탈스러움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고, 서방 주인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상업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시는 결국 소설평점이 시작되던 시기였기에, 모종의 시험적인 성질을 띠고 있어 그들로서는 소설의 전파에 유리한 지 여부는 아직까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미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판로가 괜찮은 작품을 선택해 평점으로 삼는 것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전했던 것이다. 그 뒤 소설평점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사회가 그것을 점차 받아들임으로써, 소설평점은 이러한 국면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만력 30년 경에서 만력 48년에 이르는 동안 《삼국연의》가 계속적으로 간행되고 리줘우 평본 《수호전》이 공개적으로 출판된 것 이외에 이 10여 년 동안 출판된 소설 평본은 거의 대부분이 새롭게 창작된 소설들이었다. 완전한 통계는 아니지만, 이 시기에 새롭게 창작된 소설의 평본은 《삼교개미귀정연의(三敎開迷歸正演義)》, 《정파주첩전통속연의(征播奏捷傳通俗演義)》, 《양한개국중흥전지(兩漢開國中興傳志)》, 《열국전편십이조전(列國前編十二朝傳)》, 《동서양진지전(東西兩晉志傳)》, 《춘추열국지전(春秋列國志傳)》,  《수당양조사전(隋唐兩朝史傳)》, 《편벽열국지(片璧列國志)》, 《전한지전(全漢志傳)》, 《수탑야사(繡榻野史)》 등 1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삼교개미귀정연의》와 《수탑야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역사연의소설이다. 그리고 평점자의 신분 역시 여전히 서방 주인 위주다. 특히 주의해 볼 만한 것은 평점이 이미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에, 유명인사의 이름을 도용한 평점 역시 나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춘추열국지전》은 천지루(陳繼儒)의 이름을 도용했고, 《수탑야사》는 리줘우를 도용했으며, 《편벽열국지》 역시 “리줘우 선생 평열(李卓吾先生評閱)”이라 서(署)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평어도 없었다. 이러한 풍조가 성행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소설평점이 여전히 서방 주인의 손안에 장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상술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평점의 소설 자체에 대해 그다지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기 않았기에, 이 시기의 소설평점은 ‘룽위탕(容與堂)’과 ‘위안우야(袁無涯) 본’ 《수호전》을 제외하고는 모든 평점 이론의 성취가 높지 않았고, 평점의 주요 내용은 여전히 ‘주석’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테면, 《열국전편십이조전》은 매 회 말에 각각 ‘석의(釋疑)’, ‘지고(地考)’, ‘평단(評斷)’, ‘부기(附記)’, ‘답변(答辯)’ 등의 명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런 비주(批注) 문장은 수량은 비록 많았지만, 문학 비평과는 거의 무관한 것들이었다.


[1] 【옮긴이 주】석의(釋義)는 우리말로 ‘뜻 풀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구 학문의 세례를 받은 중국의 경우에도 이것은 서구의 ‘hermeneutics, 解釋學)를 염두에 둔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해석‘이라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나, 이렇게 할 경우 다른 용어들 역시 마찬가지 수준에서 손을 보아야 할 것이므로, 잠정적으로 ’석의‘라 번역하고자 한다.

[2] 【옮긴이 주】번역문은 김혜경 역 《속분서》(한길사, 2007년), 144쪽을 참고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