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설 평점 탄생의 기본 조건
소설 평점의 탄생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조건이 있다.
하나는 소설창작과 전파의 상대적인 번성이다. 가정(嘉靖) 원년(1522년)에 《삼국연의》가 장기간 초본(抄本)의 형태로 전해오던 형식을 끝내고 공개적으로 출판된 뒤, 통속소설의 창작과 유포는 새로운 역사시기로 접어들었다. 그 뒤로 오래지 않아 똑같이 명초에 나온 《수호전》 등이 출간되었다. ‘초본’에서 벗어나 간행되었다는 것은 고대 소설의 전파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이것은 소설의 영향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소설 창작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가정 원년에서 만력 48년(1620년)에 이르는 근 백년 동안 통속소설의 창작은 점차 흥성해 오다가 평온한 발전기를 맞았다. 현존하는 자료에 근거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에 통속소설이 모두 5, 60 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그리 큰 숫자는 아니지만, 통속소설의 초창기임을 감안하면, 이미 가볍게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시기에 고대 통속소설의 네 가지 기본 적인 유형, 곧 ‘역사연의소설(歷史演義小說)’, ‘영웅전기소설(英雄傳奇小說)’, ‘신마소설(神魔小說)’, 그리고 ‘세정소설(世情小說)’이 모두 완비되었다. 곧 각각의 유형을 대표하는 불후의 작품들인 《삼국연의》, 《수호전》, 《금병매》와 《서유기》가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사대기서(四大奇書)’라 불렸던 이 네 작품은 당시와 그 이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이 소설들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소설의 발전과 독자의 소설에 대한 수용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의심할 바 없이 소설 평점이 일어나는 데에도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 시기의 소설 창작자로 소수의 문인 이외에도 비교적 많은 서점 주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소설의 창작과 전파가 촉진되었고, 동시에 소설의 창작은 매우 큰 수준에서 상업화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이 백년 간의 소설사에서 우리는 이렇듯 생각해 볼 만한 몇 가지 현상을 어렵지 않게 지켜볼 수 있다. 곧 이 백년 간의 소설 창작 중에서 ‘사대기서’는 독립적인 것으로 특기할 만하고, 나머지 창작 성취는 그다지 볼 만한 게 없다. 그리고 통속소설의 네 가지 기본 유형 가운데 이미 있는 제재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은 연의소설과 신마소설이 가장 발달했고, 상대적으로 개별 작품의 창조적인 성격이 비교적 강한 영웅전기와 세정소설의 창작은 비교적 적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웅전기의 경우는 《수호전》이 “서점가에서 잇달아서” 끊임없이 간행되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유사한 것으로 《양가장통속연의(楊家將通俗演義)》, 《위사오바오췌충전전(于少保萃忠全傳)》 등 몇 부의 역사적인 함의가 비교적 강한 작품이 있었고, 세정소설의 경우는 《여의군전(如意君傳)》과 《수탑야사(繡榻野史)》 등 전적으로 외설적인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을 제외하면 《금병매》가 거의 독보적이다. 이런 현상이 형성됨으로 해서 우리는 이 시기 소설 창작의 상업적인 특징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당시 소설 창작의 기본적인 특성이자, 평점이 소설 전파의 상업적 수단으로 일어나게 된 중요한 전제가 된다.
다음으로 소설 평점이 만력 연간에 싹튼 것과 이 시기 문인들이 통속소설에 대해 점차 주목하게 된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의 비평 형태가 싹트고 발전하는 데에는 문인들의 참여가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이런 비평 형태가 시종 민간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진정으로 예술이론비평의 전당에 오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만력에 이르는 시기에 소설평점의 문인 참여에는 어떤 외부 환경적 요소가 작용했는가?
가정 이래로 통속소설이 문인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했는데, 읽고 감상하는 동안 사람들의 소설에 대한 인식이 명백하게 제고되었으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두드러진 언행은 소설의 지위를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위안훙다오(袁宏道)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해학적인 문장을 잘 지었고, 《골계전》에 깊이 탐닉하였다. 뒤에 《수호전》을 읽었는데 문장이 더욱 기발하고 변화무쌍하였다. 《육경》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쓰마쳰은 그보다 더 못하다.(少年工諧謔, 頗溺《滑稽傳》. 後來讀《水滸》, 文字益奇變. 六經非至文, 馬遷失組練[1]).”[위안훙다오, <청이생설수호(聽李生說水滸)>, 《위안훙다오 집(袁宏道集)》 <해탈집(解脫集)>] 그리고 리줘우(李卓吾)는 《수호전》을 ‘고금의 지극한 문장’이라 칭해 사람들이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소설의 지위에 대한 고취로 말미암아 의심할 바 없이 문인들이 관념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무런 장애 없이 소설평점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종의 서사문학으로서 소설은 그 독특한 서사 방법이 가정 이래로 문인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정사의 서사법과 비교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점차 우수한 소설의 경우 서사 방법에 있어 차용해 쓸 만큼 훌륭한 부분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정 때의 리카이셴(李開先)은 《일소산(一笑散)》 <시조(時調)>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수호전》에는 억울함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되, 혈맥이 관통하는 것이 《사기》 이래로는 이 책뿐이다. 또 고래로 한 가지 사건으로 이십 책이나 되는 분량을 엮은 것이 없었으니, 만약 이 책이 간사한 도적들이 거짓과 위선을 행하는 것을 병폐로 여긴다면, 이는 서사의 방법과 역사를 배우는 묘미를 모르는 것이다.(《水滸傳》委屈詳盡, 血脈貫通, 《史記》而下, 便是此書. 且古來更無有一事而二十冊者, 倘以奸盜詐僞病之, 不知序事之法, 學史之妙者也).
후잉링(胡應麟)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담긴 의미는 창졸간에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세상 사람들은 단지 그 묘사의 곡진함만을 알 뿐이다. 108인을 안배함에 있어서는 인물의 비중에 따라 경중을 달리하여 묘사한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중간에 포폄褒貶의 대조나 두둔하고 칭송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로 언어의 겉으로 드러난 뜻을 뛰어넘는 바가 있다.(第此書中間用意, 非倉卒可窺, 世但知其形容曲盡而已.至其排比一百八人, 分量重輕, 纖毫不爽, 而中間抑揚映帶, 回護咏嘆之工, 眞有超出語言之外者.)[후잉린,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 41권 <장악위담(莊岳委談)>]
[여기서] 소설의 서사 법칙과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데 주의한 것은 하나의 독특한 예술품으로서의 소설을 인식하는 발단이 되었고, 사람들이 소설을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하나의 전제가 되었는데, 이런 인식으로 말미암아 문인들은 소설에 대해 예술 평점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문인들은 소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소설을 즐길 때 소설의 문학적 함의말고도 소설을 감상하는 가운데 [작품이] 자신의 감정과 부합할 것을 요구했다. 위안훙다오는 《금병매》가 “구름과 안개가 지면에 가득한 것이 메이청의 <칠발>보다 훨씬 낫다(雲霞滿紙, 勝于枚乘<七發>多矣)”고 찬미했다.[위안훙다오, <둥쓰바이에게 보낸 편지(與董思白書)>, 《위안훙다오 집(袁宏道集)》 <금범집(錦帆集)>] 그가 <칠발>을 취해서 비교 대상으로 삼아 《금병매》가 <칠발>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한 것을 가만히 되새겨 보면, 위안훙다오는 <칠발>같은 작품이 사회와 인생에 대해 투철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던 것처럼 《금병매》에서도 그런 정신을 읽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리줘우(李卓吾)가 《수호전》을 읽고 평점을 가한 것 역시 그가 《수호전》의 정감의 핵심 가운데서 모종의 심리와 정감이 들어맞는 것을 간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인이 어떤 의도를 갖고 소설을 선택함으로써 문인과 민중의 소설 감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고, 동시에 이것은 중국 소설평점이 상업 평점과 문인 평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별개로 소설평점의 탄생은 소설 ‘시장’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명 중엽과 말기의 소설평점의 탄생과 발전은 소설이 상업화된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1] 【옮긴이 주】원문의 마천(馬遷)은 쓰마쳰(司馬遷)이다. 조련(組練)은 “갑옷과 투구(組甲被練)”의 약칭이다. 고대에 군인들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인데, 무장한 군대를 가리키는 뜻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여기에서 “실조련(失組練)”은 서로 비교해보았을 때, 뛰어나지 못하다는 뜻이다.
중국 고대소설 평점 간론 – 소설평점의 연원 3
3) 소설 평점 탄생의 기본 조건
소설 평점의 탄생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조건이 있다.
하나는 소설창작과 전파의 상대적인 번성이다. 가정(嘉靖) 원년(1522년)에 《삼국연의》가 장기간 초본(抄本)의 형태로 전해오던 형식을 끝내고 공개적으로 출판된 뒤, 통속소설의 창작과 유포는 새로운 역사시기로 접어들었다. 그 뒤로 오래지 않아 똑같이 명초에 나온 《수호전》 등이 출간되었다. ‘초본’에서 벗어나 간행되었다는 것은 고대 소설의 전파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이것은 소설의 영향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소설 창작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가정 원년에서 만력 48년(1620년)에 이르는 근 백년 동안 통속소설의 창작은 점차 흥성해 오다가 평온한 발전기를 맞았다. 현존하는 자료에 근거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에 통속소설이 모두 5, 60 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그리 큰 숫자는 아니지만, 통속소설의 초창기임을 감안하면, 이미 가볍게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시기에 고대 통속소설의 네 가지 기본 적인 유형, 곧 ‘역사연의소설(歷史演義小說)’, ‘영웅전기소설(英雄傳奇小說)’, ‘신마소설(神魔小說)’, 그리고 ‘세정소설(世情小說)’이 모두 완비되었다. 곧 각각의 유형을 대표하는 불후의 작품들인 《삼국연의》, 《수호전》, 《금병매》와 《서유기》가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사대기서(四大奇書)’라 불렸던 이 네 작품은 당시와 그 이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이 소설들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소설의 발전과 독자의 소설에 대한 수용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의심할 바 없이 소설 평점이 일어나는 데에도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주의할 것은 이 시기의 소설 창작자로 소수의 문인 이외에도 비교적 많은 서점 주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소설의 창작과 전파가 촉진되었고, 동시에 소설의 창작은 매우 큰 수준에서 상업화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이 백년 간의 소설사에서 우리는 이렇듯 생각해 볼 만한 몇 가지 현상을 어렵지 않게 지켜볼 수 있다. 곧 이 백년 간의 소설 창작 중에서 ‘사대기서’는 독립적인 것으로 특기할 만하고, 나머지 창작 성취는 그다지 볼 만한 게 없다. 그리고 통속소설의 네 가지 기본 유형 가운데 이미 있는 제재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은 연의소설과 신마소설이 가장 발달했고, 상대적으로 개별 작품의 창조적인 성격이 비교적 강한 영웅전기와 세정소설의 창작은 비교적 적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웅전기의 경우는 《수호전》이 “서점가에서 잇달아서” 끊임없이 간행되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유사한 것으로 《양가장통속연의(楊家將通俗演義)》, 《위사오바오췌충전전(于少保萃忠全傳)》 등 몇 부의 역사적인 함의가 비교적 강한 작품이 있었고, 세정소설의 경우는 《여의군전(如意君傳)》과 《수탑야사(繡榻野史)》 등 전적으로 외설적인 내용을 드러내고 있는 소설을 제외하면 《금병매》가 거의 독보적이다. 이런 현상이 형성됨으로 해서 우리는 이 시기 소설 창작의 상업적인 특징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당시 소설 창작의 기본적인 특성이자, 평점이 소설 전파의 상업적 수단으로 일어나게 된 중요한 전제가 된다.
다음으로 소설 평점이 만력 연간에 싹튼 것과 이 시기 문인들이 통속소설에 대해 점차 주목하게 된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의 비평 형태가 싹트고 발전하는 데에는 문인들의 참여가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이런 비평 형태가 시종 민간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진정으로 예술이론비평의 전당에 오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만력에 이르는 시기에 소설평점의 문인 참여에는 어떤 외부 환경적 요소가 작용했는가?
가정 이래로 통속소설이 문인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했는데, 읽고 감상하는 동안 사람들의 소설에 대한 인식이 명백하게 제고되었으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두드러진 언행은 소설의 지위를 고취하기에 충분했다. 위안훙다오(袁宏道)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해학적인 문장을 잘 지었고, 《골계전》에 깊이 탐닉하였다. 뒤에 《수호전》을 읽었는데 문장이 더욱 기발하고 변화무쌍하였다. 《육경》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쓰마쳰은 그보다 더 못하다.(少年工諧謔, 頗溺《滑稽傳》. 後來讀《水滸》, 文字益奇變. 六經非至文, 馬遷失組練[1]).”[위안훙다오, <청이생설수호(聽李生說水滸)>, 《위안훙다오 집(袁宏道集)》 <해탈집(解脫集)>] 그리고 리줘우(李卓吾)는 《수호전》을 ‘고금의 지극한 문장’이라 칭해 사람들이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소설의 지위에 대한 고취로 말미암아 의심할 바 없이 문인들이 관념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무런 장애 없이 소설평점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종의 서사문학으로서 소설은 그 독특한 서사 방법이 가정 이래로 문인들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정사의 서사법과 비교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점차 우수한 소설의 경우 서사 방법에 있어 차용해 쓸 만큼 훌륭한 부분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정 때의 리카이셴(李開先)은 《일소산(一笑散)》 <시조(時調)>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수호전》에는 억울함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되, 혈맥이 관통하는 것이 《사기》 이래로는 이 책뿐이다. 또 고래로 한 가지 사건으로 이십 책이나 되는 분량을 엮은 것이 없었으니, 만약 이 책이 간사한 도적들이 거짓과 위선을 행하는 것을 병폐로 여긴다면, 이는 서사의 방법과 역사를 배우는 묘미를 모르는 것이다.(《水滸傳》委屈詳盡, 血脈貫通, 《史記》而下, 便是此書. 且古來更無有一事而二十冊者, 倘以奸盜詐僞病之, 不知序事之法, 學史之妙者也).
후잉링(胡應麟)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담긴 의미는 창졸간에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세상 사람들은 단지 그 묘사의 곡진함만을 알 뿐이다. 108인을 안배함에 있어서는 인물의 비중에 따라 경중을 달리하여 묘사한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중간에 포폄褒貶의 대조나 두둔하고 칭송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로 언어의 겉으로 드러난 뜻을 뛰어넘는 바가 있다.(第此書中間用意, 非倉卒可窺, 世但知其形容曲盡而已.至其排比一百八人, 分量重輕, 纖毫不爽, 而中間抑揚映帶, 回護咏嘆之工, 眞有超出語言之外者.)[후잉린, 《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 41권 <장악위담(莊岳委談)>]
[여기서] 소설의 서사 법칙과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데 주의한 것은 하나의 독특한 예술품으로서의 소설을 인식하는 발단이 되었고, 사람들이 소설을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하나의 전제가 되었는데, 이런 인식으로 말미암아 문인들은 소설에 대해 예술 평점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문인들은 소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소설을 즐길 때 소설의 문학적 함의말고도 소설을 감상하는 가운데 [작품이] 자신의 감정과 부합할 것을 요구했다. 위안훙다오는 《금병매》가 “구름과 안개가 지면에 가득한 것이 메이청의 <칠발>보다 훨씬 낫다(雲霞滿紙, 勝于枚乘<七發>多矣)”고 찬미했다.[위안훙다오, <둥쓰바이에게 보낸 편지(與董思白書)>, 《위안훙다오 집(袁宏道集)》 <금범집(錦帆集)>] 그가 <칠발>을 취해서 비교 대상으로 삼아 《금병매》가 <칠발>보다 훨씬 낫다고 칭찬한 것을 가만히 되새겨 보면, 위안훙다오는 <칠발>같은 작품이 사회와 인생에 대해 투철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던 것처럼 《금병매》에서도 그런 정신을 읽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리줘우(李卓吾)가 《수호전》을 읽고 평점을 가한 것 역시 그가 《수호전》의 정감의 핵심 가운데서 모종의 심리와 정감이 들어맞는 것을 간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문인이 어떤 의도를 갖고 소설을 선택함으로써 문인과 민중의 소설 감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고, 동시에 이것은 중국 소설평점이 상업 평점과 문인 평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별개로 소설평점의 탄생은 소설 ‘시장’의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심지어 명 중엽과 말기의 소설평점의 탄생과 발전은 소설이 상업화된 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1] 【옮긴이 주】원문의 마천(馬遷)은 쓰마쳰(司馬遷)이다. 조련(組練)은 “갑옷과 투구(組甲被練)”의 약칭이다. 고대에 군인들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인데, 무장한 군대를 가리키는 뜻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여기에서 “실조련(失組練)”은 서로 비교해보았을 때, 뛰어나지 못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