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1981년에 루쉰의 소설집 『납함(吶喊, 외침)』과 『방황(彷徨)』을 완역한 서울대 중문과 출신 번역가 김하중(金河中)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럼 1981년 이전에는 중국어문학 전공자로 루쉰의 소설을 번역한 사람이 없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대 장기근(張基槿), 건국대 성원경(成元慶), 한국외대 허세욱(許世旭) 등이 각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루쉰 소설을 번역해서 실었다. 대체로 1980년대까지는 아직 국내에서 중국 현대문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대접 받지 못했고, 현대문학 전공자도 거의 없었지만 이들의 꾸준한 노력에 힘입어 루쉰 소설 번역이 중단 없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들 중 주목해야 할 사람은 장기근이다. 그는 1974년 범조사(汎潮社)에서 간행한 『세계단편문학전집』 제7권을 『魯迅短篇集(루쉰단편집)』이란 단행본으로 꾸미고 루쉰의 문학작품 21편을 번역해서 실었다. 이 책은 특히 『吶喊(납함)』과 『彷徨(방황)』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 실린 소설을 살펴보면 『吶喊(납함)』 원본이 드디어 한국어로 완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유기석(柳基石)』의 「광인일기」 번역에서 출발하여 무려 47년만에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이 완역되었다. 루쉰의 얇은 소설집이 거의 반세기나 걸려 가까스로 완역되었고, 또 그것이 독립된 형태가 아니라 ‘세계문학전집’에 끼어 마치 업둥이처럼 취급 받게 된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해방 공간, 한국전쟁 등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살벌한 시공간 속에서도 선배 학자와 번역가들은 학문과 문학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장기근은 서울대 중문과 출신으로 같은 기수 차주환과 함께 우리나라 중문학 전공 분야를 개척하고 일으켜 세운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중문학 초기 전공자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장기근도 중문학 내지 중국학 분야의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서울대 교수, 성심여대 교수, 선문대 교수를 지냈다. 중국 현대문학이 아직 독립된 학문으로 대접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장기근은 이 분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루쉰의 『吶喊(납함)』 완역도 그런 폭 넓은 관심의 일환이 아닌가 한다.
장기근이 번역한 『魯迅短篇集(루쉰단편집)』을 읽어보면 바야흐로 현대중국어에 관한 감각이 이전 한문학 전공자와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중국어 직역에 충실하면서도 문학적 표현을 실리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다만 ‘아큐’와 ‘阿Q’를 혼용하는 등 아직 번역 원칙에 관한 세밀함은 다소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학들의 이런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좀 더 치밀한 지금의 번역이 가능했다고 말해야 한다.
또 이 번역집은 2부 제목으로 루쉰의 두 번째 소설집 『彷徨』을 채택했으나 아쉽게도 「축복」과 「고독자」 두 편만 싣고, 그 아래에는 루쉰의 세 번째 소설집 『故事新編(새로 쓴 옛날이야기)』에서 「嫦娥(항아)」, 「고사리」, 「出關(출관)」, 「非攻(비공)」을 뽑아 함께 번역해서 실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제2부 『방황』 제목 아래 실린 루쉰의 작품은 『방황』의 작품보다 『고사신편』의 작품이 더 많은 셈이다. 루쉰의 『고사신편』에는 모두 8편의 단편 역사소설이 실려 있으므로 이 번역집에서 장기근은 그 절반을 번역한 것이다. 그럼 『고사신편』에 실린 루쉰의 소설은 장기근이 이 번역집에서 최초로 번역한 것일까? 역시 그렇지 않다. 이미 1966년 번역가 정성환(鄭成煥)이 『세계수필문학전집』(동서문화사) 제2권에 「非攻(비공)」과 「出關(출관)」을 번역한 적이 있다. 정성환이 「비공」과 「출관」을 수필로 인식했는지, 아니면 소설임을 알고도 일부러 『세계수필문학전집』에 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1974년 범조사(汎潮社) 판 『세계단편문학전집』 제17권이 중국 현대문학 출범기 창조사 작가인 위다푸(郁達夫) 『短篇集』(이석호 역)이라는 사실이다. 퇴폐적 낭만주의 작가로 알려진 위다푸가 이미 1974년에 단행본으로 소개된 것이다. 이 단행본은 따로 소개할 기회를 마련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1974년 대양서적(大洋書籍)에서는 『세계문학대전집』을 간행하면서, 제13권을 위의 『魯迅短篇集』과 『郁達夫短篇集』을 한 데 묶어 편집했다. 혹시 위의 범조사를 대양서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 사실을 기록해둔다. 당시에는 이처럼 같은 작가 또는 번역가가 같은 내용의 작품을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