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대원, 대잡원, 평방 – 권력이 담긴 높은 담장에서 백성들의 소박한 집까지
베이징에서 사합원과 후퉁을, 베이징 교외 산촌에서 산지 사합원을 둘러봤는데 이것들은 전통시대의 살림집들이다. 그러면 현대의 살림집은 어떨까?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한옥에서 사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베이징에서도 실제 사합원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에 주거환경도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20세기 초중반의 베이징 역사를 잠시 살펴봤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도시로서의 베이징에는 더 큰 변화가 몰아쳤다. 1949년 대륙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몰아낸 마오쩌둥은 천안문에서 신중국을 선포했다. 신중국은 장제스가 아닌 마오쩌둥이었고, 수도 역시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환원되었다. 지명도 베이핑에서 베이징이란 위엄 있는 이름으로 복귀한 것이다.
신중국의 베이징에는 새로운 권력과 함께 이주민들이 급작스럽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새로 권력을 장악한 엘리트 계층이거나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베이징으로 흘러들어 온 백성들이었다.
베이징은 우선 권력을 쥐고 몰려든 이들에게 주거지를 제공해야 했다. 처음에는 베이징 시내의 빈터에 숙사를 신축했다. 숙사는 소속 기관이나 회사, 학교가 소속원들에게 제공하는 살림집으로 1950년대 초반에는 시볜먼西便门지역에 많이 지었다.
그러나 곧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는 직장과 주거를 일체화시켜 한 블록 안에 직장과 주택, 그에 필요한 공공시설과 편의시설까지 모두 몰아넣었다. 마치 큰 도시 안에 작은 도시를 건설한 셈인데, 외진 곳에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처럼 직장과 주택을 한데 결합한 것을 대원大院이라고 한다.
신중국 이후 등장한 베이징의 대원은 무시디木樨地에서 중관춘中关村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들어섰다. 대원을 신축할 당시에는 썰렁한 교외의 벌판이었다. 널찍하게 터를 잡고 높은 담벼락을 둘러친 다음 그 안에 직장, 주택, 학교, 목욕탕, 병원, 우체국, 상점, 심지어 영화관과 파출소까지 들인 것이다. 도시로서의 편의시설은커녕 기반시설도 없던 지역에 다수의 이주민을 단기간에 수용하기에는 효율적인 방편이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의 대원에 입주한 사람들은 달랐다. 라오베이징老北京이 아니라 신베이징新北京이었고, 만주족이나 베이징 토박이가 아니라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지방 출신들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베이징이라는 시급 행정단위나 회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중앙으로서 공산당, 정부, 군의 상급기관들이나 대학, 연구소, 극단, 병원 등과 같은 국가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오랜 세월 문화와 역사가 퇴적된 사합원과 후퉁의 라오베이징 백성들이 아니라 신중국의 엘리트들이었다.
이 대원의 아이들은 ‘간부의 자녀’로 학교와 가정에서 마주치는 요란한 정치적 구호 속에서 그들끼리 동년배 집단으로 성장했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높은 지위 덕분에 국가 기밀문서를 보기도 하고, 일반인에게 금서였던 외국 철학서를 읽기도 했다. 이들이 마오쩌둥에 열성적인 충성을 바치면서 기존의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문화혁명에서 홍위병의 주류를 형성했던 세대다.
그들이 문화혁명 와중에서 홍위병이었을 때에는 권력의 꼭두각시로 극좌의 깃발을 미친 듯 흔들어댔고, 지식 청년의 농촌 하방下放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변방의 오지로 들어가서는 ‘그들만의 혁명’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방의 경험을 쌓으며 새로운 세대로 자랐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와서는 자기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그들만의 지하세계에 슬금슬금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이 기존 권력에 반항하며 1976년 5월 4일의 천안문 사건을 일으켰고, 문화적으로는 자기들끼리 돌려 보던 지하의 문학을 세상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국에서 ‘3세대’라 한다. 1세대는 마오쩌둥과 같은 혁명 세대이고, 2세대는 1세대들이 주도하는 혁명의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1세대의 기에 눌려 있던 세대였다. 3세대의 시대가 마무리되는 것은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였다. 천안문 사태를 통해 덩샤오핑의 경제개발에 맞서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다시 한 번 기득권의 장벽 앞에 좌절하게 되고, 결국 많은 이들이 중국을 떠나기도 했다. 중국 현대사의 깊은 곳에는 베이징의 대원이란 공간에서 성장한 세대와 그들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대원이란 공간에서 베이징의 문화와 역사, 곧 중국의 역사가 변화해갔는데, 지금도 대원과 같은 주거지역이 남아 있을까? 대원은 건축이란 측면에서 콘크리트 담장을 높게 둘러치고, 도시공학으로는 직장과 주택을 일체화한 폐쇄적인 소도시를 건설한 것이며, 눈으로 보면 정복 차림의 보안원들이 출입자들을 까다롭게 통제하는 곳이다.
대원은 개혁개방, 경제성장과 함께 소리 없이 해체되어 갔다. 숙사는 새로 지은 아파트로 분리되고, 직장은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로 옮겨가기도 했다. 정부에서 개개인에게 직장을 배치해주던 시스템에서 개인별 구직으로 바뀌면서 대원은 베이징의 엘리트 문화에서 사라져갔다.
지금 남아 있는 대원 가운데 소위 상급기관들의 그것은 출입 통제를 하는 경우가 많아 외부인들이 들어갈 기회는 별로 없다. 가장 보안이 철저한 대원은 과거에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 살았고 지금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최고 권력자들이 사는 중남해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국무원 그리고 공산당 서기처와 사무처 등 중요 국가기관이 들어서 있는, 천안문과 자금성 서쪽에 높은 담장을 두르고 있는 그곳이다.
베이징에서 대원을 가장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은 대학이다. 중국 대학은 우리와는 달리 학생과 교직원들이 전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일례로 베이징이공대학 지도를 보면 강의동(초록색)과 체육시설(중앙)은 물론 기숙사뿐 아니라 교직원 아파트 단지 그리고 은행, 파출소, 우체국, 수영장, 공원도 있다. 우리 관념으로는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래시장에 슈퍼마켓, 각종 상점에서 구멍가게, 심지어 노점상에서 자전거수리소까지 없는 게 없다. 오후가 되면 큰 나무가 있는 그늘 좋은 곳에 노인네들이 유모차를 밀고 산보 나온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교직원 가족들이 대학 구내에서 같이 살기 때문이다.
엘리트 계층을 위한 주택이 부족해서 대원이란 독특한 대형 주거지가 생겼는데, 백성들의 살림집은 이 시기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성들의 집도 새로 짓기는 했지만, 인구증가를 따르지 못하고 기존의 집들을 조각조각 나눠 쓰는 게 보통이었다. 사합원에서 방 한 개나 두 개를 한 가구에 배당해서 여러 가구가 같이 살게 하거나 사합원 안의 여유공간에 빼곡하게 쪽방을 지어 넣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잡원雜院 또는 대잡원大雜院이라고 한다. 이 대잡원은 전통적인 사합원의 품격 따위와는 관계가 없었다. 오직 넘쳐나는 인구를 수용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대잡원의 생활환경은 열악하다. 집 하나에 여러 가구가, 방 하나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다. 수용한계를 넘어선 인구 탓에 공중 화장실과 쓰레기장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넘쳤다. 벽돌로 지은 쪽방은 여름에 더위를 참기 어려웠다. 훗날 도심을 재개발하려고 해도 좁은 집에 많은 가구가 들어서 사는 바람에 재개발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대잡원이 넘쳐나던 베이징 구시가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블록별로 철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사합원과 후퉁이 사라져간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는 이런 대잡원이 일부 남아 있어 20세기 베이징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위 왼쪽 사진은 19세기 말의 개혁가였던 강유위康有爲가 살던 집이다.
문도의 벽면에는 이 안에 몇 가구가 사는지 바로 표시된다. 두꺼비집이 아홉 개면 아홉 가구가 사는 것이다. 대잡원의 大와 雜을 그대로 보여준다.
좁은 골목(위의 사진)은 사실은 사합원 안에 형성된 좁은 통로다. 빨간 벽돌로 벽을 쌓고 시멘트로 발라버린 쪽방들. 그래도 문틀은 새것도 있다. 일부는 철문으로 통로를 막아 작은 대문이 되기도 한다.
좁은 통로에서 어찌 살까 싶지만, 허름한 이발소도 아직 영업 중이고 구석구석 빨래가 널린 것을 보면 그들이 내일의 꿈을 안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마구잡이로 엉겨붙은 지붕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낙후된 생활환경은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새로 단장하고 있다. 어느 지역은 이미 깨끗하게 철거되어 신축공사를 기다리고 있다. 한쪽에는 철거를 기다리는 골목들도 즐비하다. 벽에 흰 페인트로 쓴 ‘拆(탁)’은 철거한다는 뜻이다. 부서진 지붕 귀퉁이에는 주인이 버리고 떠났는지, 길고양이들이 햇볕을 쬐고 있고 앉은뱅이 의자에 앉은 노인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먹먹한 철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아래 사진). 철거민이 힘들기는 베이징도 마찬가지다.
20세기 후반 급증하는 베이징의 인구를 수용해왔던 것이 대잡원이고, 철거는 대잡원과 후퉁이 겪고 있는 21세기의 변신이다. 과연 이들 사합원과 후퉁, 대잡원은 어떻게 변할까. 서울을 비롯한 우리의 도시들이 겪어온 변화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는 값싼 콘크리트가 효율적이지만, 막상 그렇게 고쳐놓고는 문화와 역사가 없는 메마른 콘크리트 속에서 살게 된 것을 후회하는 일이 반복될 것 같다.
대원과 대잡원이 20세기 후반 베이징의 독특한 살림집이었다면 21세기에 새로 지어진 그들의 아파트는 어떨까. 또 그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현대의 서민은 어디서 살까. 아파트는 21세기 현대 평균수준의 중국인들에게는 꿈이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서민들은 평방이란 곳에 살아야 한다.
평방平房은 단층집이란 뜻이다. 붉은 벽돌 또는 흙벽돌로 지은 간단한 구조의 살림집으로 중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베이징의 사합원도 2층이 아니기 때문에 평방으로 볼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사합원을 평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허름한 살림집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오늘을 열심히 살게 하는 ‘꿈과 희망’을 갖고 있다는 걸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실제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든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단면의 하나이니까.
평방은 어느 지역에 특별하게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니다. 고층 아파트나 고급 빌라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 평방이다. 2012년 1월에 찾아간 평방은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인 왕징望京에서 직선거리로 8km 정도, 시내버스로 2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둥바东坝라는 동네였다. 베이징 외곽의 농촌이었으나 도시화한 지역이다. 시내버스로 한 시간 정도면 베이징 무역센터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주거비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조그만 보따리를 둘러메고 찾아 들어가는 동네 가운데 하나다.
이곳의 평방에 한 칸짜리 월세방을 얻어서 사는 한 처자를 만났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그녀는 1985년생, 당시 만 26세. 압록강 하구의 단둥 근처 펑청에서 출생한 만주족이다. 30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오빠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주족에 우대나 차별을 직접 느껴본 적은 없단다. 문화혁명 당시에는 만주족에 대한 핍박이 심했지만, 그녀는 그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의식이 있지는 않아 보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2년간 미용을 배운 다음 만 스무 살 되던 2005년 옷가방만 챙겨서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부모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이미 이혼했다. 어머니는 베이징에서 새 남자를 만나 살고 있다. 모녀가 모두 베이징에 살지만 어머니의 잔소리 탓에 1년에 두어 번 정도만 만난다.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고, 고향에서 살고 있는 오빠와는 가끔 연락하는 정도다.
베이징에 올라와서는 미용실과 안마숍 등을 거쳤다. 중국에는 미용실에서 부수적으로 안마를 하는 곳이 많다. 그러다가 전문 안마숍으로 옮겼다. 통장 잔액은 8만 위안, 우리 돈 1500만 원 정도 저축했다고 하니 꽤 열심히 모은 것이다. 지금은 직원 6∼7명 정도의 작은 디자인 겸 인쇄 회사에서 초심자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안마사로 많이 벌 때에는 월 3000∼5000위안을 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웬만한 회사에 들어가 받는 초임이 2000∼3000위안 수준이니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마라는 직업환경이 정통 안마의 경계선을 넘나들기 일쑤였고, 당장은 벌이가 좋을지는 몰라도 전도가 불투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월 1500위안에 지나지 않지만 디자인을 배우면서 일하고 있다.
5년 후의 꿈은? 일로서는 조금 큰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열심히 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다. 집으로는 자기 집을 갖는 것, 크면 클수록 좋겠지만 수십만 위안, 한국 돈으로 5000만 원 전후로 살 수 있는 집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단다. 누구나 갖는 소박한 꿈이다.
베이징에 친구는 서넛 정도 있는데, 전부 일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다. 지금 사는 동네도 친구가 살고 있어서 오게 되었다. 친구들 가운데는 학교 청소원도 있고 식당 종업원도 있는데, 월 1000∼1500위안 정도씩 번다. 여름에는 날씨가 좋아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놀지만, 겨울에는 날씨도 춥고 외출도 용이하지 않아 가끔 전화 통화만 한다.
별다르게 배운 것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지만, 소박한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집을 들여다보자. 그녀가 사는 쪽방은 아주 간단하다. 안에 침실, 바깥쪽으로 주방 겸 현관 겸 다용도 공간, 이것이 전부다. 이 작은 공간에 이십 몇 년이나 되는 그녀의 인생이, 그녀의 꿈과 희망이, 그리고 오늘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녀가 사는 동네 안쪽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지은 집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다. 평방이란 게 이런 집들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난한 동네지만, 빨랫줄에는 내일의 꿈이 소박하게 널려 있다. 골목은 정돈되지 않은 흙길이거나 보도블록이 깨진 길이 대부분이다. 봄이면 워낙 건조해서 흙먼지가 날린다. 회색의 작은 철문이 그녀의 월세방이다.
철문을 열면 현관 겸 주방 겸 다용도 공간, 그 안에 침실 문이 보인다. 커튼으로 어설프게 가린 창 앞에 고무장갑과 행주가 걸려 있다. 세탁기에 커버를 씌워놓은 걸 보니 귀한 물건인가 보다. 그리고 주방용기 몇 개가 쌓여 있다. 고향에서는 만터우(소가 들어 있지 않은 맨 빵)를 주로 먹고 컸지만, 여기서는 항상 밥을 해 먹는다. 출근할 때 도시락을 꼬박꼬박 싸가기 때문이다.
침실에는 자잘한 물건과 옷이 가득 채워져 있다. 주말에 세탁기를 돌리는데, 빨래를 널면 실내 공간이 다 차버린다. 침실 한구석에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 붙어 있다. 그녀의 꿈의 한 조각이다. 좋아하는 스타는 장쉐유张学友, 한류 스타 가운데 노래와 춤이 멋진 이정현을 좋아한단다.
거금 3000위안을 주고 산 노트북도 놓여 있다. 성능은 고만고만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다. 이것으로 인터넷을 뒤져서 디자인을 독학으로 배운다. 그녀의 미래가 가느다랗게 달려 있는 ‘세계로 열린 창’이다.
침실 벽면은 지저분해서 벽지로 덮어버렸다. 벽지 위에는 좋아하는 노래의 필사 악보도 붙여놓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포스트잇을 하루에 한 장씩 붙여 하트 모양으로 장식했다.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고 싶은 그녀의 꿈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침대는 전기장판 위에 얇은 이불 세 장이 겹쳐져 있다. 겨울이라고 따로 겨울 이불을 쓸 형편은 아닌 것이다.
화장실은 공중 화장실을 써야 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무대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월세는 200위안, 인터넷 사용료가 50위안이고 전기세까지 포함하면 300위안 정도가 고정적인 주거비다. 시내 아파트의 지하에 살아도 이 정도 크기의 월세방은 500위안이 들어가니 300위안을 아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말엔? 쉬면서 빨래하는 것이 휴식이다. 그것도 날이 추운 겨울에는 영 불편하다. 고향에는 거의 가지 않는단다. 신분증 등을 다시 해야하는 일이 있어 다녀온 적은 있지만, 춘절春節(우리의 설날)이라고 남들처럼 고향에 가지는 않는다. 가족이 해체된 것이다. 급속한 경제개발과 도시화의 결과다.
그녀는 입술 주위의 피부가 좋지 않아 사람 만날 때 손으로 가리곤 했다. 먹는 것도, 사는 환경도 좋지 못하니 피부가 편할 리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밝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과도하게 우울해하지도 않고…….
이것이 농촌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와 열심히 사는 젊은 여자의 살림공간이다. 그녀의 고단한 삶과 소박한 꿈이 읽히는가? 어딜 가나, 누구나 꿈이 있다. 그 꿈이 사람을 살게 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