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02 베이징 촨디샤촌 산지 사합원

베이징 촨디샤촌 산지 사합원 – 산기슭에 펼쳐진 한씨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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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촨디샤촌 전경

이제 발걸음을 외곽으로 돌려 베이징 교외의 산지 사합원을 찾아가 보자. 산촌에서는 같은 사합원도 다를 뿐더러 산기슭에 사합원들이 모여 이룬 산촌의 풍광이 독특하기 때문에 문화기행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웬 산촌이냐고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베이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서 숫자로 말하자면 총 1만 6808km²나 된다. 이 넓이는 서울과 인천, 그리고 미수복 북한 지역까지 포함한 경기도 전체 면적(1만 1819km²)보다도 1.4배나 큰 것이다.

땅이 넓다 보니 베이징 교외로 나가면 높은 산지도 많다. 베이징 인근에서가장 높은 산은 해발 2303m의 둥링산东灵山인데,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보다도 훨씬 높다. 베이징은 서북은 산지이고, 동남으로 평지가 이어지는 지형이다.

둥링산 가까이에 촨디샤爨底下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500여 년 된 마을인데 전통적인 산지의 사합원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을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내야 하는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마을 앞산에 올라서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의 돌을 모아 지은 산지의 삼합원과 사합원이 남북 중축선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모양이다. 뒤의 봉우리들은 해발 1000m를 넘고, 마을은 해발 650m 정도다. 자연조건으로는 양을 키우고 벌을 치기에 적당한 산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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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촨디샤촌의 표지석과 가옥 구조

이 마을은 중국의 고전 민가건축에서 보물 같은 존재이고, 2003년 중국 정부에 의해 역사문화명촌歷史文化名村으로 지정되었다. 이 마을은 베이징에서 산시성으로 이어지는 경서고도京西古道에 자리 잡아 발전했었지만, 다른 곳으로 큰길이 나면서 쇠락했다. 그러나 쇠락한 탓에 옛 모습을 많이 간직했고, 지금은 번성했던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1990년대만 해도중국 고전건축 연구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저 문인이나 화가 몇 사람이 찾아오던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영화 촬영지로도 각광을 받는다.

이곳은 한韓씨 집성촌으로 명대에 산시성에서 이주해 온 마을이다. 이주초기 어느 날 폭우로 산사태가 마을을 덮쳐 주민 전부가 매몰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외지에 나가 있던 남자와 여자 한 명씩이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마을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결혼하여 지금의 자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을 인구도 줄어서 30여 가구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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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가옥 구조

마을 이름의 한자 찬爨도 참 재미있다(사진 2 왼쪽). 글자를 풀어보면 윗부분은 흥하다는 흥興이고, 그 아래 두 개의 나무木가, 제일 아래에는 큰大 불火이 있다. 나무 아래 불을 피워 흥하게 하는 것이니 부뚜막이란 뜻과 밥을 짓는다는뜻이다. 쉽게 말해 잘 먹고 잘산다는 뜻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일구기 시작한 조상의 애틋한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씨 한韓이 ‘寒(차다)’과발음이 비슷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불의 기운이 있는 ‘爨’으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산지에서는 산기슭에 기대어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게 된다. 사진 2 오른쪽 사진에서 보면 제일 아래 대문과 도좌방이 자리 잡고, 그 안으로 서상방과 동상방, 정당,그 위에 후조방이 자리 잡고 있다. 비탈을 타고 올라가면서 자리를 잡는 것은 주택 내부의 방 배치에서뿐 아니라 집과 집이 이어질 때도 그렇다. 사합원과 사합원이 벽을 공유하면서 앞뒤로 이어지기도 한다. 윗집의 대문은 앞집의 동쪽 담장과 연결된다. 그래서 삼합원이 많은 것이 산촌의 특징이다.

아랫집의 대문은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내기도 한다. 골목을 들어서면 골목 왼편에 아랫집 대문이, 골목의 안쪽 끝에 윗집의 대문이 있다. 골목 안에 두 집 대문이 가까이 놓여 정감 있는 이웃의 모양이 나온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물 사합원은 사진 3과 같다. 청색은 골목, 황색은 아랫집, 적색은 윗집이다.

이제 촨디샤촌爨底下村에서 이런산지 사합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이진 사합원 하나를 들어가 보자. 촨디샤에서 가장 높은 곳의 가장 큰 집이다. 기본 구조는 베이징의 사합원과 같다. 대문 안으로 영벽이다.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두보의 시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영벽을 통과해서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정방, 정방의 좌우로는 동상방, 서상방이 있다. 서상방은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노부부의 침실이다.

서상방 안에는 가벼운 취사도 하는 난로와 함께 아궁이(아래 사진 상단 좌측)가 있다. 현재도 사용하는 아궁이인데, 중국어로는 캉炕이라 한다. 전형적인북방의 난방시설이다.

정당의 왼쪽을 돌아 좁은 통로를 빠져 올라가면 다섯 칸짜리 당옥堂屋이 있다. 당옥 옆으로는 이방이 하나 붙어 있는데 이방의 지하에 곡식창고(사진 4 상단 우측)가 있다. 통풍구도 설치되어 있다. 당옥의 기단 가까운 낮은 곳에는 묘동猫洞이라고 하는 고양이 출입구도 있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도 배려해서 출입구를 터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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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당옥의 곡식창고

이 집에서는 이방의 지하에 창고를 설치했지만, 가운데 마당의 지하에도 창고(사진 4 하단 좌측)를 지었다. 산지에 느닷없이 출몰하는 토비 때문이다. 토비가 침입하면 일단 자력으로 막으면서 관군을 기다려야 하는데 관군출동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베이징의 평지 사합원에 없는 지하 창고가 생긴 것이다.

이 마을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길이 모두 세 가닥 있는데, 집중호우나 홍수에 대처하기도 좋지만 토비들이 침입해 왔을 때 자력으로 방어하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관군의 치안력이 약하면 살림집의 자기방어 기능이 더욱 강조되는 법이다. 푸젠성의 토루土樓는 아예 관군의 치안력이 없다고 전제하고 성채같은 집체거주 주택을 지어 한 마을 주민이 전부 모여 살기도 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민가나 마을에서는 토비들의 약탈에 대비한 요소가 적지 않다. 그만큼 전란이 빈발했던 것이다.

당옥(사진 4 하단 우측)은 이 집의 제일 높은 주인장 부부가 손님을 맞는 공간이다. 베이징 시내였다면 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을 텐데, 지대가 높고 전망이 좋아서 그런지 주인장 내외가 후조방을 쓴다.

이 마을은 수십 년에서 100년 정도 된 집들이 많고, 곳곳에 옛날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골목 자체도 느긋하게 거닐어볼 만하다. 골목길은 주변에 많이 나오는 청석, 회석, 자석 등을 깐 판포로板鋪路다. 오래되어 반들반들해졌다. “모택동 사상으로 우리의 두뇌를 무장하자!”라는 1950년대 정치적 구호들이 회벽(사진 5)에 남아 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통용되는 구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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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오래된 정치구호

건축학도나 역사학도가 아니더라도 이런 옛 마을을 찾아 바쁜 초침을 분침처럼 느리게 조절해두고는 느긋한 마음으로 골목을 거닐면서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어떨까. 어느 집이든 가볍게 웃는 얼굴로 인사만 하면 들어갈 수 있다. 집 구석구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뜯어볼 수 있고 아예 하룻밤 묵어갈 수도있다. 이 마을 집은 대부분 식당과 객잔을 겸하기 때문이다. 숙박이 다소 불편할 수는 있지만 50위안 정도면 방 하나를 얻어 산골 마을의 하룻밤을 지내볼 수 있다. 밤에는 산기슭으로 쏟아지는 별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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