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2 한문제漢文帝 7

漢文帝

21. 후세에는 10분의 1을 경감할 수 있다

소득의 10분의 1을 부세(賦稅)로 부과하는 것은 삼대의 제도이다. 맹자는 “그보다 무겁게 하면 크든 작든 간에 걸(桀)과 같은 폭군이요, 가볍게 하면 크든 작든 간에 맥(貉)과 같은 오랑캐의 법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는 삼대의 제도에 관해 말한 것이다.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경기(京畿)는 사방 천 리이고, 제후 가운데 직접 다스리는 땅이 큰 경우는 사방 백 리 또는 오백 리이며, 작은 경우는 오십 리를 넘지 못한다. 강역(疆域)을 지키고, 무장한 병사들이 노역하게 하고, 폐백(幣帛)을 바치고 아침저녁 식사를 챙기며 제사에 쓸 소와 양, 돼지 등의 가축[牢餼]을 챙기고, 종묘와 사직에 올리는 제사의 물품을 마련하고, 수많은 문무백관과 서리 등의 봉록을 챙겨 주어야 하는 등등의 제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예기》 〈빙의(聘義)〉에서 “옛날에는 재물을 쓰는 것을 고르게 할 수 없었다.[古之用財者不能均]”라고 했으니, 이와 같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20분의 1을 징수하는 것은 부족하다. 하지만 토지는 상, 중, 하의 등급이 다르고 일 년 단위로 윤경(輪耕)하느냐 이 년 단위로 윤경하느냐 여러 해 동안 묵혀 두어서 황무지가 된 내전(萊田)이냐 하는 차이가 있으니, 명분상으로는 10분의 1을 징수한다지만 세율을 절충하면 사실상 20분의 1을 징수하는 것이다.

진나라 이래로 제후를 없애고 군수를 설치했다. 한나라 초기에 제후를 봉했는데 그 봉토의 넓이가 옛날 제왕이 다스리던 경기보다 다섯 배나 큰 곳도 있었으나 그 휘하의 관속(官屬)과 전례(典禮)는 또 대단히 간략해서,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 변방을 지켜야 했으니 중원에서는 제후들끼리 모여 맹약을 맺고 침략 전쟁을 벌이는 일이 없었다. 군수와 현령이 있다면 그들은 황제와 백부나 숙부, 조카나 외숙의 관계가 아니어서 예물을 보내거나 초빙하여 자문하는 일은 각자 사적인 관계에 따르게 된다. 사직도 금방 세워져서 엉성한 상태였는지라 제사와 같은 전례도 아직 번잡하지 않았다. 한 군의 면적은 공후(公侯)의 봉토보다 넓었지만 연사(掾史)나 우요(郵徼) 등의 하급 관리들은 옛날에 고을마다 한 명씩 천거했던 장관에는 비할 수 없다. 온 천하의 재력을 모아 삼공구경(三公九卿)과 각 부서의 조정 신하들에게 주어도 《주례(周禮)》에서 육관(六官)에게 주던 봉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옛날의 제왕은 경사 주위 천 리의 지역에서 거둬들여서 봉록으로 쓰는 지급하는 것이 아주 컸지만, 지금은 천하 구주에서 거둬들여도 지출을 절약하니 삼대의 경비와 비교하면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10분의 1을 징수하였으니 많이 모아두었다가 군주가 욕망을 풀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또 왜 이렇게 많이 거둬들이는 것인가?

문제 13년(기원전 167)에 전조(田租)를 징수하지 못하게 하여 경제(景帝) 1년(기원전 156)에는 다시 예전의 절반을 징수하게 했으니, 소득의 30분의 1을 징수한 것이다. 그러다가 광무제(光武帝: 25~55 재위) 때에 이르러 전쟁이 이미 끝나자 10분의 1을 징수하던 부세를 경감하여 경제 때의 제도와 같게 했으니, 정말 나라의 재정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을 부유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봉건제가 후세에 다시 시행되지 않은 것은 백성의 역량이 감당할 수 없어서 추세상 혁제(革除)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2. 문제가 복상(服喪)을 줄여도 옛날의 뜻이 남아 있었다

한나라 문제의 상을 짧게 치러서 천하에 효도가 쇠락했는데, 그 유래는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선왕이 은의(恩義)를 헤아리는 깊은 뜻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점차 의미가 흐려져서, 마치 천하에 강요해서 따르기 어려워진 것 같았다. 《예기》에서는 “부모의 상은 삼 년, 군주는 부모의 상을 본떠서[方喪] 삼 년”을 치르라고 했다. ‘본뜬다.[方]’라는 것은 ‘치르는[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새로 제위를 계승한 군주가 해야 할 것은 상을 ‘치르는’ 것이지만, 바깥에 있는 제후와 조정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상을 ‘본뜰’ 뿐이다. 그들이 정말 상을 본뜨기만 한다면 교제(郊祭)를 대신 지내고, 사직에 대한 제사와 오사(五祀)를 지낼 수 있으며, 회맹(會盟)과 정벌에 참여할 수 있으니, 이런 것들이 신하들에게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제자가 스승의 상을 치른 뒤에 무리를 지어 지낼 때는 상복을 입고 외출할 때는 입지 않는다. 같은 뜻으로 해석하자면 신하가 군주의 상을 치를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정상적인 의복을 입고 외출하더라도 괜찮다. 《의례(儀禮)》 〈사혼례(士婚禮)〉에서는 “삼족 가운데 상사(喪事)가 없어야[三族之不虞]” 가례(嘉禮)를 거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군주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관례(冠禮) 및 계례(笄禮)와 혼례를 모두 거행할 수 있다. 천지와 사직에 대한 전례는 상례(喪禮)의 제한을 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으니, 제사는 본래 때맞춰 지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사의) 음식을 줄이고 귀신에 대한 제사를 끊어서 내 부덕함을 가중시켰다. 損其飮食, 絶鬼神之祭祀, 以重吾不德.

대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군주를 존중한 것이 이미 지나쳤고, 천하에 지나치게 엄격한 금제를 가하여 사람들의 음식을 통제하고, 제사를 끊게 함으로써 선왕의 깊은 뜻을 잃었으며, 사람들을 지나치게 견디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았으니, 이것은 삼대의 옛 제도가 아니다.

어쩌면 문제의 조서는 관리와 백성을 하나로 싸잡아 차등(差等)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기》에서는 “제후는 천자를 위해 참최(斬衰)를 입는다.[諸侯爲天子斬衰]”라고 했으니, 어직 제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그에 비해 “공(公), 사(士), 대부(大夫) 신분의 신하들은 군주를 위해 참최를 입는데, 베로 만든 허리띠[布帶]를 매고 짚신[繩屨]을 신는다.” 정현의 해설에 따르면 “가까운 신하는 군주를 위해 이 상복(즉, 참최)을 입는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종복(從服)으로서 군주와 똑같이 상복을 입는 것이니, 가까운 신하가 아니면 상복의 등급을 낮출 수 있다. 또 “서인(庶人)은 군주[國君]를 위해 석 달 동안 재최(齊衰)를 입는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군주’는 분명히 제후의 나라에 속한 백성 또는 천자의 경기 이내에 사는 백성의 입장에서 모시는 군주이지, 온 천하의 백성이 모시는 군주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온 천하의 백성에게 혼인과 제사, 술 마시고 고기 먹는 일을 금지하는 것은 모두 진나라 때의 가혹한 법령이다. 진나라 때는 전체적으로 그것(상례)을 중시했지만, 한나라 문제는 전체적으로 경감해 버렸으니, 그들은 모두 (지역이나 계층 등의) 차이에 대해 어두웠기 때문에 예법도 그에 따라 점차 없어져 버렸다.

오직 대를 이은 군주는 비록 천자라고 해도 당연히 자식이다.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성이 싫어하는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똑같다. 성씨가 같은 제후왕은 그 작위가 옛날의 제후에 해당하는데, 한나라 이후로는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나 군대를 다스리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더욱 예법을 적용할 만하다. 재상 이하 외부의 하급 서리(胥吏)까지는 모두 마찬가지로 천자의 신하이다. 그들에게는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을 섞어서 “베로 만든 허리띠를 매고 짚신을 신는” 예법을 확장하여 함께 쓰도록 해야 한다. 다만 몸소 제사를 거행하지 않으면 오색 의복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어도 된다. 군현제가 시행되는 시대에는 천하에 안팎의 구별이 없어졌으니, 모든 서인이 군주를 위해 석 달 동안 상을 치르는 제도를 온 천하에 확대해도 된다.

다만 ‘양암(諒闇)’의 예법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형벌과 포상을 시행하는 중대한 일을 모두 군주 자신이 장악하고 재상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것은 아마 이제는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재상 자리에 있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재상 자리에 있는 이들이 참람(僭濫)하여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것은 사방 천 리의 경기 지역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방 오랑캐를 막는 일은 변경을 둘러싸고 지키는 제후에게 맡겼다. 강한 힘을 가진 신하가 조정 안에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 제후가 그 죄를 물을 수 있었다. 안팎에서 서로 견제하니 제후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은 조정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재상 또한 마음대로 기강을 어지럽힐 수 없었다. 군현제가 시행되어 천자가 천하의 정치를 통일하고 만방의 부세를 총괄하면서 사방 변경의 수비까지 아울러 책임지게 되었다. 각 지역의 태수와 현령을 감찰하여 형벌과 포상을 모두 천자의 명령에 따르게 했으나, 변함없이 고정된 법률은 없었다. 시비가 뒤얽히고 성은과 위엄이 번갈아 내려지는데 재상이 어떻게 감히 이 중대한 일을 혼자 떠맡을 수 있겠는가? 이윤이나 주공 같은 덕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상도 문무백관과 똑같이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으니, 그 위엄과 덕망이 다른 관료들을 위압하는 재상의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상(商)·주(周)의 제도를 시행하고 효자의 정서를 늘리며 천하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선왕의 깊은 뜻을 체득하여 정치에 폐단이 없게 하려 할 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천성을 다하여 시의에 적절하게 조치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라면 쉽게 이에 관해 얘기할 수 없다. 진나라가 망한 후 한나라는 삼대가 남긴 문화를 계승하여 진시황의 잘못을 바로잡으면서, 마음속으로 반성하지 밖으로 시대 상황을 헤아리지도 않았음에도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가 복상 기간을 단축하여 만대에 길이 시행하게 했음에도 그것을 돌이킬 뜻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문제에게는 그래도 옛날의 뜻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미 하관(下棺)을 하고 나서 대공(大功) 15일과 소공(小功) 14일, 섬복(纖服) 7일을 입었고, 매장하기 전에는 당연히 참최를 입었다. 《예기》에서 “천자는 일곱 달 만에 매장한다.”라고 했다.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를 마치면 곡(哭)을 끝내면 재최를 입는 일 년의 기간이 끝나 가며, 그 기간이 다 끝나면 소상(小祥)을 지내는데, 옛날에는 그때에도 상복을 입었다. 대공과 소공이라는 것은 상복을 입는 것[受服]의 변종이고 섬(纖)은 바로 상복을 벗을 때에 올리는 담제(禫祭)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문제의 경우는 기간은 짧았지만 여전히 옛날의 뜻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다만 짧아도 너무 짧았던 것이 흠이다. 문제는 기해일(己亥日)에 붕어하여 을사일(乙巳日)에 매장했으니 모두 합치면 43일밖에 되지 않는다. 경제가 서둘러 매장하고 상복을 벗은 것은 추모하는 마음을 너무 박하게 나타냈다고 하겠다. 날짜로 달수를 대신하는 것은 문제가 만든 제도가 아니었는데, 이후로는 갈수록 더 기간이 짧아졌다.

23. 일곱 나라에 대한 문제의 계획은 가의나 조조가 예측할 수 없었다

문제는 46세에 붕어했는데, 삼 년 뒤에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반란을 일으켰다. 유비의 명령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다.

“내 나이 예순둘이다.”

그러니 그는 문제보다 13살이 더 많았던 것이다. 문제가 붕어했을 때 유비는 59세였으니, 거의 늙은 나이였다. 그가 거짓으로 병을 핑계로 내세워 조정에 들어가 천자를 알현하지 않아을 때 이미 반란을 일으킬 낌새가 드러났기 때문에 자의와 조조는 매일 대책을 세우며 걱정했다. 그런데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끝내 접지 못하리라는 것을 문제가 어찌 몰랐겠는가? 이에 그는 유비에게 궤안(机案)과 지팡이를 하사하여 까닭 없이 일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으니, 10년만 더 지나면 유비가 죽지 않더라도 이미 노쇠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趙)나라와 초(楚)나라, 넷으로 나뉜 제(齊)나라의 제후왕들은 용렬(庸劣)하고 큰 야망도 없으니, 유비가 먼저 거사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미 그것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대책을 마련해서 그대로 견지하여 반란을 평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제가 운이 좋아서 바로 죽지 않았더라면 가만히 앉아서 일곱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쉽게 거둬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의와 조조가 염려하고 있던 것을 문제는 진즉부터 이미 염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제가 견지한 대책은 가의나 조조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길흉이 커지고 스러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렸지만, 행동하거나 조용히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의 잘잘못은 사람에게 달렸다. 하늘은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곳이지만, 인간 세상의 일은 하늘이 반드시 감응하는 것이다. 사물이 궁극에까지 자라면 반드시 소멸하게 되고, 사람은 차분히 심사숙고하다 보면 움직일 수 있는 때가 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늘 자라고 소멸하며 교체되는 계기를 지니고 그것으로 천하의 험한 장애를 평평하게 고르지만,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못하는 것을 언제나 안타까워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이 자라게 하고 소멸시킴으로써 운동과 평정을 이루어내는 것을 알고, 조급한 사람이 그 안에 견지되는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문제와 같은 사람은 더불어 때를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더불어 때를 알 수 있다면 아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늘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미묘한 징조를 안다는 뜻이다. 하늘에는 올곧고 일관된[貞一] 이치가 있고, 탈 수 있는 징조가 있다. 하늘의 이치를 아는 사람은 움직여서 사물과 동화되기를 잘하고, 하늘의 기미를 아는 사람은 차분히 지내면서 사물을 해치지 않으며 사물도 그를 해칠 수 없다. 이치로 교화를 주관하는 것은 군자의 덕이고, 징도를 통해 다칠 위험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은 황로(黃老)의 도리이며, 이 아래로는 다른 도리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하찮은 지혜를 믿고 아직 움직이지도 않는 사물을 격발시켜 움직이게 한다. 그래 놓고선 스스로 선각자라고 자랑한다. 움직이는 것은 멈추게 할 수 없으니 그 해독이 천하에 두루 퍼져서 피가 흘러 강을 이루게 한다. 설령 나라가 운 좋게 존속한다 하더라도 피해 역시 너무나 참혹하다. 아! 남의 가문이나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 하나라 걸왕이나 상나라 주왕은 아니니 틀림없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인재가 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지혜를 가진 이라면 신중하고 은밀히 그런 인재를 기다리면서 경솔하게 말하지 말아야 할지니, 그러면 천하의 재앙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