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E. 매클라렌(Ann E. MacLaren)
백화체 텍스트 쓰기와 편집하기
명대 초기부터 중기까지의 많은 백화체(혹은 반-백화체) 텍스트들은 오직 필명으로만 알려져 있는 무명씨나 역사적으로 분명치 않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특히 명대 사대기서인 《삼국연의》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뤄관중(羅貫中)과 같은] 앞선 시기의 조금 알려진 인물은 일련의 희곡과 소설에 대한 가상의 작가로 간주되었다. 책의 앞머리에서 “작가”로 추정되는 이들은 종종 자신들을 단순히 이전 재료의 편찬자, 편집자 또는 개작자로 자처하였다. 특정한 텍스트를 그것을 “소유한” 특정한 작가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텍스트들이 중요한 의미에서 “작가가 없으며” 그러므로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도록” 열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데이비드 롤스톤이 지적하듯이 작자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은 독자들에게는 독서라는 행위의 개념과 관련된 문제였다. 왜냐하면 독서의 전통적인 목적은 작가의 사람됨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롤스톤은 명 중기에서 말기 사이 “문인 소설”의 발전과 더불어, 문인 편집자들이 독자가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commune)” “내포 작가”를 창조하기 위해서 평점에 의존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과 유사하게 로버트 헤겔은 서양에서와 반대로 중국에서의 작자 문제가 “소설이 대중적인 문학 형식이 된 이후에나 의미가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백화체 소설과 희곡 텍스트의 가장 초기 출간자들은 그들 자신을 개별화된 “작가”로 간주하지 않았다. 명대의 서문에 가장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인 호사가(好事者)는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텍스트를 읽고 출간하고 수집했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두루 가리킨다. 고대에 호사가는 소문내기와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예를 들어 멍쯔(孟子)는 쿵쯔(孔子)의 삶에 대한 헛소문을 듣고서는 이런 것들은 (호사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으로 지어진 이야기”라고 대꾸했다. 미술에서 이 용어는 비싼 예술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필수적인 교양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이를 모으는 벼락부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미페이(米芾, 1052년-1107년)는 예술 작품 수집가를 감상가(鑑賞家)와 호사가(好事者)로 구분하였다. 그에게 감상가는 취미로 뛰어난 수준의 예술품을 모으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의 호사가는 (부와 재산은 가지고 있으나 교양은 거의 없는 단순한 애호가로) 그들이 자신들의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비싼 품목들을 모으는 사람들이라며 비통해하였다. 호사가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할 뿐 진정한 풍취나 감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 2) 남경의 기루에 있는 책들. 앞부분에는 한 여성이 책들을 가지고 기루에 도착한다. 2층에서는 여선생이 책을 펼쳐놓고 두 여성을 가르치고 있다. 《녹창여사(綠窓女史)》, 14권, 친화이위커(秦淮寓客)가 쓴 것으로 여겨지며 진링(金陵)의 신위안탕(心遠堂)에서 출판되었고 숭정 연간에 나온 것이 분명하다. 진페이린(金沛霖) 편, 《고본소설판화도록(古本小說版畵圖錄)》(北京: 線裝書局, 1996년), 이함(二函) 10책(十冊), 649번 그림의 영인본.
호사가(好事者)라는 말은 그것이 가진 폄하적인 함의를 떨쳐버리지는 못했을지라도, 명대에 이르게 되면 어느 정도 체통을 세울 수가 있었다. 선춘쩌(沈春澤, 1573년-1620년 활동)는 원전헝(文震亨, 1585년-1645년)의 《장물지(長物志)》에 붙인 서문에서 확실히 그것을 비판적인 호칭으로 보았다. “최근에 몇몇 부자들은 그들의 천박하고 둔감한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감식안(好事)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감상할(賞鑑) 때마다 속된 말을 내뱉으며, 손에 들어오는 것을 거칠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몇몇 다른 글들에서 이 용어는 아마추어적인 애호가나 수집가를 가리킬 때, 중립적이거나 심지어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였다. 희곡과 소설의 서문에서 호사가(好事者)는 중요한 표적 독자층을 구성하는 애호가로 여겨졌다. 명 태조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주취안(朱權, 1378년-1448년)은 희곡 창작에 관한 자신의 책 《태화정음보(太和正音譜)》의 서문에서 자신의 의도가 “호사가들에게 유용하고 배우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도록(庶幾便於好事, 以助學者萬一耳)” 악부(樂府) 창작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호사가(好事者)는 또한 필사본의 형태로 남아있는 자료들의 수집가이기도 했다. 취유(瞿祐)는 그의 《전등신화(剪燈新話)》 서문에서 당시의 사건이나 막 지나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는 호사가(好事者)의 행동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서 취유는 이것들을 취합하여 출판하였다.
호사가(好事者)는 명백하게도 회화 수집가들에게서 빌려온 용어로, 중국 희곡의 노래(唱)를 부르고 작곡하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노래의 소재들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에 쓰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의 소재와 일화를 모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에 쓰였으며,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삼국연의》와 같은 반-백화체의 소설을 옹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 쓰였다. 1494년 융위쯔는 이 소설을 베끼려고 몰려드는 이들을 “문인 중의 수집가들(士君子之好事者)”이라고 지칭하였다. 한 세대 뒤에 슈란쯔(修髥子)는 1522년에 쓴 그의 서문에서 이 작품을 교정하고 편집한 이들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호사가(好事者)라고 지칭하였다. “문인(士君子)”이라는 통칭은 여기서 사라지는데, 이는 아마도 이 용어가 이제는 제 스스로 설 수 있을 만큼 품격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호사가(好事者)는 텍스트의 특정한 판본을 수집하기 위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만큼의 자금과 여가를 가진 사람이었다. 1528년 장루(張祿, 1522년-1566년 활동)은 악부 선집인 《사림적염(詞林摘豔)》의 서문에서 그것의 원본은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유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몇은 대중을 위해 인쇄되었고(公諸梓行), 나머지는 필사본의 형태로 개인적으로 유포되었다(秘諸謄寫). 그러므로 한 벌을 온전하게 얻기 어려웠다. 겨우 몇몇의 수집가(好事者)들만이 그것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호사가(好事者)는 아마도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여행을 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는 같은 텍스트에 쓴 1539년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암시되어있다. “사방에서 온 시인과 학자들은 고향을 떠나 그곳을 그리워하여 바람과 달을 대하고서는 노래를 읊고 술을 권하면서 이로써 여행의 회포를 풀었다. 어찌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열광적인 수집가들은 텍스트에 대한 수요뿐만 아니라 그것의 출간까지도 자극하였다. 후톈루(胡天祿)는 1582년에 쓴 《권선기(勸善記)》의 서문에서 작가가 이전에 존재하던 무롄(目蓮)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서 그것을 교훈적인 희곡으로 “개작하였다(括成)”고 적고 있다. “호사가(好事者)는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그 원고를 구하였으나 여럿이 베끼도록 줄 수 없었으니 이에 목판에 새겨 구하는 이들에게 제공하였다.” 호사가(好事者)는 텍스트 구성 과정에 직접적으로 간여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텍스트를 편집하고 교정하고 출간할 수 있었다. 톈두와이천(天都外臣)은 정평 있는 《수호전》의 초기 판본을 되살린 공이 호사가(好事者)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는 호사가의 작품이 “시골 학자(村學究)”라고 경멸 적으로 이름 붙인 다른 집단의 편집 행위에 비해 훨씬 낫다고 보았다. 호사가는 또한 희곡 《비파기》의 전파에 개입하였다. 1498년의 서문에서 “바이윈싼셴(白雲散仙)”이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진 작가는 한 호사가(好事者)가 대본의 일부분을 적었다고 주장하였다. 중간 부분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그는 내용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과감하게 내용들을 덧붙였지만 몇몇 잘못들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보수적인 평점가들은 호사가가 백화체 텍스트의 위상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각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예성(葉盛)은 여성들이 즐겼던 대중적인 이야기를 “여통감(女通鑑)”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 호사가(好事者)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호사가(好事者)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사회적 계급은 “시골 선생(鄕塾)”, “시골 학자”, “시골 유생(里儒)”, “시골 노인(野老)” 등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는 집단이다. 후잉린(胡應麟)에 따르면 후대의 소설들은 시골 유생과 시골 노인의 저작으로, 이들은 더욱 화려한 문체의 소설을 썼던 당대(唐代) 이전의 문인이나 재사들과는 구분된다. 그는 더 나아가 《삼국연의》와 같은 서사에 허구적인 이야기들이 섞여있는 것에 주목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시골 유생과 노인들(里儒野老)”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었다. 호사가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교육 수준이 낮았던 듯한 이러한 독자들도 텍스트의 전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였다. 허비(何璧, 1600년대 초 활동)는 1616년에 쓴 서문에서 《서상기》의 오래된 판본들에는 잘못된 음운론적 주석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이는 시골의 학자들이 훈고한 것 같다. 지금은 모두 새기지 않았다”라고 언급하였다. 톈두와이천(天都外臣)은 《수호전》에서 앞부분을 삭제하고 톈후(田虎)와 왕칭(王慶)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인 “시골의 학자들”을 마찬가지로 비난하였다. “화려한 글을 지우고 불필요한 이야기들을 덧붙이니 이보다 나쁜 횡액이 어디 있겠는가!” 이른바 호사가(好事者)와 시골 유생 혹은 시골 노인의 행동은 너무 유사해서, 어떤 이는 그들을 배웠다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부류로 간주하려 하였다. 명칭의 선택은 분명히 주관적인 문제이다. 한 서문에서 “애호가”의 지위를 높여주려는 노력은 나중에 “시골 학자들”의 터무니없는 간섭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