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인상 2

지금은 확실히 몇 년 몇 월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루쉰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구제舊制 고등학교 학생 때로, 같은 반의 타이완 출신 홍洪 군이라는 친구가 중국의 잡지와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나는 그와 친하게 지내고 있어 그에게서 들었던 게 최초인 듯한 생각이 든다. 혹은 그 당시 교토대학京都大學 사람들이 펴내고 있던 『시나가쿠支那學』이라는 잡지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잡지에서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1] 씨가 소개했던 「후스胡適를 둘러싼 신문학운동」인가 하는 글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이미 당시의 일들은 확실하지 않다. 다이쇼大正(1912∼1926년) 말년이었다.

루쉰의 소설을 직접 읽은 것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동급생인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2] 군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중국에 여행하면서 베이징에서 루쉰을 만났는데[3], 그 즈음 루쉰 등이 펴내고 있던 잡지 『어사語絲』 등을 받아서 귀경歸京한 뒤, 우리 동급생들과 작당해 현대중국문학연구회現代中國文學硏究會 비슷한 것을 계획했다. 그 첫 번째로 루쉰의 문학을 다 같이 논평하자고 했기에, 나 역시 『고향』을 읽고, 목가적인 서정성이라는 것으로 정리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당시는 루쉰의 문장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아주 어려운 것인 양 생각했던 기억이 있기에, 틀림없이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되나 캐나 지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구회도 그 1회로 중지되었다.

그것보다도 루쉰이라고 하는 이름이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내게는 오히려 그의 『중국소설사략』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대학에서 시오노야 온鹽谷溫 선생의 중국소설사 강의를 들었는데, 그 당시 중국의 소설사에 관해서는 시오노야 선생의 『중국문학개론강화中國文學槪論講話』가 가장 상세해서 이것이 이 방면에서는 최고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다 루쉰의 『중국소설사략』이 나왔는데, 풍부한 자료를 갖춘 체계적이고도 정연한 저술이라는 사실에 놀랐으며, 새로운 연구로 계시를 주는 바가 많았다. 이것에 자극받은 시오노야 선생은 명의 소설 삼언三言(『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과 이박二拍(『박안경기拍案驚奇』,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의 연구를 수행하고, 『금고기관今古奇觀』의 성립 계통을 밝혀냈다. 나도 나가자와 기쿠야長澤規矩也[4] 군, 가라시마 다케시 군과 함께 우에노도서관上野圖書館에서 『성세항언』을 조사하고, 삼언의 편자編者(펑멍룽馮夢龍)를 조사하는 등 [선생님을] 도와주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것도 결국은 『중국소설사략』을 길잡이로 삼아 진행한 조사 연구였다. 그렇게 하면서 『중국소설사략』은 일종의 중국소설사의 획기적인 명저라고 하는 감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 갓 입학한 처지였기에 『중국소설사략』의 저자라는 존재는 실로 이 방면의 뛰어난 학자라는 존경의 마음이 내 머릿속에 깊이 심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이었던 동창 모두 다들 그랬다.

나는 학교를 나온 뒤로(학교에 있을 때부터이긴 했지만) 잠시 사토 하루오佐藤春夫[5] 씨의 도움으로 중국소설의 번역 등을 했는데, 줄곧 중국에 가고 싶어 하다가 천 매 가량의 긴 번역이 일단락되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상하이에 갈 결심을 했다. 그것은 쇼와 5년(1930년) 말이었는데, 배편 등으로 인해 다음해인 6년 3월에야 상하이에 도착했다. 처음엔 한 달 가량 여행을 할 생각이었는데, 당시는 특별히 중국의 문단 사정에 관해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루쉰이 상하이에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 다만 사토 하루오 씨로부터 우치야마 간조內山完造 씨 앞으로 된 소개장을 갖고 있었기에, 어느 날 우치야마서점을 방문했다가 마침 루쉰이 상하이에 있고 거기다 매일 이 서점에 나타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아주 굉장한 인물이 여기 있다고 여겨 그에게서 뭐라도 아주 많이 배워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 대해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존경심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중국소설사략』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가로서도 중국 제1인자였다고 하는 정도의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상하이 판 『현대중국소설집』이라고 하는 책을 읽고, 또 『소설월보小說月報』라는 상하이에서 발행한 문학잡지도 이따금씩 들여다봤기 때문이었다.

맨 처음 그와 만났을 때의 인상이 어땠는지 지금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때 일시적인 여행자로 루쉰과 한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선명하게 당시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뒤로 줄곧 매일매일 열 달에 걸쳐 그와 접촉했기에 자연스럽게 첫 번째 인상도 지워져버렸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에 관해 공부하려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매일 우치야마서점에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가늠해서 나갔다. 아마도 그에게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데 어떤 책부터 읽어야 좋을지 물어 봤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쓴 『조화석습』이라는 책을 주었다. 나는 이 책을 내 하숙집에서 읽어나갔는데, 확실하지 않은 자구나 내용의 사항에 관해서는 다음날 우치야마서점에서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일을 당분간 계속했다. 『조화석습』은 그의 유소년 시기(및 일본에서 유학했던 시절) 그와 그 주변을 회억한 것으로, 그중에서도 중국의 생활 풍습과 그 안에서 성장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되돌아본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타국에서 온 나에게, 그리고 중국을 공부하고자 하는 나에게 우선 무엇보다 앞서 중국의 생활 풍습과 그 분위기를 알게 해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백 페이지가 안 되는 책으로 1주일이 안 돼서 다 읽어버렸다. 그 다음은 『들풀野草』이라는 자신의 산문시를 주었다. 산문시라고는 해도 서정적인 것은 아니고 격정적이고 노기 충만한(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것을 기탁한 것이 많았다.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을 썼는지, 그 구체적인 사정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나로서는 솔직히 잘 납득하지 못했지만, 이것을 통해 야위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목전의 그가 끓어오르는 강렬한 분노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중국소설사략』에 관한 질문을 시작했다. 이건 처음부터 번역할 생각이 있었기에(우치야마 간조 씨가 그렇게 하도록 추천했다), 거의 축자적으로 강해를 받았다. 그 즈음은 우치야마서점의 점포가 아니라 루쉰의 집으로 직접 나가게 되었다. 우치야마에서의 「만담漫談」(당시 그렇게 말했었다)을 마치고 나면, 그와 함께 그의 우거에 갔다(우치야마로부터 그의 우거까지는 2분이나 3분 거리). 그러고 나서 그의 테이블 앞에 둘이 나란히 걸터앉아 내가 소설사의 원문을 축자적으로 일본어로 번역해 읽다가, 읽기 어려운 곳은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자구나 내용 등에 관해 잘 모르는 곳은 철저하게 질문했다. 그에 대한 답은 자구의 해석이라면 간단했지만, 내용에 이르게 되면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대체로 오후 2시나 3시 경부터 시작해 저녁 5시부터 6시 경까지 이어졌다. 물론 어느 때는 잡담을 하기도 하고, 날마다 일어나는 시사에 대한 의견과 비평을 듣기도 하며 장단을 맞추는 일도 많았지만, 무릇 3개월은 그 책의 1권을 강독하는데 보냈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는 외부와 거의 교류가 없었기에 우선 손님이 없었다. 넓은 서재 겸 응접실에서 부인인 광핑 여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 자신의 일(책을 읽거나 원고를 베끼거나, 뜨개질을 하거나)을 하고 있었다(아들인 하이잉海嬰은 보모가 대체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집에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방해받을 일 없이 나는 충분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쉬서우창許壽裳이 펴낸 『루쉰연보』를 보면, 아마도 루쉰 자신의 일기에 의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민국 20년(1931 년) 7월 조條에 “마스다 와타루를 위해 『중국소설사략』을 강해하고 전부를 마쳤다”라고 되어 있는데(추기. 나중에 출판된 『루쉰 일기』를 보면, 7월 17일 경 ‘오후에 마스다 군을 위한 『중국소설사략』 강해를 마쳤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마쳤을 때는 나도 한시름 놓았지만, 그 역시도 한시름 놓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외침吶喊』과 『방황』 두 소설집의 강해를 마친 것이 그 해 말이었다. 결국 나는 그 1년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매일 같이 그의 서재에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은 세 시간 가량 그의 개인 교수를 받을 때도 있었다. 매일 쉬광핑 여사로부터 간식과 차를 접대 받았고, 일주일에 두 번 가량은 그의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 받았다. 실제로 싫은 기색도 없이, 잘 알아듣게 그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가르쳐주었다. 나는 뭐라 감사하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느끼고 있다.

[추기] 이상의 내용에 관해서는 루쉰 부인 쉬광핑 여사도 나중에 그녀가 1956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가서 쓴 「일본에서의 루쉰」(1956년 『문예월보』 10월호)에서도 회고한 바 있다. 루쉰이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는지 여부를 일본에서 사람들이 물어왔을 때, 루쉰은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청년에게는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했다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라고 말하면서 내 이름을 거명했던 것이다. “그(마스다)는 중국에 와서는 우치야마 선생(간조)의 소개로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루쉰은]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거의 매일, 오후의 집필 시간을 할애해 그를 위해 『중국소설사략』을 강해하였다. 겉으로는 학생이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친구처럼 평등하게 대했다. 이야기가 활기를 띠면 집에서 식사를 하고 밤까지 이어졌다. 때로는 같이 외출해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1]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1887∼1964년)는 야마구치 현山口県 시모노세키 시下関市 출신으로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이다. 1908년 창설된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지나문학과에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1911년 교토대학 중국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노 나오키狩野直喜의 지도하에 「원곡의 연구元曲の研究」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졸업 후에는 잠시 다이니뽄부도쿠가이부도전문학교大日本武徳会武道専門学校 교수를 지내다가 1918년 사직하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 강사 및 헤이안중학교平安中学校講師를 겸임했다. 1919년에 도시샤대학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때 『시나가쿠支那學』 잡지를 창간했는데, 당시 후스胡適, 저우쭤런周作人, 루쉰魯迅 등과 교유하며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도호쿠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25년 문부성 재외연구원으로 중국에 유학했다. 1926년 귀국한 뒤 도호쿠제국대학 문학부 지나학과의 제2강좌(중국문학) 초대 교수가 되었다. 1930년 『지나근세희곡사支那近世戯曲史』로 교토제국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5년 『지나문학개설支那文学概説』을 출판했다. 1938년에는 스즈키 도라오鈴木虎雄의 후임으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지나문학강좌의 교수가 되었는데, 도호쿠제국대학 교수도 겸임했다. 1947년 교토제국대학에서 퇴직한 뒤 간사이대학関西学院大学과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学 강사가 되었다. 1949년에는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学文 이학부 교수가 되었고, 1953년 일본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 1964년 리츠메이칸대학 대학원 강의를 마친 직후 심부전증으로 급사했다. 저서로 『지나 근세 희곡사』(支那近世戱曲史), 『지나 문학 사상사』(支那文學思想史) 등이 있다.

[2]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1903∼1967년)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문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쿠오카福岡 시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났다. 1928년 도쿄대학 중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39년 박사논문인 『「중국 현대문학의 연구支那現代文学の研究』를 도쿄대학에 제출했지만 전란 중이라 정식 박사학위는 1946년에 받았다. 이후 가마쿠라 시 도서관鎌倉市図書館 관장과 쇼와여자대학昭和女子大学, 사가미여자대학相模女子大学 등의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 『중국의 신극中国の新劇』, 『당시 상해唐詩詳解』, 『중국현대문학의 연구: 국공분열에서 상하이사변까지中国現代文学の研究 国共分裂から上海事変まで』 등이 있다.

[3] “1926년 8월 17일……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가 와서 시오노야 세츠잔鹽谷節山(곧 시오노야 온鹽谷溫)이 보낸 『전상평화삼국지全相平話三國志』 한 부를 보내주었다.”[루쉰(이주노 역), 『루쉰전집』 제17권, 그린비출판사, 2018년. 775쪽.]

[4] 나가자와 기쿠야長沢規矩也(1902∼1980년)는 일본의 중국문학자, 서지학자이다. 호는 세이안静盦이고, 가인歌人 나가자와 치즈가 그의 양녀이다.

[5] 사토 하루오佐藤春夫(1892∼1964년)는 근대 일본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주로 메이지明治 말기부터 쇼와昭和 시기에 걸쳐 문예평론과 수필, 동화, 희곡 등 다양한 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중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마스다 와타루와 『루쉰선집』을 간행하고, 그외 중국 고전소설과 시를 번역하는 등 중국문학 번역 활동도 왕성했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