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 또 하나의 수도 4

풍경

항저우는 수생 도시였다. 그 경관은 카이펑과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카이펑의 도시 사람이 형편이 달랐다고 탄식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수로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갈 때도 배를 사용했다. 수레를 사용했던 카이펑과 여기서 이미 차이가 났다.

물론 육로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는 가마(駕籠)나 수레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남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궁중의 퍼레이드 등은 두 개의 운하 사이에 끼어 있는 중심가를 행진했다. 게다가 이 가로는 이미 직선이 아니었다. 도중에 구부러졌던 것이다. 길이로 말하자면 카이펑보다 길었지만, 이 점에서는 크게 위엄이 부족했다.

궁중에서 기다리는 관리들도 육로를 사용했던 듯하다. 카이펑의 경우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말을 손에 넣고 싶었기 때문에 독직(瀆職) 소동을 일으킨 이도 있었다. 그런데 항저우에서는 가마가 유행했던 듯하다. 수레도 탔지만 관료들은 견여(肩輿)라 불리는 가마를 탔다.

견여는 일본의 여(輿)나 가마와 상당히 다르다. 전후를 한 사람씩 메는 점은 같지만, 타는 것은 그 중앙에 걸터앉는 형태였다. 이 가마는 시내에 가마 가게가 있어 임대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일본의 가마 가게와 시스템이 같다.

덧붙여 말하면 관료들 모두를 가마로 모셨던 것은 아니다. 장소에 따라 배를 이용한 이도 있었다. 남송 말의 재상인 쟈쓰다오는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정치를 사유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후를 사이에 두고 그 건너편에서 살았다. 거기서 대기하다가 급할 때는 배를 부렸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 배에는 삿대를 조종하는 사공이 없었다고 한다. 거선(車船)이라 불렸던 이 배는 미루어보건대 일종의 외륜선으로 기계장치인 듯하다. 재상이 부리는 진기한 배로서 주목을 모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운하를 달리는 배는 많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타는 배는 낙각두선(落脚頭船)이라 불렀다. 화물도 이것으로 운반했다. 부자는 자기 배를 갖고 있었다. 항저우의 운하를 달리는 것은 그런 배만이 아니었다. 항저우 옆에 후저우(湖州)라는 도시가 있다. 쌀의 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항저우의 미곡점에 쌀을 가지고 갈 때는 대탄선(大灘船)이라는 것을 이용했다. 그밖에 땔감이나 벽돌, 회반죽의 재료, 소금 등은 모두 이 배로 운반했다.

여객용 배도 있었다. 동선(𦨴船), 방선(舫船), 항선(航船), 비봉선(飛蓬船)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고용해 쑤저우, 후저우, 슈저우(秀州)로 가는 것이다. 관청에서도 고용했다. 그런 배가 항저우 인근의 운하에 밀집해 있었고 언제든 북적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선이 있는가 하면 낚시 배도 있었다. 홍색으로 칠한 것은 절이나 도관(道觀)의 배였다. 동선(舟同船), 탄선(灘船)으로 왕래했다. 이것으로 먹을거리나 땔감을 운반했다. 그 속을 분뇨를 운반하는 배가 다녔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대로다.

항저우는 15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 안에만 빽빽하게 인가가 밀집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 밖에도 넘쳐났다. 성 안에서 사는 이는 황족이나 고급 관료, 장사에 열중하는 이들, 또 연금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이 살았고, 성 밖에는 하급 관리나 군인, 농가나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살았다. 그들이 항저우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또 펑황산과 같이 외국의 큰 부자들이 살고 있어 객산(客山)이라 불렸던 지역도 있었다.

성 안에는 사치스러운 물품을 파는 가게가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진주나 보석 등 귀금속을 파는 가게, 포목이나 능직(綾織), 비단(錦), 나사(羅絲), 축면(縮緬)과 같은 직물을 파는 가게, 서화나 골동품을 파는 가게, 국수나 밥을 먹게 해주는 가게, 고기나 식용으로 쓰는 내장 등 부식을 파는 가게 등이 늘어서 있었다. 대체로 무엇이 팔렸던 것인지 알 수는 없어도 확실히 많은 물품이 가게 앞에 늘어서 사람들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저우 사람의 세련된 혀는 세계에서 으뜸인 중국 요리를 키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고종 황제가 가신인 장쥔(張俊)의 저택에 행차했을 때의 헌립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때 황제로부터 시종에 이르기까지 전부 2백 여 그릇의 요리가 나왔다고 한다. 고다 로한(幸田露伴, 1867~1947년)을 필두로 이 메뉴를 언급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것들을 읽어주기 바란다. 그럼에도 나는 이 메뉴를 길게 이어서 써놓은 저우미(周密)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당시의 수도에서 어지간히 평판이 있고, 항간에서 소문난 요리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항저우 성 안은 활기가 넘쳤다. 도시에는 구조적인 분화가 일어났고, 고급주택가나 시장, 사원 밀집지역이 있는 곳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성 안 곳곳에 있는데, 집중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미곡점은 북쪽의 미스샹(美市巷) 부근에 많았다. 성 안의 미곡점은 그런 장소의 도매상이 종류와 가격을 결정해 운반해 온 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당시 이미 쌀에는 갖가지 종류가 있었다. 쌀은 상품작물화 되었고, 종류도 풍부했기에 거래는 복잡했다. 게다가 성 안에는 황족이나 고급관료와 같이 쌀을 봉급으로 받는 이 말고도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도 쌀은 매일 운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래의 지불은 날짜를 정하고 하는 것으로 그날은 도매상이 수금하러 왔다. 그 밖에 신카이먼(新開門)의 차오챠오(草橋) 아래의 난졔(南街)에도 30에서 40가 정도의 미곡점이 있어 마찬가지로 장사를 했다. 물론 여기서도 운반업자가 있고 쌀을 담는 포대도 임대했다.

육곳간이나 어물전도 규모가 컸다. 슈이팡(修義坊)에 있는 육시(肉市) 등 두 갈래의 길은 모두 도살장으로 매일 수백 마리의 소와 돼지가 도살되었다. 이것 또한 여러 가지로 나뉘었다. 이곳의 고기와 뼈는 용도에 따라 안팎의 요릿집이나 주루로 팔렸다. 일을 시작하는 것이 3경이라고 했으니 자정부터 동틀 때까지의 일이었다. 어물전도 100곳에서 200곳이라고 했기에, 이것 또한 방대한 숫자였다. 물과 호수의 땅에 걸맞게 종류도 풍부했다. 이것들을 작은 뒷골목까지 팔러 와서 더 할 나위 없이 편리했다.

오락의 발달

어느 시대나 장사와 오락이 도시의 꽃이다. 항저우도 카이펑과 마찬가지로 상업 거래가 활발히 행해졌는데, 역시 와자의 발달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 숫자는 카이펑을 훨씬 넘어서서 23개 소가 기록되어 있다. 상연된 연예도 50종류를 넘는다. 이것들은 구란(勾欄)이라 불리는 연예장에서 공연되었는데, 항저우의 북와자(北瓦子)에는 13좌가 있었다고 한다. 남송대의 브로드웨이라 부르는 곳이었을까? 여기서 활약한 예인의 숫자도 현격하게 증가했다. ‘소설(小說)’을 말하는 이도 60명 가깝고 ‘강사(講史)’를 말하는 이 26명, ‘설경(說經)’을 말하는 이 20인 ‘상미(商迷)’를 말하는 이 13명, ‘합생(合生)’을 말하는 이 1명. 여기서도 많은 연예 목록과 예인의 이름이 소개된다. 덧붙여 말하면 인기가 있었던 것은 ‘강사’였다. 북와자의 13좌 가운데 2좌는 ‘강사’ 전문이었다고 한다.

이들 상연작은 서회(書會) 또는 사회(社會)라는 기예인 단체에서 만들어졌던 듯하다. 이 단체의 실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대의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그들의 활발한 활동이 예능계를 지탱했던 듯하다. 그런 활동이 《수호전》과 《삼국지연의》를 완성시켜 갔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공연되었던 상연작의 내용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에 전해오는 것도 약간 있고, 원대와 명대 소설 속에 형태를 남긴 것도 적지 않다. 역주서도 많이 있어 흥미 있는 이는 꼭 읽어보면 좋다. 아울러 근세의 일본 문학, 평론을 읽으면, 여러 가지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나 문학, 평론에 흥미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어찌 된 셈인지 아시아의 것은 읽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 책이 그런 중국문학의 유산과 그 연구자의 성과에 의해 도시 경관을 복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독자들은 반드시 아주 친숙한 세계를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원말의 《취옹담록》에는 「화화상(花和尙)」, 「무행자(武行者)」, 「비룡기(飛龍記)」 등의 연극 목록이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수호전》 이야기와 관계가 있지만 「비룡기」는 조금 뉴앙스가 다르다. 이것은 송을 건국한 태조 자오쾅인(趙匡胤)의 이야기다. 태조는 젊었을 때부터 호방하고 거칠 것 없었다. 그리고 전국을 유람하며 무술을 닦았다는 전설도 있다. 이로부터 그의 이야기가 성립해 연극 목록이 되어 가설무대까지 걸쳐서 많은 인기를 모았던 듯하다.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인기를 끌었을까? 명초의 조선인 통역을 위한 텍스트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다음과 같은 모범 회화가 실려 있다.

“우리 부쳰(部前)에 책을 사러 갑니다.”

“무슨 책을 삽니까?”

“《조태조비룡기(趙太祖飛龍記)》와 《당 삼장 서유기(唐三藏西遊記)》를 삽시다.”

부쳰(部前)은 다두(大都), 곧 베이징(北京)의 지명이다. 회화의 범례에 나올 정도로 이 2권짜리 책이 당시 서점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당 삼장 서유기》가 유명한 《서유기》라고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성립되어 갔을까? 나카노 미요코(中野美代子)의 일련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면 일목요연하다. 그리고 하나 더 《조태조비룡기》는 송 태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명말청초의 《경세통언(警世通言)》이라는 책에 태조가 크게 날뛰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 명의 사람이 당해낼 수 없을 만큼의 용맹을 가졌던 젊은 날의 태조는 카이펑에서 크게 난동을 부린 것을 책잡혀 고검(孤劍)을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도중에 들렀던 백부의 집에서 악한에게 납치당했던 아가씨를 보고 그를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도중에도 덤벼드는 악한을 물리치고 무사히 호송을 마쳤다. [아가씨의] 양친은 크게 기뻐하는 한편 천리를 함께 여행한 젊은 남녀의 일이기에,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였다. 결백한 태조는 만약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여기에 오는 도중에 손에 넣었을 것이라고 분연히 말했다. 화가 난 그는 그대로 길을 나섰고 결백을 믿어주지 않자 아가씨는 슬퍼하다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생각해 보면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런 고전적인 이야기였지만 송 왕조 건국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기를 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태조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시(无錫)였는지 전쟝(鎭江)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남을 혼자 여행하고 있던 나는 기차역 매점에서 《자오쾅인 연의(趙匡胤演義)》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손에 들고 보니 젊은 날의 태조의 활약 이야기였다. 서문에 쑨후이원(孫惠文)의 구술을 류관팡(劉關芳)이 정리했다고 했다. 봉건적인 색채가 강하기에 주의해서 읽으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것이 출판되었다는 것 자체로 태조의 시들지 않는 인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책을 손에 넣었을 때의 놀라움과 열차 안에서 동승한 중국인이 이 책을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의 표정이 인상에 남는다.

송에서 명에 걸쳐서 중국 사회에서 성장한 서민문화는 그 뒤 일본에 유입되어 에도시대의 문화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항저우는 이것을 잉태한 도시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당시의 항저우 시내는 운하를 운행하는 뱃소리, 도로를 가는 수레 소리, 소리 높여 물건을 팔거나, 그들과 흥정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던 거리였다. 그 가운데 한층 더 높게 울려 퍼진 것이 예인(藝人)들의 소리였다. 순간의 환락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시내로 잇달아 나와 가설무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중국 소설에는 청중과 예인의 거래를 기록해 놓은 것도 많다.

범죄 도시

도시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범죄다. 좋든 싫든 간에, 사람들은 사건에 휘말려 있다. 무엇이 인간을 악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어느 시대건 악과 범죄와 애정사는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송의 도시에도 온갖 종류의 범죄가 있었다. 갈취, 날치기, 사기, 유괴, 강도, 독직(瀆職), 살인 등등. 송․원․명으로 성숙해 갔던 소설류에는 온갖 종류의 범죄가 기록되어 있다. 의롭지 못한 밀통을 하는 이, 남의 아내를 훔쳐 가는 이, 도움을 청한 아가씨를 팔아치운 이, 병이 난 사위를 내다 버린 이 등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도시에서는 유령과 귀신까지도 인간 세상에 끼어들어 악을 행했다.

그런 경우만이 아니었다. 공교롭게 범죄에 휘말린 이도 많았다. 저 《수호전》의 세계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어느 틈엔가 범죄에 휘말려들어 전락해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별 것 아닌 일로 전락해 가는 이도 있는가 하면, 선의가 원수가 되어 범죄에 휘말려 드는 이도 있었다. 매일 벌어지는 다툼이 이내 사건이 되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사소한 이별부터 독직이나 국가의 공방에 연루되는 경우까지 사람들은 혼란과 운명의 변천, 그리고 악과 관련 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중요한 책으로 《명공제판청명집(明公諸判淸明集)》이 있다. 송대의 재판 판례를 모아놓은 것이다. 한때 전모를 알 수 없었는데, 일본에 송대에 인쇄된 것이 일부분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명대에 인쇄된 것의 소재가 중국에서 확인되어 공간(公刊)된 것이다. 그 안에는 인간 세상의 얽히고설킨 일들, 이를테면 유산 상속으로부터 물건의 임차, 유력자의 횡포에서 살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는지 모른다.

일상의 고뇌나 이치에 닿지 않는 수난까지, 많은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정한 재판과 재판관을 요구했다. 지금도 중국의 명재판관으로 인기가 있는 바오궁(包公)의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연전에 타이완(臺灣)을 여행했을 때, 잔치 때 하는 연극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는 배우가 바오궁의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바오궁”, “바오궁” 하고 발원하는 소리에서 지금도 인기가 시들지 않은 바오궁, 곧 바오정(包拯)의 인기를 엿볼 수 있었다.

송대의 명신인 바오정(包拯), 곧 바오 대제(包待制)의 재판 안건을 명대에 정리한 《바오공안(包公案)》은 마찬가지로 남송대에 고금의 명재판관의 판례를 모아 놓은 《당음비사(棠陰比事)》와 함께 많이 읽혔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읽혀져 에도시대에 형성되었던 명재판관의 이야기, 이른바 《오오카세이단(大岡政談)》이나 교토쇼시다이(京都所代司)의 재판에서 소재를 취한 《이타쿠라세이단(板倉政談)》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오카세이단》이나 《이타쿠라세이단》, 곧 도오야마 긴시로(遠山金四郞)의 이야기가 인기를 모으고, 나아가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부조리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명재판관의 인기가 높고 결국 쇼군(將軍)이나 봉행(奉行) 등이 직접 마을에 나와 악을 처벌했다고 하는 줄거리가 지금도 인기를 모은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세계를 서민의 감정에서 일도양단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철저하게 가공의 이야기인 《미즈토코몽만유기(水戶黃門漫遊記)》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 재판 안건은 당시 사회와 구조, 얽혀 있는 세상사와 사고방식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그 자료로서의 사용방법은 쉽지 않다. 일어나던 범죄는 확실히 당시 사회를 보여준다. 한편으로 적발된 사건은 사회의 모순으로서 돌출한 것 역시 확실하다. 일벌백계의 의미를 담고 적발된 것도 있는가 하면, 사회 변화 속에서 범죄로서 적발된 것도 있었다.

또 법률이나 재판이라는 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사회보다 한 걸음 늦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변화나 사건을 예측하고 만든 법률은 실제로는 별로 없다고 한 것도 과언은 아니다. 애당초 시행할 즈음에 예측해서 만들어진 것도 많이 있지만, 이것들은 대체로 곧 현상에 들어맞지 않게 된다.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법률을 바로잡아도 결국은 현상의 추인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법률은 허용 범위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법률 문서로 사회의 얼개를 밝혀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금이나마 당시의 설화가 생겨난 배경을 엿본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송의 도시의 악당들

도시의 악당들에 관해서는 조금씩이긴 하지만 그때마다 서술해 왔다. 사람을 죽여 고기로 만들어 팔았던 목욕탕, 성벽 공사비를 착복한 관리,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한 것도 모자라 여자를 납치해 하수구에서 살았던 남자들.

그런 류의 범죄는 가벼운 것에서 큰 것까지 거리에 넘쳐났다. 멍위안라오(孟元老)는 점 따위는 엉터리라고 말했다. 과거 수험자가 점을 의뢰할 때는 과거수험자 등에게 떨어진다고 말하는 게 좋다. 과거 수험자 등은 대체로는 떨어진 사람이다. 그곳에 오는 사람에게 떨어진다고 말해 두면 대체로 들어맞는다. 그렇게 하면 그 점은 맞는 게 된다.

린안의 일을 엮은 《무림구사(武林舊事)》에 당시의 범죄가 열거되어 있다. 그룹으로 사기도박에 억지로 끌어들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 궤방도국(櫃坊賭局). 상부에 연줄이 있다고 엽관 운동, 공무원 시험, 정부의 은전, 인사이동, 소송, 장사 등을 유리하게 옮겨주는 체하고 재물을 갈취하는 것이 수공덕국(水功德局). 물건을 매매할 때 잽싸게 바꿔치기 하는 재간을 부리는 이가 백일적(白日賊). 종이를 옷에, 구리나 납을 금이나 은에, 흙과 나무를 향약(香藥)에 잽싸게 바꿔치기 했다고 한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 나오면 소매치기도 있었다. 의복과 신발, 장신구 등을 빼앗아 갔다고 하니 상당히 강압적인 소매치기였다. 이것은 멱첩아(覓貼兒)라고 부른다. 거리를 걷다 보면, 갈취범이나 날치기와도 만난다. 란가호(欄街虎), 구조룡(九條龍) 등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린안의 거리는 위험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담당 관리는 수천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치안 유지에 대응했다. 그들이 그런 불한당들을 체포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 가운데 완력이 있는 이는 도적 출신도 많았다고 한다. 《메아카시 킨주로의 생애(目明し金十郞の生涯)》의 세계였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포리(捕吏) 가운데 암흑세계 출신 인물이 등용되었던 것은 자주 지적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집에 있으면 괜찮은가? 금고털이나 좀도둑이 있었기에 결코 집에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집에 있는 여성을 교묘하게 유인해 내 팔아버린 이도 있었던 것이다. 송의 도시에는 상당히 진보된 면도 엿보였지만, 범죄의 면에서도 활기를 드러냈던 듯하다.

물론 여성에 얽힌 범죄도 있다. 미인국(美人局)이다. 화류계 여자를 여염집 규수로 내세워 돈을 편취했던 것이다. 이런 수법의 이야기는 때로 소설에 나온다. 린안의 소묘를 했던 히비노 다케오(日比野丈夫, 1914~2007년)는 명의 톈루청(田汝成)의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餘)》를 인용해 남송의 전형적인 범죄를 소개했다.

후저우(湖州) 부자의 철부지 아들인 류아무개(劉某)라는 소년이 여관 주인이 획책한 미인국(美人局)에 걸려든 이야기다.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소년이 똑같이 여관에서 놀고 있던 군인의 아내와 그 첩에게 소개받아 놀고 있는데, 그곳에 주인이 돌아온다. 소년은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내고 용서받는다. 이것은 실은 그가 돈을 갖고 있는 것에 눈독을 들인 여관의 주인 영감이 꾸며놓은 함정이었다는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좀 더 만만치 않은 것도 있다. 《금고기관(今古奇觀)》 38권에 있는 이야기는 피해자가 이긴 이야기이다. 한다 하는 난봉꾼이 미인국에 걸려들었다. 그런데 그는 들이닥쳐 “남의 마누라하고 뭘 하고 있는 거냐. 이제 어쩔테냐. 살려두지 않겠다”고 칼을 휘두르는 남자를 차분하게 대했다. “유혹한 것은 자네 마누라일세. 죽이려면 둘 다 죽이게나.”, “자네 마누라는 [자네에게 돈 벌어다 주는] 화수분이지 않은가.”, “송사하면 조작이 들통 나서 곤란한 것은 그쪽이지. 따로 다른 봉이나 찾게나.”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여자를 범하고 유유히 떠나갔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송대에는 경찰 기구도 정비되고 화재에 대한 소화 시스템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특히 화재가 많았던 린안에서는 이 시스템이 성숙되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고 있다고 위험이 없을 리는 없다. 사람들은 도시 생활을 향수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에서 일어나는 위험에도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흥청대며 활기가 넘쳤던 도시의 발전은 동시에 사람들에게 높은 대가도 청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