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산수, 그리 높지 않지만 급경사를 이루지만 날카롭지 않게 볼록 솟은 봉우리들, 수많은 암봉들 사이를 꽃뱀인 듯 구렁이인 듯 빠져나가는 강물, 문득 나타나는 폭포, 말없이 사라지는 협곡,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동굴이 여행객의 탄성을 불러낸다. 대표적인 여행지는 구이린(桂林) 남부의 양쒀현이다. 이곳에서 리강(漓江)의 유람선을 타고 계림산수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양쒀에서 구이린 방향으로 15킬로미터 정도 가면 싱핑진이라는 작은 촌락이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20위안짜리 지폐 뒷면의 도안에 사용된 바로 그 풍광을 볼 수 있다. 여행객들은 지폐의 도안과 눈앞의 실경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느라 시선을 바삐 움직이곤 한다. 싱핑진에서 다시 리강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첸징촌(潛經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1942년 링짜오라는 농장이 세워졌다.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던 류자명이 2년 반 동안 혁명이 아닌 농업기술을 지도했었다.
첸징촌에서 구이린을 거쳐 동북으로 500km를 가면 후난성 창사에 이른다. 창사의 후난농업대학에는 류자명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그가 거주하던 관사는 <류자명 진열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흉상의 기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류자명(1894.1~1985.4)
대한민국 국적의 국제 우인(友人),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했다. 후난농업대학 교수, 저명한 원예학자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북한(조선국)에서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류자명의 90여년 일생에는 독립운동과 원예학, 남한과 북한, 한국과 중국, 신중국과 중화민국,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마오쩌둥 김일성 김원봉 김구라는, 서로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는 1919년 3월 고향인 충주의 간이농업학교에서 제자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도피했다. 서울에서 청년외교단 활동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충청북도 의원, 신한청년단(1919) 활동을 했다.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 이회영 등과 함께 활동(1921)하기도 했고, 톈진의 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했다. 아나키스트로서 의열단에 가입(1922)했고, 재중국 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1924)했다. 일제 밀정 김달하를 처단(1925)했고,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1927)했다. 우한 공안국에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1928)되기도 했으며,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1933)하고, 육삼정 의거를 주도(1933)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과 넷이서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1937)하고 조선의용대 지도위원(1938)이란 중책을 맡았다. 류자명은 이회영 신채호와 함께 아니키즘을 독립혁명의 이념으로 수용했다. 명문으로도 유명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은, 류자명이 부탁하여 신채호가 집필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류자명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2002년 3월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애국지사 묘역 제2-964)했다.
중국에서 류자명은 농학자이자 원예학자로 존경받는다. 그는 애초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의 공립간이농업학교 교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농학자로서의 활동이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난징 합작농장에서 농사기술을 지도(1929)했고, 푸젠성 취안저우의 리밍중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며 중국 열대식물을 조사(1929)했다. 상하이 리다(立達)학원 농촌교육과에서 일본어와 농학을 가르쳤다(1930~35). 푸젠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시험장 원예계 주임(1940)을 거쳐, 구이린의 링짜오농장에서 농업기술을 지도(1942~44)했다. 푸젠성 캉러신촌의 주임(1944~46)과 타이완 농림처 기술실 책임자(1946~1950)를 맡았다. 후난대학 교수(1950)로 옮겨가서 후난농업대학(1951) 창설에 참여하고 은퇴할 때까지 봉직했다. 후난농대는 류자명의 90세 축수다과회를 열어주었고, 중국 농학회는 표창장(1983)을 수여했다. 후난성 정부는 그의 서거(1985.4.17) 후에 후난 과학기술의 별이란 칭호(1996)를 수여했다.
류자명이 중국 대륙에 남게 된 사연은 기구하기만 하다. 류자명은 30여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1950년 6월 타이완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부산행 여객선을 타려고 홍콩에 도착한 바로 그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산행 선편은 취소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우연인지 행운인지 후난성에서 류자명의 처지를 알게 되고 바로 그를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후난농대에서는 후학을 양성하면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강남지역에서의 포도의 재배기술과 같은 실용분야는 물론 중국에서 재배하는 벼의 기원이나 마왕퇴에서 발굴된 재배식물의 고증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했다.
중국인과의 교류도 넓고 깊었다. 각국의 아나키스트들과는 물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인사와도 친밀했다. 루쉰에 버금가는 중국의 대문호였던 바진(巴金)과의 60년 우정도 잘 알려져 있다. 바진이 1936년 4월에 쓴 단편소설 <머리카락 이야기>은 류자명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고, 여러 가지 무기를 지니고 다녔으며, 여러 나라 국토를 누비고 다녔는데,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예사로운 일”이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류자명을 “젊음과 활력이 넘치던 머리가, 잿빛의 머릿결 가운데 가끔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드러나곤 하는 백발이 성성해졌다.”고 묘사했다. 독립운동은 앞날을 보기 어렵고 생계마저 힘들었던 1930년대 류자명의 시대적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