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34-변방의 혁명가 2 남북한 중국에서 존경받는 류자명

계림산수, 그리 높지 않지만 급경사를 이루지만 날카롭지 않게 볼록 솟은 봉우리들, 수많은 암봉들 사이를 꽃뱀인 듯 구렁이인 듯 빠져나가는 강물, 문득 나타나는 폭포, 말없이 사라지는 협곡,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동굴이 여행객의 탄성을 불러낸다. 대표적인 여행지는 구이린(桂林) 남부의 양쒀현이다. 이곳에서 리강(漓江)의 유람선을 타고 계림산수에 흠뻑 취할 수 있다.

guilin
류자명이 활동했던 중국 계림은 산자수명한 풍경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양쒀에서 구이린 방향으로 15킬로미터 정도 가면 싱핑진이라는 작은 촌락이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20위안짜리 지폐 뒷면의 도안에 사용된 바로 그 풍광을 볼 수 있다. 여행객들은 지폐의 도안과 눈앞의 실경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느라 시선을 바삐 움직이곤 한다. 싱핑진에서 다시 리강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첸징촌(潛經村)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1942년 링짜오라는 농장이 세워졌다.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던 류자명이 2년 반 동안 혁명이 아닌 농업기술을 지도했었다.

jinian3
첸징촌의 포도나무 과수원

첸징촌에서 구이린을 거쳐 동북으로 500km를 가면 후난성 창사에 이른다. 창사의 후난농업대학에는 류자명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그가 거주하던 관사는 <류자명 진열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흉상의 기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류자명(1894.1~1985.4)

대한민국 국적의 국제 우인(友人),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했다. 후난농업대학 교수, 저명한 원예학자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북한(조선국)에서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류자명의 90여년 일생에는 독립운동과 원예학, 남한과 북한, 한국과 중국, 신중국과 중화민국,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마오쩌둥 김일성 김원봉 김구라는, 서로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liu2(6)
>창사 후난농업대학의 류자명기념전시실

그는 1919년 3월 고향인 충주의 간이농업학교에서 제자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도피했다. 서울에서 청년외교단 활동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충청북도 의원, 신한청년단(1919) 활동을 했다.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 이회영 등과 함께 활동(1921)하기도 했고, 톈진의 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했다. 아나키스트로서 의열단에 가입(1922)했고, 재중국 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1924)했다. 일제 밀정 김달하를 처단(1925)했고,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1927)했다. 우한 공안국에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1928)되기도 했으며,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성(1933)하고, 육삼정 의거를 주도(1933)했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과 넷이서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1937)하고 조선의용대 지도위원(1938)이란 중책을 맡았다. 류자명은 이회영 신채호와 함께 아니키즘을 독립혁명의 이념으로 수용했다. 명문으로도 유명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은, 류자명이 부탁하여 신채호가 집필한 것이다.

liuziming
남북한과 중국 모두에서 서훈을 받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류자명.

대한민국은 류자명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2002년 3월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애국지사 묘역 제2-964)했다.

중국에서 류자명은 농학자이자 원예학자로 존경받는다. 그는 애초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의 공립간이농업학교 교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생계를 위해 농학자로서의 활동이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난징 합작농장에서 농사기술을 지도(1929)했고, 푸젠성 취안저우의 리밍중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며 중국 열대식물을 조사(1929)했다. 상하이 리다(立達)학원 농촌교육과에서 일본어와 농학을 가르쳤다(1930~35). 푸젠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시험장 원예계 주임(1940)을 거쳐, 구이린의 링짜오농장에서 농업기술을 지도(1942~44)했다. 푸젠성 캉러신촌의 주임(1944~46)과 타이완 농림처 기술실 책임자(1946~1950)를 맡았다. 후난대학 교수(1950)로 옮겨가서 후난농업대학(1951) 창설에 참여하고 은퇴할 때까지 봉직했다. 후난농대는 류자명의 90세 축수다과회를 열어주었고, 중국 농학회는 표창장(1983)을 수여했다. 후난성 정부는 그의 서거(1985.4.17) 후에 후난 과학기술의 별이란 칭호(1996)를 수여했다.

jinian1
류자명의 고향 충주에는 류자명 추모비도 세워졌다. 그의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독립유공자추모비가 바로 그것이다.

류자명이 중국 대륙에 남게 된 사연은 기구하기만 하다. 류자명은 30여년의 망명생활을 접고 1950년 6월 타이완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부산행 여객선을 타려고 홍콩에 도착한 바로 그날,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산행 선편은 취소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우연인지 행운인지 후난성에서 류자명의 처지를 알게 되고 바로 그를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그는 후난농대에서는 후학을 양성하면서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강남지역에서의 포도의 재배기술과 같은 실용분야는 물론 중국에서 재배하는 벼의 기원이나 마왕퇴에서 발굴된 재배식물의 고증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했다.

중국인과의 교류도 넓고 깊었다. 각국의 아나키스트들과는 물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인사와도 친밀했다. 루쉰에 버금가는 중국의 대문호였던 바진(巴金)과의 60년 우정도 잘 알려져 있다. 바진이 1936년 4월에 쓴 단편소설 <머리카락 이야기>은 류자명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줄 알았고, 여러 가지 무기를 지니고 다녔으며, 여러 나라 국토를 누비고 다녔는데,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예사로운 일”이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류자명을 “젊음과 활력이 넘치던 머리가, 잿빛의 머릿결 가운데 가끔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드러나곤 하는 백발이 성성해졌다.”고 묘사했다. 독립운동은 앞날을 보기 어렵고 생계마저 힘들었던 1930년대 류자명의 시대적 초상이다.

liu
후난농업대학에 세워진 류자명의 흉상. 중국에 농업기술을 전수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일제 패망 이후 류자명의 운명은 북한으로 기울어갔다. 그가 김원봉 등과 함께 창설했고 공식적인 4인의 지도원의 일원으로 깊이 관여했던 조선의용대의 상당수가 북한으로 귀국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중국은 남한과는 적국으로 완전히 단절되었고, 재중 조선인의 국적은 북한으로 간주되었다. 1954년에는 북한의 방중대표단이 후난성의 수도 창사를 방문하자 류자명은 환영위원을 담당했었다. 3년 뒤인 1957년 법적 조국인 북한으로부터 귀국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귀국 직전에 귀국하지 말라는 통지를 받아 다시 중국 땅에 머무르게 됐다. 류자명의 귀국을 뒤늦게 인지한 신중국의 고등교육부가 외교부를 통해 류자명의 잔류를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류자명은 1972년에 북한이 지정한 후난성과 창사시의 공민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78년 12월 그는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에서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재중 농학자와 현지 공민책임자로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었다. 김일성 유일체제에서 아나키스트의 독립운동을 무에 그리 평가해주었겠는가.

liuditu

류자명은 한국 북한 중국 세 나라에서 전부 서훈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농학자 원예학자로서 인민의 좋은 친구(好朋友)였고, 대한민국에서는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였으며 북한에서는 조국의 명예를 높인 재외학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그의 일생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나로서는 속단하기 어렵다.

처음 중국으로 망명할 때 고향에는 이미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러나 귀국조차 보장할 수 없는 망명 생활 속에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1933)에 중국여성 류쩌충(劉則忠)과 중혼을 한 것이다. 혈육의 깊은 인연을 쉽게 털어낼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분단된 조국은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했다. 사상편력으로는 북한과의 친연성이 높았겠으나 남한은 가족이 있는 고향이었다.

<
jinian2
충주 류자명 기념비의 비문

그가 은퇴한 다음 후난농업대학이 주최한 류자명 90세 축수연이 CCTV에 보도됐다. 이를 계기로 고향의 가족들이 류자명의 생존사실을 알게 됐다. 류자명에게도 고향소식이 짤막하게 전달됐고 그는 안절부절했다는, 명절이 되면 혼자 조용히 아리랑을 불렀다는 안타까운 전언이 슬픈 공명을 일으킨다. 그는 “남북이 민족대단결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다.”는 편지도 썼다. 다른 글에서는 “하늘에 달이 두 개”인 것을 탄식하기도 했다.

여행객에게 계림산수는 선계였으나 20세기 망명객 류자명에게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일생의 반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으려는 열정과 이념을 토해냈으나 그래봐야 남의 나라를 떠도는 ‘망국노’였다. 나머지 반은 조국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재외국인으로 살아야 했다. 변방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의 심연에는 고향나라만 있을 뿐 국가 자체가 희미한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