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2 한문제漢文帝 4

한문제漢文帝

13. 후세에 비판받는 대신

현인보다 위에 성인이 있고, 고관대작 위에 천자가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선행을 본받는 것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행실을 쌓는 것이고, 경대부를 공경하는 것은 군왕을 존엄하게 하기 위한 행실을 쌓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정의 섬돌(신하들)이 (군주를) 존중하여[陛尊], 당(堂)의 측면이 땅에서 멀어지게 함[廉遠]으로써, 당(堂, 군주의 존엄)이 높아지게[堂高] 한다는 주장이다.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는 천하에는 다섯 등급의 오랑캐가 있는데 천자는 그 위 높은 곳에 홀로 있으면서 여러 신하와 다섯 등급의 오랑캐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므로 가의가 신하를 죽이고 모욕하는 일이 너무 심한데 대신들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아! 진시황이 변법(變法)한 이래 천하 선비들의 염치가 5, 6할 정도 사라져 버렸구나! 한나라 때는 간신히 보존했고,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겨우 맥을 이었으나 여진족과 몽고족이 중국의 주인이 되면서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명 태조 홍무제가 나라를 세운 후 선비의 염치를 회복하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정말 그렇다면 그들이 매질을 당하고 모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거늘, 어떻게 그들이 위로 군주와 나라의 재앙과 복을 염려하고 아래로 백성의 분노와 원망을 두려워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사대부의 몸으로 금방 군주의 무릎에 앉혀져 총애를 받다가 또 금방 깊은 연못에 던져지며, 꾸짖는 소리에 익숙해지고 질곡(桎梏)의 고통을 두루 겪으며, 발가벗겨진 채 사예교위(司隷校尉)에게 능멸을 받았으니, 설령 은인자중하여 요행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청의(淸議)로 조정을 풍자하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죽은 뒤의 일이지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악독한 간신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궁벽한 처마 밑에서나 가능하지 상대의 면전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상황이 비록 그렇더라도 사대부 역시 그런 모욕을 자초한 면이 있다. 소하(蕭何)는 옥에서 나온 뒤에 여전히 승상으로 있었고, 주발(周勃)도 옥에서 나온 뒤에 여전히 강후(絳侯)의 신분을 유지했으니, 군주가 자신들을 죄수로 만들어 옥에 가두는 것이야 막지 못했더라도 왜 자신이 제후 신분과 승상 벼슬을 벗어 던지지 못했을까? 목숨을 걸고 직간(直諫)하는 신하는 북시(北寺)의 감옥과 정장(廷杖)의 치욕도 피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풀려나고 매질에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기며 좋아하지만, 나중에 다시 홀을 받쳐 들고 관복(官服)을 입은 채 조정에 나가는데,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추원표(鄒元標)가 다시 구경(九卿)이 되었지만 자기 몸이 상하고 부모가 욕되게 죽도록 한 죄는 어떻게 피하겠는가?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자는 일찍이 죄수들과 함께 갇혀 매질을 당해도 치욕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어찌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어 예우할 만한 인물이겠는가!”

군주는 칭찬하지 않는데 신하가 편안히 받아들이고, 신하가 편안히 받아들이니 군주는 더욱 신하를 천대한다. 관대하고 온후한 인종(仁宗)도 강직한 좨주(祭酒) 이시면(李時勉)에게 형틀을 채우고 형벌을 내렸지만 벼슬을 사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랑캐 풍속에 점차 물들어 군주와 신하 사이의 도의가 없어졌으니, 이것이야말로 가의가 통곡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14. 대신을 모욕하는 것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사랑받고 욕을 먹을 수는 있지만 살해당하지는 않는다. 신체라는 것은 부모가 주는 것이므로, 사랑받고 욕을 먹으며 부모의 분부를 따르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살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신들이 낳은 아들의 목숨을 해치는 것이니 이런 아비를 아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식이 그런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식이라고 할 수 없다. 신하는 군주가 존중할 수도, 천대할 수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지만,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 형벌과 포상은 하늘이 군주에게 내린 권리이니 군주가 존중과 천대, 살리고 죽이는 데에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신하는 당연히 하늘의 뜻에 순응해야 한다. 모욕을 주는 것은 군주가 스스로 예의에 어긋나는 처사를 한 것이니 이런 군주는 군주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하가 부끄러움을 모르고 거기에 순응한다면 그런 신하는 신하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신이 자살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스스로 결행하는 경우,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 신하가 자식과 다른 것은 하늘이 안배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인성이 순한 사람은 거역하지 못하고, 강인한 이는 굴복할 수 없다.

가의가 말로 문제(文帝)를 감동시켰는데 당시의 대신들 가운데 그 얘기를 듣고 부끄러움을 느낀 이가 있었을까? 당시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조옥(詔獄)이나 정장(廷杖) 처분을 받고도 여전히 관복을 입고 조정에 서 있던 대신들 가운데 부끄러움을 느낀 이가 있었을까? 조옥이나 정장 처분을 받고 자살한 이가 있었는데 군주가 사대부를 욕보인다면 징계(懲戒)할 수 있다. 그래서 고반룡(高攀龍)은 이렇게 말했다.

“대신을 모욕하는 것은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그래서 그가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나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재앙이 끝났다. 이에 위충현(魏忠賢)마저도 그 흉험한 위세를 거둘 정도였는데 아물며 군주는 어떠했겠는가?

15. 가의가 여러 제후를 세워 그 힘을 약화시킨 것은 겉으로 베풀면서 속으로 빼앗는 술책이었다

한나라 초기에 제후왕을 봉한 판도(版圖)는 대단히 컸는데, 당시는 삼대(三代)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백성들이 보고 듣는 것도 여전히 옛날의 봉건제도에 익숙해서 진시황이 제후를 봉하지 않고 홀로 다스린 것을 원망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추세로 인해 한나라도 제후왕을 봉하는 전통을 갑자기 없앨 수 없었다. 진시황과 이사는 봉건제도를 혁파함으로써 만고 역사의 죄인이 되었는데, 가의는 제후왕의 세력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한나라를 위해 통곡했으니 황제 홀로 다스렸던 진나라의 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논자가 진시황을 중벌에 처하고 가의를 공손히 모셔서 자리에 앉히자고 한다면 수십 년 사이에 옳고 그름이 물과 불처럼 상반되게 바뀔 것이다. 심하구나, 역사를 논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이여!

가의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제후를 세워서 그 힘을 줄여야 한다.”

이것이 삼대(三代)가 남긴 제도로 보이는가? 삼대에 여러 제후를 세워서 판도가 백 리를 넘지 않은 것은 선왕이 땅을 아꼈기 때문이 아니라, 제후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땅을 빼앗을 수 없고 유한한 공간을 마음대로 확대할 수 없었기 때문었다. 게다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봉토(封土)는 《시경》과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징험해 보면 모두 오백 리가 넘었으니, 천자가 그 판도를 좁혀서 방비한 적이 없었다. 제후왕의 봉토를 분할하여 여러 제후를 세우면 부귀하고 교만하며 음란한 귀족의 자식들이 어린 마음을 아직 고치지 못한 채 모두 제후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게 된다. 그러면 천자는 그들이 잘못에 빠질 때를 앉아서 기다렸다가 손쉽게 그 작록(爵祿)을 박탈해 버린다. 이렇게 겉으로 베풀면서 속으로 빼앗는 술수는 혈육을 원수처럼 핍박하고 얽매는 것이니, 가의의 뜻이 어찌 진시황이나 이사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진나라는 단단히 드러내 놓고 처리했지만, 가의는 음험하고 잔인했다! 한나라가 땅을 분할해 제후왕을 봉한 것은 삼대가 남긴 제도를 계승하면서 갑자기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것은 일곱 나라의 전란이 앞서 일어나자 진나라가 뒤에서 평정하면서, 장차 등불을 끄기 위해 불꽃 하나만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 추세로 보건대 결국 꺼질 수밖에 없으니 가의가 수고롭게 통곡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설령 한나라를 위해 그런 계책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저 왕실을 공고하게 하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저절로 안정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어야지 괜히 겁을 집어먹고 놀랄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에 봉건제도가 폐지되어 깜짝 놀랐는데, 또 금방 제후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심정이다. 고금의 이치와 추세를 살피지 않고 그저 눈앞의 것만 보고 놀란다면 인의를 해치고 재앙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말이야 얼마나 쉬운가!

가의가 회남왕 유장(劉長)의 아들 유안(劉安)이 제후에 봉해진 것을 논할 때는 춘추·전국시기 백공승(白公勝)과 오자서(伍子胥), 전저(鱄諸), 형가(荊軻)처럼 복수하거나 자객을 통해 암살을 시도하는 일이 다시 일어날까 염려했다. 그러나 주공은 채중(蔡仲)을 제후에 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전 사람의 허물을 경계로 삼아라!”

이 또한 채중이 칼을 갈아 성왕을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을까 염려한 것이겠는가? 이로 보건대 가의가 각박하고 은혜를 베푸는 데에 인색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회남왕이 끝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다들 가의의 말이 맞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조정에 이렇게 큰소리쳤다.

“유안은 장차 백공승이나 오자서 같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러니 유안이 백공승이나 오자서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뜻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회남왕의 반란은 가의가 유도한 것이라 하겠다. 회남왕 유장이 폐위된 것은 국법에 따른 결과지만, 그의 아들이 제후에 봉해진 것은 천자가 친척을 아끼는 어진 마음 때문이었다. 회남국이 결국 회복되었고 유장은 여전히 문제의 친동생이었으며, 유안은 문제의 조카였으니 어찌 백공승이나 오자서와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을 끌어와서 가까이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로 여기고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했다. 죽이려는 낌새를 보이면 똑같이 돌려받기 마련인데 가의가 천자가 되어 천하의 생사를 관장했다면 날마다 천하를 지니고도 복수를 염려했을 테니, 원수로 보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심하구나, 가의여! 도의(道義)를 듣지 않고 그저 술수만 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