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 5

조셉 P. 맥더모트(Joseph P. McDermott)

인쇄본 세계에서의 필사본 : 지속되는 영향력과 수요

하지만 16세기에 인쇄본이 결국 주도권을 잡긴 했지만 청말까지 필사본의 영향력이나 그 나름의 용도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우선 필사의 전통은 지속적으로 목판 인쇄의 형태와 외양에 영향을 주었다. 확실히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체(匠體)가 주도적인 판각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자, 인쇄본 텍스트가 더 이상 필사된 텍스트의 서체를 흉내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문, 특히 고품질의 인쇄본은 종종 눈에 띄는 서체로 판각되었으며 최소한 처음 몇 페이지는 여전히 필사본을 본떴다. 인쇄본에 대한 필사본의 영향은 더 심화되어, 인쇄본의 외양을 넘어 그 내용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전통적인 중국의 인쇄본은 어느 것을 검토하더라도 그 서지학적인 분류와 무관하게 언제나 선집으로 읽히고 또 그렇게 만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종종 이것은 저자가 바라는 바대로 덧붙여지거나 삭제된 항목들을 필사본으로 정리된 것처럼, 한 사람이나 그 이상의 저자가 하나나 그 이상의 주제에 대해 한 가지 이상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쓴 문집이 되곤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필사본이 아니라 인쇄본이라 할지라도 이런 책에서 개별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나 심지어 몇 개가 탈락되면, 단지 그것을 알아차릴 만한 능력이 있는 독자만이 그 차이를 눈치챌 것이다. 필사본 문화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텍스트의 유동성은 중국에서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쇄본 출판업자들 사이에서 통상적인 관행으로 지속되었으며, 이것은 13세기의 대중적인 상업 출판사에서 지난 세기[곧 20세기]에 각각의 성(省)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당되는 것이었다.

둘째, 16세기 이래로 인쇄본을 대량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음에도, 필사본은 현재까지도 강남 지방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오고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인쇄본으로 출현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필사하고 또 유통하기까지 하는 독자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유마오(尤袤; 1127-1194년)와 같은 대다수의 중국 학자와 장서가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붓으로 베껴 쓰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베껴 쓴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읽고 외우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12세기의 훙마이(洪邁, 1123-1202년)와 같은 작자들은 학문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자치통감》을 세 번이나 베껴 썼는데, 한 번은 그 책의 오류와 성취를 검토하기 위해, 또 한 번은 그 문체를 공부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유가의 가르침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명말의 어떤 유명한 관리는 생계를 위해 텍스트를 필사했다. 황다오저우(黃道周; 1585-1646년)는 정치적인 비평문 때문에 베이징의 옥에 갇혀 있을 때 《효경》을 필사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는 하나 당 2금을 받고 팔았다. 그러니 17세기 초 쑤저우에서 필사를 지지하는 어떤 이가 “책 한 권을 짓는 것(著書)이 한 권의 책을 베끼는 것(抄書)만 못하다”고 주장한 것도 놀랄 일은 못 된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스스로 사본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필경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사본을 한 번에 30개 정도 만들게 했다. 종종 이런 필경사들은 하급 관리거나 시골 학당의 학생, “서동(書童)”, 또는 자신들의 붓으로 먹고 살 일을 도모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낙제수재들이었다. 하지만 필사본을 만드는 일은 쑤저우의 문인인 장쥔밍(張俊明; 17세기 후반에 활동)의 다양한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출판업에도 유용했다. 그는 명말에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향시에서 낙방했다. 그리하여 그는 문인 관료들을 위해 다양한 서체로 시나 문장을 써주거나 베껴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목판 각공이나 석공을 위해 텍스트를 베껴준다거나 쑤저우의 사원이나 술도가의 간판에 쓰이는 상호를 써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인쇄가 떠오르고 심지어 정복에 나섰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필사본이 사라지게 하지는 못 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새로운 필사본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다양한 이유로 계속 만들어졌다. 16세기 말에 강남 지역에서 인쇄가 우세를 보인 이후 몇 십 년 동안, 후잉린(胡應麟)은 “최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에 만여 장의 종이를 사용해가며 모든 종류의 학술 저작들의 사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1769년까지도 유명한 베이징 류리창(琉璃廠)의 서점에서는 인쇄본 뿐만 아니라 필사본도 많이 팔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한 사람은 당시 그가 수도에 머무는 동안 책을 빌리고 베끼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실상 더 많은 책들이 인쇄되고 더 광범위하게 유통될수록, 어떤 텍스트의 필사본들이 최소한 그것이 유통되는 하나의 단계에서 인쇄본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개연성이 더 커졌다. 그래서 명청 시기의 문화에서는 이러한 상호 작용이 널리 퍼져 필사본과 인쇄본 사이의 뚜렷하고 절대적인 차이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명대 중엽에 인쇄본이 필사본에 대해 먼저 우위를 점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필사본이 지속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어떤 발전의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알게 된 텍스트의 형성에 생명력을 불어놓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중국 동남쪽의 비교적 발전된 지역에서조차 족보나 대련, 그리고 가족의 관습이나 사회적 관례에 대한 지침서 등과 같은 것이 인쇄본보다는 필사본으로 남아 있었다. 풍수나 의례에 대한 책과 같은 다른 장르의 서적들에 대해 말하자면, 필사본 형식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보편적이었다. 여기에서 문인 문화에 대한 조사 결과는 마찬가지로 일반 독자의 도서 문화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인쇄본의 우세(와 아마도 16세기에 일어난 출판 붐의 결과물인 듯한 더 많은 텍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서적 부족 현상을 종식시키지는 않았다. 책을 소유한 이들이 책을 빌려주고 공유하는 데 대해 이전의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가 남아 있다. 책은 여전히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소장자들은 종종 자신의 소장품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다. 최소한 당 이래로 책을 소장한 이들은 그들 자신과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언을 상기시켰다. “책을 빌려주는 것은 불효”이고, “책을 빌려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마찬가지로 책을 돌려주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도서관이나 순회 도서관, 심지어 친척이나 친구들 사이의 도서관에서는 송대와 원대 특히 명대에 이르게 되면 책에 대한 접근이 꽤 향상되었다. 그러나 유명한 17세기의 학자 황쭝시(黃宗羲, 1610-1695년)는 몇십 년 동안 강남에 있는 주요한 사설 도서관을 방문하려고 애쓰다가, “사람들은 자신의 책들을 다른 사람에게 쉽사리 내보이려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책이 희소하고 비쌀수록, 더 많은 보호를 받았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독자들의 불평을 야기했던 그런 배타성이 선본이나 값비싼 책에서만 보여졌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엘리트 위주의 과거시험이 어떤 종류의 지식이 문자 그대로 권력으로 이끌어주는 것을 보장해주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책을 간수하고(아마도 그런 책들을 경쟁자들로부터 지켜내려는) 노력만이 예상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필사본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만들어진 것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인쇄본이 우세를 점했다는 사실이 도서 부족에 대한 불평불만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말의 도서 부족 현상은 그 원인이 순전히 경제적인 데 있지 않고 근본적으로 인위적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 사뭇 다르다. 어쨌든 간에 16세기나 17세기 명대의 출판 붐이 고조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독자들이 중국의 텍스트를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거나 오늘날 서구의 주요한 연구 기관의 도서관의 사용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도의 도서 종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민간의 장서들은 비문학적인 학문이나 심지어 사회 교제를 위한 기초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자본으로 더 자주 이용되었다. 그 결과 송대와 원대 그리고 명대의 지적인 삶은 훨씬 더 단편화되었고, 학자나 문인들은 (그렇게 다양한 집단에 대해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편협한 독서를 했(고 그리하여 당대의 지적인 경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훨씬 무지했)다.

확실히 명말의 장서가들은 책을 빌려주는 데 좀 더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특히 출판 붐이 일었을 때, 독자들이 책을 손에 넣는 데 장애가 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청초에는 1640년대의 혼란스러운 기간 동안 광범위한 도서 파괴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걱정을 했던 소장가들이 그들의 책을 교환하기 위해 정식으로 서면 계약(約) 행위를 채택했다. 이러한 협정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두 개나 세 개 이상의 동아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도서 대여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곧 청초에 구옌우(顧炎武)나 황쭝시(黃宗羲)와 같은 사람들이 시도했던 학술에 이르러서야 17세기 중후반의 장서 공유에 대한 관심이 정치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상 민간의 장서를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데 바탕한 공동의 학술 연구는 훨씬 더 나중인 18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도 필사본은 대량으로 남아 있으면서 여전히 중국의 여타의 지역을 통틀어 독자들 사이에서 인쇄본에 대한 전통적인 우세를 양보하지 않았다. 명청 시기에 인쇄본의 “정복”은 인쇄본이 우세한 지위를 얻기까지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