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 4

조셉 P. 맥더모트(Joseph P. McDermott)

명대 중 후기의 도서 문화

강남 지역 도서 문화에 대한 이 같은 변화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중국의 다른 지역들에도 심원한 영향을 낳게 되었다. 내가 논하고 있는 문인 엘리트들에게 있어서, 필사본이 인쇄본과 함께 8세기 동안이나 공존하였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정부 기관 인쇄본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지 그들이 정부의 출판과 상업적 출판을 너무 뚜렷이 구분한 것 때문이라면, 이노우에의 통계 수치는 이 8세기 동안의 엘리트 문화를 위한 사적인 출판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략 17세기 중반까지 공적 출판이 상대적으로 고급의 독자들을 위해 인쇄본을 공급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 수치들은 정부 출판의 우위가 이러한 고급 시장을 위한 인쇄의 비용과 위험을 감당 할 수 없었을 순전히 사적인 출판사들이라는 경쟁자를 낙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지식인들까지도 참여했던 인쇄본으로의 전환이 도서 가격의 하락 및 새롭고 더 능률적인 판각 방식과 맞물릴 뿐 아니라, 문인 독자들을 위한 도서의 인쇄에 있어서 정부 출판에 대한 상업적 출판사의 확고한 우위 및 주도권과도 일치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넓은 의미로 문인 엘리트를 규정하게 되면,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가려지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쇄본의 주도권이 중국의 엘리트 문화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학자 겸 관료 계층의 역할을 견인해냈다는 사실이다. 진사(進士) 학위를 획득한 이런 교양 있는 남성 집단은 정기적으로 정부 관청을 드나들며 활동하면서 송대부터 20세기까지 중국 문화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명대 중기부터 그들은 벼슬길에서 훨씬 덜 성공적이었던 수많은 개인들이 형성했던 문인 문화의 창조와 소비, 보존에 참여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학자 겸 관료, 또는 진사들의 도서 문화는 내가 생원의 도서 문화라고 명명하고 싶어하는 것에 의해 보충되고 보완되었던 것이다. 송대에는 실제로 모든 개인 문집들(과 현존하는 자료들의 압도적인 부분)이 진사인 학자 겸 관료 계층의 성원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명대 후반에 그들은 작자와 수집가로서 전혀 관직을 지내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과거시험에서 가장 낮은 학위인 생원이나 공생(貢生) 이상은 획득하지 못했던 허량쥔(何良俊; 1509-1562년), 왕즈덩(王穉登; 1535-1612년), 천지루(陳繼儒; 1558-1639년), 쉬보(徐渤; 1570-1642년), 마오진(毛晉), 펑수(馮舒; 1593-대략 1645년), 루이뎬(陸貽典; 1617-1683년), 쳰퉁아이(錢同愛; 1475-1549년) 등과 같은 작자와 편집자, 그리고 수집가들을 떠올려 보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지식인과 주요 민간 도서 수집가들의 상당 부분이 고관이나 고급 학위 소지자도 아니고 그들 가문의 성원들도 아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작자들과 서적 수집가들 가운데 여전히 많은 거인(擧人) 또는 진사 학위 소지자들이 있었다. 후잉린(胡應麟)이나 황쥐중(黃居中), 장쉬안(張萱), 그리고 원정밍(文徵明)과 같은 거인 학위 소지자의 글이 없었다면, 명대 도서 수집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불완전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성(葉盛), 루선(陸深; 1477-1544년), 리카이셴(李開先), 양쉰지(楊循吉; 1458-1546년), 왕스전(王世貞; 1526-1590년), 그리고 판친(范欽; 1532년 진사)와 같은 진사 학위 소지자들의 실제 장서가 없었다면 우리의 도서관은 훨씬 빈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원은 명대 후반부에 출판된 저작물의 범위 확대에 문학적으로 상당한 정도로 기여했다. 생원이라는 계급은 낮은 것이었기에, 단지 부담스러운 부역을 일시적으로 면제받고 기껏해야 쥐꼬리만한 수입을 제공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글쓰기에 의지해 살아가도록 내몰렸다. 물론 상업적인 출판의 붐으로 그들 자신의 저작을 출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늘어나기도 했다. 어떤 단계의 과거 급제도 하지 못한 평민들 가운데 글을 읽을 줄 아는 일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은 외견상 방대한 숫자의 독자들을 위한 읽을거리를 쓰고, 편집하고, 편찬하며, 수정하고 베꼈다. 그리하여 그들이 흥미를 가졌던 것은 과거시험이나 의학, 시와 산문 짓기, 사전과 수많은 유희호기를 다루는 “입문서”였다. 총서와 유명한 사람들의 글의 선집을 모아들였고, 대중 소설을 지었으며, 붓과 관련 있는 것이라면 어디든 손을 뻗쳤다. 문인으로서(여성 작가나 장서가는 아직 그 숫자가 극히 적었으며, 시장을 위한 글쓰기도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지위가 높은 장서가와 문인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몇몇 오만한 골동품 애호가들은 이들 생원과 평민 출신 장서가들을 비웃고 그들 장서의 내용들을 불신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십 대 초에 글을 배워 잘 편집된 2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야오스린(姚士燐; 1561-1651년)과 같은 평민 출신 장서가 몇몇은 이전에는 아주 다른 사교계에서 놀았을 지위가 높은 장서가들에 의해 환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장서가들과 이전의 장서가들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분한 것은 그들이 추구했던 (종종 정통적인 학문 분야의 정의를 넘어서는) 관심사의 넓이와 그들이 자신의 책에 부여했던 용처의 범위였다. 괴짜였던 싱량(邢量; 15세기 말에 활동)과 같은 몇몇 사람은 역사와 경서에서 불교, 도교, 의학에 이르는 수많은 주제를 다룬 책들을 찾았다. 의원이자 점쟁이이자 마을의 훈장이었던 이 사람은 쑤저우에서도 인기가 없는 펑먼(葑門) 지역에서 “향촌의 중처럼” 혼자 살았는데, 그가 임대한 퇴락한 집의 세 칸 또는 네 칸의 방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고, 벽은 이끼로 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고장을 작성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다 사회와의 접촉의 길을 막아 버린) 이 빈한한 장서가는 결국 수많은 학동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당시 주요한 장서가 몇몇의 칭송을 얻었다.

16세기의 다른 장서가들은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쟈싱(嘉興)의 의원인 인중춘(殷仲春)과 같이, 그들은 조금은 저급한 학술 영역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모았고 그들의 장서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해 생계를 이어갔다. 의원들은 야망을 품은 관리들이 경서와 과거시험 지침서를 이용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오랫동안 자신들의 치료에 의서를 실용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시골 의원 인중춘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서벽(藏書癖)을 거대한 출판 사업으로 전환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어쩌다 그 자신이나 나중에는 그의 아들이 불과 몇 푼의 동전으로 살 수 있는 불완전하고 짝이 맞지 않는 의서를 맞닥뜨리는 경우에 대비해 항상 주머니에 여윳돈을 넣고 다니다 [그런 책들을] 그러모았다. 결국 그는 쟝시로 갔는데, 그곳에서 몇 명의 의원이 가세해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가장 오래된 전문적인 의서 목록으로 590권 이상으로 구성된 《의장목록(醫藏目錄)》을 편찬하여 간행했다. 나중에는 그 역시도 당시에 문인으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고, 유명한 저술가인 천지루(陳繼儒)가 그의 전(傳)을 쓰기도 했다.

서적상인 퉁페이(童珮; 16세기 말 경 활동)와 같은 다른 장서가는 심지어 좀 더 드러내놓고 자신의 장서를 책을 쓰고 파는 경력을 쌓는 데 활용했다. 창쟝 하류 저쟝 지방의 책 거간꾼 가문에서 태어난 퉁페이는 서적계에서 (2만 5천 권에 이르는) 유명한 장서가와 존경받는 저술가가 되기 위해 열의를 보였다. 그는 쑤저우의 저명한 문인인 구이유광(歸有光; 1507-1571년)의 문도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자신의 시문을 다른 문인들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문인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그림에 대한 재능과 예술에 대한 감식안으로 명성을 얻는 한편으로, 실제로는 책을 판매하는 가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후잉린과 같은 장서가를 포함한 그의 고객들은 그의 판매 목록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과거공명(科擧功名)의 등급과 사회적인 배경, 그리고 서적 출판과 장서가들 사이에서의 관심 등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오늘날 우리가 도서관에서 접할 수 있는 16세기와 17세기이래 남아 있는 인쇄본의 유형에 강한 자극이 가해졌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노우에의 연구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불완전하고 결정적이지 못하지만―앞으로의 연구는 거의 확실히 그의 발견을 수정하게 될 것이다― 그의 연구는 인쇄본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12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갔는지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인식을 얻는 데 유익하면서도 유리한 시점을 제공하고 있다.

12세기에 이미 [당시] 인쇄되고 있던 텍스트의 유형이 확장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남송대 이래로 경전이나 역사, 시가, 공적인 추도사, 점술, 의서와 같은 좀 더 전통적인 장르의 책들이 증가하는 추세에 발맞추어 희곡이나 민가, 소설 등과 같이 인쇄에 부쳐진 새로운 장르의 책들 [역시] 출판되었다. 송대 인쇄본 가운데, 현존하는 철학 서적들은 주로 주시(朱熹)와 그의 문도들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성리학의 가르침인 도학(道學)에 관한 저작이고, 다음으로는 의서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원대에 들어서게 되면, 의서가 압도적이 되고 유서(類書)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 두 개의 장르는 이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책들의 거의 60퍼센트에 이른다. 그 뒤로 몽골 제국의 치하에서 유가 경전에 대한 공식적이고도 학술적인 연구가 붕괴한 것을 반영하는 도학 관련 저작들이 따르고 있다. 순수 문학 범주에 들어가는 송대 인쇄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육조와 당대 작가들의 선집이었다. 그러나 원대에는 당과 그보다 앞선 시기의 작가들의 그와 같은 저작들은 두푸(杜甫; 712-770년)와 리바이(李白; 705?-762년)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것도 출판되지 않았다. 이렇듯 유명하고 검증된, 아마도 안정적으로 이익이 보장될 거라 예상되는 작가들에 대해 집중하는 현상은 명대에는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명대 초기에는 인쇄된 텍스트의 범위가 더 크게 감소한 듯하다. 원대 내내 조정의 관청에서는 이따금씩 문학 작품과 유가 경전을 찍어냈다. 그러나 명대에 들어서 초기 백년 동안에 경전류 인쇄물은 유가 경전과 주석서 및 이들을 쉽게 풀이한 것과 사전류, 그리고 운서(韻書)가 전부였다. 역사서의 경우는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속통감강목(續通鑑綱目)》을 펴낸 반면, [이 두 책의 원본이라 할]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이 책을 요약해서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손을 본 것은 펴내지 않았다. 사실상, 명대를 여는 이 시기에 [이를테면, 홍무(洪武; 1368-1399년) 연간에 나온 《원사(元史)》나 천순(天順) 연간에 나온 《사기》, 성화(成化) 연간에 나온 《송사(宋史)》와 같이) 중요한 역사 인쇄본은 아주 드물었고, 거의 대부분 관에서 펴냈다. 명대 초기 민간 출판업자가 펴낸 역사서의 인쇄본들은 언급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명대 초기에 나온 집부(集部)에 속하는 인쇄본들 역시 그 수치가 비슷한 정도로 적다. 성화 연간에 쟝시 부(江西府)에서 펴낸 《주자어류(朱子語類)》와 베이징 국자감에서 펴낸 《산해경(山海經)》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사람들이 선호했던 작가들 목록을 보면 원대 이래로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명대 초기 백년 동안 당 이전 작가의 선집은 아무것도 펴내지 않았고, 당대 작가도 리바이나 두푸, 한위(韓愈), 류쭝위안(柳宗元), 루즈(陸贄; 754-805년), 그리고 루구이멍(陸龜蒙; 9세기 경 활동) 정도만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판본의 숫자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송원대에 비해 명대에 선집들을 좀 더 많이 펴낸 듯이 보인다. 송대에는 10년마다 평균 4.7권이었고, 원대에는 4.8권이었던 데 비해, 홍무 연간에는 6권, 선덕(宣德; 1426-1436년) 연간에는 12권이, 그리고 성화 연간에는 35.7권이 나왔다.

홍치(弘治)와 정덕(正德) 연간에는 16세기에 곧 뒤따르게 될 출판 붐의 몇 가지 산발적인 암시가 있었다. 《회남자(淮南子)》와 《염철론(鹽鐵論)》, 《독단(獨斷)》과 같은 오래된 자부(子部) 류의 책들을 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명대 초엽에는 《상산문집(象山文集)》과 《이정전서(二程全書)》, 《북계자의(北溪字義)》와 같은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자부 류의 범위는 정통적인 성리학에 국한하더라도 여전히 상당히 협소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식견 있는 역사학자들이 정통 주자학파의 전성기로 여기고 있는 시기인 1565년 이전에는 실질적으로 도학과 관련해 출판에 부쳐진 것은 단지 경전에 대한 주시의 주석과 “본성과 운명(性命)”의 원리에 대한 논의뿐이었다. 이러한 정통적인 학설에 대하여 어떠한 도전적인 논의도 장려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쇄본에 기대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학자들 역시도 이러한 “주어진 관점”을 학습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재생산해 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좀 더 다양한 지적인 식이요법(diet)에 대한 욕구가 출판에 반영된 철학적인 관심사의 팽창을 촉진했다. 좀 더 다양한 철학적 주제에 대한 출판이 급증한 것이 명대 지성인의 삶과 왕양밍(王陽明; 1472-1529년)의 사상에 대한 관심의 증폭에 맞선 (정주학파에 체현된) 도학의 헤게모니와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강남 지역의 서적계에서 인쇄본이 점차 애호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이 성리학적 사고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인식 확산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책들은 종종 이론에 대한 실천을 주창하고 정주학파의 책상물림 식의 행태를 주저함 없이 비난했다.

비슷한 변화가 명대 중엽에 철학 이외의 분야의 출판에서도 나타났다. 출판업자들은 그때까지는 인쇄본으로 구해볼 수 없었던 광범위한 초기 역사 저작에 대한 새로운 판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지(漢志)》, 《대당육전(大唐六典)》, 《문헌통고(文獻通考)》와 《오월춘추(吳越春秋)》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제는 《김문정공북정록(金文靖公北征錄)》이나 《황명개국공신록(皇明開國功臣錄)》과 같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서들을 찍어냈는데, 이런 책들은 명대 역사에 대한 거의 당대의 자료로 쓰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선집 류는 육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선(文選)》뿐 아니라 좀 더 최근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대적 배경을 가진 텍스트들이 출판되었다. 경전의 경우에는 그러한 변화가 조금 덜 나타났다. 그러나 정덕 연간의 《의례(儀禮)》와 《춘추번로(春秋繁露)》의 출판은 [다른 경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판이 조금 덜 이루어졌던 경전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우리가 이미 보았던 대로, 구옌우(顧炎武)는 가정 연간 이전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던 책들이 “기껏해야 사서오경과 《통감》이나 도덕적 본성에 대한 책에 지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가정 연간 말에 이르자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1500년 이전의 서적계에서는 오랫동안 유통될 가망성이 거의 없었던 희귀본들이 약 1520년 이래로 대량으로 다시 출판되어, 인쇄본의 형태로 영속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증가했다. 그리하여 양질의 인쇄본만을 사용할 것을 고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부총간(四部叢刊)》의 편자들은 명대 후반부에 만들어진 인쇄본에 과도하게 의지했다. (청대 초기에는 명대 인쇄본을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도) 장서 가운데 44퍼센트가 명말의 판본에서 온 것들이었다. 16세기가 되어서 인쇄본은 전체적으로 서적계뿐 아니라 학술 서적의 좀 더 세세한 분야까지도 “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