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2 한문제漢文帝 3

한문제漢文帝

9. 돈은 마땅히 무겁고 정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돈을 주조하는 무게의 기준은 어떻게 해야 이로울까? 그런데 이 이로움은 이로움이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고, 그 이로움이 절대 밖으로 새면 안 된다. 단순히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라면 유협전(楡莢錢)이나 선환전(線繯錢), 아연이나 주석이 섞인 것도 괜찮겠지만 유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가치가 떨어져서 금방 부식되어 망가지기 때문에 저장해 놓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로움은 이로움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또 오곡과 실, 삼[麻], 목재, 생선, 소금, 채소와 과일 등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어서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금과 옥, 진주와 같은 보물은 드물고 천부적으로 아름다움을 부여받아서 선왕은 그것을 취해 만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것을 바탕으로 삼아 민생을 부유하게 하는 이로움을 얻게 하려고 유통시켰으니, 정말 그것들을 보배로 여겨서가 아니었지만 백성은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들이 드문 것도 천지자연의 바탕에 따른 것이다. 구리는 천지가 만들어 낸 것이 아주 많아서 사람들이 익히 보았기 때문에 천하게 여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으로 돈을 주조하자 이내 금과 옥, 진주 등의 보석과 값어치를 다투며 곡식과 비단, 목재, 채소의 생사를 통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전이 정밀하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으면, 신속하게 부식되어 망가짐으로써 천하 사람들에게 경시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무겁고 정밀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이 만든 물건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사람들의 노력이 구차해지지 않으면 그래도 오랫동안 천하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수장은 하늘과 사람이 경시하고 중시하는 도리를 알아야지 일시적인 속임수로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동전 1전(錢)을 8, 9푼[分]의 물력(物力)과 인력을 들여 만들면, 그 이윤도 없어진 적이 없다. 만약 동전 1전을 만드는 데에 1전을 쓴다면 쓸모없는 구리를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나, 전체적으로 계산해 보면 이런 물건이 민간에 많아지면 백성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니, 나라의 이익도 커질 것이다. 1전을 만드는 데에 8, 9할의 자본을 들인다면 몰래 주조하더라도 이익이 없으니 그런 짓을 그만둘 것이다. 돈이 조정에서 통일되어 나오면 재물은 군주의 통제에 따라 나누어지거나 거둬질 것이다. 돈이 만물과 통용되어 드나들면 나라를 가진 군주는 시종일관 그 이익을 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로움이라고 얘기하지 않아야 돈을 주조하는 이익이 밖으로 새지 않는다. 가벼운 ‘오수전(五銖錢)’은 무거운 ‘개원전(開元錢)’보다 못하며, 아연이나 주석이 섞인 것은 정교한 금배전(金背錢)이나 칠배전(漆背錢)보다 못하니, 통계를 내 보면 증감(增減)의 액수가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식견이 천박한 자가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다. 구차하고 천박한 인정과 풍속으로 천지의 은덕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아름다움과 이익을 다투려 들었다가 이긴 사람은 여태 없었다.

10. 회남왕 유장, 승상과 어사를 참수하라고 청한 원앙을 죽이다

회남왕 유장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승상과 어사가 마땅히 그를 처형하여 저자에 전시하라고 상주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신하는 사적인 군대를 가져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人臣無將, 將則必誅]”라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회남왕을 사면하고 사천(四川)으로 유배를 보낸 것은 채숙(蔡叔)을 곽린(郭鄰)에 가둔 것과 같은 처벌이었으니, 신하가 법의 징벌을 받았는데도 천자가 혈육의 정을 끊지 못한 것이다. 유장은 분노가 치밀어 단식 끝에 죽어서 결과적으로 “뉘우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하는[怙終賊刑]” 셈이 되어 버렸으니, 토벌을 면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겠다. 원앙은 승상과 어사를 참수하라고 청했으니 간사한 자의 마음을 깊이 규명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혹은 그가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 밖으로 제후의 마음을 사고 천자를 배신하면서 장조(莊助)처럼 외부의 호걸들과 널리 사귀어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도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신들이 자신과 알력을 일으키는 것을 증오해서 이 사건을 핑계로 그들을 내치고 조정에서 위세를 떨치며 남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을 피하려고 원앙을 질책하지 않고 그의 주장을 참작해 받아들였다. 원앙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 경제(景帝)를 면전에서 기만하고 조조(晁錯)를 압박하여 죽음에 빠뜨렸으며, 시종일관 양다리를 걸친 채 조정에 반기를 든 오(吳)나라와 서한 조정 사이를 오가며 거래했으니, 그의 간언이 충심(衷心)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원앙은 예전에 협객이었는데, 협객의 마음은 본래 알 수 없다. 천하를 가진 이가 협객을 믿고 일을 맡겼는데 분란을 초래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11. 가의는 도를 폄훼하여 군주를 유혹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 한나라 이래로 다스림의 도리가 옛것을 따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태갑(太甲)과 고종(高宗), 성왕(成王)의 방종함이 반드시 문제(文帝)보다 더했던 것은 아니나, 이윤(伊尹)의 훈계와 부열(傅說)의 명령, 주공의 경고는 “그 지위가 불안하면 틀림없이 위태롭다.”라거나, “편안함과 향락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거나, “(훌륭한 군주는) 안일함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이지 도를 폄훼하여 군주가 쉽게 방종에 빠지도록 유도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이 어찌 가의의 이런 말과 같겠는가?

나라를 다스리게 하면 뜻을 세우고 심사숙고하면서 몸소 고생해야 하며, 풍악의 즐거움을 줄이거나 아예 그것을 즐기지 않아도 된다. (옛날 군주의) 즐거움은 지금과 같은데 법률의 씨줄을 세우고 제도의 날줄을 펼쳐서 만대(萬代)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使爲治, 勞志慮, 苦身體, 乏鐘鼓之樂, 勿爲可也. 樂與今同……(而欲)立經陳紀, 爲萬世法.(賈誼, 〈治安策〉)

이 말은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간쟁(諫爭)의 길을 끊어야 한다고 권고한 말과 별 차이가 없다. 왜냐? 법술(法術)로 천하를 통제하면서 안일한 향락에 빠지면 그 법이 비록 진나라의 법과는 다를지라도 근본이 없이 말단에 위세를 세우고, 천하를 수고롭게 하여 자신의 향락을 즐기는 것이니, 이런 군주라면 하루아침이라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천하를 단지 법으로 다스리고 술수로 제압해야 한다면 수레와 복식(服飾)의 크기와 모양을 규정해 주어야 풍속이 통일되고, 문사(文辭)를 다듬어 주어야 염치를 아는 마음이 돈독해지고, 제후의 권한을 삭탈해야 정치가 모두 천자에 의해 통솔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나라와 상나라에도 법률이 있었는데 걸(桀)과 주(紂)는 왜 나라를 망하게 했겠는가?

다행히 문제가 지나치게 방종하거나 구차하게 향락을 즐기는 군주는 아니었지만 잠시 사냥과 풍악을 즐기며 잠시 안일한 향락에 빠지는 오류를 피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고치게 한 이가 없었을 따름이다. 순수하고 올바른 유생(儒生)이 그 마음을 비옥하게 해 주고 도의(道義)의 거름이 스며들게 해 주어 중화(中和)를 세우고 왕도를 일으키게 해 주었다면 제후들이 어찌 순복(順服)하지 않고, 풍속이 어찌 개선되지 않으며, 염치를 아는 마음이 어찌 높아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가의가 먼저 아첨하여 마음을 이끌어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는데, 다행히 문제는 호해(胡亥)와 같이 못난 군주가 아니었다. 문제가 호해와 같았다면 가의가 이사와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래도 그가 “군주를 잘 일깨워서 다스림이 일어나도록 했다.”라고 칭찬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어찌 그런 신하가 있을 수 있으며, 위에 어찌 그런 군주가 있을 수 있겠는가!

12. 가의, 가르침의 근본을 모른 채 태자 교육을 논하다

가의가 태자 교육을 논한 것은 근본적인 논의이다. 사대부와 서민의 자식이 술과 도박에 빠졌을 때 그들이 바라는 것을 금지하고 가르치려 하면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선생님께서도 아직 모든 행실에 정도(正道)를 따르지는 못하셨습니다.”

하물며 천자의 아들이 앞에서 음란한 소리와 미색(美色)을 탐하여 여인네와 환관이 옆에 늘어서서 욕망을 채울 길을 알려주고 음란한 욕망을 채울 곳을 마련해 주는데, 군주이자 아비인 이가 뜻을 세우고 노심초사하는 것을 잊고 몸소 고생하는 것을 꺼리면서 풍악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쓸데없이 엄한 스승을 두어서 일상생활과 예의를 차리는 것을 간섭하게 하면, 그가 스승의 말을 따르게 하는 것은 그저 나무 인형의 위엄을 보이는 것처럼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제(成帝)는 아랫사람을 공경하고 아름다운 태도를 유지했지만 지나치게 황음(荒淫)을 일삼아 반란을 유발했다. 하물며 방탕하기로 유명하여 그저 부친인 군주가 자신의 권력과 자유를 빼앗았다고 원망하면서 하루아침이라도 쾌락을 즐기려 하는 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성왕은 어렸을 때 부친인 무왕이 죽어서 본받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주공이 〈빈풍(豳風)〉을 읊어서 왕업을 창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해 주었고, 또 〈무일(無逸)〉을 지어서 선왕의 근면함과 부끄러움을 아는 모습을 알려주었으며, 멀리 문왕과 무왕을 배워야 할 모범으로 제시해 주었다. 또 문왕과 무왕이 정말 모범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주공이 그들을 내세워 보고 느끼기를 바란 것이 헛된 시도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편안히 즐기는 것을 덕으로 여기고 법술로 다스면서 목소리와 웃는 모습을 꾸미는 것을 능사로 여기면서 스승이 보존해 전수하는 간절한 가르침을 따르게 한다면, 이는 속된 유생이 부질없이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부자지간과 스승 및 벗들 사이에 서로 속이며 위선을 떨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보다는 문제가 스스로 황로 사상을 연구하여 자식을 가르쳐 믿고 따르게 했던 것이 낫다. 그러므로 가의의 논의는 가르침의 근본에 관한 논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