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 또 하나의 수도 2

운하

우선 수질이다. 카이펑의 운하는 상당히 빠르게 흐르고 황허의 토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항저우의 운하는 소금기를 머금고 천천히 흘렀다. 이것이 수면으로 내려가는 계단 형태로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대로다. 하지만 쳰탕 강의 물을 끌어 들였기 때문에 여기도 토사가 포함되었다. 나중에는 시후(西湖)의 물을 끌어들여 개량하여 보전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경관적인 특색이 나온다. 카이펑에서 운하에 떠있는 배는 멀리 강남에서 선단을 이루어 물자를 옮겼다. 그 종착지인 카이펑에는 많은 창고가 설치되었고 내성 안의 샹궈쓰(相國寺) 인근에는 정기적인 시장도 있었다. 일단 카이펑에 운반되어 온 물자는 그 뒤로는 육로로 이동했다. 이에 비해서 항저우의 경우는 운하의 역할이 좀 더 컸다. 운하를 중심으로 상업지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저우의 시내 형태는 가늘고 길었다. 몇 가닥의 메인 로드가 있으면, 성 안의 상당 부분을 커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먹을거리의 주요한 생산지는 모두 주변이었다. 항저우는 풍부한 생산지대에 있었고, 게다가 이것들은 수운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스허(市河)가 옌챠오(鹽橋) 운하와 나란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점은 여기에 있다.

또 성 안의 운하는 성의 북쪽에서 대운하에 접속한다. 하지만 이것은 화북에 이르지 않았다. 화북은 남송에 있어서 잃어버린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예전과 같이 원거리를 염두에 둔 선단은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성 안에 이르는 배도 그만큼 대형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항저우의 운하에서는 용도에 맞춰 여러 가지 형태의 배가 보이게 되었다. 물자 운반선만 해도 카이펑에서와 같이 대형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배가 떠다녔던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성 안의 운하에 역할 분담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항저우의 성 안밖에는 여러 가지 직종에 따른 길드 센터라 불러야 할 상업 구역이 출현했다. 항(行) 또는 단(團)이라고 칭했던 길드는 영업을 독점하는 한편,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거두는 조직이기도 했다. 이것들은 장소를 정해 영업을 하고, 소매업자에게 물품을 도매했다. 일본의 도매센터나 도매상가와 똑같은 경관이 출현한 것이다. 성 안 곳곳에 출현한 길드 센터는 동시에 이곳에 화물을 운반하는 운하에도 특색을 만들어냈다. 이런 존재방식은 남송이 되어서 명확한 형태로 출현했고, 아울러 도시 경관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산업 수로로서의 기능을 가졌던 운하 옆에는 창고 군이, 생활 수로로서의 기능을 가졌던 운하 옆에는 거주지로서의 경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일별해 보도록 하자. 옌챠오(鹽橋) 운하가 쳰탕 강에 흘러든 일대에는 건어물을 취급하는 점포가 있었다. 궁성 근처의 허우차오먼(候潮門) 옆에는 선어(鮮魚)와 청과물 등을 취급하는 단(團)이, 북쪽의 베이관먼(北關門) 인근에는 쌀이나 물고기를 취급하는 단이 있었다. 물자가 풍부한 일대에 있었던 도시답게 생산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경제지대가 출현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방대한 물자가 운반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도시적인 구조와 경관

항저우는 성 밖도 번화했다. 동쪽의 사주(砂洲)에는 항저우에 유입된 하층민이나 겸업 농가, 하급 관리, 소상인 등이 살았다. 그것도 상당히 밀집해 있었던 듯하다. 150만 명이라 추정되는 항저우의 인구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던 것이다. 그들은 항저우의 많은 일들을 도맡아 생계를 꾸려갔다. 그렇게 되면 이 경관은 카이펑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리라.

서쪽의 시후(西湖) 근처에는 많은 시장이 있다. 물자가 쑤저우, 후저우(湖州)라고 하는 곳으로부터 운반되어왔기 때문이다. 대운하를 따라서 시내가 북쪽까지 뻗어 있었을 것이기에 많은 배가 항저우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도착했다. 그 때문에 많은 시장이 섰다. 베이관(北關) 야시 등은 그림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성의 북쪽은 그 외에도 몇 개의 상업구가 있었다. 그렇기에 항저우에 가까워지면 도시적인 경관이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도 성 안에서 밀려난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시후(西湖)에 가까운 인근에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경관도 좋고 고급주택가가 될 요소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경관이 좋은 곳은 일종의 별장지를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주지 분리가 좀 더 철저했던 것은 성 안이다. 성 안의 번화가는 도시 중심부 및 서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원지이기도 했던 시후를 가까이 두고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곳에는 마켓 타운도 있었고, 오락 센터도 가까웠다. 따라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의 거주지로서 발전해 갔다. 그런 가운데 고급 관료, 특히 재상이 궁성에서 1킬로미터 전후의 땅에 집을 지었다고 했기 때문에 항저우 중심가에서 남쪽은 고급 관리의 집과 관청이 많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굉장한 건물이 많고, 뛰어난 경관을 출현시켰다고 생각된다.

그건 그렇고 대담하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시내 사람들의 외양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비교적 유복한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복장도 좋았다. 반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복장도 나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녀 비율에까지 영향을 주어 유복한 이는 큰 집에 살면서 하녀를 두었다. 물론 하인도 있었을 것이지만, 부자들의 세계였던 만큼 여자의 수요가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첩을 두었다.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계는 집도 작고 밀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날그날의 양식과 계절 노동을 구하러 유입된 이도 많았다. 그만큼 남자가 많았던 것이다.

유복한 이가 대량의 여자를 독점하니 빈곤한 남자는 무릎을 감싸 안고 잠들었다고 하는 철칙이 이곳에서도 나왔다. 당연히 인구에 있어 남녀 비율은 동쪽보다 서쪽이 여성이 많다. 그런 까닭에 서쪽의 경관이 화려했다. “부유한 이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 구약성서 마태복음의 말을 인용해 ‘마태 효과’라 불려지는 것이 이곳에서도 보였던 것이다.

그러한 성 안의 구조는 당연히 운하에 역할 분담이 생겨나게 했다. 옌챠오 운하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금과 쌀, 기름(油), 탄(炭) 등, 생활필수품을 운반했다. 또 도시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물자도 많았다. 벽돌, 목재 등도 운하로 운반했다. 말하자면 산업도로였다. 옌챠오 운하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가지를 쳐 옌챠오에 이르는 일대까지 운하 연변에는 창고 등이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화물을 가득 실은 배는 그곳에 들러 남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스허(市河) 쪽은 번화가나 관청가, 궁전에 연결되었던 만큼 객선이나 소형 화물선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생활수로의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던 것이다. 항저우의 기록에 많이 나오는 운하의 번성은 주로 이곳을 일컬었던 것일까? 곧 운하의 기능 분담이 행해지고 있던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교통 시스템이 뛰어난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쓰임새가 완전히 나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옌챠오 운하에 들어가는 배는 컸다. 그렇게 되면 용무가 끝났다고 해서 간단하게 유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직진해서 스허로 들어가든가, 차이스허로 나가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성 안 남부의 운하 교차점은 상당히 복잡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항저우 도시의 운하의 모습이었다. 쑤저우와 같은 빠져나가는 구조의 도시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항저우는 성 안 한 가운데를 중심으로 전체의 30퍼센트 정도의 부분이 아주 번화하고 택지가 밀집한 부분이었다. 지도나 사료 등을 보아도 이 부근에 관한 지명이나 기술이 많다. 그만큼 번화하고 동시에 변화가 많았던 부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근 일대가 항저우의 중심부였다고 생각된다.

남송이 되어 형성된 항저우의 경관은 이후에도 확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도시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전 도성에 인가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번화한 곳이 있는가 하면, 듬성듬성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항저우에서는 인구가 넘쳐났던 만큼, 전 도성에 인가가 들어찼다. 인가는 성 밖에도 넘쳐났다. 요소요소에 높고 굉장한 건물이 세워지고 전망도 나빠졌다. 운하는 오염되고 거주 환경도 나빠졌다.

최근 입수한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라는 그림엽서는 항저우공예미술연구소(杭州工藝美術硏究所)가 남송대의 항저우의 메인 스트리트인 톈졔(天街)의 경관을 상상해 그린 것으로, 30미터에 이르는 그림을 촬영한 것이다. 물론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당시를 완벽하게 복원 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집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조밀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제작에 관계한 사람들이 필자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나칠 정도로 집들이 밀집해 있는 경관이야말로 항저우인 것이다.

항저우에서 특징적인 재해는 불이었다. 몇 년에 한 번은 큰 화재가 발생했다. 때로는 수만에 이르는 집들이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택지가 얼마나 밀집해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은 궁전에서도 일어났다. 정부는 대응에 고심해 소방단을 충실히 하고 초가집을 내화성이 있는 기와집으로 바꾸라는 공고를 내보냈다. 하지만 서민에게는 그만큼의 개축 자금을 준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임대 주택을 갖고 있는 이도 임대하고 있는 집을 돈을 걸고 개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과밀한 항저우였기에 날림으로 지은 집이라도 세입자는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실마리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마치 전차 위에서 거리 풍경을 조망하는 듯한 경관이 항저우였던 것은 아닐까? 작은 가옥들이 밀집해 있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그런 곳을 무대로 활발한 사람들의 일상이 영위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화재 대책을 위해 비어 있는 땅이나 도로의 정비를 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금세 가로 침범이 되었고, 더욱더 과밀한 도시 경관이 만들어져나갔던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항저우의 발전은 정점에 이르렀다.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또 한 번 발전한 항저우를 그려냈다.

“주요한 운하는 대형의 배가 돛대를 눕히지 않고도 지나갈 정도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인가는 많고, 물자도 풍부하다. 게다가 주요한 거리는 고층 건물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런 가로에는 목욕탕 일꾼과 여종업원을 상설한 냉수와 온수의 목욕탕이 있다. 성 안에는 유녀도 많다.”

이런 기록을 읽으면, 항저우가 남송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한층 발전해 과밀한 도시 경관을 형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소비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발전한 산업도 소개하고 있다. 도시에는 한 두 개의 수공업자의 조합이 있어 각각 1만 2천 명씩의 장호(匠戶)가 참가했다. 그리고 각각이 10명 남짓 때로는 15명이나 20명, 30명, 그리고 40명 정도의 직인(職人)을 포괄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마르코의 득의만만한 과대한 숫자이다. 만약 그 대로라면 항저우의 직인만으로 가볍게 200만 명 가깝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마르코를 놀라게 했던 항저우의 경이적인 발전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이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항저우는 발전을 이어왔다. 산업의 발달에서 상징되듯이, 항저우의 발전은 명대의 도시 권역의 확대를 초래했다. 송대의 항저우의 대발전이 되풀이 된 것이다. 커다란 시대의 전환기 가운데 과밀한 그리고 과잉의 경관을 전개했던 도시 항저우. 실로 송대는 도시 경관의 형성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