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2 한문제漢文帝 2

한문제漢文帝

5. 심이기(審食其)가 죽자 한나라 대신 가운데 회남왕을 처벌하라고 감히 청한 이가 없었다

심이기(審食其)가 회남왕 유장에게 피살당하자 문제는 모친의 원수를 갚으려는 회남왕의 뜻을 슬피 동정하여 죄를 사면하고 추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아직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한나라 조정의 대신들 가운데 회남왕을 처벌하라고 감히 청한 이가 없었다는 것은 나라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장석지(張釋之)가 정위(廷尉)가 된 것은 심이기가 죽은 뒤였으나 형후(邢侯)와 옹자(雍子)에 대한 과거의 처벌을 바로잡도록 청했으니, 오래전의 일이라고 해서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경제가 태자의 신분으로 있을 때 양왕(梁王)과 함께 길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가 사마(司馬)의 대문 앞을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지난 일을 직접 추궁하여 명성을 얻었으나, 회남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그의 정직함은 ‘상황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는’ 기회주의적인 정직함이어서 강한 권세는 두려워하면서 손을 뻗을 만한 일만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천자는 아우에 대한 정에 막히고 대신들은 회남왕의 권세에 좌절되었기 때문에, 훗날 회남왕의 지위를 계승한 유안(劉安)이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조정 대신들은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듯이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듯 조정 대신들이 제후들에게 모욕당하는 일의 유래는 오래되었는데, 장석지는 그 가운데 더욱 심한 경우가 아닌가!

6. 문제가 신하의 칭송과 비난에 따라 계포를 부르고 내친 것은 병폐라고 볼 수 없다

한 사람이 칭송했다고 해서 계포(季布)를 불러들이고 또 한 사람이 비난했다고 해서 계포를 내치니 천하 사람들은 이를 통해 황궁의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병폐이겠는가? 군주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큰 권한을 지니고 있지만, 어찌 천하 사람들이 아무도 엿보고 짐작할 수 없게 할 수 있겠는가? 계포가 내침을 당해 울적하게 하동(河東)으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군주가 너무 쉽게 불러들이고 내치는 일을 결정한다고 힐난한 것은 그가 어사대부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술을 절제하지 않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실은 스스로 드러내서 가릴 수 없었다. 문제의 잘못은 경솔하게 계포를 불러들인 데에 있지 그를 쉽게 내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대신을 신중하게 등용하고 잘못을 뉘우쳐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아서, 다른 이의 말을 듣고 한 달 뒤에야 모함이 아님을 알게 되자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동은 내가 전략적으로 중시하는 지역이라서 특별히 그대를 불렀소이다.”

이것은 사실 신하의 수치심을 키운 것이지 문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한 말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경솔하게 계포를 불러들여서 일찌감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7. 가의의 학문은 순수하지 못해서 육지(陸贄)와 엇비슷했다

가의와 육지(陸贄), 소식(蘇軾) 이들 셋은 생애가 비슷했다. 육지와 소식은 스스로 가의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들을 칭찬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여겼다. 그러나 육지는 가의와 같이 되고 싶었을 뿐 그렇게 되지는 못했고, 다만 어떤 면에서는 가의보다 뛰어나기도 했다. 소식은 육지와 같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도 심지어 가의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의는 태자에게 미리 근본을 단정히 하고,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장려하여 풍속을 개선하도록 미리 가르쳐야 한다고 했는데, 이 점은 육지가 따라잡지 못했다. 이뿐 아니라 육지는 양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있을 때 양회왕이 낙마 사고로 죽자 그도 단식 끝에 죽었는데, 이것은 육지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두참(竇參)과 대립했던 감정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의의 학문은 거칠고 순수하지 못해서 육지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가의는 지혜를 이용하고 법령을 지키며 흉노를 제압하고 제후의 세력을 약화하려 했으니, 그가 쓴 삼표오이(三表五餌)의 방책은 어린애의 잔꾀였다. 그는 오(吳)나라와 초(楚)나라를 약하게 하고 제(齊)나라의 힘을 키워주었으며, 자신과 친한 이들을 사적으로 보살피려는 생각에 훗날 막대한 근심을 남기게 될 일을 염려하지 않았으니, 이는 노복이나 첩의 지혜이다. 하지만 육지는 이런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군주를 보좌하며 외로운 성을 단단히 지켰고 절조와 도의를 견지하여 그 충정(忠貞)을 잃지 않은 점은 육지가 가의보다 못하다. 그러나 분란 속을 드나들며 경중의 기세를 조절하며, 완급을 잘 헤아려 위험에서 벗어나 먼 지역까지 경영하는 일은 가의가 육지보다 못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의는 나이가 젊어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왕성했고 어려운 지경을 겪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성정이 굳고 올곧은 사람은 늘 화통한 성향이 조금 있는지라 근본은 넘치지만 말단은 부족이다. 이 때문에 가의와 육지는 각자의 장점을 헤아렸을 때 서로 우열이 나타난다.

소식의 경우는 어찌 이 두 사람과 비교할 만한 자격이 되겠는가? 그는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여 그 성정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군주의 은총이며 작록(爵祿), 화복(禍福)에 연연하여 이익이 그 운명을 앞선 것도 정도가 심했다. 자잘한 기예를 익히는 데에 힘쓰고 천하를 속여서 자신의 지혜를 자랑했다. 그의 학문은 짐작[揣摩]하는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천하를 현혹하여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아비에게서 장의(張儀)와 소진(蘇秦), 상앙(商鞅) 이사(李斯) 등의 잘못된 학설을 배워서 그것으로 천하를 쥐고 태평성대에서 사달을 일으키려 했다.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서 스스로 가의 같은 사람이라고 햇으며, 멋대로 이해관계를 엉터리로 짐작하고는 스스로 육지 같은 사람이라고 했으며, 마음이 미혹되어 제자들의 추대(推戴)를 따라서 스스로 맹자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단의 학설을 취하여 자신이 노자 같은 사람이니, 구담(瞿曇) 즉 석가모니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것들은 가의는 물론 육지도 하찮게 여겼던 바이다. 강주(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가의가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분란을 일으켰다.”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가의의 입장에서는 모함인데, 소식에 대해서는 적합한 비판이라 하겠다. 그는 어린 군주가 다스리는 위태로운 나라에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려 했지만 자신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자신을 높여서 가의와 육지 사이에 있고 싶어 했으니, 이야말로 송옥(宋玉)이 말했던 것처럼 “말의 관상을 보는 이들은 살찐 놈들만 추천하는[相者擧肥]” 격이다.

왕안석(王安石)은 가의와 비슷하지만, 가의가 더 정직했다. 가의는 방효유(方孝孺)와 비슷했지만 방효유가 더 순진했다. 방효유는 가의보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그것으로 재앙과 혼란을 막지 못하고 거의 죄악의 수괴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없고 자신은 아직 변화를 미리 도모하지 않은 채 그저 억측에만 의지해 천하를 얻어 경영하려 했을 때 성공한 예는 아직 없다. 가의의 뜻을 채우고 방효유의 시대에 처하여 자신의 품은 경세제민의 방책을 펼쳐 시행되게 하려 했다면 거의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과 나란히 달릴 수 있어야 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육지도 그렇게 할 수 없었거늘, 음란하고 못된 소식이야 언급할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를 향해 큰소리치는 사람은 군주가 등용하지 않더라도 애석해하기에 부족하다. 다만 육지는 사안에 따라 충성을 바칠 수 있었으니 현명한 군주라면 재갈을 물려서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8. 문제가 백성들 스스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게 한 것은 이권을 위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처사이다

문제는 사적으로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폐지하여 백성들 스스로 돈을 주조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는 당연히 그렇게 하면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주조할 수 있다면 빈민이 아니고, 빈민은 돈을 주조할 능력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간사한 부자만이 이를 통해 더욱 부유해지고, 소박한 빈민은 그로써 더욱 가난해진다. 돈이 더 많아지면 포백(布帛)과 곡식, 모시[紵]와 옻[漆], 생선과 소금, 과일 등을 사 모아서 쌓아 놓고 빈민들이 급히 필요로 하여 값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니, 빈민이 어찌 나날이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농사지어 먹고 양잠하고, 모시를 가꾸어 옷을 입고, 못을 파서 물고기와 자라를 기르고, 우리를 만들어 소와 돼지를 기르며, 나무를 베고 대를 심어서 목재를 만드는 일들에 빈민은 온 힘을 쓰지만 얻은 것은 별로 없다. 부자들은 비록 소작농과 일꾼을 늘리지만 그들 수익의 6, 7할을 갈취한다. 이것들은 돈을 주조하는 이익에 비해 천만 배도 넘는 차이가 있다. 설령 빈민의 힘을 빌린다 해도 고용비는 역시 겨우 얼마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사정이라도 해야 남은 이윤을 조금 나눠줄 것이다. 그러니 이 정책은 빈민을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들에게 부림을 당하도록 내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은 우형(虞衡)에게 산림과 연못의 산물을 관리하게 하면서도 절제시켜서 감히 과도하게 채취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천지의 산물을 쓰는 데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잔꾀를 부려서 윗사람의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일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이익이란 공평하게 아래에 퍼지게 하되 위에서 통제해야지, 부귀하고 권력을 지닌 자들의 수중에 있으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뜻을 미루어 생각하면 소금을 백성들이 마음대로 만들고, 차를 백성들이 마음대로 채취해도 위에서 추궁하지 않으면, 명분이야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천하에 매우 큰 손해를 끼칠 것이다.

어떤 이는 소금을 속임수로 얻을 수 있고, 차는 농사지어 곡식을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안겨주는데 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농사를 지으면 공전(公田)의 농사를 돕는 방식으로 세금을 대신했지만, 지금 농사를 지으면 공품(貢品)을 징수한다. 공전을 운영할 때는 백 무(畝)를 기준으로 삼았는데, 공품은 호구(戶口)에 따라 부과한다. 토지 겸병(兼幷)으로 인해 옛날의 법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옛 제도의 영향이 남아 있다. 백성에게 차는 곡식처럼 생계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곡식에는 제약을 두면서 차에는 제약을 두지 않으면 산을 깎아 밭으로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도 그 성과는 상공업자들과 같아질 뿐인지라, 옻나무 밭[漆林]의 세율이 20분의 5였어도 선왕은 가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한 군주의 땅에서 땅을 갈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찌 교활한 백성이 농사를 팽개치고 다른 일로 많은 이익을 챙기는 것을 제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공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권장하며, 소박한 것을 권장하고 간사한 것을 금지함으로써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고 산에 차를 심는 일을 백성들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물며 돈을 주조하는 것은 앉아서 이익을 챙기는 일이고, 부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의 교활한 짓을 조장하면서 빈민을 고생시키는 길이니, 간사하게 나라를 좀먹게 하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금, 은, 아연, 주석 광산은 그 이익이 돈을 주조하는 것보다 5배나 많아서 쟁탈전의 실마리가 된다. 그런데도 그것을 변호하여 백성들 마음대로 채취하여 이익을 챙기게 해야 한다고 한다. 병력을 동원해 살육전이 벌어져도 금지하지 않으면 백성은 군주를 두어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