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P. 맥더모트(Joseph P. McDermott)
16세기의 인쇄본의 우세
7세기 말엽부터 16세기 초엽까지 강남 지역의 서사(書肆)와 수집가들 사이에서 필사본과 인쇄본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이례적으로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서구의 서적사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최근의 추정 치에 의하면, 서구 유럽의 출판업자들은 그들이 책을 찍어냈던 첫 번째 세기 말까지 모두 해서 백만 권 가량을 찍어냈다. 하지만 필사본은 최소한 2세기나 3세기 이상 되는 기간 동안 전 유럽에 걸쳐 여전히 통용되고 있었다. 심지어 인쇄본이 가장 빨리 득세했던 잉글랜드에서조차 필사본은 천천히 소멸해 갔다. 인쇄는 1486년에 대륙에서 그곳으로 전해졌으며, 16세기 첫 번째 10년까지 400여 종 이상의 서적이 나왔다. 이 숫자는 1630년대에는 대략 6천까지 치솟았으며, 1710년대에는 거의 2만 1천 종이, 그리고 1790년대에는 5만 6천 종, 1870년대에는 32만 5천 종 가량의 개별적인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에 나온 잉글랜드의 독서사(讀書史)의 편자의 견해에 의하면,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상업적인 필사본 유통은 서적 산업과 나란히 유지해 나갔다. 손이나 인쇄에 의해 만들어진 텍스트의 종류가 다양했던 것처럼 인쇄물에 비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필사본 텍스트의 비율은 이전과 달랐다. 하지만 심지어 18세기나 19세기에 인쇄의 우위는 때때로 필사로 된 전달 방식에 의해 도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인쇄가 갖고 있던 의심할 바 없는 헤게모니는 인쇄가 잉글랜드에 소개된 이후 4세기 동안이나 완벽하게 공고한 지위를 갖고 있지 못했다.
중국의 경우에 두드러지는 것은 중국에서 상업과 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지역의 장서와 서적 시장에서 인쇄가 필사본에 대해 분명하게 우위를 점하기 이전에 경과했던 (7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는 8세기나 되는)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두 가지 유형의 텍스트 사이의 기나긴 경쟁 관계나 명대에 이르러서야 인쇄가 승리를 거두게 된 사실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종종 명대에 인쇄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정부 차원의 인쇄 기획이나 과거 시험의 확산, 그리고 초기의 검열 제도의 중단과 같은 일반적인 정치적 요인들이 이용되곤 했다. 그러나 나는 16세기 초에 인쇄가 갖는 이점이 우세를 점하게 된 것에 대해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에 같은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인쇄물 가격이 하락하고 출판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던 기관이 정부 조직에서 민간 업자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데니스 트위쳇과 이노우에의 관점에 의하면, 송원(宋元)과 명대 초기의 인쇄물은 비쌌다. 결과적으로 수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업자들은 인쇄 부수를 대규모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 결과 송대와 원대 판본이 희소하게 된 것은 16세기 이래로 서적 수요가 급격하게 팽창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나온 책들의 가격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잉린(胡應麟)이 지적한 대로, 종이의 질이나 목판 각인(刻印)의 세련도, 사용된 목판의 유형, 텍스트의 정확도, 포장을 공들여 했는지, 실제 인쇄된 저작에 주의를 기울였는지에 따라 서적의 가격이 달랐다. 16세기에 나온 새로운 인쇄물에 대한 서적 가격을 하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앞서 든 것 가운데] 첫 번째 두 가지 요인에 대한 비용의 하락인 듯이 보인다.
전통적으로 유럽에 비해 중국에서는 종이가 서적 생산에 드는 비용 가운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요소였던 듯하다. 그럼에도 종이의 가격이 송대와 명말 사이에 떨어진 것은 확실하다. 송대에는 어떤 품질의 종이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양면에 글씨를 쓸 정도로 비쌌다. 송대의 인쇄업자들은 의레 페이지의 공백에 인쇄를 함으로써 종이를 재활용했다[16세기의 관리였던 장쉬안(張萱, 1459-1527년)은 개인적으로 명의 황실 도서관 장서에서 송대의 종이를 확인할 때까지 이러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북송 대에 정부 관청에서는 가외의 수입을 얻기 위해 또는 심지어 연회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종이를 내다 팔았다.
하지만 14세기 말과 15세기에는 그러한 검약 정신이 조정에서나 지방의 관청에서나 흥청망청 낭비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은 종이의 가격이 하락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지가 된다. 다음의 일화는 종이 사용에서 일어난 변화를 시사해준다.
저쟝성 취저우(衢州)에서는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종이를 만들고 있다.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그들이 해마다 관청에 공급하는 종이의 양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조정의 호부의 (환관 출신) 고관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았을 때, 그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천순(天順) 연간(1457-1465년)에 어느 나이 먹은 환관이 쟝시(江西)에서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조정의 호부에 공용으로 쓰이는 종이를 벽에 처바른 것을 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나는 그 환관이 그 종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함부로 낭비되고 있는 데 슬픔을 느꼈던 것이라 생각한다.
16세기 초까지 종이를 손쉽게 소비하는 것은 관계(官界)를 벗어나 일반 평민이나 향촌 지역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가정(嘉靖) 연간의 어떤 평자는 이런 식으로 농촌 마을에서조차 종이의 사용(그의 견해로는 낭비하는)이 널리 확산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요즘 쟝저(江浙)의 상인들은 종이를 배와 수레에 싣고 온다. 종이를 거래하러 다니는 배들은 [물 위에서] 서로 마주치고, 길에서는 그들이 타고 다니는 수레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종이의 절반 정도는 장례식 때 “지전(冥紙)”으로 태워진다. 열 채의 집이나 몇몇 가족밖에 없는 마을에도 늘상 종이로 만든 말을 파는 노점이 있다. 사람들은 항상 절이나 사당의 제단 위에 공물이나 희생을 위해 종이를 태우고 있다.
이 평문의 작자인 리롄(李濂, 1514년 진사)은 확실히 종이를 대량으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을 달갑지 않은 인쇄 문화의 폭발과 연결시켰다. 그것은 곧 “경서가 아닌 서적과 무용한 책”들을 출판하고, 과거 시험 공부를 위한 수험서에 빠져드는 것이 확산되며, [당시] 시류가 불필요한 둔사(遁辭)와 췌언(贅言)의 글쓰기로 흐르고, 조정에서도 서류 작업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는 “도처의 벽마다 조정의 방문과 공지문으로 채워져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종이의 소비가 팽창한 것은 훨씬 싸고 좀 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종이의 생산이 증가한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종이의 생산은 안후이(安徽) 남부와 강남, 그리고 쓰촨의 일부 지역에서는 수공업으로 진행되었음에도, 저쟝(浙江)과 쟝시(江西), 그리고 푸졘(福建)에 걸친 지역들은 특히 인쇄에 적당한 고품질이면서도 상대적으로 값싼 대나무 종이의 산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종이의 가격 하락이 출판 붐을 가능하게 만들긴 했지만, 이것이 인쇄로 옮아간 결정적인 가격 요인이 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값싼 종이가 필사본에도 사용될 수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필사본의 가격 역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판본 가격에 대한 정보가 없기는 하지만, 목판을 새기는 데에서도 기본 가격의 변동이 일어났던 듯이 보인다. 쑤저우(蘇州)에서의 판각 가격에 관한 두 가지 사례는 글자 백 개당 판각 비용이 1250년 경 200문에서 1600년 경 26-35문으로 급격히 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그 사이 몇 세기 동안에 있었던 통화의 변화 때문에 실제적인 하락폭이 수치가 제시하는 것에 비해 적기는 하지만, 판각 비용의 하락폭은 여전히 상당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렇게 절감된 비용의 혜택이 독자들에게 돌아갔는지, 또는 이와 동시에 수반되었던 변화가 필사본 출간 가격에서도 일어났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문인이었던 리쉬(李詡, 1505-1593년)가 쓴 평어의 도움으로 필사본과 인쇄본 사이의 상대적인 가격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창쟝 삼각주의 북쪽 언저리에 있는 쟝인(江陰)의 임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과거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인쇄된 책은 아무 것도 구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필사본만 사용했는데, 이것은 (친구의 집이나 서적상에서) 필경사에게 20에서 30장에 약 2문이나 3문 가량을 주고 만든 것으로, 곧 필사한 종이 한 장 당 0.1문이 들었던 셈이다. 확실히 목판에 100 글자를 새기는 데에만 약 30문이 들었던 인쇄본으로서는 필경이 훨씬 더 낮은 가격에 책 한 권을 다시 만들어냈던 것과 경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출판업자가 같은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그런 경제학은 변했을 것이다. 우리가 손으로 베껴 쓴 리쉬의 책 한 장 위에 들어가는 글자 숫자인 400에서 500 글자 정도가 각각의 목판에 새겨진다고 가정한다면, 각각의 목판은 새기는 데 대략 140문 정도가 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16세기에도 목판을 새기는 데 드는 비용이 목판 인쇄를 위한 생산비의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그리고 다른 인쇄 비용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가정한다면, 상업적으로 책을 만드는 이는 한 권의 책을 수백 권이 아니라 수천 권을 팔 수 있다고 기대할 수만 있다면 베껴 쓰는 것보다는 인쇄를 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서적 출판의 경제 논리는 명말에는 가격이 더 낮아졌음에도 새로운 책에 대한 모험적인 선택은 단념케 하고 판매가 입증된 책들을 인쇄하는 경우 합리적으로 예상 가능한 시장을 보상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개 그렇게 안전한 인쇄물은 몇몇 유명한 시나 산문의 저자들의 작품이나 과거시험 수험서, 의서와 소설이 되었다.
목판의 판각 비용의 하락은 직접적으로는 적어도 16세기 중반보다 늦지 않은 시기 정도에 널리 채용된 판각 기술의 단순화에서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송 판본의 글자에 사용된 서체는 유명한 서예가의 필치를 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었는 데 반해, 16세기 중반 이후로 점증하는 인쇄본의 글꼴은 장체(匠體), 즉 송체(宋體)였다. 단순하고 각진 이 글꼴 덕분에 판각을 완수하는 데 드는 시간과 각공의 기술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출판업자들은 판각 비용과 나아가 인쇄본의 소매 가격을 더 낮추었을 감소 효과를 볼 수 있었을 터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수많은 명대 문인들을 분개하게 만들 정도로 각공이 재현하는 필치의 영역을 축소시켜 버렸는데, 이것은 곧 인쇄본에 있었던 필사본적인 외양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학적 가치의 희생을 대가로 하는 생산성에 대한 이러한 압박은 난징과 쑤저우의 일부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자극하였다. 즉 매우 세련된 인쇄본, 가장 요구가 까다로운 문인 애호가의 만족을 겨냥한 아름답게 판각된 인쇄본으로의 특성화가 그것이다. 매우 숙련된 각공들을 고용함으로써 그들은 삽화와 본문이 송대의 많은 인쇄본보다 좀 더 훌륭한 그림이나 우아한 서예 작품과 흡사한 인쇄본들을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장인의 판각 양식의 발전이 책에 대한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출판업자들의 능력을 증대시켰다 하더라도, 도서 시장은 하향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확대되지는 않았다. 캐서린 칼리츠와 로버트 헤겔이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것처럼, 판각이 점차 정교화되면서 출판업자들은 상층의 엘리트 고객들이라는 한정된 그룹을 위한 세련된 판본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장인의 판각 스타일의 채택에 확실히 금전적 투자나 특별한 기능(실제로 덜 숙련된 판각이 용인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기구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출판업자들이 인쇄 비용을 줄이는 이러한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시간(어림잡아 8세기 정도)이 걸렸는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대답은 아마도 15세기말까지의 필사작업의 낮은 노동 비용에 있었을 것이다. 송대 초기에 과거제도는 지식수준을 높이고 학자와 지식층 독자들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동시에 그 높은 실패율은 수많은 잠재적 필사자들(하나의 거대한 잉여 저작 노동력)을 양산하여 자연적으로 필사 비용을 낮추게 됨으로써 필사본이 인쇄본보다 쌌던 것이다. 중국에서 기술적 진보의 광범위한 적용이 오래도록 지체된 고전적인 예가 있다. 8세기의 위대한 발명인 목판인쇄술은 책 문화에 즉각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인 필사본이 지속적으로 낮은 노동 비용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특정 부류의 인쇄물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대되면서 변화하게 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과거시험 지침서에 대한 관심의 폭증,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특정 부류의 작품, 특히 허구적인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인기 때문이었다. 15세기말부터 과거시험 참가 지망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과거시험 지침서와 참고서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예를 들어, 1465년 이전에는 과거시험 합격 답안이 책으로 인쇄되지 않았다. 그러나 1480년 무렵에 항저우 부의 부지사(同知)가 그것을 인쇄하여 큰 이익을 얻자, 푸졘과 기타 지역의 출판업자들이 손쉬운 이익을 얻기 위해 그의 선례를 따라 이 길로 몰려들었다. 그 후 일부 저자들(그들 중 상당수가 과거시험 실패자들이었다)이 확대된 독자들을 위한 그 자신의 저술과 편집 작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게 되면서 과거시험 참고서의 인쇄는 남송 때보다도 더 번영하였다. 리롄(李濂)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요즘은 과거시험에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면 서방(書坊)들이 인쇄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시험을 위한 책이 아니면, 시장의 상점들은 팔려고 하지 않는다. 또 과거시험을 위한 것이 아니면, 학자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16세기 초반 당시 새로운 종류의 작품에 대한 대중적 요구도 성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작품은 16-17세기의 많은 선집들처럼 단지 개인의 생일이나 관직 임명, 그리고 부임 등을 축하하는 의례적인 글들만 포함하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명말의 문학적 상상을 자극한 소설과 가극, 그리고 희곡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남송부터 20세기 초까지의 현존하는 중국 허구작품을 출판한 1,056개의 출판사들 가운데 단 5개만 제외하고는 모두 1520년 이후에야 활약하였다.
명대의 낮은 도서 가격과 경쟁적인 관료선발 시험, 문학 또는 학문 서적의 새로운 형태들, 그리고 더욱 상업화된 경제를 위해 요구되는 높은 교양 수준 등은 인쇄본에 대한 수요 증가를 유발하였고, 이는 다시 상업적 출판사들의 흥성을 이끌었다. 이것은 앞에서 분석한 것처럼 인쇄본의 가격 하락과 더불어 16세기 초 인쇄본의 주도권을 뒷받침해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상업적 출판사’(坊刻)라는 용어는 (유명한 졘양의 출판업자들처럼) 장기적인 가족 기반의 출판업자나 출판업으로 확장한 서점 지배인 또는 서상,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작품의 일부를 인쇄하기 시작한 장서가들, 또는 자신들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점잖은 방법으로서 출판업으로 전향한 문인 가족들까지도 포함하는 서로 다른 기원과 형태의 다양성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었든 상업적 출판이 명말에 중국의 출판문화를 주도하게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동시에 거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정부나 관 주도 출판의 영향력 하락, 즉 초기부터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었던 쇠락이 존재했다. 송대부터 정부나 관 주도의 출판사는 비대중적인 시장을 위한 출판 영역을 형성하였다. 1166년에 장서가 왕밍칭(王明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최근 몇 연간 내가 방문했던 현청(縣廳)들은 개인 저자들의 문집을 자주 출판하였고(刊文集), 그 사본을 얻어 베끼거나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장슈민은 송대의 지방 기관과 관료들이 정부의 자금으로 출판한 1백 부 이상의 서적들을 목록으로 만든 바 있다. 이 책들에는 이들 관료나 그들 조상의 글들, 또는 다른 개인 장서가에게서 입수한 책들에 의지할 경우에는 그들 관할구역 출신 명사의 글들이 수록되었다.
신시아 브로카우가 [이 책의] 첫 번째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확실히 정부나 기관의 출판과 상업적 출판 사이에 엄격한 선을 긋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편으로는 기관의 인쇄본들은 지역의 서원이나 학교에 기증되거나, 또는 자신들의 인쇄본을 상업적인 이익보다는 사회적인 이익, 즉 친구들이나 다른 관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후원한 관료들에 의해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이윤을 위해 판매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는 체르니악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비록 정부나 민간의 출판과 상업적인 출판이 때때로 별도의 체계로서 다뤄지기는 하지만, 정부나 준(準)기관, 민간 인쇄소 및 상업적 인쇄소들은 모두 지역 차원에서 판매를 위해 경쟁하였다.” 공적으로 출판된 책들의 상업적인 판매는 명대 내내 유지되었고, 당시 환관들과 황실의 황자들은 관료들과 결합하여 정부의 자금과 정부 기관들을 이용해서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책들을 출판하였다.
<표 2.2> 1131년부터 1367년까지의 전체 인쇄본에서 관방의 인쇄본이 차지하는 비율(베이징 중국국가도서관과 타이베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러나 명대에 각급 정부 기관들이 비록 인쇄본들을 출판(하고 판매)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 도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왕조 설립 후 2세기 동안 크게 하락하였다. 다소 개략적이기는 하지만, 이노우에는 16세기 말까지의 공식적인 출판의 운명에 관한 또 하나의 시사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표 2.2>와 2.3 참고). 한편으로 정부의 또는 공적으로 후원된 서적 인쇄본의 수량은 1131년에서 1521년 사이, 그리고 1368년에서 1566년 사이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정부와 관청의 인쇄본들은 비록 그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이 그것들의 전파와 소비를 제한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해도, (최소한 타이베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현존하는 인쇄본 전체만 놓고 본다면) 사실상 송원대와 명대 초기 1백 년 동안의 모든 인쇄본의 절반에 해당된다. 그러나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과 타이베이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연대가 확인되는 모든 현존하는 인쇄본들을 통해 볼 때, 명대 초기의 2세기 동안 정부 인쇄본의 비율은 상당히, 그리고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하락하였다. 1368년부터 1464년까지의 모든 현존 인쇄본들 가운데 51%에 달하던 정부 인쇄본의 비율은 다음 세기동안 점차 줄어들어 26%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그 하락은 사부(四部) 전체에서 나타났다. 단지 명대 초기 작가와 독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받았던 학문적인 분야인 사서(史書)들만은 꽤 높은 비율인 39%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후원한 경서와 제자서 범주의 인쇄본들은 명대 통치의 첫 2세기 동안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상업적 출판사들에 의해 출판된 경전 주해서들과 의서들의 인기 때문이었다.
<표 2.3> 1368년에서 1566년까지 정부와 관청에 의해 출판된 명대의 연대 추정 가능한 현존 인쇄본의 출판 연대 분포
실제로 리쉬는 값싼 인쇄본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필사본이 사멸해가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상업적 출판업자들(坊刻)의 핵심적인 역할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요즘 사람의 눈을 채우는 것은 모두 상업적 출판업자들의 인쇄본들인데, 이는 이 시대의 두드러진 기호를 아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이다.” 대략 16세기 중반에 상업적 출판업자들은 경쟁력 있는 가격과 소설의 주제, 그리고 유용성 등을 통해 출판계에서 우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와 17세기 초반 상업적 출판사와 인쇄본의 급증은 명대 후기의 마지막 1세기 반 동안 중국 출판 산업 전체의 눈부신 성장을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