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32-샹그릴라 가는 길2

현실이 팍팍하거나 시대가 우울하거나, 자신에 대해 회의가 깊어지면 이상향을 떠올리기도 한다. 상실감이 클수록 공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코로나19가 길이 막힌 지 벌써 1년, 갑갑증이 매일 도지곤 한다. 그러거든 앞의 글에서 루구호까지 닿았던 ‘나의 샹그릴라 가는 길’을 이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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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강 양안의 협곡은 절경을 자랑한다

루구호에서 소환선(小環線)을 타고 라보촌까지 80킬로미터 정도의 꼬불꼬불 산길을 세 시간 정도 넘어가면 호수같이 고요한 진사강을 만나게 된다. 호도협을 무너뜨릴 것처럼 포효하던 진사강을 기억한다면 이곳의 고요함은 경이롭다고 할 것이다. 진사강을 건너는 거낭두(革囊渡)대교에서 바오산향(寶山鄕)의 석두성까지는 찻길도 있고 뱃길도 있다. 차를 타면 등골 서늘한 절벽 길에서 심장이 오그라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작은 철선을 타고 고요한 진사강 물결에 실려 가면 양안의 절경에 숨이 넘어갈 것이다. 석두성은 가파른 경사에 불쑥 솟은 거대한 암반 위의 작은 마을이다. 그 위치가 워낙 기묘한 탓에 몽골군도 공략하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석두성 객잔에서 바라보는 진사강의 석양도 멋진 오지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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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경사에 불쑥 솟은 거대한 암반 위의 작은 마을인 석두성 의 주민.ption>

석두성에서 남서쪽으로 산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면 한국인들에게도 국민관광지라 할 만한 리장(麗江) 고성이다. 리장에서 호도협으로 가면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를 1박2일 동안 걸을 수 있다. 하바설산 남록을 가로지르며 위룽(玉龍)설산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중도객잔이나 나시객잔에서의 하룻밤은 호도협이 주는 또 하나의 짜릿한 낭만이다. 호도협 동쪽 출구에서 북으로 가면 백수대(白水臺)를 거쳐 샹그릴라시에 닿는다. 샹그릴라의 두커쭝 고성이나 송찬림사, 나파하이의 초원과 습지 역시 멋진 여행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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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 대협곡의 바라거쭝

그러나 나의 샹그릴라 가는 길은 샹그릴라시까지가 아니다. 북서쪽으로 170킬로미터 정도 더 가야 한다. 샹그릴라 대협곡의 바라거쭝(巴拉格总)을 들렀다가 바이마설산을 지나 메이리설산(梅里雪山)과 대면해야 한다. 바라거쭝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오히려 추천할 만하다. 바이마설산(해발 5640미터)이 차창으로 스치면 곧 더친현에 이른다. 더친현 중심을 빠져나가면 메이리설산 전망 포인트에 다다른다.

메이리설산은 해발 6740미터의 주봉을 포함해 6천 미터 급 봉우리가 13개나 늘어서 있다. 티베트 동남부에서 가장 높은 산군이다. 주봉은 아직도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적이 없다. 1991년 1월에는 중일연합 등산대가 도전했다가 대원 17명 전원이 조난당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등산이라면 전문가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설산을 조망하는 것은 여행객의 몫이다.

메이리설산의 절경은 전망대 위치도 큰 역할을 한다. 메이리설산은 서쪽으로는 고산들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동록의 계곡으로는 단숨에 4천5백 미터를 내려앉는다. 그곳에는 란찬강(베트남의 메콩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란찬강의 동쪽 기슭 위로 해발 4천 미터 높이에 바로 전망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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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설산 일몰

그러나 최후의 절경은 따로 있다. 바로 석양과 일출이다. 붉은 해가 설산 너머 기울어가면서 설산 위의 넓고 높은 하늘에 시뻘건 노을이 광대하게 펼쳐지곤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차례나 뒤집힌다. 신속하고 거대한 붉은 빛의 향연은 하늘을 통째로 휘두르는 춤사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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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설산의 일출. 해를 받으면 백옥 같던 눈과 빙하는 붉은 기운이 도는 황금빛을 반사한다.

일출도 상상을 절한다. 전망대의 등 뒤로 해가 떠올라 전망대 앞의 설산을 비추기 시작하면 메이리설산의 백옥 같던 눈과 빙하는 붉은 기운이 도는 찬란한 황금빛을 반사하기 시작한다. 황금빛은 설산을 태울 듯이 정상에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인간과 자연 모두를 쿵쾅거리게 하는 거대한 합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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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찬강 츠중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

일출 후에는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리고는 란찬강으로 내려가 강을 따라 남으로 길을 이어가야 한다. 메이리설산 전망대까지의 겨울 날씨와는 전혀 다른 봄이 포근하게 받쳐준다. 표고차이 때문이다. 란찬강의 수면은 넓다. 때로는 햇빛을 가루로 부수듯 튕겨내어 멋진 윤슬을 연출하기도 한다. 란찬강 강가의 츠중(茨中)이란 작은 마을도 찾아볼 만하다. 이곳에는 1867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당과 포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다. 포도원은 당시 선교사들이 가져온 로즈허니(Rose honey, 玫瑰蜜)라는 품종의 와인을 지금도 생산한다. 1860년 유럽에서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흑사병이 돌아 이 품종이 절멸되는 바람에 지금은 전세계에서 이곳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덕분에 살아남은 품종이라니 샹그릴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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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가 허구의 지명이란 것은 누구나 안다. 그것을 향해 솔깃해지는 마음은 실제의 샹그릴라를 만들어 내곤 한다. 나만 해도 답사여행 중에 종종 듣는 노래 <Our Shangri-la>가 있다. 길 위의 음악친구가 되는 에밀루 해리스가 마크 노플러와 듀엣으로 부른 버전이다. 중년 남자의 밍밍한 웅얼거림이랄까 아니면 말랑말랑한 감미로움이랄까, 음유시인 풍의 노래가 매력적이다.

대중화된 샹그릴라는 1933년 발표된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The Lost Horizon)>이다. 샹그릴라는 윈난 리장에서 디칭 자치주로 가는 길목의 샹거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연유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작가의 창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소설은 전쟁과 공황에 시달리던 시대의 상실감과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했다. 1937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더 유명해졌다. 이탈리아계 미국 영화감독 프랑크 카프라가 감독이었고 존 하워드와 제인 와이어트가 주연이었다.

샹그릴라를 또 하나의 실물로 만들어낸 것은 호텔업계였다.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에 동명의 호텔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 체인망을 구축하고 있는 샹그릴라 호텔은 1972년 말레이시아의 부호 궈허녠이 싱가포르에서 창업한 것이다. 이상향의 이미지를 고급 호텔과 리조트에 가져와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십년 동안 한국인이 샹그릴라를 언급했다면 그것은 중국 윈난성의 디칭(迪慶)티베트자치주의 행정중심인 샹그릴라시(香格里拉市 2014년 시로 승격)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디칭자치주는 행정으로는 윈난성이지만 지리로는 티베트고원의 동남부 끝자락이다. 호적인구 36.9만 가운데 티베트인이 13.3만으로 32%를 차지한다. 리쑤족(11.2만), 나시족(4.7만)도 적지 않다. 한족도 4만이나 상주인구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샹그릴라 상업화의 최대 히트작은 디칭이 샹그릴라를 행정지명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관광업을 일으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윈난과 쓰촨 티베트 등 중국의 서남부뿐 아니라 미얀마 네팔 부탄 인도 등지에서도 자기네 지역이 소설 속의 샹그릴라라는 주장은 많았다. 디칭자치주는 좀더 적극적이었다. 1997년 자치주 건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세외도원 샹그릴라가 바로 디칭이라고 선언하면서 지명을 선점했다. 그 이후 구체적인 조사연구를 보완하여 중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냈다.

결국 2002년 디칭의 행정중심인 중뎬현을 샹그릴라현으로 개칭했다. 그 이후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칭자치주 전체의 지역경제는 이제 관광업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제임스 힐튼은 1920, 30년대 서구의 상실감에 오리엔탈리즘을 버무려 이상향 욕구를 자극했다. 70년 후에 중국은 그 허상을 가져다가 현실 속의 샹그릴라라는 간판을 세우고는 막대한 현찰 관광수입을 취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샹그릴라가 있을 수 있다. 나는 2018년 겨울에 루구호를 거쳐 메이리설산까지 8일간의 여행을 했다. 감동의 여정이었다. 다시 2019년 겨울, 일년 전의 여정에 진사강의 소형 철선과 바라거쭝 대협곡과 란창강 코스를 추가하여 19일간의 여행을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자신만의 샹그릴라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없었다면 코로나19 이후의 첫 번째 여행으로 계획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샹그릴라는 외래어이다. 로마자로 Shangri-la이다. 중국어는 香格里拉이고, 중국어 지명의 우리말 표기로는 샹거리라이다.)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