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소설 서발문中國古代小說序跋文 <한위가 지은 《모영전》을 읽은 뒤 적다讀韓愈所著毛穎傳後題>

<한위가 지은 《모영전》을 읽은 뒤 적다讀韓愈所著毛穎傳後題>

류쭝위안柳宗元[1]

【原文】

自吾居夷[2],不與中州人通書[3]。有來南者,時言韓愈爲《毛穎傳》,不能擧其辭,而獨大笑以爲怪,而吾久不克見[4]。楊子誨之來[5],始持其書,索而讀之,若捕龍蛇,搏虎豹,急與之角而力不敢暇[6],信韓子之怪於文也。世之模擬竄竊[7],取靑媲白[8],肥皮厚肉[9],柔筋脆骨[10],而以爲辭者之讀之也,其大笑固宜。且世人笑之也不以其俳乎[11]?而俳又非聖人之所棄者。《詩》曰[12]:󰡒善戱謔兮,不爲虐兮󰡓。《太史公書》有《滑稽列傳》[13],皆取乎有益於世者也。故學者終日討說答問,呻吟習復,應對進退,掬溜播洒[14],卽罷憊而廢亂[15],故有息焉游焉之說[16],不學操縵,不能安弦[17],有所拘者,有所縱也。

大羹玄酒[18],體節之薦[19],味之至者,而又設以奇異小蟲水草楂[20]梨橘柚,苦鹹酸辛,雖蜇吻裂鼻[21],縮舌澁齒,而咸有篤好之者。文王之菖蒲菹[22],屈到之芰[23],曾晳之羊棗[24],然後盡天下之味以足於口,獨文異乎?

韓子之爲也,亦將弛焉[25]而不爲虐歟,息焉游焉而有所縱歟,盡六藝之奇味以足其口歟,而不若是,卽韓子之辭若壅大川焉,其必決而放諸陸[26],不可以不陳也。

且凡古今是非六藝百家,大細穿穴用而不遺者,毛穎之功也。韓子窮古書,好斯文,嘉穎之能盡其意,故奮而爲之傳,以發其鬱積,而學者得之勵,其有益於世歟!是其言也,固與異世者語,而貪常嗜瑣者,猶呫呫然動其喙[27],彼亦甚勞矣乎!

【우리말 옮김】

  내가 오랑캐의 땅에 거하고 있을 때, 중원의 사람들과는 서신 왕래가 없었다. 그런데 남쪽에 내려온 이가 있어 당시 한위가 《모영전》을 지었다고 말해주었는데, 그 내용은 거론하지 않고 혼자 크게 웃으며 괴이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그 글을 구해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처남인] 양후이즈가 그 글을 가져왔기에 그제야 구해 읽어볼 수 있었는데, 마치 용이나 뱀을 잡듯이, 호랑이나 표범과 싸우듯이 황급히 책에 몰두해 잠시도 쉴 틈이 없었으니, 한위의 문장은 진정 괴이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모방하고 표절하며, 자구를 짐작해 글귀의 대우를 맞추고, 그 형식만 방대하게 할 뿐 실제 내용은 없으니, 글 짓는 이들이 그것을 읽고 크게 비웃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또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그의 장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장난치는 것조차도 성인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장난도 잘 치시지만, 해롭지 않네善戱謔兮, 不爲虐兮”라고 하였고, 《사기》에도 《골계열전》이 있어 세상에 유익한 것을 취하였다.

  본디 배우는 이들은 하루종일 (경전의) 말씀을 토론하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읊조리고 복습하되, 다른 사람을 응대하는 가운데 나아가고 물러가는 등, 양손으로 물을 떠서 흩뿌리듯 의미 없는 일을 하느라 지치고 정신없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잠시라도 쉬고 노닐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니, 현악기의 줄을 조율하고 음을 맞추는 것을 배우지 아니하면 편안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억누르는 것이 있으면 풀어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제사용으로 쓰는 담백한 육즙과 제례에 올리는 검은 빛깔의 물, 그리고 군왕이 제후들에게 나누어주는 희생물의 고기와 같은 것들은 맛의 지존이다. 하지만 여기에 다시 기이한 곤충이나 물풀, 산사열매나 배, 귤이나 유자 등을 배설하는 것은 그 맛이 쓰고 짜고 시고 매워 입과 코를 자극하고, 혀를 움츠러들게 하며, 입안을 떫게 하여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문왕은 창포 절임을 좋아하였고, 취다오屈到는 마름을 좋아하였으며, 쩡시曾晳는 양조를 좋아하였는데, 그렇게 한 뒤에야 천하의 맛을 다하여 입을 만족시켰다 할 만하니, 어찌 문장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한위가 그 글을 쓴 것 역시 휴식을 위한 것이지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쉬엄쉬엄 휴식을 취하고 노닐면서 긴장의 끈을 풀어놓은 것이다. 육예의 기이한 맛을 다하여 그 입맛을 만족시킨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한위의 문장은 마치 큰 강을 막은 둑과 같아서 반드시 무너져 여러 곳으로 흘렀을 것이니, 그렇게 펼쳐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고금의 시비와 육예와 제자백가에 대해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붓(모영)의 공이라 할 수 있다. 한위는 옛 서적을 궁구하고 유가의 문장을 좋아하였으니, 붓으로 그 뜻을 다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상히 여겨 분연히 붓을 위해 전을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맺혀 있던 것을 풀었고, 배우는 이들을 격려하였으니 그 자체로 세상에 유익함이 있을진저! 한위의 이야기는 실로 다른 세상의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통상적인 것을 탐하고 번쇄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여전히 이러니저러니 주둥이를 놀려대니, 그들 역시 몹시 수고로울 따름이다.

【해설】

  잘 알려져 있듯이 한위는 정통 유학자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제기한 유희적인 문장이 당시 문단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지은 《모영전》은 붓을 의인화해서 일종의 전을 쓴 것으로, 이런 형식의 글을 가전假傳이라 한다. 가전 형식의 글은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을 의인화했으되 그 전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글이 갖고 있는 심오한 뜻을 함께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글을 즐길 수 있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데, 정통적인 문장관을 고수한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류의 글을 ‘희문戱文’으로 여겨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모영전》이 나오자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괴이하다 여겼다.大笑以爲怪.” 그래서 페이두裴度 같은 이는 “문장으로 도를 만들지 아니하고, 장난짓거리로 삼았으니,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不以文爲制, 而以文爲戱, 可矣乎? 可矣乎)”(<리가오에게 부친 편지寄李翶書>) 라고 비난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한위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류쭝위안이 팔을 걷어붙이고 한위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류쭝위안은 이 글에서 《모영전》이 갖고 있는 의의를 한껏 치켜 올리는 동시에, 한위가 장지張籍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전과 같은 해학적 문장이 결코 정통적인 문장에 폐해가 되지 않음을 논증하였다. 흔히 음악하는 사람들은 “쉼표도 음악이다”라는 말을 한다. 곧 팽팽한 긴장감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것 못지않게 한 순간 느슨하게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류쭝위안의 주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적인 육예의 문장이 있으면 가전과 같은 ‘희문’ 역시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후대의 루쉰魯迅이 주장한 “소설이 휴식에서 나왔다는 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석】

 [1] 류쭝위안柳宗元(773~819년)의 자字는 쯔허우子厚이고, 원적原籍은 허둥河東 졔 현解縣(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 현運城縣 서남쪽)이다. 산시陝西 완녠萬年(지금의 시안西安)에서 태어나 정원貞元 9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이후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 감찰어사監察御使,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왕수원王叔文 등과 함께 정치 개혁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융저우 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10년 후 류저우 자사柳州刺史로 자리를 옮겨 5년 동안 그곳에 있다가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류쭝위안은 문학과 이론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는데 이 글은 그가 한위韓愈의 《모영전毛穎傳》을 읽은 뒤의 감상이다. 모영毛穎은 붓의 별칭이다. 《모영전》은 한위韓愈가 의인화의 수법을 사용하여 붓의 신세를 묘사한 것으로, 자신의 우울한 심정을 나타내고 아울러 세상 사람들을 격려한 것이다. 류쭝위안은 《양후이즈에게 보내는 서신與楊誨之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한위의 《모영전》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 여기고 있소.足下所持韓生《毛穎傳》來, 僕甚奇其書.” 이 서신은 원화元和 5년(서기 810년) 11월에 쓴 것이고, 이 글에서 “내가 오랑캐의 땅에 있을 때……남쪽에 내려온 이가 있어 당시 한위가 《모영전》을 지었다고 말해주었는데……나는 오랫동안 그 책을 구해 볼 수 없었다.自吾居夷……有來南者, 時言韓愈爲《毛穎傳》……而吾久不克見.”라고 하였던 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久不克見”는 것은 《모영전》이 세상에 등장하여 류쭝위안이 읽기까지 일련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정원貞元 19년 이전에 한위는 창안長安에 있었다. 영정永貞 연간(서기 805년) 이전에 류쭝위안은 창안에 있었고 한위와 왕래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모영전》이 나와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이것으로 짐작컨대 《모영전》의 저작시기는 영정 연간 이전으로 잡을 수 없고, 원화 4년보다는 늦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류쭝위안이 이 《후제後題》를 쓴 것은 당시 《모영전》을 비난하는 몇몇 사람들의 견해에 대하여 일부러 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영전》을 비난함을 염려하여 지금 수백 마디 말을 쓰노니, 나는 이전의 성인들이 잡희雜戱를 비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恐世人非之, 今作數百言, 知前聖不必罪俳也.”(《양후이즈에게 보내는 서신與楊誨之書》에 보임)

 [2] 거이居夷 : 소수민족이 거주했던 지역. 당시에 작자는 융저우永州(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링링零陵)로 좌천되어 융저우 사마司馬로 있었다.

 [3] 중주中州 : 중원 일대를 가리킨다.

 [4] 불극견不克見 : 볼 수 없었다.

 [5] 양후이즈楊誨之 : 후난 성 관찰사觀察使 양핑楊憑의 아들로, 류쭝위안의 손아래 처남이다.

 [6] 약포룡사若捕龍蛇 등 3구절 :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독서하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7] 모의찬절模擬竄竊 : 모방하거나 베껴 쓰는 것이다.

 [8] 비媲 : 여기에서는 ‘받쳐준다’는 뜻이다. ‘푸른 것을 취해 흰 것을 받쳐준다取靑媲白’는 것은 자구를 짐작해 글귀의 대우를 잘 맞추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9] 비피후육肥皮厚肉 : 형식이 방대하다는 뜻이다.

[10] 유근취골柔筋脆骨, 실제 내용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11] 배俳, 잡희雜戱나 골계희滑稽戱를 뜻한다.

[12] 《시詩》 왈曰 구절 : <장지에게 다시 답장을 보냄重答張籍書> 각주 6)을 참고할 것.

[13] 《태사공서《太史公書》는 《사기史記》를 가리킨다. <골계열전滑稽列傳>은 해학적이고 희극적인 인물을 모아놓은 열전이다.

[14] 국류파려掬溜播洒 : 양손으로 물을 떠서 흩뿌리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15] 파罷 : 피疲와 같다. 피로하다는 뜻이다.

[16] 식언유언息焉游焉 : 《예기禮記》<학기學記>에 나와 있다. 식息은 멈추어 쉬는 것이다. 곧 공부하는 사이에 잠시 쉬는 것을 이른다. 유游는 즐기는 것으로, 공자는 “예에서 노닐었다游於藝”는 말을 한 적이 있다.(《논어論語》<술이述而>)

[17] 불학조만不學操縵 : 이 두 구절은 《예기禮記》<학기學記>에 나온다. ‘조만操縵’은 현악기를 다루는 것이다. 거문고를 배우는 사람이 현을 고르고 음을 듣는 것을 가리킨다.

[18] 대갱大羹 : 고대에 제례 시에 사용했던 다섯 가지 맛으로 조미하지 않은 담백한 육즙을 가리키는데, 고기 본래의 맛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현주玄酒 : 옛날 제례 시에 술처럼 사용했던 물로, 물빛이 흑색인 까닭에 ‘현주玄酒’라고 하였다.

[19] 체절지천體節之薦 : 고대 군왕이 공후에게 나누어 주었던 희생물의 고기이다. 이것과 “대갱현주大羹玄酒”는 사람들이 정통적이고 아름다운 맛이라고 여기는 음식물을 가리킨다.

[20] 사楂 : 산사山楂이다. 배와 비슷한 과일로 그 맛이 시다.

[21] 철문렬비蜇吻裂鼻 : ‘철蜇’은 벌레가 쏘는 것이다. 입을 쏘고 코를 가른다는 것은 입과 코를 자극한다는 것으로 마치 벌레가 쏘는 것처럼 참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22] 문왕지창포저文王之昌蒲菹 :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문왕이 창포의 뿌리를 저린 것을 좋아하였다. 쿵쯔가 그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해보았는데, 목을 움츠리고서야 넘길 수 있었고, 삼년이 지나서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文王嗜昌蒲菹 孔子 闻而服之,缩頞而食之,三年,然后胜之”

[23] 굴도지기屈到之芰 : 《국어國語》<초어楚語>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취다오가 마름을 좋아하였는데, 병이 나자 문중의 어른을 불러 말했다. ‘나를 제사지낼 때 반드시 마름으로 해주오’屈到嗜芰, 有疾, 召宗老屬之曰: 祭我必以芰.”

[24] 증석지양조曾晳之羊棗, 《맹자孟子》<진심하盡心下>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쩡시가 양조를 좋아하였다.曾晳耆羊棗.” 양조羊棗는 과일의 이름으로 열매가 작고 둥글고, 짙은 보라빛이다. 속칭 양시조羊矢棗라고도 한다. 

[25] 이언弛焉 : 앞서 <장지에게 다시 답장을 보냄重答張籍書>의 주7)을 참고할 것.

[26] 약옹대천언若壅大川焉 : 이것은 마치 큰 바다를 막는 것과 같아서, 무너지게 되면 육지 각처로 흘러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서주西周의 려왕厲王은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소목공이 려왕에게 폭정을 그만두도록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려왕은 폭정을 그만두기는커녕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점을 쳐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색출하게 하여 처단하였다. 백성들은 공포정치에 눌려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려왕은 이를 두고 태평성대라고 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득의양양하였다. 이에 소목공이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이는 진정한 태평성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냇물을 둑으로 막았다가 무너지면 상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니, 백성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냇물을 위하는 자는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주고, 백성을 위하는 자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防民之口,甚于防川,川壅而溃,伤人必多,民亦如之. 是故为川者,决之使导;为民者,宣之使言.” 그러나 려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공포정치를 계속하였다. 이에 참다못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려왕을 왕위에서 쫓아냈다.

[27] 첩첩연呫呫然 : 말이 많고 끊임없이 재잘 재잘대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훼喙 : 본래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주둥이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사람의 입을 낮춰 부르는 것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