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 2

조셉 P. 맥더모트(Joseph P. McDermott)

필사본에서 인쇄본까지, 송대에서 명대까지

이 글은 세 가지 주장, 곧 [앞서 국자감 좨주와 쑤스(蘇軾), 선과(沈括)가 말한] 11세기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것, 당시 인쇄본의 광범위한 파급과 사용에 대한 주장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이노우에가 이러한 언명들을 꼼꼼하게 고찰했을 때, 그러한 주장의 타당성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황제의 모든 신하들 집에서 유가 경전과 주석서를 찾아볼 수 있다는 국자감 좨주의 1005년의 주장은 (이렇듯 서투른 감정의 표출을 유발케 한 질문을 던졌던) 진종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첨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수사의 일단으로 해석된다. 쑤스(蘇軾)가 인쇄본의 광범위한 생산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가 칭찬하고 있던 바로 그 장서가 단지 필사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빛을 잃었다. 그리고 선과(沈括)의 주장은 단순히 펑다오(馮道)가 953년에 쓰촨에서 출판하고 북송 조정이 나중에 몇 차례에 걸쳐 다시 출판했던 유가 경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대 서적 생산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표지 가운데 아마도 개인이 소장한 책, 특히 대규모 장서의 규모에 대한 증거물의 상세한 세목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다. 송대의 가장 큰 서고는 거의 틀림없이 황실의 서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권(卷)’이라는 말의 의미가 송대 이전부터 송대까지 바뀌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송 왕조의 황실 서고의 장서는 결코 수당(隋唐)대의 황실 서고의 장서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송대의 장서가 이런 식으로 쇠락한 것은 인재와 자연 재해 때문이었다. 8세기 중엽 창안(長安)의 파괴와 9세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 다섯 왕조(곧 오대)가 잇달아 정치적 혼란에 빠짐에 따라 거듭된 파괴로 인해 당 왕조 황실의 장서 대부분이 사라졌다. 송 왕조 초기에는 새로운 황실 서고에 단지 13,000권만이 소장되어 있었다. 송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오대의 국가들 을 멸하면서, 966년에는 [오대 가운데 하나인 후촉(後蜀)이 있던] 쓰촨(四川)에서 13,000권의 도서가, 976년에는 [남당(南唐)이 있던] 난징(南京)에서 20,000권의 도서가 왕실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더해진 도서들은 1015년에 궁에서 일어난 엄청난 화재로 손실을 입었다. 1041년이 되어서야 황실 서고의 장서 규모가 30,669권으로 회복되었고, 북송 말년까지는 좀 더 확대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한 규모를 살필 수 있는 실마리는 북송 시기 1061년 이후 황실 서고보다 작긴 하지만 궁궐의 주요한 서고 가운데 하나였던 태청(太淸) 서고에 부여된 45,018권이라는 숫자이다. 1127년 이 두 개의 장서들은 중국 북부 지역에 있던 금나라 침략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자체의 서고가 없이 항저우(杭州)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한 남송의 조정은 거의 처음부터 그것들을 재건해야만 했다. 1142년에는 남부 중국의 민간 장서가들이 희귀본을 내놓게 하거나 그 대리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펴내게 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해 주거나 비단을 하사하고, 작위를 내렸다. (책을 장서가 혹은 책방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아닌) 이런 방법을 통해 황실 서고의 장서는 1178년에는 44,486권이 되었고, 마침내 1220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송대의 왕궁 장서 가운데 최후의 총 숫자인 59,429권에 이르렀다.

송대에 이전 왕조의 규모를 넘어서는 큰 규모의 민간 장서가 의미 심장하게 증가했다는 증거는 들쭉날쭉하다. 남북조에서는 한 가문이 수백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학술적인 명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반면, 1166년에 이르면 “조정의 관료가 약간 유명해지려면, 예외없이 집안에 수천 권의 책을 소장해야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송대의 대 규모의 민간 장서가 그 이전 시대의 장서들과 비슷한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당대(唐代)의 장서가는 20,000이나 30,000 권 정도를 소장해야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강남 지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소장한 장서가로 알려진 주창원(朱長文: 1041-1100년 경)은 그 장서량이 단지 2만 권뿐이었던 데 반해, 북송 시대 대부분의 장서가들은 대부분 만 권 이상을 소유하지 않았다. 16세기의 고도의 식견을 갖춘 서지학자였던 후잉린(胡應麟; 1551-1602년)의 견해로는 그 숫자가 극히 소수이긴 하나 송대의 가장 큰 규모의 개인 장서는 30,000~40,000권 사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쓰마광(司馬光; 1019-1086년)같이 뛰어난 학자조차도 유명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썼던 자신의 독락원(獨樂園)에 마련된 서고에 단지 “5천 권이 조금 넘는”(이것은 쓰마광 자신의 추산이고 다른 작가들은 “만권이 넘었을” 거라 추산하고 있다) 장서를 보유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남송의 경우에는 두 개의 장서 규모가 도드라지는데, 하나는 잘못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올바른 것이다. 쑤저우(蘇州)의 문인인 예멍더(葉夢得)의 장서는 송대와 현대의 비평가들에 의하면 10만 권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추산되었지만, 소유자인 예멍더 자신은 대략적으로 2만 권 정도로 보았는데, 대충 그 가운데 절반이 114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 하나의 대규모 장서가인 13세기 중엽 후저우(湖州)의 천전쑨(陳振孫; 1183-1261년)의 경우에는 49,700권 (또는 약 51,180권) 정도를 소유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송대 그 어떤 개인 장서보다도 많은 양을 보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 말기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과거의 경향보다는 미래의 경향을 나타냈다. 더구나 이러한 장서에서 겹치거나 중복된 책들이 존재했을 거라는 개연성은 이러한 수치를 다소나마 감소시킬 것이다.

아마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서의 대략적인 내용을 고려할 때, 이들 수치가 훨씬 덜 인상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곧 여기에는] 십삼경과 이에 대한 주석서, 《사기(史記)》, 1,100년 이전에 씌어진 《십팔사략》이 2,750권 정도가 되고, 남송 시기에 십여 개의 백과사전이 인쇄되었던 것처럼, 북송 초기 백과사전들이 3,000권 정도 추가된다. 이러한 텍스트들, 아마도 대부분의 주요 장서들에서 핵심을 이루는 콘텐츠와 송대 말엽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의 민간의 장서 가운데 주요한 콘텐츠는 모두 대략 9,000권 정도가 된다.

이들 장서 가운데 인쇄본이 차지하는 비율에 대한 정보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인쇄본의 비율은 현대의 학자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1177년에 황실 서고는 주요한 장서와 황실의 문서 기록을 포함해서 59.5퍼센트의 필사본과 32퍼센트의 가공되지 않은 저작들, 그리고 8.5퍼센트의 인쇄본으로 구성되었다(조금 덜 상세한 명세에 의하면 필사본은 ‘권(卷)’의 91퍼센트와 ‘책(冊)’의 92퍼센트를 차지한다). 개인 장서의 경우에는 이와 유사한 명세를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러나 두 명의 여행 경험이 풍부한 16세기의 장서가가 그들의 책에 대한 필생의 연구를 통해 유익한 개괄을 제공했다. 후잉린은 “송대의 융성한 시기에서조차도” “인쇄본(刻本)은 드물었다”고 단정했다. 난징(南京)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았던 푸졘(福建) 지방의 주요 장서가 쉬보(徐渤, 1570-1642년)도 “송대에는 아직 목판본(版本) 번성하지 않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러한 명대인들의 견해는 송대 학자들이 유명한 책들의 판본을 보고 손에 넣으려 할 때 봉착했던 어려움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증거를 확증해준다. 아마도 우리는 10세기 후반 두딩(?)이라는 의원이 《천금방(千金方)》이라는 잘 알려진 의서가 인쇄본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까닭에 자기가 직접 손으로 써서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 수단을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유명한 인물 역시 그와 비슷한 [서적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한치(韓琦; 1008-1075년)의 어린 시절, 지금의 허난 성에서는 “인쇄된 책(印板本)은 매우 적었고, 글(文字)은 모두 손으로 쓴(手寫) 것뿐이었다. 한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오래되고 못쓰게 된 책들을 빌려 읽었고, 언제나 그 책들을 매우 자세히 기록했다(節錄).” 12세기에 [이들보다] 훨씬 더 부자였던 장서가 유마오(尤袤; 1127-1194년)는 필사본을 구해서 우시(無錫)에 자신의 장서를 구축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종종 자신의 아들ㆍ딸들과 함께 책을 베껴 쓰는 일을 즐기곤 했다. 그의 개인 장서 가운데 삼천 권 이상은 자신의 필사본이었다. 당시 라이벌 관계를 이루었던 장서가인 푸졘 사람 정챠오(鄭樵; 1104-1162년)도 (이와)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 그는 책을 손에 넣는 방법을 여덟 가지로 세분했는데, 그 모두가 옮겨 적는 것을 상정한 것이었고, 서사(書肆)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었다. 금나라의 강남지역 침공으로 많은 장서들이 파괴되었는데, 이는 남송 초기 최소한 난징 인근에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같은 책들을 구해보기 어렵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12세기 후반의 학자이자 닝보(寧波)의 명문가 후예인 러우팡(樓昉, 1193년에 진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사에 급제하기 전까지 내가 볼 수 있는 책은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두 권의 사서(곧 《한서》와 《후한서》)마저도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 봐야 했다.” 이와 같이 [책이] 부족한 상황에서, 12세기 중반과 후반의 강남지역 독자들은 책을 구하러 멀리 서쪽으로 쓰촨까지 가야 했다. 시인이자 관리였던 루유(陸游; 1125-1210년)가 1178년에 [임지였던] 쓰촨에서 항저우(杭州)와 사오싱(紹興)으로 돌아올 때 그의 배에는 강남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쓰촨의 인쇄본으로 가득했다. 그 다음해 효종(孝宗; 재위 기간은 1163-1189년)은 관리들에게 쓰촨에서 책을 찾아오라고 명했는데, 효종은 그곳의 관청과 학교들의 장서가 1120년대와 1130년대의 파괴적인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송 왕조의 조정에서 펴낸 장서가 가장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12세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책을 입수하는 것이 좀 더 쉬워졌다. 북송 대에서는 겨우 서른 곳 남짓 되는 곳에서만 책을 출판했던 것에 비해, 영토가 훨씬 작은 남송 때는 거의 200여 곳에서 출판했다. 이렇게 [책을 찍는 곳이] 여섯 배에 가깝게 증가한 것은 더 많은 책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각공(刻工)을 보유했고, 이들 각공의 지역 간 교류가 더욱 잦아졌으며, 도서 목록에 더해진 서지가 좀 더 자세해졌음을 의미한다. 12세기 중반에는 도서 목록에서 경전과 왕조사를 인쇄본과 필사본으로 구분했다면, 13세기 중반의 목록들에서는 문집과 제자서들도 구분하였으며, 나아가 출판사의 위치까지도 명시하였다. 저우비다(周必大; 1126-1204년)는 송대 초기인 1202년에 출판된 5세기에서 10세기까지의 문장 선집인 《문원영화(文苑英華)》에 대해 평하면서 중요한 문집의 출판에서 일어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송대 초기에는] 인쇄된 판본이 매우 귀해서, 당대(唐代)의 유명 작가인 한위(韓愈, 768-824년), 류쭝위안(柳宗元; 773-819년), 위안전(元稹; 779-831년), 그리고 바이쥐이(白居易; 772-841년) 등의 글도 손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하물며 천쯔앙(陳子昻; 659-700년), 장웨(張說; 667-730년), 장쥬링(張九齡; 673-740년), 그리고 리아오(李翶; 772-841년)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은 실제로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당대의 많은 저작들이 개별적으로 인쇄되어 매우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서, [이들의 책을 모아 놓은 선집인] 《문원영화(文苑英華)》는 학자들 사이에 더 이상 인기 있는 책이 아니었다.

약간 뒤에, 푸졘(福建) 북부 지역에 있는 졘양(建陽)과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의 사방(私坊)에서 찍어내는 출판이 매우 번창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지역과 항저우(杭州)에서는 13세기에 걸쳐 유가 경전과 불경 그리고 대중적인 종교물(religious fare), 학동들의 입문서 및 유명한 작가들의 저작이 널리 보급되면서 아마도 해당 저작들의 필사본을 넘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명 사전이나 의학 처방과 같은 몇몇 장르의 책들은 이전보다 적은 양이 출판되었는데, 관청의 지원 하에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항저우(杭州)와 닝보(寧波)와 같은 중심적이면서 부유한 곳에서는 책과 인쇄물의 부족이 지속되었다. 그러한 어려움은 닝보 출신으로 항저우의 부윤[당시 명칭으로는 린안 부윤(臨安府尹)]과 소부(少傅)를 지냈던 위안사오(袁韶; 1187년에 진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위안사오의 증손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증조부께서 진사에 급제하셨을 때에는 가난해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증조부께서는 종종 직접 손으로 쓴 책(手抄本)을 만들어 달달 외웠다. 뒤에 증조부께서는 경사의 관리가 되셨는데, 모두 합쳐 25년 동안 오랫동안 품고 있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책을 수집하셨다. 세상에 아직 책이 없었을 때, 황실의 서고(中秘書)와 오래된 가문의 장서를 필사한 뒤 귀향하셨다. 그리하여 증조부의 장서가 처음으로 완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얼마 뒤에 닝보에서 주시(朱熹) 철학의 문도인 황전(黃震, 1213-1280년)은 추측컨대 유가 경전을 보편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했다. 황전이 1256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하기까지 그가 갖고 있던 주시의 《사서집주( 四書集註)》는 거칠게 초서로 쓴 필사본이었다. 너무 가난한 탓에 더 좋은 판본을 살 수 없었고, 자신의 고향에 소장된 관청의 판목으로 인쇄한 책을 손에 넣는 데 명시적으로 필요한 연줄도 없었다. [그러니] 강남동(江南東; 지금의 쟝시 성)에 있는 쳰산 현(鉛山縣)과 같이 좀 더 고립된 지역에서 도서 부족이 보고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제시된 증거는 송 왕조 내내 대형의 민간 장서가 드물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10,000에서 20,000권 사이를 소장했고, 드물게는 30,000권 이상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보통의 문인 관료 출신의 장서는 이보다 훨씬 작았고, 13세기까지는 경사(京師)에 사는 독자들조차도 인쇄본을 포함해 잘 알려진 문인의 책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3세기 초부터 이러한 상황이 항저우에서 변화했는데, 그렇지만 닝보와 같은 인근의 대도시는 그렇지 못했던 듯하다. 이와 같이 부수적인 세부 사항들은, 비록 개별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결정적인 것이 아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강남 지역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지역에서 송대 신사 계층의 서적 인쇄가 이루어졌다는 데 대한 수정주의자의 회의적인 평가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확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혹자는 위안사오와 황전과 같은 학자들이 텍스트를 구해 보기 어려웠던 데 대해 불평을 토로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것은 송대의 독자가 어떤 텍스트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고 불평했을 때 종종 현재의 관점에서 그가 말한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책을 구해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인지, 단순히 다른 사람이 그 책들을 공유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장서의 책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인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송대에 대규모의 장서가 드물었고 그런 대규모의 장서라 할지라도 사실상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그렇기에 개인 독자들이 책을 손에 넣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그런 책에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책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 듯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원대의 출판 상황에 대한 후잉린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원대에는 목판 인쇄(板本)가 여전히 드물었다.” 그는 300,000여 권 정도 되는 가장 크다고 알려진 원대 장서가 단지 확실하게 30,000권 정도의 실제 규모를 호도해 중복된 책들을 포함시킴으로써 극도로 부풀려졌다고 비판했다. 항저우에 있는 관방이나 사방 인쇄소는 최소한 비 불교적인 텍스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였던 듯하다. 그것은 우선 몽골족이 수도와 송 왕조의 황실 서고, 그리고 궁정의 일상적 삶을 베이징으로 옮겼고, 더 중요한 것은 정부 기관에 의해 출판 전의 사전 검열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다른 자료에 대해 산재해 있는 증거뿐 아니라 원대 황실 서고에 대한 이노우에의 수치는 이 시기 강남 지역의 서적 생산이 약간 증가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베이징의 관리들은 여전히 동남 지역을 천하의 희귀본을 가장 잘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여겨, 1340년대 초에는 관리들을 파견해 그런 책들을 찾아다니게 했다. 강남 지역 최대의 장서가인 좡쑤(莊肅, 14세기 경에 활동)는 송대의 어떤 장서가보다도 많은 80,000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샤오밍(吳曉明)이 주장하는 대로, 이러한 규모는 원대에는, 특히 좡쑤의 고향인 상하이 지역에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는데, 그곳에는 실제로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큰 규모의 장서는 대부분 14세기 초 양저우(揚州)에 살고 있던 천지모(陳季模)의 50,000권의 장서를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드문 경우였다. 다른 주요한 장서들의 경우, 각각 “수만 여 권”에 이르는 양웨이전(楊維禎, 1296-1370년)과 항저우의 푸른 문 바깥의 선비(靑扉外士)”라고만 알려진 이가 있을 뿐이었다. 원대의 강남에서 조금 더 전형적인 경우는 10,000권 정도의 장서였는데, 심지어 창저우(常州)의 부유한 문인 화가였던 니짠(倪瓚, 1301-1374년)조차도 주로 전사한 책으로 이루어진 수천 권 정도만 소유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실상 원대 장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장서의 내용이나 규모보다는 장서가 조금 더 낮은 사회계층에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곧 원대 장서 가운데 최소한 두 곳의 소유자는 상당히 낮은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백정 집안 출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포목상이었다. 이것말고는 원 왕조가 주요하게 남송의 사회적 조건과 상황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원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강남 지역의 경제 조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런 식의 탈피를 뒷받침해주는 것 역시 아무 것도 없다. 몇몇 학자들은 대체로 송대의 경제는 12세기 말 경부터 성장을 멈추었다고 주장하지만, 강남 지역의 경제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인 13세기의 2/4 분기에서만 침체의 분명한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남 지역의 경제적인 문제는 1276년 몽골의 침략에 굴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침략에도 불구하고 지역 경제의 성장과 출판업의 팽창은 (몽골의 침략로 쓰촨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말을 고하지는 않았다. 원 왕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고 나서는 강남 지역의 경제가 대대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시바 요시노부(斯波義信)와 데이비드 포레(David Faure), 그리고 리차드 본 글란(Richard von Glahn)에 따르면, 송대 말부터 강남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이 실제로 의미심장하게 후퇴했던 것은 14세기 중엽 원대 통치의 마지막 혼란기 10년 또는 20년까지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오히려] 명 왕조 초기의 경제 정책에 의해 심화되었다. 루실 쟈(Lucille Chia)는 특히 강남 지역의 서적의 생산이 침체된 것은 원대가 아니라 명 초기였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자면 강남과 푸졘 지역에서 도서 문화가 “붕괴”한 것은 이제는 주로 명 왕조 치하에서 대충 (두 세기가 아니라) 한 세기동안 (붕괴가 아니라) 침체한 것으로 의미를 좁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의 도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13세기말과 14세기 말 사이에 중국에서 다른 어떤 문화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 두 세기 정도의 시간 동안 인쇄에 대한 점증하는 필요성으로부터 필사본 문화로 되돌아가는 도서 문화 발전에서의 역전 현상이 진행되었다고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14세기에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인쇄본의 생산이 침체했던 사실을 해명해야만 한다. 특히 서적의 생산에 대한 명 조정의 비교적 느슨한 정책이라는 관점에 볼 때 헷갈리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심지어 송과 원대 스타일의 검열을 폐지하고 인쇄에 부과되는 세금을 취소하는 등의 조처도 최소한 초기에는 서적의 생산을 자극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명대 초기에는 서적(모든 책?)을 위한 목판이 국자감과 푸졘(福建) 북부의 졘양(建陽)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5세기 중반까지는 국자감의 목판들이 그것으로 찍어낸 인쇄본들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결과로 대량으로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확실히 서적 생산의 침체 원인은 다양한 것처럼 보인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 명 태조의 강남 문인들에 대한 심각한 의심, 명 초기의 목재의(그리하여 종이의) 부족 등 이 모든 것들이 그와 같은 이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우리가 그런 침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또 다른 요인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14세기 전반에 걸친 서적의 세계에서 항저우가 차지하고 있던 역할 변화이다. 루실 쟈는 이미 14세기 출판의 침체가 졘양보다는 강남 지역에서 “좀 더 심각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나는 단지 그러한 침체가 강남의 여타 지역에서보다 항저우에서 좀 더 심각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자 한다. 13세기 동안 남송의 수도로서 항저우는 (정부나 민간 출판업자에 의한) 서적 생산뿐 아니라 서적 소비에서도 주요한 중심지였다. 중국 남부 지역을 통틀어서 그곳에 대다수의 학생과 학자, 관리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기에, 인쇄본은 13세기 초까지 도서 문화의 어떤 일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필사본에 대한 인쇄본의 이러한 “진보”가 송과 원대의 서적 문화 전반에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송대 강남 지역에서도 이러한 우세는 이들 예외적인 도시들에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1276년 항저우와 남송이 몽골족의 무력에 무릎을 꿇자, 한 세기보다 조금 더 긴 기간 동안 항저우의 인쇄 문화가 완만하게 침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와 관료 집단이 베이징으로 옮겨가고, 과거시험이 사실상 중단되고, 강남의 다른 지역이 문인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함에 따라, 항저우의 서적 생산과 소비는 항저우 시후(西湖) 학당에 있던 2만 여 장이 넘는 송대의 목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세기 내내 점진적인 하강세를 보였던 듯하다. 이러한 침체는 이 도시가 국가 전체의 인쇄본 문화에서 차지하고 있던 예외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중국의 서적계에 조금은 불균형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듯하다. 그래서 명대 초기의 인쇄본 생산이 전반적으로 침체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송원대에 강남과 중국 경내의 여타의 지역 대부분에서 인쇄본 문화가 매우 고르지 않게 분포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14세기의 인쇄본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침체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의심할 바 없이 좀 더 상세한 조사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침체했다고 하는 사실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명대 초기 인쇄본보다 수초본(手抄本)이 우세했던 것은 조정과 학자들 가운데 대표격인 인물들에 의해 유발된 서적에 대한 수요의 성격에서 드러난다. 1483년 권세 있는 환관이었던 왕징(王敬)은 쑤저우에서 전래된 점술서를 구하고자 했는데, 인쇄된 것이나 [시중에서] 구입한 책이 아니라 (항저우와 쑤저우의 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과거 급제자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의 생원이) 손으로 필사한 것을 구해오라고 명하였다. 구옌우(顧炎武; 1613-1682년)에 따르면, 정덕(正德; 1506-1522년) 연간 말기에 왕실 기관이나 관청, 그리고 졘양의 인쇄소에서만 목판을 소유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보급되었던 책은 《사서(四書)》, 《오경(五經)》, 《자치통감(資治通鑑)》, 《행례(行禮)》 등에 그쳤다. 다른 종류의 책이 인쇄된 경우에는 호고적인 취향을 가진 가문에서만 소장했다.” 대중적인 책들은 비슷한 부족 현상을 겪었다. 법령과 관청에 의해 책력이 모든 가정에 반포되어야 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경사(京師)의 많은 가문들조차도 이런 인쇄물들을 받아보지 못해 어떤 문인은 다음과 같은 불평을 토로했다. “경사에 있는 가문들만 책력을 받지 못한 것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의 황실 서고(文淵閣)에 필사본이 인쇄본에 대해(각각 70퍼센트와 3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강남의 안팎에서 명초의 서적 시장은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1429년에 쿵쯔(孔子)의 후손인 쿵옌진(孔彦縉; 15세기 중엽에 활동)이 누군가에게 주고자 푸졘에 가서 책 한 권을 사야 했는데, 이것은 필사본이었다. 쟝시(江西) 남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겸 관리였던 양스치(楊士奇; 1365-1444년)는 두 권으로 된 당대(唐代) 저작인 《사략(史略)》을 그의 어머니가 닭 한 마리를 팔고서야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책이 부족했던 상황은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일찍이 나는 공부하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으나, 고아였고 가난했던 탓에 책을 구할 수 없었다. 내가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책을 필사해 만드는(抄錄) 일을 했지만, 종이와 붓을 살 돈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종종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책을 빌려 읽고자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은 적이 많았다. 내가 14살이나 15살이 되었을 때,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러 다녔다. 내 수입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나면 책을 살 여분의 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내가 (대략 스무살 가량)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로부터 상당한 금액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책을 구입했지만, 많은 책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20년 후에 훈장 노릇을 하면서도 양스치는 겨우 “《오경》이나 《사서》, 당대(唐代)의 몇몇 작가의 시문집 몇 권을 구할 수 있었다.” 그의 장서는 그가 조정의 관리가 되어서야 상황이 나아졌다.

내가 조정에서 봉직했을 때, 일정한 녹봉을 받고 이따금씩 선물도 받았다. 나는 모든 지출을 줄이고 매일 다달이 저축을 했다. 저축한 돈은 모두 책을 모으는데 사용했다. 10년 이상, 나는 상당한 양의 고서와 역사책, 제자서, 문집 등을 모을 수 있었지만, 나의 장서는 여전히 완비된 것이 아니었다.

양스치와 같이 관직을 얻어 수입이 있던 학자들은 극소수였고, 그 결과 이보다 조금 뒤인 15세기 후반에는 루룽(陸容; 1436-1497년)이 말했던 것처럼 “수많은 가난한 학자들이 부와 현에서 자리를 얻을 수 없었기에, 책을 읽고자 해도 심지어 한 권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강남 지역에서는 명나라 초기와 심지어 중기까지도 독자들이 유명한 문집이나 사서들을 손에 넣기 위해 찾아다니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쑤스(蘇軾)의 저작들은 명 성화(成化; 1465-1487년) 연간까지 구해보기 어려웠고, 15세기 말이 되어서도 원톈샹(文天祥; 1236-1283년)의 선집은 인쇄본의 형태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한 권은 황궁에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원톈샹의 고향인 쟝시(江西)에 어쩌면 그나마도 일부만 있을 뿐이었다. 6세기에 나온 초기 중국의 유명한 시문집인 《문선(文選)》 역시 널리 구해볼 수 없었다. 시인인 위안츄(袁裘; 1502-1547년)는 가난했던 시절 심지어 한 권도 빌려볼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쑤저우의 열성적인 장서가인 양쉰지(楊徇吉; 1458-1546년)가 맞닥뜨렸던 어려움은 가난이라는 요소로 설명되지 않는다. 학술에 대한 흥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난(“우리 집안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양쉰지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문선》과 같이 유명한 책의 적당한 판본이 없어서 오랫동안 좌절했다. 그가 조사해서 베이징의 국자감에서 복사한 이 선집본은 그나마 몇 쪽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구한 판본은 단지 후반부만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친우인 왕아오(王鏊; 1450-1524년)가 소장하고 있던 이 책의 전반부를 손으로 베낀 뒤에야 비로소 완정본을 구비할 수 있었다. 9세기 당대(唐代)의 시인인 바이쥐이(白居易)와 위안전(元稹)의 저작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는 친구에게서 책을 빌려 그 자신이 붓을 놀려 책을 만들어야 했다. 예부상서(禮部尙書)였던 겅위(耿裕; 1430-1496년)는 《집고록(集古錄)》과 《당감(唐鑑)》, 《후산기(後山記)》와 같이 유명한 책들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이것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실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놀라워했다. 그리고 강남 지역 최대의 장서가인 예성(葉盛; 1420-1474년)은 20년의 시간을 들여 쓰마광(司馬光)의 역사 이외의 저작들을 완벽하게 엮어냈다. 그는 세 명의 친구들이 소유하고 있던 개별적인 판본들로 책을 만들었는데, 반대로 그들 가운데 그 자신의 책을 완성하는 데 예성의 책에 의지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던 듯하다

쓰마광의 책과 같이 잘 알려진 이의 역사 저작들이라고 해도 이야기는 다를 게 없었다. 12세기 말에 쓰마광의 《자치통감》의 완전한 인쇄본은 희귀한 것이었고, 기록에 의하면 독자들은 주제에 따라 요약되거나 재구성된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쑹쟝(松江) 출신의 차오안(曹安)이 1445년 거인(擧人)이 되고 나서 3년 만에 그와 같은 판본을 손에 넣을 정도로 요약본은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사기(史記)》의 인쇄본과 난징(南京)의 국자감(國子監)에 있는 그 목판은 열악한 상황에 있었고, 명대에는 이렇게 유명한 역사 저작이 홍치(弘治; 1488-1506년) 이전의 판본 하나만 인쇄되었다. 1525년이 되어서도 “《사기》의 선본(善本)은 여전히 부족했고”, 그 해에 이루어진 이 책의 출판은 송대 인쇄본에 근거해야 했다. 몇 년 후인 1534년, 쑤저우의 열광적인 장서가이자 화가였던 쳰구(錢谷; 1508-1578년)는 선저우(沈周; 1427-1509년)에게서 《송사(宋史)》를 선물로 받았을 때, 34권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완정본을 만들기 위해 손수 이것들을 베껴 써야 했다. 그래서 21사가 학자 관리들의 서고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가정(嘉靖; 1522-1567년) 연간에 난징에서, 그리고 만력(萬曆; 1573-1620년) 연간에는 베이징에서 인쇄된 후라는 구옌우(顧炎武)의 견해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구옌우가 유감을 표한 대로, 과거 시험 참고서에 밀려 이들 관방 학술의 기념비적인 저작들은 항상 읽혀지지 않은 채로 방치되었다.

마찬가지로 명대 초기의 장서 규모는 인쇄 문화가 팽창했다는 그 어떤 징후도 보여주지 않았다. 최대의 개인 장서 두 곳은 양저우(揚州) 부의 쟝두(江都) 현에 있는 거(葛) 씨 집안의 것과 산둥의 지난(濟南) 부의 장츄(章丘)의 리(李) 씨 가문의 그것이다. 둘 다 모두 42,750권 가량 되는 장서를 보유했다고 한다. 15세기 후반부, 강남 지역에서 가장 큰 개인 장서였던 예성의 것은 22,700권 정도였고, [이것은] 1250년 경의 천전쑨(陳振孫)의 장서가 가장 많았을 때의 절반보다 적은 것이었다.

자기 수양을 향한 당대의 유가적인 삶의 태도는,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장려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유학자들이 서적의 수집을 제한한 것을 정당화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명대 초기의 몇몇 사상가들은 성스러움에 대한 탐구는 오히려 명확하게 정의된 텍스트 몇 권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곧 유가 경전과 그에 대한 주시(朱熹)의 주석이었다. 주시의 다른 저작들이나 다른 뛰어난 성리학자들의 저작들은 자기 수양의 교육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주시의 선집과 그가 자신의 문도들과 나눈 대화들 그리고 그의 스승인 청이(程頤; 1033-1107년)의 선집마저도 명 왕조 초기 1세기 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광범위한 독서는 위험하고 수천 권에 이르는 “대량의” 장서는 수상쩍은 일로 느꼈던 듯한 이런 풍조는 사실상 중국에서는 최초도 최후도 아니다. 한 사람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성인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책이 필요하단 말인가?

강남의 지적인 삶의 암울한 환경은 서서히 변해갔다. 15세기 초 두 번째 25년 동안, 타이창(太倉) 출신 루룽(陸容)에 의하면, 서적과 인쇄 목판(印版)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비록 그렇게 해서 찍어낸 텍스트들이 항상 유학자들을 즐겁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15세기 말이 되어서야 그런 상황이 호전되었다. 이노우에에 의하면, 책을 인쇄하는 것은 성화(成化) 연간에 증가하기 시작했고, 홍치(弘治)와 정덕(正德) 연간에는 급피치를 올려 가정(嘉靖) 연간에는 성행했다고 한다. 이노우에의 통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경향은 명대의 책들에 대한 한 통계에 의해 확증되었는데, 루실 쟈의 (33개의 도서관 목록과 서지에 바탕한) 현대의 서지에 열거된 명대 민간의 인쇄본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모든 명대의 인쇄본 가운데 10분의 1도 안 되는 양이 1505년 이전에 출판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의 연구들은 이런 통계적 증거들을 뒷받침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출판된 텍스트의 수량뿐 아니라 유형 면에서 크게 확장되었다고 한다. 문인인 원쟈(文嘉; 1501-1583년)에 의하면, 16세기 중엽 쑤저우에서 “진귀한” 책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가 어렸을 때 종종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학자들은 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쇄본이 사회적으로 위험할 정도로 넘쳐났다고 여겼기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창저우(常州)의 문인 탕순즈(唐順之; 1507-1560년)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백정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만한 돈이 있다면, 그 가족이 그를 위한 부고장을 인쇄할 것이다.” 쑤저우의 작가인 주윈밍(祝允明; 1461-1537년)과 같은 이는 그러한 경멸과 조롱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정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못마땅한 서적들을 불태우기를 원했다.

이러한 출판 붐은 국내 시장, 특히 창쟝(長江) 일대 내에서의 강남 지역의 서적 생산의 역할을 변형시켰다. 송대에는 수도인 항저우가 강남 지역 내 고품질 도서의 생산과 유통의 유일한 중심지였던 데 반해, 16세기에 이르면 그런 우월한 지위를 쑤저우와 난징에 넘기게 되었다. 주로 북쪽에서는 베이징과 그리고 남쪽에서는 푸졘과의 경쟁 관계 속에서 이 두 도시의 출판업자들과 서적상들은 강남 지역 내와 그곳을 벗어난 다른 많은 지역에서의 서적 생산과 유통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쑤저우와 난징은 각각 시안(西安)과 강남의 다른 세 도시, 쟈싱(嘉興), 후저우(湖州), 양저우(揚州)에서 찍어낸 것보다 5배에서 10배나 많은 책을 찍어냈다. 어떤 예비적인 추정치에 따르면, 16세기 동안 쑤저우 한 곳에서만 적어도 650명의 각공(刻工)과 거의 40여 개 소에 이르는 민간 인쇄업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생산의 성공은 유통에서도 판박이처럼 나타났다. 난징과 쑤저우의 인쇄소와 서점들이 책 판매대나 가게를 장악하고 있어서, 이 도시들에서 판매되는 책들 가운데 타지에서 출판된 것은 채 2퍼센트도 안될 정도였다. 또 그들은 배로 책을 창쟝 하류 지역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는 푸졘 북부 지역의 좀 더 값이 싼 인쇄본과의 경쟁으로 인해 항저우 서적 거래의 일정한 몫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그 나머지는 이 지역의 값싸고 편리한 선박 수송 탓에 푸졘 북부의 인쇄업자에게 갔는데, 쑤저우와 난징은 푸졘에서 실어온 값싼 책이 성내에 들어오지 못 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책 시장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창쟝 하류 지역을 벗어나서 쑤저우와 난징에서 찍어낸 책들은 훨씬 더 남쪽, 곧 저쟝(浙江)이나 푸졘(福建), 광둥(廣東)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창쟝 유역의 나머지 지방[청두(成都)는 더 이상 경쟁이 되지 못했다]과 북부 지역, 특히 베이징에서는 환영을 받았다. 사실 강남 지역의 서적 거래에 대한 후잉린의 조사는 경쟁 관계가 없는 세목들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은 16세기 말엽에는 그들의 주요한 경쟁자들, 유통에서의 베이징과 생산과 유통에서의 푸졘을 앞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대체로 요즘 나라 안에 [대량 판매를 위해] 책이 모이는 곳은 베이징과 난징, 쑤저우의 창먼(閶門) 일대, 그리고 항저우 이렇게 네 곳이 있다. 나는 산시(陝西)와 산시(山西), 쓰촨(四川), 그리고 허난(河南)에서 널리 탐문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 볼 수 있게 된 책들을 숙독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끔씩은 푸졘과 후난, 윈난과 구이저우에서 나온 인쇄본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중 어떤 도시들도 대개는 이들 네 곳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베이징에서는 거의 책을 출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 안의 배와 수레들이 모두 그곳에 모인다. 오래 된 가문의 장서가 섞여 있는 [책을 담은] 대나무 상자가 거상들에 의해 그곳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하여 베이징(의 책 시장)은 다른 곳에 비해 특히 번성하고 있다. 그곳의 책값은 가장 비싼데, 각각의 들여오는 책 가격은 쑤저우보다 두 배나 비싸다. 그것은 베이징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사에서 출판된 책들은 저쟝(浙江)에서보다 세 배의 비용이 드는데, 베이징의 종이가 비싸기 때문이다.

저쟝에서도 거의 책을 출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남동부의 중추이자 저술의 중심지이다. 쑤저우와 푸졘에서 온 책들은 모두 그곳에 모인다. …… 후난과 쓰촨, 쟈오(交趾, 南越, 또는 越南)와 광난(廣南, 곧 광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상인들이 때때로 그곳에 여행 갔다가 새로운 책이나 희귀한 책을 구해오곤 한다. 관(關, 山西)과 뤄(洛, 河南), 옌(燕, 北京), 진(秦, 陝西)에서 봉직하는 관리들은 그곳에서 가지고 돌아온 책들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향시가 치러지는 해에는 이런 책들은 아주 많이 나온다.

쑤저우와 난징은 저작들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인쇄본이 아주 많다. 커다란 판본과 유서들은 모두 그곳에서 발견되며, 나라 전체의 상인들은 그들이 구하는 책의 70퍼센트를 쑤저우와 난징에 의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30퍼센트는 푸졘에 의지하고 있다. 베이징과 저쟝은 그들의 경쟁자가 못 된다. 이곳에서 인쇄된 책들을 제외하면, 다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극히 적어, …… [구해 볼 수 있는 모든 책의] 2, 3퍼센트도 안 된다. 대체로 (쑤저우와 난징)은 (판매를 위한) 책을 찍어내는 곳이지, (다른 곳으로부터 팔기 위한) 책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요컨대, 목판을 판각하는 중심지는 세 곳이 있는데, 쑤저우, 저쟝, 푸졘이 그곳이다. 쓰촨에서 오는 인쇄본은 송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몇십 년 간은 몹시 보기 드물어졌다. 베이징과 광둥(粤), 산시(陝西, 秦), 후난(湖南)은 요즘에 모두 책을 출판하고 있는데, 상당히 다양한 판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들은 앞서의 세 곳만큼 번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세 곳 가운데 질로 따지면, 쑤저우가 가장 뛰어나고, 양으로는 푸졘이 가장 앞서며, 저쟝이 두 번째 자리에 놓인다. 가격 면에서는 쑤저우가 가장 비싸고, 푸졘이 가장 싸며, 저쟝은 그 중간이다.

권수로 놓고 보자면, 대체로 인쇄본 열 권 값이 수초본 한 권 값도 되지 않고, 필사본 열 권 값도 송대 인쇄본 한 권 값이 되지 않는다. …… 푸졘 본 열 권 값은 저쟝 본 일곱 권 값에 미치지 못하고, 저쟝 본 일곱 권 값은 쑤저우 본 다섯 권 값에 미치지 못하며, 쑤저우 본 다섯 권 값은 또 [쑤져우, 저쟝, 푸졘에서 들어와] 베이징에서 팔리는 인쇄본 세 권 값에 미치지 못한다. 베이징에서 팔리는 인쇄본은 세 권을 모아도 황실본 한 권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다.

요컨대, 16세기 말까지 책은 나라 전체에 걸쳐 다시 인쇄되고 있었지만, 현재 강남의 주요한 두 도시, 쑤저우와 난징이 나라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두 도시는 각각 유통과 특히 인쇄본의 생산에서 또 다른 중심지인 베이징을 능가했다. 비록 양적으로는 푸졘보다 적었지만, 거래 규모는 훨씬 컸다. 쑤저우와 난징에서 거래되는 책의 양은 푸졘에서 만들어내는 텍스트의 양보다 두 배나 많았다. 두 도시에서 내놓은 책들의 유일한 문제점은 비교적 높은 가격이었다. 비록 높은 가격으로 인해 항저우 남동쪽에 있는 시장에서는 판매 잠재력이 제한적이었지만, 쑤저우와 난징의 인쇄본들은 명대에 여전히 정치와 문화 중심지에서의 서적 거래를 지배했다. 난징에서의 일상적 삶을 관찰한 것으로 유명했던 저우량궁(周亮工; 1612-1672년)의 견해로는 16세기 마지막 4분기부터 왕조 말기까지 이 두 곳은 계속 번성했다.

서적 거래에서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해서 강남 지역 인쇄소들이 다른 지역의 공인(工人)들과 협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송원대에 이러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로는 각공(刻工)들과 뜨내기 장인들이 저쟝이나 푸졘, 그리고 광둥, 또는 저쟝과 화이난(淮南), 쟝시(江西), 후베이(湖北), 그리고 아마도 쓰촨에서까지도 일을 찾아 돌아다니다 고용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14세기 초에는 항저우의 불교 사원에서 불경을 인쇄하는 데 저쟝과 강남의 다른 부현, 푸졘의 졘양, 그리고 안후이의 광더(廣德)에서 온 각공의 힘을 빌렸다. 16세기 중엽까지 루실 쟈에 의하면, 그런 연결이 푸졘과 강남(특히 난징)의 책 시장에 집중되었다. 이 두 지역의 상업적 인쇄소에서는 동일한 저자와 편자(編者), 인쇄공, 각공, 그리고 목판이 사용되었다. 쑤저우의 각공들은 한 종의 책을 판각하는 데 있어서 난징(1592년), 푸졘 북부(가정 연간), 쟝시(1603년)의 각공들과 목판의 판각을 분담했다. 아마도 이들 안후이와 푸졘, 그리고 쟝시의 각공들은 뜨내기 노동자로 쑤저우와 난징, 항저우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임이나 목판 가격이 좀 더 낮고, 배를 이용한 운송이 싸고 편리했을 자신들의 고향지역에서 판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통합된 형태의 노동 시장이 꼭 노임과 책 가격의 조화를 초래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이들 지역에서의 책 가격은 푸졘과 항저우, 쑤저우―난징에서 나온 새 책의 서로 다른 품질에 대응하는 개별적인 틈새시장에 따라 상당히 달랐고, 똑같은 책이라도 경쟁력 있는 가격과 좀 더 오래된 판본을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경제적으로 집중된 서적 시장은 중국의 북부 지역까지 확장되지 못했다. 도서 부족으로 북부 지역의 중국인들은 14세기 초에는 학교에서 공부할 책을 사기 위해 쑤저우에, 그리고 16세기에는 개인적으로 인쇄된 과거시험 문제집을 사기 위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왔다. 기록에 의하면 심지어 17세기 말에도 북부 지역에서는 책을 사기가 어려워 그 지역의 장서가들은 매우 적은 수의 책만을 보유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북부 지역에 살고 있던 구옌우(顧炎武)는 강남 지역에 있는 친구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아마도 여전히 수요(나 재원)보다 공급이 적었던 데 주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던 듯하다. 북부 지역의 주요한 장서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리카이셴(李開先; 1502-1568년)의 장서는 그가 죽었을 때, 배로 남쪽으로 내려보내져 강남 지역의 유명한 장서가이자 출판업자인 마오진(毛晉; 1599-1659년)의 서고에 추가되었다(명백하게도 마오진에 필적할 만한 북부 지역의 장서가는 없었다).

명대 후반기에 강남 지역에서 서적 생산이 대대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그곳의 개인 장서의 숫자와 규모가 상당한 정도로 증가했다. 이제 1만이나 2만 권 정도 되었던 송대의 민간 장서는 장서가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는데, 주요 장서가의 경우 종종 서너 배 정도 많은 장서를 보유했다. 17세기 초 사오싱(紹興)의 장서가인 치청한(祁承漢; 1565-1628년)은 9천 종 10만 권이 넘는 책을 구했다. 16세기가 가까워가며 이들 민간 장서의 규모는 이미 황실 서고의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어떤 장서가는 이 장서들 각각만 하더라도 황실 서고의 두 배는 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출판 붐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부유한 계층이라 해도 그들이 손에 넣고 읽고자 하는 책을 구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었다. 12세기의 잘 알려진 문집인 《청파별지(淸波別志)》만 하더라도 고도로 숙련된 편자인 야오쯔(姚咨; 1595년 출생)가 그것을 처음 보고 난 뒤 다시 두 번째로 볼 때까지는 30년이 걸렸다. 쑤저우의 부유한 장서가는 30년 뒤인 1584년에야 10세기에 나온 저작인 《재조집(才調集)》의 완정본을 한데 모았고, 1579년에 그는 송 왕조 때의 저작인 《서원청화(書苑菁華)》을 손에 넣는 데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쑤저우의 주요한 장서가인 자오치메이(趙琦美; 1563-1624년)는 2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서 송대의 건축에 대한 책인 《영조법식(營造法式)》을 만력 연간에 완정본으로 만들었다. 그는 불완전한 인쇄본을 사들인 뒤 남은 것은 황실 서고에서 빌린 것으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17세기 중반에 쟈싱(嘉興)의 독실한 주시(朱熹) 추종자 한 사람이 주시와 뤼쭈쳰(呂祖謙)이 같이 펴낸 송대 성리학 저작 가운데 종종 언급되는 선집인 《근사록(近思錄)》 완본을 구하려 할 때도 비슷한 좌절을 겪었다. 그는 우연히 서상에게서 한 질을 손에 넣었는데, 한 번 빌린 책은 절대로 돌려주지 않는 한 친구에게 그 책을 빌려주었다가 20년이 지나서야 다른 판본을 구해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16세기의 눈에 띄는 출판 붐은 비록 이로 인해 유통되는 서적 숫자가 상당한 정도로 증가하고 처음으로 수많은 대형 민간 장서가 나타나긴 했지만, 도서 부족 현상을 전적으로 완화하지는 못했다.

이때가 되어서야 필사본에 비해 인쇄본이 도서 문화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사실 역시 놀랍다. 현대의 중국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수많은 명대 이전 서적들의 가장 빠른(그리고 가장 좋은) 인쇄본은 일반적으로 명대가 되어서야 나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사본에 대한 인쇄본의 비율의 기록을 알고 있는 명대의 주요한 장서 두 곳에서 인쇄본은 주요한 송대 장서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곧 후잉린의 장서에서 인쇄본은 70퍼센트에 이르렀고, 1560년 경에 판친(范欽; 1532년에 진사)이 세운 유명한 천일각(天一閣)에서는 모두 44,000권 가운데 절반을 차지했다(판친 자신은 80퍼센트가 인쇄본이라 주장했지만, 이것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후잉린이 말한 대로, 16세기 후반 서적 구매자와 장서가들은 똑같은 저작의 인쇄본과 필사본 가운데 선택해야 할 때마다 인쇄본을 선호했다. 그러한 선호로 인해 대부분의 수초본의 가격이 극단적으로 하락했는데, 지금은 그 내용의 희귀성보다는 그런 책이 갖고 있는 미학적인 우수성, 특히 서법이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송대 인쇄본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맞물려, 예성(葉盛)이나 우콴(吳寬; 1435-1504년), 원정밍(文徵明; 1470-1559년), 왕컨탕(王肯堂; 1589년 진사), 양이(楊儀; 1488-1558년 이후), 마오진(毛晉), 셰자오저(謝肇淛; 1567-1624년), 쳰쳰이(錢謙益; 1582-1664년), 선볜즈(沈辨之), 야오순타이(姚舜臺), 친시옌(秦西巖), 지청한(祁承漢), 그리고 펑반(馮班; 1602-1671년)과 같은 유명한 문인 장서가들이 쓴 명대 수초본이나 서예 작품 역시 존중되었다. 17세기 상하이와 창수(常熟), 쑤저우의 소수의 전문가들이 앞서 언급한 이들의 필사본 수집에 열을 올려, 그들의 작품 가격이 조금 올랐다. 1681년에는 우콴의 수초본 한 권의 가격이 30금이나 나갔다. 장서에 관한 이러한 전문화된 관심의 출현은 강남 지역의 서적 거래에 있어서 인쇄본이 필사본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우위에 있었는지를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