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안臨安
금나라와의 싸움에 패해 남쪽으로 옮긴 송이 잠시 표류하다 정착한 곳이 항저우(杭州)이다. 이후 행재(行在) 또는 린안(臨安)이라고 불렸던 이 도시가 남송의 수도가 된다.
항저우의 역사는 오래다. 하지만 그 도시로서의 발전이 실제로 시작된 것은 카이펑과 마찬가지로 수의 대운하 개통 이래다. 북과 남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남쪽 기점으로서 도시로서의 발전의 기초를 공고히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유수한 도시로 그 명성이 높다.
당대 300년 간 착실히 발달해 온 항저우가 면모를 일신하고 그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든 것은 오월(吳越)의 쳰 씨(錢氏) 시대였다. 당말의 혼란을 틈타 이곳 강남땅에 오월이라는 왕국을 건설한 쳰 씨는 907년부터 978년까지 지배하는 동안 많은 사업을 일으켰다. 건국에 앞서 절도사 시대의 893년 의욕적으로 확장된 것이 현재 항저우의 기반이 되었다. 강남의 발달이 운하의 기점으로서의 항저우의 지위를 끌어올려 양쯔강(揚子江) 하류 유역의 도시군 중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오월의 쳰 씨가 건도한 것은 그것을 바탕으로 행한 것이다.
오월 이전의 항저우는 아직 시후(西湖) 가의 극히 좁은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당시 중심지였던 화북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풀이 우거진 시골 도시였다. 항저우의 지형은 서쪽은 시후(西湖), 남쪽은 우산(吳山) 그리고 펑황산(鳳凰山)과 이어진 산맥을 가까이 두고, 동쪽에는 큰 조류(潮流)로 유명한 쳰탕 강(錢塘江)이라는 큰 하천을 끼고 있는 지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북쪽이 열려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원래 항저우는 쳰탕 강이 상류로부터 밀어낸 토사가 만들어낸 땅이다. 따라서 시후와 쳰탕 강 사이는 수 킬로미터 밖에 안 된다. 바이쥐이(白居易)가 사랑해 그 풍경과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는 해도 당대의 항저우는 아직 한적한 땅이었다. 후대의 송대와 같은 번영은 아직은 이른 것으로 한 걸음 성 밖으로 나가면 그곳은 쓸쓸한 바람이 불어대는 갈대밭이었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는 쳰탕 강이 이곳에 토사를 밀어내 북으로 향해 습지를 넓혀간 것이다. 오월은 이 땅에 제방을 쌓고 치수와 관개를 배려해 거대한 성벽을 건설했다. 그 크기는 주위 70리라고도 한다. 40킬로미터에 가까운 성벽이다.
다시 발전한 것이 남송이다. 창강(長江) 유역의 졘캉부(建康府)에 도읍을 세워 북방 민족의 압력에 두려워하느니 [좀 더 안전한] 항저우에 도읍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라고 먼 훗날까지 칭송되었던 세상에도 드문 도시의 기초가 세워졌던 것이다.
송대의 항저우의 형태는 오월과는 또 달랐다. 오월의 그것이 지금의 항저우보다 좀 더 남쪽의 친왕산(秦望山)까지 포함했던 데 비해서 송대의 그것은 대략 펑황산을 남쪽 한계선으로 삼았다. 하지만 북쪽 부분에서는 쳰 씨의 성의 기본은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송대의 항저우는 그만큼 좁아졌다. 그러나 남부는 원래 필요 없는 부분이었기에 이곳을 잘라 버림으로써 항저우의 도시 형태가 한층 정비되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나왔다.
이 지형적 특색은 남송이 여기에 도읍을 두었던 것에 의해, 중국 역사상 희귀한 형태를 가진 수도를 출현케 한 것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왕성과 궁성은 도성 안의 북쪽이나 한가운데에 두었던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비해서 항저우는 남쪽으로 왔던 것이다. 펑황산 산록에서 우산에 걸쳐 있는 좁은 일대가 궁성에 해당한다.
린안의 궁성에 관해서는 어찌된 셈인지, 상세한 기술이 남아 있지 않다. 《함순린안지(咸淳臨安志)》에 게재된 황성도를 보면, 펑황산 산록 부분을 성벽으로 에두르고, 여기에 궁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궁성이라고 쓰인 바로 옆에 약간 높은 언덕이 그려져 있고 수목이 울창하다. 나 역시 그 부근을 탐방했는데, 상당히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졌다. 마르코 폴로는 송의 황제는 숲 속에서 궁녀와 장난치다가 이윽고 목욕하는 것을 즐기는 술탄적인 놀이에 탐닉한 것처럼 적었지만, 현장을 방문해 본 바로는 아무래도 그런 장소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어쨌든 협애한 궁성이었다.
《함순린안지》를 보면, 궁궐, 곧 궁성 주변에는 몇 개의 관청이 그려져 있다.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들은 주위를 중심으로 도성의 여기저기에 두어졌던 것이다. 이런 발상은 기본적으로는 카이펑과 똑같다.
하지만 기이하게 생각되는 것도 많다. 관청이 남쪽의 성벽과 궁전 사이의 협애한 장소에도 몇 개인가 그려져 있는 점이 그것이다. 어느 쪽이라고 말한다면, 직접 민정에 관계없는 것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장소가 있을까 싶다. 다만 궁전 안에 있는 쟈후이먼(嘉會門) 옆에도 와자(瓦子)가 있던 것이어서 꼭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는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하여 북송과 남송 모두 궁성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도시] 모두 도시로서 어느 정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수도로 개조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송 이후의 군주 독재성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장중함이 결여된 형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형태
다음은 형태다. 수생 도시에 걸맞게 수로가 성 안을 달렸다. 육로도 착종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운하였다. 그런 까닭에 항저우에서는 육로의 성문과 마찬가지로 수문도 큰 의미를 갖는다. 성 안의 중앙을 달리는 주 운하는 옌챠오(鹽橋) 운하였다. 그 옆을 평행으로 달리며 바이패스 기능을 갖고 있는 산업 수로인 스허(市河)와 함께 성 안의 주요한 교통로였다. 전체 길이는 대략 6킬로미터였다. 그밖에도 스허의 서쪽을 달리는 칭후(淸湖) 운하가 있다. 옌챠오 운하의 동쪽에 있는 짧은 마오산(茅山) 운하와 동쪽 성벽 밖을 따라 가듯이 흘러 도랑과 운하의 역할을 수행했던 차이스허(菜市河) 등, 수로는 많았다. 이것들은 차례로 정비되어 형태를 완성시켜 간 것이다. 그밖에 쳰탕 강(錢塘江)과 성 안, 시후(西湖)와 성 안을 연결하는 갑문(閘門)이라 불리는 수문이 있어 쳰탕 강의 물을 끌어온 것에 의해 생긴 간만의 차에 대처했다.
이와 같이 도시 기능의 유지를 운하에 맡긴 항저우였지만, 그 기본 형태는 쑤저우와는 전혀 달랐다. 쑤저우의 운하는 가늘고 정연하게 배치된 것이 특색이었지만, 항저우의 운하는 그만큼 가늘지 않았다. 가늘고 긴 항저우를 종으로 세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몇 개가 시후(西湖)와 쳰탕 강을 연결했다. 물론 성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운하가 물자를 성 안 깊숙이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팽창하는 인구를 모으고 도시의 정점에서 군림했던 항저우였다. 대량의 물자를 필요로 하고 물자의 저장고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 점에서 수도(首都)의 역할은 카이펑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항저우 자체의 특색은 운하와 그것을 둘러싼 경관에서 카이펑과 전혀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 안의 교통, 특히 물자의 운반은 수로를 주체로 하였다. 물론 육로도 충분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진즉부터 수레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이펑의 시내에서 보이는 것처럼 갖가지 형태의 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강남의 도시 도로는 이미 보아 왔던 것처럼 기와와 벽돌을 깔아 포장되어 있는 것이 많았기에 수레가 사용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주요한 운반 수단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배 역시 카이펑과 다른 경관을 만들어냈다. 운하의 경관도 카이펑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