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다. 서로 다루고 있는 지역은 다르지만, 공통의 키워드는 아편이다. 하나는 동남아 화인들의 이주 역사와 흥망성쇠를 다룬 『아편과 깡통의 궁전』(강희정, 푸른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아편전쟁』(서경호, 일조각)이다. 일단 완독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둘 다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라는 것이다.
먼저 『아편과 깡통의 궁전』은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동남아 화교들의 역사를 아편과 주석, 그리고 고무의 시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공간적으로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페낭과 그 부근 지역이고, 시간적으로는 19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약 1백 년 남짓 되는 기간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곳을 무대로 활동했던 화교 거상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낯선 땅에 터를 잡고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웠는지 등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때는 청 왕조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휩싸여 있었던 시기였다. 아마도 그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등 떠밀리듯 중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새로운 삶을 도모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향 조직을 중심으로 상부상조하면서 또는 서로를 착취하면서 물설고 낯선 이역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갔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화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중국의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다는 것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만큼 해외 이주민 숫자도 여타의 국가를 압도한다. 화교들의 집단 거주지인 차이나타운도 세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해외 이주 화인華人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평소 궁금하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을 소개한 책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동남아시아는 우리가 별로 눈길을 주지 않던 변방 중의 변방이 아니던가. 이 책으로 문득 아 거기에도 화교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렇다. 동남아시아 화교의 역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 한국 축구가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버마 등과 진땀나는 승부를 벌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우리를 애먹였던 말레이시아 축구 대표팀에 소친온(Soh Chin Aun, 蘇進安)이란 선수가 있었다. 외양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화교 출신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찌 축구선수뿐이겠는가.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화교의 위상과 역할은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일 터인데, 여지껏 우리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뿐이다. 과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페라나칸의 정체성이 어쩌구, 바바와 뇨냐의 의미가 어쩌구, 광둥과 푸졘 출신 화인들의 갈등과 협력 관계가 어쩌구 하는 등등의 것들은 이제까지 나의 뇌리에 흔적을 남긴 적이 없던 그야말로 생소한 분야의 것들이다. 한 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신천지가 안계에 펼쳐진 격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연구의 수준과 깊이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릴 게 없을 정도이다. 예전에는 이런 분야에 대한 정보는 대개 외국 학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자가 직접 발품과 손품을 팔아 쓴 책을 통해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3,40년 전만 해도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 한 권이 페낭으로 대표되는 동남아시아 화교 역사의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페낭 화교 사회의 주류 격인 ‘성공한 화인’들을 중심으로 서술을 해나갔는데, 라오케가 되었든 신케가 되었든 기층을 이루었던 대다수 이주민들에 대한 좀 더 세밀한 사례 분석과 그들의 문화 등등 향후 과제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런 후속 연구를 위한 첫 땅띔이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편전쟁』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편전쟁은 앞서의 동남아 화교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도 서문 격인 <책을 펴내며>에서 밝혀놓았듯이 “이 사건이 동아시아에 끼친 충격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 밀려온 격랑을 생각하면 국내에서 이 전쟁에 관한 전문서적이 한 권도 없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아편전쟁은 거의 모든 중국사 관련 저작들이 다루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에 기술된 내용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그 서술도 소략하기에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소상히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이 뭔가 좀 더 구체적인 사건의 전말을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의 출간으로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구성은 일종의 연의演義 형식을 띄고 있다. 그것은 필자가 “아편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역사학의 입장이 아니라 전후의 내막을 풀어내는 이야기로 쓰기로 했다”는 말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필자는 이 책이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라 영어권과 중국, 한국에서 출판된 책과 논문들을 뜯어 모아 재구성한 것”이고, 그나마도 “능력 부족으로 피하지 못한 엉성함”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 보면 필자의 이런 겸사는 일종의 엄살이거나, 혹시라도 있을 따가운 시선, 이를테면 본격적으로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중문학(그 중에서도 소설 전공) 교수가 이제껏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아편전쟁에 대한 책을 감히 썼다는 데 대한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 마디로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들인 공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공교롭게도 두 명의 필자 모두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편과 깡통의 궁전』의 저자는 본래 불교미술 전공으로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에 대한 뛰어난 저작 다수 펴낸 바 있다. 비록 최근에는 동남아 연구로 그 방향을 틀었지만, 그래도 본래 전공인 불교 미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편전쟁』의 저자 역시 앞서 말한 대로 역사학 전공이 아니라 중국 소설 연구자이다. 물론 양자 모두 비록 역사학 전공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각각 미술사와 소설사를 연구한 바 있으니, 역사학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쓴 책은 일반 대중이 읽기에 조금 난삽한 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편전쟁』은 일종의 편년사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본격적인 아편전쟁에 대한 기술에 앞서 중국에서의 아편 무역의 유래와 외국 상인들과의 관계 등을 소개하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술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중국사 책에서 간단하게 기술된 내용의 이면에 이렇게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곧 그저 단순히 영국 측이 중국과의 무역 역조를 만회하기 위해 아편을 동원했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던 것이 실상은 중국인들 역시 아편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이해관계가 좀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내가 이해했던 아편전쟁의 속살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이다. 우리는 단순히 영국이 아편 무역에 관해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찬성하고 전쟁에 나선 것 정도로 이해했는데, 사실은 영국 내부에서도 휘그당과 토리당이라는 두 주요 정당 간의 이해 충돌이 있었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아편 무역 종사자들이 당시 언론을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등등.
하지만 이렇게 세밀하고 꼼꼼한 기술이 이 책이 갖고 있는 한계일 수도 있다. 소소한 전투까지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나무를 보되 숲을 놓치는 격이랄까? 물론 이 책의 저자가 그런 큰 그림을 제시해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주요 논점이 사건의 시말을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간 데 있기에 아편전쟁이 갖고 있는 세계사적 의의나 당시 주변국들의 반응 등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그저 칭찬 일색의 주례사 비평을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낸 평자의 투정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작자가 말했듯이 아편전쟁에 대한 변변한 전문 서적 한 권 없는 처지에 이제라도 이 정도로 아편전쟁을 소상하게 기술한 책이 나와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게 이 땅의 현실인 것을.
돌이켜 보면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 지금은 아편이 대표적인 마약의 하나로 여겨져 양귀비 꽃 한 송이만 재배해도 엄한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아편을 매개로 개인적인 치부를 하고, 아편이 국가의 주요 무역 품목이 되어 이를 둘러싸고 전쟁까지 벌어졌던 19세기는 과연 어떤 시기였던가? 인간의 물욕이 극에 달해 인간성이 말살되고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였던 제국주의 시대의 단면이 아편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나 할까? 이 두 권의 책은 무심한 듯 그 시절의 야만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