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권
도시가 출현하면 당연히 주변에 도시 교회의 경관이 생긴다. 도시 주변의 경관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행을 해 오면서 도시에 다가갔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거리까지를 도시로 생각하고 근교로 생각했던 것일까? 다른 곳에서 도시로 다가간 인간과는 다른 감각을 도시 사람들은 갖고 있었을 것이다.
카이펑의 교외는 어느 부근까지였을까? 이것을 찾는 하나의 실마리는 행락지를 고려하는 것이리라. 송대 사람들도 계절마다 행락을 즐겼다. 자주 소개해온 바대로 《청명상하도》는 명칭 그대로 청명절 그림이다. 그리고 묘사된 것은 카이펑 교외의 무지개다리(虹橋)를 중심으로 한 장소이다.
이것도 서술한 바이지만, 이 그림 안에 카이펑의 풍경이 포함되었다고 하는 설이 많지만, 나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 청명절 그림이라는 것은 봄의 성묘 그림이다. 눈이 녹고 추위가 누그러지고 사람들 마음이 푸근해지는 봄. 그 무렵에 사람들은 차츰 따뜻해져 가는 교외로 나가 좋은 날씨를 즐겼다. 이 광경을 중심으로 묘사한 것이 《청명상하도》이다. 이것은 화제(畵題)가 보여준다.
그 메인 테마로서 설정된 것이 무지개다리(虹橋)였다. 무지개다리는 카이펑 교외 7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리로 번잡한 장소였다. 일찍이 소도시적인 경관을 갖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특수하지 않은 보통의 도시적인 경관을 찾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항저우의 교외도 번잡했고 상당히 멀리서부터 인가가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이 그림은 도시 교외를 고려하기에도 적당한 그림인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송대 사람들은 행락에 어느 만큼의 거리를 나갔던 것일까? 이것은 도시의 언저리나 도시화의 범위를 헤아리는 의미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이를테면 시나다 유타카(品田穰)는 《도시의 자연사(都市の自然史)》에서 에도의 행락권을 논했는데, 대체로 도시 근교를 들었다.
카이펑의 경우 잃어버린 수도의 번영을 엮은 멍위안라오(孟元老)의 《동경몽화록》에서 행락지를 거론하며, “도성의 주변 백리 안은 원포로 가득했다”고 하였다. 송대의 1리는 약 552.96미터이므로, 주위 약 53킬로미터 이내는 행락지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 되고, 오늘날에도 그에 미치지 못할 만큼 대규모의 행락권이다. 시나타 유타카는 에도에서 이 정도로 큰 행락원을 들고 있지 않다. 간단히 하루나들이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수 킬로미터 정도였을까? 물론 도시권의 확대에 의해 당연히 범위는 넓어졌지만, 쇼와(昭和) 초기에도 대체로 20킬로미터 정도로 수렴된다.
이것은 송대에도 거의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을까?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있어도 옛날 서민의 주된 교통수단은 결국 발이었으므로 행동 범위에 극단적인 차는 없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당시의 일반적인 행락지까지의 거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불현듯 책을 읽고 있다가도 명확하지 않았다. 정원이나 절, 도관, 분묘 등에 거리가 씌어져 있기는 해도 가까운 것은 2~3리, 먼 것은 50리도 있어 어느 것이 일반적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송대의 서민 풍속을 기록한 홍마이(洪邁)의 《이견지(夷堅志)》를 보면, 수십 리 떨어진 곳에 하룻밤 숙박을 하면서 성묘를 가는 경우도 있지만, 10~15리 정도의 행락이나 성묘, 장보기라고 하는 것도 결코 작은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1백 리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다. 지금 여기서 이 점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기 전에 일상적인 세계가 어느 정도 크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행락’이라고 하는 말이 ‘교외에 나갔다’는 정도의 의미로 극단적인 원행을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활권
일상적인 세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범위를 말하는 것일까? 당대(唐代)의 예이긴 하지만, 《태평광기(太平廣記)》라는 전기(傳奇)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에 밤도둑이 50리 밖에서 도적질을 해 장물을 성안에 갖고 들어왔는데도 오랫동안 탄로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거리는 대체로 28킬로미터였다. 송대에도 《이견지(夷堅志)》에 비슷한 이야기 있는데, 이 경우는 30리, 약 16.6킬로미터였다. 도시간의 거리나 시장권(市場圈)의 문제도 있는데, 이것도 당시 하나의 일상적인 생활권의 범위라는 것이 될 것이다. 곧 약 17킬로미터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간단하게 사람들이 교류하는 세계는 아니었다. 적어도 하루에 돌아올 수 있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뜬소문 등으로 전해지기 어렵다고 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보행 거리로만 측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인간의 보행속도와도 관계있다. 이전에 《분게이슌슈(文藝春秋)》(1979년 7월호)에 「통계로 본 일본인―그렇게 급하게 어디로 가는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도시에 있어서 일본인의 보행속도를 계측한 흥미로운 데이터이다. 이에 의하면 보행속도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가장 빨리 걷는 것은 오사카 사람이고 느리게 걷는 사람은 가고시마(鹿兒島) 사람이다. 실제로 1시간에 1킬로미터의 차이가 있다. 아시아 각 국의 측정은 실려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만큼 느린 듯하다. 가고시마에서는 1시간에 4.788킬로미터, 마닐라에서는 4.464킬로미터이다.
달리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송대 사람이 오사카 사람만큼의 속도로 걷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송대 사람의 보행속도는 1시간에 4~5킬로미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1시간에 대체로 9리 정도 걷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출할 때의 시간, 곧 아침 일찍 나가는 것이나 오후에 나가는 것 등등. 이동수단, 이를테면 말을 이용하는가, 배로 가는가. 그렇지 않으면 터벅터벅 걸어가는가 등등. 지형도 문제가 된다. 산이나 고개를 넘어가는가, 그렇지 않으면 평지를 가는가. 모두 우리가 외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그때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역시 편도 1시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견지(夷堅志)》에 10 내지 15리로 되어 있는 예는 여기에 성안의 보행거리를 더하면 더 큰 숫자가 된다. 집에서 성문까지 2리 정도였다고 하면 편도 10리에 2리를 더해 왕복 24리가 된다. 곧 편도 1시간 반의 거리가 된다. 15리라면 2시간이 넘는 거리가 된다.
일반적인 행락에서 편도 2시간은 상당히 먼 거리이다. 교통수단이 확립된 오늘날에도 편도 2시간이라는 것은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당시의 실제 행락지나 행동 양태를 좀 더 상세히 검토할 필요도 있지만, 역시 성 밖 10리가 하나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무리 없는 상정이라는 것은 카이펑 축성에 즈음해서 성 밖 7리를 하나의 기준으로 분묘를 설치하는 경계로 했다는 것과 술고래와 해학으로 유명했던 스만칭(石曼卿)이 「아득히 황도 10리의 봄을 보네(瞭見皇都十里春)」이라고 노래했던 것으로도 납득할 수 있다. 또 쑤저우 교외 10리 거리에 있는 스후(石湖)에 별장을 갖고 있던 판청다(范成大)가 뻔질나게 성 안에 오갔던 것은 거리가 적당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성 밖 7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무지개다리(虹橋)가 《청명상하도》에 그려져 있듯이,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봄이 되면 도성의 사람들이 교외에서 행락을 즐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의 행락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도시의 교외에 있고 먹을거리 등을 보급할 수 있는 도시권이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행자가 행동하는 거리 또한 도시권을 생각한 실마리가 된다. 다만 이것들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도시 상업권이 문제가 되기에 보고 있는 도시 경관과 행동권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시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 도시 거주자로부터 하면, 7리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