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지王夫之의 독통감론讀通鑑論 – 권2 한혜제漢惠帝

한혜제漢惠帝

1. 혜제 때는 조참曹參은 소하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참(曹參)은 소하(蕭何)의 법에 따라 다스렸으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잘 다스려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조가 막 붕어(崩御)하고 모후(母后) 여태후가 위에서 권력을 쥐고 있어서 연약한 혜제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니, 소하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노나라의 두 선비는 “예악은 백 년 뒤에나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혜제 때에만 마땅한 말일 따름이다. 주공(周公)이 예를 제정했을 때는 유언비어가 아직 다스려지지 않고, 동교(東郊)도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상엄(商奄)도 아직 멸망하지 않은 상태여서 겨를이 없었다. 조참은 주공과 같은 덕망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때를 만났는데 처음 만들어진 것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의 전례(典禮)를 바꾸려 했다면, 민심이 평안하지 못하여 분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주역》 〈익괘(益卦)〉(䷩)의 “초구(初九)”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형세를 이용하여 큰 사업을 하면 대단히 길하고 이로우며 허물이 없다. 利用爲大作, 元吉無咎.

‘길하고 이로운[元吉]’ 뒤에 ‘허물이 없으니[無咎]’ 이롭다는 것은 자기의 이로움이 아니다. 위에서는 바람이 과도하게 몰아치고 아래에서는 우레가 치니, 길하기는 어렵다.

위대한 법(法)을 정비하고 위대한 벼리[經]를 바로잡아 위에서 편안하게 백성을 다스리며 풍속을 바꾸는 데에는 본말(本末)과 문질(文質)이 있다. 기강을 세워 다듬고 어지러움을 바로잡아 올바름으로 돌려서 백성이 상하가 구별되고 길흉의 법칙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그 근본이다. 아름답게 꾸며서 문장(文章)을 갖추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되돌리는 것은 그 말단이다. 말단이란 하루 사이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꾸민[文]이란 일부분[一端]만 꾸미는 것이 아니다. 미리 수립해서 하루라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때를 기다려 서로 따름으로써 도와주는 것이 그 말단의 꾸밈[末文]이다.

고조 때는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선비의 말은 잘못이다. 뿌리를 심을 수 없으니 나중에 일어난 이가 흥성하고자 해도 기댈 곳이 없는지라 인심과 풍속이 간략하고 태만하며 경솔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니, 백 년을 기다려도 백성의 풍속은 더욱 경솔해질 따름이다. 뜻이 있어도 징험(徵驗)할 길이 없고, 군주는 있어도 신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무제 때에 이르러서 겨우 소홀하고 빠뜨린 것이 있기는 해도 동중서(董仲舒)가 나왔는데, 곡학아세(曲學阿世)했던 공손홍(公孫弘)도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했다. 이것은 고조가 미리 생각하여 두 선비를 산에서 나오게 하지 못한 잘못이다.

혜제와 조참 때는 이전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周)나라가 남긴 글과 6국의 유로(遺老) 가운데 남은 게 있더라도 소하의 법과 숙손통의 예를 정리하고 규정으로 만들어 삼대(三代)와 절충해 후세에 분명히 보여주고자 해도, 사나운 여태후와 기세 높은 권신(權臣)과 간신(奸臣) 때문에 내부에서도 곤란이 생기고 근본적으로 개혁된 것도 많지 않아 안에서 재앙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를 창립하는 것을 분쟁의 실마리로 지목될 수밖에 없으니 천하가 어찌 또 명확한 제도를 수립해 경계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 폐단은 《시경《과 《서경》의 도리가 무너지고 구차하게 속된 학문을 수용하여 인심이 무너지고 윤리강상(倫理綱常)이 나날이 망가지니, 점점 넘쳐 흘러서 천박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가 될 것이다.

아! 방효유(方孝孺)가 죽고 세상에 학문의 씨앗이 없어졌으니 한나라 때의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 왕장(王臧), 조관(趙綰)이 옛날의 법도 가운데 백분의 일을 보존했는데 조참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것을 길러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오직 조참만이 이전의 법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시대환경 때문이었다. 조참 이전의 고조가 마땅히 그 바탕을 돈독하게 했고, 조참 이후의 문제와 경제가 반드시 그 꾸밈을 중시했던 것도 시대환경 때문이었다. 두 선비가 오만하여 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문제와 경제가 겸양하며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은 시대의 조류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도의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2. 한나라는 강한 병력을 남북에 모아서는 안 되었다

“현명한 왕이 도의를 갖추고 있으면 사방 오랑캐의 힘을 빌려 중국을 지킨다.[明王有道, 守在四夷]”라는 속담이 있다. 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려 보호하는 지극한 도리일 것이다! 《상서》 〈주서(周書)〉 〈입정(立政)〉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오직 하나라 때에만 경대부(卿大夫)가 크게 경쟁했다. 迪惟有夏, 乃有室大競.

경쟁[競]은 덕을 비교하는 것이지 군사력으로 다투는 것이 아니다. 《시경》 〈상송(商頌)〉 〈현조(玄鳥)〉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라의 영역이 천 리인데
오직 백성이 사는 곳이라네.
邦畿千里, 惟民所止.

백성이 사는 곳이지 군대가 모이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주역》 〈췌괘(萃卦)〉 〈상전(象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무기를 정비하여 불의의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 除戎器, 戒不虞.

췌괘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효(爻)가 양효로서 위아래 네 개의 음효를 나누고 있다. 양은 문덕(文德)이고 음은 무공(武功)이다. 제왕의 위치인 구오(九五)에 가까운 것이 양효 즉 문덕인데 그 바깥에서 음효 즉 무공이 둘러막고 있으니, 안으로는 문교(文敎)를 펼치고 밖으로 무공이 둘러싼 형국이므로 불의의 사태를 방비할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는 강한 병력을 남북의 군대에 모아 강력한 병력을 천자의 발아래에 모아놓고 이것으로 왕실을 보호하고, 나라의 영토를 공고히 다지고, 불의의 사태를 경계하는 방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천자가 어찌 스스로 그 별력을 통솔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다른 이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어서 외척(外戚)이나 환관에게 맡기고 자신과 친한 사람이니 염려할 게 없다고 여긴다. 이에 여록(呂祿)이 북군(北軍)을 장악하고 여산(呂産)이 남군(南軍)을 장악했는데, 여태후가 죽은 후 또 그들에게 병력을 이끌고 황궁을 호위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그들이 방자하게 유씨의 정권을 여씨에게 옮기는 음모를 실행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에 외척인 두씨(竇氏)와 양씨(梁氏), 하진(何進) 등의 환관과 교대로 병권을 장악하여 함부로 살상을 일삼으며 천자를 위협하며 계속해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설령 그것이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천자를 폐위하고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에 줄곧 장군의 명령을 따라야 했으니, 승상은 마치 그 휘하의 비서와 같았다. 만약 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지 않았다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이 법령으로 질서가 잡힌 궁중에서 공명정대하게 논의하게 되었을 테니, 누가 감히 방자하게 날뛸 수 있었겠는가? 병력은 천하에 분산해 놓아야 팔다리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군대란 사방 오랑캐를 지키기 위해 장수의 명령에 따른 조직이다. 그런데 그것을 황궁 가까이 두고 황제가 통제할 수도 있다. 주발은 속임수로 성공했지만 두무(竇武)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아 실패했는데, 천자가 쓸데없이 윗자리를 차지한 그 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 역시 위태로울 것이다.

당나라 천보(天寶: 742~756) 연간 이전에는 천자 주위에서 금군(禁軍)의 병권을 장악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두 장씨(張氏)와 무씨(武氏) 세력을 칠 때 병아리 잡듯이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때야 황제 주위에서 무력을 다투는 세력이 없었다고 하겠고, 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켜 황궁을 침범하자 짧은 시간 안에 평정했다. 정원(貞元: 785~805) 연간 이후로는 어조은(魚朝恩)과 토돌승최(吐突承璀), 왕수징(王守澄), 유계술(劉季述) 등이 무력을 내세워 발호하면서 군주를 폐하고 시해하기를 마치 썩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했는데,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이 바로 천자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주변에 모아놓은 병력이 아니었던가? 오대(五代) 시기에 이르러 곽씨(郭氏)가 먼저 후한(後漢)의 정권을 훔쳐 후주(後周)를 건립했고, 조씨(趙氏)가 뒤에서 후주 정권을 탈취하여 북송(北宋)을 세웠으니, 그들은 사교(四郊)의 관문을 나가지도 않고 천하의 주인이 바뀌게 했다. 오랑캐를 막고 도적을 평정한 원인을 살펴보더라도 이것 즉 경사에 모인 금군(禁軍)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자가 병력을 지닌 일은 없었고, 병력을 모아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주었을 따름이다.

변방의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주(州)와 군(郡)에 오랫동안 비축하지 않은 채 제왕이 정무를 처리하는 황궁 옆에서 무력을 자랑하면서 덕을 버리고 병력으로 시위하고, 책략을 버린 채 용력(勇力)을 자랑한다면 천자가 천하를 정복한 것이 어찌 무력의 도움을 받아 먼 지방을 뒤흔들어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귀순하게 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오직 병력이 외부에 있으면서 오랑캐를 막고 있어서 외척과 환관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서로 탐낼 만한 이익이나 자랑할 만한 위세가 없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자신들의 뒤에서 비판할까 두려워하며 감히 무력을 끼고 다투지 않는다. 설령 역심을 품은 신하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서로 견제하다가 결국 궤멸하고 만다. 그것을 미루어 확대하면 순임금과 우임금이 방패를 들고 춤을 추자 삼묘(三苗)가 투항해 귀순했다. 그들은 천하와 용력을 다투지 않았지만 덕망과 위세를 저절로 떨쳤는데, 그저 이런 방법을 썼을 따름이다. 아! 왕실에 병력을 모아 온 천하가 엄청난 물자를 나르느라 고생하게 하지만 그저 난리를 불러오기만 할 뿐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제하지는 못하니, 천하를 차지한 사람에게 어찌 분명한 경계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