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 1

조셉 P. 맥더모트(Joseph P. McDermott)*

1005년,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는 최근 국자감의 창고에 보관된 목각 본의 수량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 왕조(송) 초기에는 서판(書板)이 4천 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전과 사서 및 그에 대한 주석서들이 10여만 권 넘게 있다. 내가 어려서 유학을 공부할 때는 학동들 가운데 1, 2퍼센트만이 경전과 주석서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판본들이 풍부해 선비들뿐 아니라 평민들의 집에도 다 갖춰져 있을 정도이다.

60년 쯤 뒤에 송대(960-1279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었던 쑤스(蘇軾; 1037-1101년) 역시 당시 인쇄본의 보급에 대해 이와 유사하게 고무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최근 몇 년간 시장에서 다양한 저자의 저작들이 잇달아 모각(摹刻)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용도로 하루에 만 여 쪽씩 보급이 되다보니, 책이 많아져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다.” 11세기는 박학다식한 관리였던 선과(沈括; 1031-1095년)가 인쇄본의 증대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단언했던 다음과 같은 언명과 함께 막을 내렸다. “(953년에) 펑다오(馮道)가 최초로 오경을 간행한 이래 전적(典籍)들이 모두 판본으로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11세기의 몇몇 관점들로 인해 북송(960-1126년) 시기에 인쇄본이 중국의 학문과 독서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동서고금의 학술계의 경향이 만들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서 수전 체르니악(Susan Cherniac)이 상기시켜 주었던 것처럼, 인쇄본의 보급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쇄본의 명성은 (송) 왕조 초기에 확립되었다. 당시 조정은 유가 경전과 주석의 개정판, 고전적인 사전들, 문학, 법률, 의학 및 전장 제도 등에 관한 선집,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삼사(三史)로 시작되는 정사의 새로운 판본들 및 불경 전체에 대한 최초의 인쇄본인 대장경(大藏經) 등을 간행하는 방대한 사업에 공을 들였다. 많은 작업들이 편찬과 제작에 몇 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일이었다. 황제들의 재위 기간 동안에 허가된 사업의 수는 태조(太祖, 재위기간은 960-976년) 때 5개, 태종(太宗, 재위기간은 977-997년) 때 6개에서 진종(眞宗, 재위기간은 998-1022년) 때는 35개, 그리고 인종(仁宗, 재위기간은 1023-1063년) 때는 추가적인 39개의 사업으로 늘어났다. 사업의 범위도 도가 경전의 선집과 농업, 천문학, 풍수에 대한 참고서, 그리고 일반 지식에 관한 서적들에 이르기까지 점차 확대되었다. 국자감은 (송) 조정의 지배적인 출판 기관으로 대부분의 인쇄본을 간행하고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송대 초기 조정의 이와 같은 인쇄 사업과 이후의 관방의 인쇄본들, 과거시험의 대중화,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인쇄본에 대한 점증하는 수요 덕분에 인쇄본은 광범위하게 확산되게 되었다. 왕조 말기에 서적은 전체 17개 로(路) 가운데 15로에 산재한 적어도 91개 현에서 인쇄되었다. 유명한 서적 수집가인 예멍더(葉夢得, 1077-1148년)에 따르면, 고품질의 인쇄본은 카이펑(開封)이나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그리고 쓰촨(四川) 중부 등지에서 성행했고, 이에 반해 푸졘(福建) 북부 지역은 팽창 일로에 있는 시장을 위해 대량의 복사본들을 인쇄할 수 있는 상업 서적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서적의 확산으로 인해 텍스트를 암기하는 행위는 서적 수집과 판본 대조(즉 권위 있는 판본을 결정하기 위해 세심하게 수집하고 같은 텍스트의 서로 다른 판본들을 비교하는 것), 그리고 (몇몇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대충 훑어보기와 속독에 자리를 내주었다. 12세기의 유명한 성리학자 뤼쭈쳰(呂祖謙, 1137-1181년)과 주시(朱熹, 1130-1200년)의 눈에는 인쇄본에 대한 의존적 경향이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이와 같은 엉성한 독서 행위가 확산되고 필사 전통이 소홀히 여겨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12세기 경에 인쇄본 서적이 나타났을 뿐 아니라 텍스트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나는 송대 인쇄본에 대한 이 같은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현대의 학자들이 인쇄본의 기원 시기를 중국의 과거로 훨씬 더 이르게 끌어올린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중국의 인쇄본을 연구하는 몇몇 역사학자들은 앞서 인용한 주장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인쇄가 그렇게 빠르고 포괄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속속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유관한 시기의 일단에 대해 현재 학자들은 중국에서의 인쇄본이 시작된 추정 시간을 과거로 끌어올리면서 목판 인쇄술이 늦어도 7세기나 아마도 6세기 초 정도에는 사용되었을 거라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일단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현재 필사본에 대한 인쇄본의 결정적인 ‘승리’의 시기(즉 인쇄본이 궁극적으로 책 문화를 지배하여 필사본 텍스트를 수적으로 현저하게 압도하게 된 시기)는 송대에서 일러야 명대 중엽 정도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밍쑨 푼은 중국의 인쇄본 역사에서 송대의 역할을 깎아 내린 최초의 현대 학자일 것인데, 그는 송대에 나온 인쇄본들은 단지 송대에 나온 모든 서적과 개인 장서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몇 년 전에 송대 도서 문화에 관한 인상적인 연구에서 체르니악 역시 마찬가지로 인쇄본의 흥성에 관해 비슷하게 유보적인 관점을 드러내었다. 그는 “대부분의 (송대) 독자들의 경우, 책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대체로 실용적인 것이었고, 인쇄본이 주요한 성분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비록 송대의 인쇄업자들이 많긴 했지만, 당시 황실과 개인의 장서들은 대부분 여전히 필사본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의 전환이 송대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러한 전환은 언제 일어났을까? 송을 뒤이은 원 왕조는 학문적으로는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장-피에르 드레게(Jean-Pierre Drège)는 그 전환 시점을 몇 세기 뒤인 명대(1368-1644년)로 늦춰 잡았다. 최근 일본의 두 젊은 학자 이노우에 스스무(井上進)와 오오키 야스시(大木康)가 이 같은 관점을 크게 강화시켰다. 충분한 조사를 통한 일련의 연구논문들에서, 그들은 지식층을 위한 책과 ‘실용’ 도서 모두에 있어서 인쇄본이 우세를 보인 시기를 16세기로 설정하였다. 특히 이노우에의 연구는 이 글의 기본방향의 틀을 제시해 주었다.

송대 인쇄본의 영향력에 대한 다소 회의적인 관점을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애당초 목표로 했던 것은 결국 인쇄본이 언제 중국 서적의 주도적인 매체로서 필사본을 대체했는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질문은 양적인 차원에서 쉽게 제기될 수 있어 보인다. 곧 인쇄본 도서가 언제 필사본보다 더 많아졌는가? 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최초로 [사람들이] 책을 찾을 때 필사본보다 인쇄본을 좀 더 쉽게 접근할 정도로 일반화된 것은 언제인가? 불행하게도 이러한 질문들은 던지기는 쉽지만 해답을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위해서는 최소한 당말(唐末)부터 19세기까지 중국의 자료들에서 언급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모든 책의 판본에 대한 인쇄본의 정보뿐 아니라, [쇠렌 에드그렌(Sören Edgren)이 주도하는 중국의 선본 연구 프로젝트에서 기획한 것과 같은] 현존하는 중국 희귀본 전체에 대한 완벽한 목록이 요구된다.

현재 우리는 그런 수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대신 이노우에의 주목할 만한 연구 가운데 남송에서 명대 중기까지, 더 정확히는 1131년부터 1521년까지의 4세기 동안 간행된 중국 인쇄본의 통계치가 가장 유용하다(<표 2.1> 참고). 전체적으로 이노우에가 제시한 수치는 남송에서 원대(1279-1368년)까지 인쇄본의 숫자가 뚜렷하게 증가했으며, 명대 초기 50년 동안은 처음으로 하락했다가 다시 더 침체했으나 그 뒤에는 서서히 상승하다가 15세기 후기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그러나 경사자집(經史子集) 사부(四部) 인쇄본의 장기적인 인쇄본 기록은 서로 매우 달랐다. 경서 인쇄본은 (주로 거업서(擧業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의 결과로) 원대에 처음으로 최고점에 달했다. 그러나 명대 초기의 하락 이후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다시 이전의 최고 수치를 회복한다. 사서(史書) 인쇄본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명대 초기에 정점을 이루었다가 15세기 초에 다시 하락하지만, 그 뒤 15세기 후기에 이전의 최고 수치를 능가하게 된다. 제자서(諸子書) 인쇄본은 송대에서 원대까지 증가했다가 명조 통치 초기의 반세기 동안 극심한 침체를 겪었다가 1430년 전후에 다시 급증하지만 15세기 후기에는 그 수치를 능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이 4세기 동안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던 순수한 문학 류 인쇄본, 특히 문인과 관원들의 문집(文集)들조차도 15세기 초반의 쇠락을 겪었다. 요컨대 이들 전통적인 경사자집의 사부 가운데 뒤의 세 분야의 인쇄본은 1450년 이후에야 눈에 띄게 증가하고, 첫 번째 부류는 1500년 이후가 되어서야 현저히 증가하였다. 이렇듯 강남 지역에서 인쇄본은 16세기 이후에야 서면 문화를 전파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필사본을 영속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표 2.1> 베이징 중국국가도서관 및 타이베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131-1521년 사이의 현존 인쇄본의 시기별 수량 및 10년 단위 평균 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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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노우에 스스무, <장서와 독서(藏書と讀書)>[《동방학보(東方學報)》 62(1990년)], 428쪽.

하지만 송대와 원대, 그리고 명대 도서의 인쇄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통계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중국의 희귀본 고서 장서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두 곳인 베이징 중국국가도서관과 타이베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면, 이것들은 현존하는 송대 인쇄본 총수의 5분의 1 이하이기에, 빠져 있는 5분의 4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들 현존하는 인쇄본 가운데 어느 것에 관해서도 실제 인쇄본의 규모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 20세기의 어떤 학자는 10세기에는 84,000 권(!) 정도, 12세기에는 600과 1,000 정도였다가 19세기에는 30,000 정도가 인쇄되었을 거라는 추정치를 내놓았고, 또 다른 학자는 최대치를 15,000권으로 상정했는데, 하지만 에도시기(1600-1868년) 일본의 인쇄본을 연구한 또 다른 학자는 8,000권 정도라고 했다. 이런 숫치들의 엄청난 차이와 함께, 이노우에의 통계치에 포함된 도서들 가운데 한 셋트의 목판으로 만들어진 인쇄본들의 총수에 대한 거의 모든 계산들이 극단적인 추정치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훨씬 더 험난한 장애가 남아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생산하는 세계에서는 판목이 몇 년에 이르는 일정한 시기 동안 무수한 복본들을 찍어내는 데 사용되다가 한 구석에 처박힐 수도 있고, 아마도 이러한 목판들이 원본에 대한 최대치의 복본들을 찍어내기 전에 다른 텍스트로 다시 새겨지기도 했다. 한 마디로 어떤 정확한 인쇄업자의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의 출판 규모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숫자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훨씬 더 많은 인쇄본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는 책의 서문들은 천여 개에 이르지만 (남아 있는 송대 장서 목록과 같은) 도서들에 대한 가장 통상적인 정보원이라 할지라도, 서적의 생산에 대해서는(실제로 그 책이 인쇄됐는지 여부를 포함해) 아무 것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요컨대 송대부터 명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현재 남아 있거나 남아 있지 않는 중국의 서적들에 대한 전체적인 목록이 필요하긴 하지만, 궁극에는 그런 목록이라 할지라도 송대에 인쇄된 서적의 숫자나 어떤 책이 유통된 숫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주 뚜렷한 모습을 제시해주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숫자들은 어떤 책의 필사본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는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필사본이 오랫동안 서적을 전파하는 주요한 방식이었던 만큼, 마찬가지로 인쇄본이 어떤 특정한 시점에 그러한 위치를 대신했을 거라는 가정으로 필사본의 운명을 논해야 할 것이다. 필사본이 아예 사라져버렸다거나 더 이상 필사본으로 추가본을 만들지 않았을 거라 가정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필사본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도서를 전파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송대와 그 이후 어떤 왕조의 필사본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직적인 조사 연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노우에의 통계들에서 드러나는 경향들은 그것이 결국 거칠게나마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할지라도 확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장기간에 걸친 중국의 필사본과 인쇄본 생산에 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위해서는 정량적이지 않은 내용으로 방향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노우에는 이 점에 대해서도 명대 초기 도서 부족에 대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면서 약간의 자료를 제공한 바 있다. 비록 이런 자료들이 짜증날 정도로 적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언제 중국에서 인쇄본이 필사본을 대체했는가 라고 하는 크고 단일한 질문을 좀 더 다루기도 쉽고 답하기 쉬운 일련의 질문들로 조각 조각 나누어주는 미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정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가 되는 질문들에 대해 그럴 듯한 답을 해냄으로써, (중국의 자료들에서 좀 더 선호되는 방식인 권이라는 텍스트 내의 장과 비슷한 분할로) 일반적인 대형 서고의 장서 규모나 그런 서고의 숫자, 그리고 독자들이 손에 넣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서적, 특히 인쇄본의 유형들과 같은 구체적인 주제들이 명확해지기를 기대한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확실치는 않지만 인쇄본이 13세기 중국의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필사본 형태의 서적에 대해 우세를 보였고, 이러한 우세는 16세기에만 강남 지역에서 유지되었다는 주장을 여러 정황 증거들을 보아 간접적으로 접근하여 세울 수 있게 해줄 거라는 점이다. 관청이나 관리들이 펴낸 의서와 경서와 같은 다른 유형의 인쇄본의 운명은 이런 상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쇄술의 발명 이후 단지 8세기 남짓 동안에만 중국의 문화 중심지의 출판계에서 인쇄본이 필사본에 대해 영속적인 우세를 점했다는 총체적인 결론을 약화시킬 만큼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량적인 증거들에 대해 이렇게 분석함으로써 공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한계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여기서 중국의 전역에 걸쳐 17세기의 서적사를 설명하는 대신, 강남이라고 하는 지역과 우리가 신사(紳士)라고 알고 있는 특정의 독자 유형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지역에 대한 초점은 가격이나 유통과 같은 분석에 필수적인 지역 요소들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확정하는 데 결정적이다. 이를테면, 12세기 중반 중국에서 인쇄본 한 권의 가격은 그 책이 어디에서 인쇄되느냐에 따라 600퍼센트나 차이가 났다. 곧 이러한 차이는 인쇄본 가격에 대한 전국적인 비교를 통해 인쇄본의 가격이 서적의 생산과 교역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의 효용성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강남 지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의 분석을 긴밀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지역이 송대에서 명말에 이르는 시기 동안 서적의 생산과 유통, 전파에서 의심할 바 없이 중심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송대에는 서적의 거래에서 출판 중심지였던 항저우(杭州) 이외에 푸졘(福建) 북부의 졘양(建陽)과 쓰촨(四川)의 청두(成都)라는 두 개의 만만찮은 라이벌 도시가 있었다. 그러나 송대 이후에는 청두가 상당한 경쟁력을 잃었는데, 18세기가 되어서야 이 도시의 출판업은 13세기 중반 몽골의 침략과 17세기 장셴중(張獻忠)의 반란 기간 동안에 당했던 파괴로부터 회복되었다. [이에 반해] 졘양은 원대에서 명대에 걸쳐 최소한 서적 생산이라는 측면에서는 강력한 라이벌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명대만 놓고 보자면, 졘양에는 도서 문화, 특히 서적의 소비에 대한 정보가 쑤저우(蘇州)나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그리고 강남의 다른 도서 중심지를 총괄한 것보다 조금 덜 남아 있다. 그래서 강남 지역의 도서 생산, 특히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넘어가는 것에 관한 설명은 중국의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쇄본이 우세를 보이고 있는 현상에 대한 시발점(terminus ante quem)을 시사해줄 뿐만 아니라 11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장기간의 중국의 출판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그림을 제공해 주게 될 것이다.

내가 진행하고자 하는 분석의 두 번째 제한 요소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작자와 독자의 주요한 유형, 곧 신사(紳士) 계층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읽고 책을 수집하는 일을 그들 자신이나 가문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던 중국인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실제적인 고려 때문이다. 이 몇 세기 이래 현재 남아 있는 책들과 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신사 계층과 관청의 장서와 저작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체르니악의 용어로 “실용적인 독자”들을 위해 내놓은 이를테면 소보(小報)와 세금 서식들뿐 아니라 책력이나 달력, 보통 크기의 민요집과 주문(呪文), 그리고 여타의 종교 텍스트와 같은 대량의 대중 인쇄본의 경우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덜 단명했던 자료들에 집중한다면, 궁극적으로 이러한 출판물들과 여기서 제시되는 증거와 결론들을 틀림없이 이 시기 동안 중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업화되고 문화적으로 발달했던 지역의 수많은 문맹 인구 중 가장 학식 있는 일부와만 분명하게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제한 요소들은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송대와 명대의 출판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비교적 확실한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조금 덜 확실한 어림짐작을 하는 것이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책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인쇄에 부쳤다는 광범위하고 근거 없는 일반화된 논리를 반복하는 것보다 좀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지역과 신사 계층에 대해 주목하면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안들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부분의 중요한 관청과 민간 서고에서 필사본에 대해 인쇄본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 심지어 주요한 장서가가 유명한 저작의 판본들을 손에 넣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들, 그리고 이들 장서가들의 사회적 지위나 수집 취향과 16세기 중국의 신사 계층의 사회 구성에서의 변화들이다. 또 이러한 접근을 통해 나는 송대와 명대의 출판과 인쇄의 양상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유와 명대 중엽에 인쇄본이 궁극적으로 필사본에 우세를 보이게 된 이유들을 분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론을 통해 필사본이 명대 후기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방식에서의 변화들뿐 아니라 송과 명대에 필사본이 지속적으로 수행했던 역할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글에서의 나의 관심사는 주로 기술적인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중국의 서적을 연구하는 현대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알아낸 바와 같이, 여기에서 제기된 질문들은 단지 협소하게 서지학이나 경제적, 또는 학술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중국의 엘리트 문화를 이해하는 관건이 되기도 한다. 최소한 최근 1천년 동안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엘리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문화를 규정하는 것뿐 아니라 국가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의해 결정되듯이, 문화와 정치상의 엘리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렇기에 책은 중국의 사회, 정치와 학술사에 대한 의미심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서적의 생산과 유포 그리고 사용에 대해 알아낼 수 있다면 인쇄본이 점진적으로 우세를 보이게 된 것뿐 아니라 어떤 한 권의 책이나 저자가 지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향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우리가 얻은 결론은 식자 계층인 엘리트의 학문세계가 어떤 식으로 진화 발전했고,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국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