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구호의 모쒀족 모계사회에서 음미하는 ‘오래된 미래’
십여 년 넘게 중국여행을 하다 보니 그 넓은 대륙에서 어디를 가면 가장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나는 중국여행 티켓이 단 한 장이라면 윈난을 먼저 가라고 답을 한다. 몸에 밴 도시의 편리함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편의성이 적당히 받쳐주는 가깝고도 먼 오지를 추천하는 셈이다. 그 가운데 나만의 ‘샹그릴라로 가는 여정’이 있다.
윈난의 관문 쿤밍에서 출발하여 토림 루구호 석두성 리장 위룽설산 하바설산 샹그릴라 샹그릴라대협곡 메이리설산(해발 6740미터)에 이르는, 느긋한 일정으로 2주 정도 걸리는 코스를 여러 번 여행했었다.
토림(土林)은 억겁의 세월이 대지를 기묘하게 깎아낸 각양각색의 흙기둥들이 즐비한 지질공원이다. 붉은 기운이 도는 밝은 황토색 흙기둥이 파란 하늘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정말 아름답다.
토림 다음은 루구호(瀘沽湖)라는 고원의 호수다. 그곳으로 가는 산길부터가 매력적이다. 굽이굽이 끝도 없이 휘돌면서 고도를 높여 올라간다. 차를 세우고 돌아보면 땅덩어리가 이렇게나 클까싶은 생각이 든다. 산 아래 계곡에 안긴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기라도 하면 이곳이 샹그릴라가 아닐까 하는 몽상이 젖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차를 달려야 루구호에 도착한다. 수면이 해발 2685미터, 수심은 평균 40미터, 깊은 곳은 105미터나 된다. 깊이에서 나오는 진하고 푸른 물빛은 푸른 향기가 되어 온몸에 스며들 것만 같다. 해발 3770미터의 거무신산(格姆神山)에 올라가면 루구호 전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인다. 고개를 들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를 굽어보면 짙푸른 하늘을 삼키고 있는 푸른 호수. 하늘과 호수가 광대한 유화로 펼쳐진다.
루구호 일주도로는 44킬로미터 정도, 예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즐기고 물가에서 물수제비도 뜨면서 하루를 만끽할 수 있다. 호수 안쪽으로 뻗은 작은 반도의 끝에서 거무신산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과연 신산이라 할 만하다. 여행객의 피로감이 차올라도 호수 위로 쏟아지는 별들이 잠을 막아서기도 한다. 늦잠에 뒤척이다가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루구호의 물안개는 또 어떠한가. 잠에서 버쩍 깨어서는 곧바로 몽환에 빠지지만, 그 순간에는 샹그릴라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침 국수라도 한 그릇 하고 호숫가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루구호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모쒀(摩梭)족을 만나게 된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목록에는 없지만 그들의 신분증에는 엄연히 ‘모쒀인’이라고 명기돼 있다. 루구호 서남부의 윈난성 모쒀족은 나시족(納西, 리장의 소수민족)으로, 루구호 동북부의 쓰촨성 모쒀족은 몽골족으로 분류된다. 모쒀족은 독자적인 민족으로 분류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모쒀족은 ‘여인국’이란 다소 자극적인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쒀족 상당수는 모계-가모장제-대가족을 이루어 살아 왔다. 가문의 어른은 여자이고 여자에서 여자로 대를 잇는다. 아이를 낳으면 남편 없이 여자가 키운다. 수천 년 동안 쌓여온 가부장제의 편견으로는 이들의 습속과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모쒀족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주혼(走婚)이라는 혼인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말 자체가 틀렸다. 주혼은 여자 집에서 상대 남자가 찾아와 밤을 같이 지내고, 해뜨기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모쒀족 특유의 남녀관계를 말한다. 주혼은 남녀의 교제이지 혼인이 아니다. 남녀가 동거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족성원들이 권리와 의무로 한데 묶이는 결혼이, 이들에게는 아예 없다는 것이다. 아이를 출산하면 여자는 자기 집에서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키운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남자어른의 조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남자형제가 수행하는 역할이다.
남녀관계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공동의 노동이나 이웃 간의 교류에서, 마을 축제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사전에 서로 약속해야만 남자가 여자 집으로 찾아올 수 있다. 여자의 방은 2층이고 남자는 그 창문 아래에서 미리 약속한 신호로 노크를 한다. 여자가 창문을 열어주면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게 보통이다. 관계가 끝나는 것도 간단하다. 여자가 창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남자의 물건 하나를 창밖에 걸어둔다. 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아가지 않아도 그것으로 그만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당하게 다가가고, 남자는 여자에게 당당하게 어필한다.
가부장제 남자들의 섣부른 상상으로는 모쒀족 여자들은 성적으로 문란할 것으로 넘겨짚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남녀교제는 우리와 마찬가지, 오래가기도 하고 짧게 끊어지기도 한다. 동시에 여러 상대와 교제하는 것은 품위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흔하지 않다. 남녀관계를 가족은 물론 누구에게든 드러내지 않는다. 뜨겁지만 조용한 사생활로 다룬다. 어머니라 할지라도 성인 자녀들의 남녀관계에 간섭하지 않는다. 자녀가 성장하여 13세가 되면 성인 의복을 입혀주며 성년식을 치른다. 딸은 어머니의 옷을, 아들은 외삼촌의 옷을 물려받는 게 보통이다. 이날부터 딸들은 화방(花房)이라고 하는 자기만의 방을 따로 배정받는다.
습속이 이러하니 남자가 여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없다. 남자가 여자를 희롱해도 남자니까 무방하고, 여자니까 부끄러워해야 하는, 그런 젠더의 불평등이나 차별은 없다. 애초에 여자로 태어났으니 경시하고, 여자로 성장하니 억압당하는 일이 없다. 여자를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할례나 전족은 물론 얼굴을 가리는 복장도 없고, 그와 유사한 습속도 없다. 성관계 한번으로 여자를 올가미에 걸린 사냥감으로 취급하는 일이란 이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물론 남녀의 사회적인 역할 구분은 있다. 여자는 농사와 가사 등 가정 안팎의 일을 주도한다. 남자는 큰 힘을 쓰는 가사, 타지역을 오가거나 장사나 종교와 같은 대외적인 일을 맡고, 가족 안에서는 가모장, 곧 어머니나 누이를 충실하게 보좌한다.
나도 여러 차례 이 지역을 여행했고 관련 자료를 읽었지만 이들의 가족구성과 일상을 실감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여자남자 관계는 찬찬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미래에 관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제로 살아왔다. 남자들을 위해 여자를 낮추고 희생시키는 체제였다. 갓 태어나 성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어른들은 외면하기 일쑤였다. 성장하면서 여자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가정에서의 억압, 교육상의 억압, 습속과 문화의 억압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가해졌다. 어머니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부장제라는 틀 안에서만 허용된, 사실은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미화한 것이 적지 않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성평등이 보편적 당위로 인정되고 그에 따라 사회 구석구석이 서서히 또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장노년층은 가부장제의 습성에 매인 채 세태에 뒤떨어진 훈계로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일쑤다. 중년들은 장노년보다는 성평등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강하게 거부하는 게 태반이다. 젊은 층들은 공감이나 불만, 무관심이나 냉소 등등 여러 스탠스를 취한다. 남자들은 성평등이 과속이거나 역차별이라 불만을 토로한다. 여자들은 불충분하다고 주장하고, 남자들의 반발에 미러링으로 강하게 반박하기도 한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성평등은 시대의 당위이고 뒤집을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중장노년 남성들은 시대 변화에 부적응하는 사례가 상당하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수천 년 동안 기득권을 누렸고 개인으로서도 오십년 이상 충분한 혜택을 누렸으니 이제라도 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앞장서서 페미니스트가 되기는 어렵다고 해도 최소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은 알아야 한다. 루구호는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대해 조용히 사유하고 성찰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모쒀족의 일상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어머니의 나라>(추와이홍 저)와 <아버지가 없는 나라>(양 얼처나무, 크리스틴 매튜 공저)라는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이 청색 부분은 추천도서 사진이 들어가면 사진설명으로 옮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루구호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모쒀족과 우리나라의 여자들을 함께 읽어보자. 그러면 루구호가 샹그릴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