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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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마의가 싫었다. 그의 뛰어난 책략이, 자로 잰 듯한 빈틈없는 작전이, 용서를 모르는 가혹함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냉정하고 정확했다. 그는 기다릴 줄 알았고, 일어날 때를 알았고, 공격할 때를 알았지만, 인정이 없고 용서를 몰랐다. 기계와 같았다. 영민하고 출중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출세 기계’와 같았다. 그것이 그동안의 나의 인상이었다. 소설이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한 맞수로 내세워서가 아니라, 그는 확실히 공업에서는 탁월했다. 삼국은 결국 그의 손자 사마염이 서진을 세우고 통일하지 않았는가. 그 토대는 십년 동안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일으킨 고평릉 쿠테타 덕분이 아니겠는가. 그 이전에 조조와 조비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린 덕분이 아니겠는가. 나이가 들면서 사마의가 궁금해졌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 기다림이니까. 기다림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면서 사마의가 궁금해졌다. 기다리는 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마의는 기다렸다. 지략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다림이 필요했다. 사마의는 어떻게 기다렸을까… 나는 사마의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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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세설신어》<우회尤悔>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있다. 동진 초기 진 명제(재위 322-325)가 한번은 왕도와 온교를 불러 물었다. “조상들은 어떻게 해서 천하를 얻었소?” 온교가 답을 못하자 왕도가 나서서 말했다. 왕도는 동진을 세운 장본인이자 원로였기에 나라의 일을 많이 알고 있었다. “온교는 아직 어려서 모르오니 소신이 폐하께 알려드리겠습니다.”그리고는 선제(사마의)가 어떻게창업을 하였고 문왕(사마소)이어떻게 고귀향공을 시해했는지 말하였다. 이에 명제는 부끄러워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 말했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나라가 어찌 장구할 수 있으리오?”이러한 기록은 아주 뚜렷하게 사마의의 인상을 만들어준다. 사마의는 249년 고평릉 쿠테타로 조상을 모살하여 위나라의 정권을 손에 넣었고, 그의 아들 사마소는 260년 고귀향공을 시해하여 찬탈로 나아갔고,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결국 265년 서진을 세웠다. 이들의 행위는 모두 정당하지 않고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사마의는 성품이 매우 포악하였다.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를 할 때는 3대까지 멸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미 출가한 딸까지 화가미쳤다. 그래서<진서>에서도 그가 너무 잔혹하다고 기록했다. 그의 일생은 온갖 지략과 계략을 이용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포악한 수단이 동원됐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오직 한 사람의 지위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백성을 전란에서 구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사마의는 그마저도 없었다. 명대에 찍은 <역대명인상>의 찬문을 보면 “장수의 재능에 간웅의 뜻, 전권을 행사하며, 이익을 위해 의리를 저버린다”고 악평을 하고 있다. 경극에서도 그의 얼굴은 조조와 마찬가지로 간사함을 의미하는 흰색 분장의 ‘정’으로 나타난다. 명청시대 소설, 희곡, 설창 등에서 사마의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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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비병

조조(47세)가 사마의(23세)를 불렀다. 자기 밑에서 벼슬을 하라는 뜻이었다. 201년이었다. 당시 조조는 관도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자신의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한 때로, 재능 있는 사람은 물론 명문대족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 수배 명단에 사마의는 당연히 들어갔다. 사마 가문은 사마의의 증조부부터 태수 이상의 인물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사마의 자체가 출중했다. 당시 상서 최염(崔琰)은 사마의의 형 사마랑(司馬朗)에게 “자네의 동생은 총명하고 밝으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그대가 미치지 못한다네“(君弟聰亮明允, 剛斷英特, 非子所及也)라고 했고, 남양태수 양준(楊俊)은 “범상치 않은 그릇”(非常之器)이라고 칭찬할 정도였으니, 조조가 모를 리가 없었다. 진수는 “젊은데도 특출한 절조가 있고, 총명한데다 원대한 모략이 있다”(少有奇節, 聰朗多大略)고 평가하였다. 더구나 사마의가 사는 하남의 온현(溫縣)은 조조가 있던 허도(지금의 허창)에서 아주 가까웠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응하지 않았다. 칭병하고 나가지 않았다. 젊은 사마의로서는 조조가 달갑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조조는 황제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다지만 찬탈을 하려는 도적이었으며, 더구나 추악한 환관의 자식이었다.

이에 비해 사마 가문은 대대로 한나라의 충신 집안으로 자처해왔다. 사마 가문이 하남성에 자리 잡은 것은 초한전 때 사마앙이 공을 세워 은왕(殷王)으로 봉해졌기 때문. 그 후 8대째 이후를 보면 사마균(정서장군)-사마량(예장태수)-사마준(영천태수)-사마방(경조윤)으로 이어졌고,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 사마의였다.당시 사마의는 풍비병(風痹病)을 이유로 들었다. 풍비병은 곧 중풍이었다. 23세의 젊은 놈이 중풍으로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조조는 사람을 보냈다. 조정에서 사령이 온다고 하니 당일 사마의는 침상에 누웠다. 사령은 칼을 들고 누워있는 사마의의 면상 앞에서 이리저리 허공을 그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령이 돌아가 보고했다. 조조는 자기 때문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았기 때문에 사령을 보내지 않았겠는가.당시 사마의는 사령을 속이기 위해 먼저 집안사람들을 속였다. 그래서 평소에도 몸을 석고처럼 굳힌 채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은 사마의가 중풍에 걸린 느린 동작으로 책을 말렸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사람을 부를 겨를이 없던 사마의는 후다닥 재빠르게 마당에 나가 책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여종이 이를 보고 말았다. 이 일이 발설되면 사마의와 집안에 화가 닥칠 수도 있어 사마의의 부인 장춘화가 여종을 죽였다.

4. 낭고지상

관도전에 승리한 조조가 201년 사마의를 불렀지만 사마의는 칭병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잔당을 제거하러 북상한다. 앞으로 남방을 치러갈 때 배후의 공격을 미리 없애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조가 지은 명편 <고한행>(苦寒行)이 아직 남아있어 행군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北上太行山, 북으로 태항산을 오르니
艱哉何巍巍! 힘들기도 하여라! 산봉우리는 얼마나 외외한가!
羊腸坂詰屈, 비탈길은 양의 창자같이 구불거려
車輪爲之摧. 수레바퀴가 이 때문에 부서지는구나.
樹木何蕭瑟, 나무들은 어찌 이리 삭막한지
北風聲正悲. 북풍의 바람소리가 진실로 슬프구나.
態羆對我遵, 곰들이 나와 마주하여 웅크리고
虎豹夾路啼. 호랑이와 표범이 길 양옆에서 포효한다.
谿谷少人民, 골짜기에는 사는 사람 드물고
雪落何霏霏. 내리는 눈은 부질없이 분분하다.
延頸長歎息, 목을 빼어 길게 탄식하니
遠行多所懷. 먼 행군 길에 감회가 많구나.
我心何怫鬱, 내 마음은 울적하기 그지없어
思欲一東歸. 동으로 돌아갈까 줄곧 생각한다.
水深橋梁絶, 강물은 깊으나 다리가 끊겨 있어
中路正徘徊. 중도에서 마침 배회한다.
迷惑失故路, 정신이 혼미하여 길을 잃고
薄暮無宿栖. 해거름에 묵을 곳도 없다.
行行日已遠, 걷고 걸어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人馬同時飢. 사람과 말이 모두 굶주렸다.
檐囊行取薪, 자루를 지고 여기저기 땔나무를 줍고
斧氷持作糜. 도끼로 얼음을 깨서 죽을 만든다.
悲彼東山詩, 슬프구나. 저 <동산>의 시여
悠悠使我哀. 참으로 나를 애닯게 하는구나.

조조는 몇 번이나 동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허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럴 때마다 곽가가 좋은 기회를 잃지 마라고 간언하였다. 과연 곽가의 계책으로 요동을 평정한 후 허도로 돌아와 적벽대전을 준비하면서, 208년 조조(54세)는 다시 한 번 사마의(30세)를 부른다. 두 번째 부름에 사마의는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지 않으면 살해되기 때문이었다. 《진서》<선제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위 무제 조조가 승상이 되어 사마의를 문학연(文學掾)으로 초빙할 때 집행자에게 말하였다. “만약 다시 주저하면 바로 제거하게.” 사마의가 두려워 직위에 나아갔다.

(及魏武爲丞相, 又辟爲文學掾, 敕行者曰 : “若復盤桓, 便收之.” 帝懼而就職.)

조조가 처음 사마의를 보았을 때 조조는 깜짝 놀랐다. 사마의의 관상이 ‘낭고지상’이었기 때문이다. ‘낭고지상’(狼顧之相)은 이리의 목을 가진 상을 말한다. 사람은 뒤돌아볼 때 어깨도 함께 돌아가는데 이리는 목만 백팔십도 돌아간다고 한다. 조조는 순간 의혹이 일어 돌아가는 사마의를 불렀다. 과연 뒤돌아가던 사마의가 어깨는 움직이지 않은 채 머리만 돌려 뒤돌아보는 것이 아닌가.(魏武察帝有雄豪志, 聞有狼顧相. 欲驗之. 乃召使前行, 令反顧, 面正向後而身不動.) 이러한 낭고지상을 가진 사람은 잔인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조는 시종일관 사마의를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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