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의 24시간 3

탈 것과 수레

카이펑의 탈 것에 관해 소개해 보겠다. 걸어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가마를 타는 사람도 많았다. 가마는 일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본의 가마는 그 안에 앉지만, 카이펑의 그것은 걸터앉는다. 그렇기에 종으로 길다. 그들은 우두머리들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던 것일까? 청대가 되면 도시에서 가마꾼 인부의 투쟁이 보였다는 것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청명절 무렵에는 가마에 버들과 꽃다발로 장식을 한 꽃가마가 되었다.

수레도 있다. 가장 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라 부른다. 이것은 화물 운반용 수레인 듯하다. 무개(無蓋)로 양쪽에 난간이 붙어 있다. 앞에 긴 자루가 튀어나와 있어 여기에 소나 나귀, 노새를 비끄러맸다. 소라면 다섯 내지 여섯 마리, 나귀나 노새라면 20 마리 정도를 전후 2열로 연결하고 뒤에 쇠방울을 매달고, 화물도 수십 석 싣고 달렸다고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뒤에 나귀나 노새가 두 마리 정도 묶여져 있어 가파른 다리나 언덕을 지날 때에는 뒷걸음질을 치도록 해 브레이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관중거(官中車)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나귀로 끄는 것으로 태평거보다 작았다.

이것보다 더 작은 것이 소가 끄는 평두거(平頭車)이다. 여기에는 술통 정도를 실었다 한다. 술통은 몸통이 긴 통으로 꼭지가 달려 있었다. 이밖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어 가족 용 탈 것과 인력으로 끄는 일륜거 등, 용도에 맞춰 실제로 많은 수레가 있었다.

수레를 끄는 것은 소나 나귀, 노새였다. 이밖에 《청명상하도》에는 낙타나 말이 보인다. 화물을 싣고 사람을 싣고 성안을 다녔다. 카이펑 시내의 소리는 물건 파느라 외치는 소리에 예인이나 아이들 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화물 수레 소리와 동물들 울음소리로 어수선하게 가득 찼던 것이다.

샹궈쓰(相國寺) 인근

시끌벅적한 것이 도시의 그리고 번화가의 본령이라 한다면, 이것은 샹궈쓰(相國寺)의 저자(市)일 것이다. 지금도 카이펑에는 샹궈쓰라는 명찰이 있다. 물론 몇 차례의 홍수를 겪었던 카이펑이었기에, 송대의 샹궈쓰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 전통을 이어받은 명찰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서는 매월 날을 잡아 저자가 섰다. 카이펑에 사는 이들이 거래하는 저자였던 것이다. 샹궈쓰에는 몇 개의 산문(山門)이 있는데, 최초의 것에 애완동물 시장이 섰다. 두 번째 세 번째 산문에는 가구나 도구를 파는 시장이 섰다. 형형색색의 텐트를 펼친 점포나 노점이 늘어서 손님을 불렀다. 이것 이외에도 일용품에서 계절 과일이나 소금에 절인 말린 고기까지 풍성한 상품이 팔리고 있었다.

불전(佛殿) 부근에는 유명한 물품들이 늘어섰다. 도사가 쓰는 모자나, 꿀로 잰 과일, 붓이나 먹 같은 것도, 여기서 팔리는 물건에는 ‘아무개의 무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의 깊게 송대의 자료를 읽으면, 그런 물품에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가끔 눈에 띈다. 그저 점포나 예인만이 아니고, 일용품에서 만두(饅頭)와 같은 과자류까지 고유한 브랜드가 붙어 있는 게 나왔던 것이다. 당시의 상품 경제의 확실성과 거리에서 활동하는 서민의 힘의 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토인(白兎印)이라는 침(針) 상표다. 그 당시 유행한 광고 카피가 붙어 팔려나갔던 것이다. 뛰어난 직인이 탄생하고 이를 통해 뛰어난 상품이 만들어졌다는 것, 또한 브랜드로서 선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대 소비 경제의 두려워할 만한 실상이 엿보이는 것은 아닐까?

자 그럼 샹궈쓰의 시장 산책을 좀 더 계속해보자. 불전의 낭하에는 여기저기서 절의 중들이 만든 것을 팔고 있다. 자수 세공이나 조화(造花), 보석 세공, 장신구, 실과 침 등 여러 가지다. 백토인 침도 이곳에 나열되어 있었던 것일까? 안으로 돌아가면, 서화와 골동품이다. 또는 지방에서 전근 온 관료가 지참한 지방의 특산물을 팔고 있다. 관료의 가벼운 아르바이트였던 것일까? 그 뒤 쪽에는 점쟁이도 있다. 《청명상하도》에도 길가의 가건물에서 점을 치는 이가 그려져 있는데, 일본에서도 그런 류의 엔니치(緣日)에는 으레 따르는 풍경이다.

시내의 일화

시내를 느긋하게 걸으면 몇 가지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띈다. 노상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풍경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수레도 그렇고, 이야기꾼(講釋師)도 그런 점묘의 하나였다.

《청명상하도》를 보면, 주루 이웃에 만두 가게가 있다. 연신 떠들어대고 있는 강석사의 뒤다. 어쩐지 찐만두와 같아 보인다. 하지만 만두라고는 해도 일본의 그것과는 다르다. 당대부터 보리농사의 보급에 의해 분식이 성행했다. 그 결과 가루를 반죽해서 면과 만두, 포자(包子) 등이라 부르는 것을 먹게 되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얌챠(飮茶) 등을 먹는 게 가능해지고 있다. 만두나 포자는 메뉴에도 있기에 먹어본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리는 쌀과 먹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인류 최대의 발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맷돌이 여기에 끼어든다. 빻은 가루를 반죽하고 늘려 펴고 때로는 다시 발효시켜 사용한다. 당(唐) 후반의 경제를 떠받쳤던 세제인 양세법(兩稅法)은 기본적으로는 보리와 쌀의 수확에 맞춰 여름과 가을 두 번으로 나누어 세금을 징수한 것을 말하지만, 식생활의 기본적인 전환이 세제를 변화시킨 것이기도 하다.

송대가 되면서 만두가 선호되었던 듯하고, 이것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멍더(葉夢得)의 《피서록화(避暑錄話)》라는 수필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있다. 만두를 먹어본 적이 없는 서생이 있었다. 그는 만두집 앞에서 갑자기 자빠지며, “만두 무서워”라고 외쳤다. 의아하게 생각한 만두집 주인은 그런 일이 있을까 하고는 많은 만두를 놓아둔 방으로 그를 들여놓고 몰래 엿보니 그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절반 이상을 먹어 버렸다. 속았다는 것을 안 주인이 “자네 만두말고도 무서운 게 있나?”라고 물으니, 가난한 서생은 답했다. “우롱차 두 잔이 무서워요.” 일본의 만담(落語)과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유행하지 않는 듯한데, 일종의 고학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와 동시에 잰 체하는 선비들을 비아냥거린 재담인 듯도 하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화가 나올 정도로 만두가 인기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이와 같이 복잡한 길을 사람들이 걸었다. 그들은 관료든 사대부든 승려든 학생이든 주인이든 하인이든, 상인이든 장인이든 보면 대체로 알 수 있었다. 사람도 가지가지, 계급도 가지가지의 복장과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도시의 점묘에 빠질 수 없는 것으로 여성이 있다. 유례가 드문 남성 천국이었다고 낙인찍혔던 중국이었지만 거칠 것 없이 활약한 여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밖에서는 외견상 한 발짝 물러섰던 여성도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을 리드하며 대활약했던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 다만 《청명상하도》 안에서는 여성의 모습이 적어서 다소 아쉽다.

고급스럽고 뛰어난 디자인의 의류와 장신구는 여성을 위해서 있었다. 그 나라의 최첨단의 온갖 도구들을 몸에 걸친 것은 결단코 여성이다. 비록 거리의 여성이라 해도, 아니 거리의 여성이기 때문에 그 헤어스타일이나 의복 그리고 소지품에 틀림없이 당시의 문화가 나올 것이다. 참으로 적었던 《청명상하도》 안의 여성들이었지만, 벽화나 기타 그림을 합쳐서 보면, 왕년의 풍속이 그리워지고 흥미롭다.

이와 같이 카이펑의 시내는 시끌벅적하게 활기로 넘쳤다. 엿보고 싶은 동네나 가게는 아직 있지만, 슬슬 돌아가기로 하자. 그리고 교외로 나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