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미터 절벽에서 101미터 폭으로 엄청난 물을 쏟아내는 폭포, 이런 폭포가 주는 웅장함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땅바닥을 딛고 있는 내 몸뚱이를 슬며시 끌어올려 폭포가 품어내는 뽀얀 물방울 구름 속으로 끌어당기는 듯한, 몽환이 느껴지기도 한다. 폭포 중간 높이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폭포수 커튼 안쪽을 통과할 수 있다. 폭포수 안쪽에서 듣는 물소리는 원시의 음향 그대로인 것 같다. 전신으로 울려오는 폭포 소리의 파장은 스테레오니 서라운드니 하는, 사람이 고안해낸 뛰어난 음향장치들을 무색하게 한다.
중국 구이저우성(貴州省)의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황궈수(黃果樹) 폭포이다. 황궈수 폭포의 상류에는, 주발을 엎어놓은 형상의 거대한 바위 표면을 넓게 감싸며 흐르는 루포탕 폭포가 색다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하류에는 톈싱차오라는 엉킨 실타래 같은 기묘한 계곡이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카르스트 지형은 또 다른 기묘한 풍광, 원추형의 봉우리가 봉긋봉긋 솟아난 만봉림(萬峰林)은 어떠한가. 봄에 유채꽃이 필 때에는 지형과 색조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그림을 연출하기도 한다. 황궈수 폭포와 만봉림을 보면 이곳 구이저우는 우리의 자연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깊고 깊은 오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경관에 취했다가 깨어나면 내 주변에 상당수의 여행객이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곳은 한국에서는 멀다고 해도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 먼 곳은 아니다. 이곳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내게 쌓인 인상은 ‘가까운 오지’이다.
중원과는 문화적 지리적 정치적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먀오족(苗族)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바로 구이저우다. 그러나 이 연재의 앞글에서 살펴본 먀오족의 수난사가 말해주듯 황제의 힘은 이곳을 오지로 남겨두지 않았다.
먀오족 눈앞에 실제 등장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황제가 보낸 군대였다. 군대의 장졸 역시 황제에게 휘둘리는 백성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황제의 권위를 위해 강제 또는 반강제로,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동원됐다. 고향을 떠나 정벌이란 임무를 완료했으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눌러앉아 살아야 했다. 황제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가족까지 동반하게 했다. 미혼의 병졸들에게는 혼인까지 주선했다. 군대와는 별개로 주민들도 대량으로 이주시켰다. 오지를 ‘그들’의 땅으로 남겨두지 않고 아예 황제의 백성들로 채우겠다는 것이었다. 병졸을 뽑아 파견해서 정벌했으니 조북정남(調北征南)이라 하고, 중원의 백성들까지 이주시켜 영토를 채웠으니 조북전남(調北塡南)이라 한다.
병졸과 이주민은 중원과 강남 지역에서 주로 차출했다. 이 지역은 인구는 조밀하고 농지는 부족했다. 이 가운데는 떠돌던 유민과 파산한 농민, 범법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주자들에게는 토지를 나눠 주고 세금은 가볍게 했다. 이렇게 보냈으니 중원에서 하층민으로 눌려 살던 이주민들에게는 선물이었으나 토착민에게는 느닷없는 침탈이었고 갈등은 비극으로 끝나기 일쑤였던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이 160만, 3대 황제인 영락제가 35만을 이주시켰다. 낯선 땅으로 이주한 또는 이주당한 한족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척박한 땅을 개간해야 했다. 구이양(貴陽)에서 안순(安順) 취징(曲靖)으로 이어지는 윈난으로 가는 주요 통로는 한족의 거주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족 문화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이때부터 구이저우는 한족이 토착민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600년 전의 일이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지역은 한족이 차지했고, 토착민들은 황제의 군대와 한족의 문화에 밀려났다. 지금도 구이저우에서는 성(城 도시)은 한족이, 논은 좡족(庄族)이나 이족(彛族)이 차지하고, 먀오족은 깊은 산중에 산다고 이야기한다.
황제가 보낸 병졸들과 이주민들은 성벽을 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그야말로 가까운 오지에, 그것도 성벽에 갇혀 살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들이 사는 취락이나 주택을 둔보(屯堡)라고 하고, 이들 특유의 생활문화를 둔보문화라고 한다. 안순에는 둔보와 둔보문화가 잘 보존된 곳이라 둔보라 하면 이곳을 떠올리게 된다. 천룡둔보(天龍屯堡)와 운봉팔채(云峰八寨)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저항하는 소수민족의 공격에 대응하며 자연스레 군사문화에 적응해 살아왔다. 출신지역을 떠나 같은 처지로 모여 살게 됐으니 자기들끼리의 유대감이 강했다. 현지 토착민에 대해서는 우월의식도 단단했을 것이다. 낯선 땅에 정착하니 고향에서의 전통문화는 오히려 굳게 보존했다. 일상의 교류나 오락은 물론 혼인까지도 자기들끼리 하면서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을과 살림집들이다. 촌락에는 가로(街路)와 주택의 배치는 물론, 한 채 한 채의 살림집에 군사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돼 있다. 집은 작은 보루와 같아서 담장에는 사격 구멍을 곳곳에 뚫어놓고, 옆집으로 피신할 수 있는 비상구들이 가깝게 마주 보고 있다. 한 집이 침입자에 의해 위험에 빠지면 옆집으로 재빠르게 피신하려는 것이다. 집의 후면도 높은 돌담으로 에워싸는 것이 보통이다.
마을의 중심 대로에서 가지 치듯 전개되어 있는 가로의 구조는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중심가로든 작은 골목들이든 대부분 곡선인 것이 특이하다. 골목이 골목과 만나도 직각이 아니고 어슷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골목 자체도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 골목 하나가 장악되더라도 다음 골목 안쪽까지의 시야를 차단함으로써 직선 사로(射路)에 노출되지 않게 한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미로에 빠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구조는 침입자를 유인하는 작전에 유용하다. 침입자가 중심가로에 들어서면 마을의 주출입구를, 골목길을 들어서면 골목 입구를 막아버린다. 침입자는 시야도 좁은 상태에서 갇히게 된다. 둔보를 안내하던 해설원 말 그대로 문을 잠그고 개를 때려잡는(關門打狗)고 함정이다. 마을 자체가 주둔지가 되기도 해서 출입구에는 망루를 설치하여 바깥을 감시한다. 망루는 마을 입구 이외에도 골목 곳곳에 산재해 있다.
둔보 사람들은 현지 토착민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고, 생활습속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변화된 것들조차 이곳에서는 원형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많다. 특히 복식과 희극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1993년 이 지역에서 명대 왕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넓은 소매에 테를 두른 상의, 꽃과 새를 수놓은 신발 등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600여 년 전의 복식이 발굴 당시 이 지역 부녀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전통복장과 거의 똑같아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둔보의 희극은 희대 위에서 하지 않고, 관객들이 둘러선 평지에서 하기 때문에 지희(地戱)라고 한다. 무대만 다를 뿐 지희의 내용이나 연출 형식 등도 명대 희극의 원형에 가깝다. 언어에서도 권설음이 많아 명대 관방어 발음이 전이되어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중국 민속학자들은 둔보문화를 명대 중원문화의 활화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둔보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생각해본다. 이 땅은 누구의 땅일까. 먀오족과 그 외의 소수민족들의 땅인가. 황제의 땅이 되고 이주민들이 6백여 년을 살았으니 이제는 그들의 땅인가. 역사는 세월의 집적이고 백성들의 피땀으로 채워진 것이다. 그것을 정치적으로만 포장하여 오늘 당장의 국제정세나 국내정치에 대입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2천 년 전의 역사를 들어 팔레스타인이 조상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정치군사적 위력으로 밀고 들어간 시오니즘이 엄청난 갈등을 일으켰고,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틀려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다. 긴 세월의 역사를 토막 쳐서 정치라는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 정당할 것인가.
만봉림 만봉림 만봉림 만봉림 만봉림 둔보의 골목 황궈수 폭포 황궈수 폭포 폭포수 안쪽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