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의 24시간 2

목욕탕

아침은 느긋하고 활력이 넘친다. 하루의 시작에 걸맞게 사람들은 활발하게 활동을 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침이라고 방심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관청에 나갈 무렵까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목욕이나 하자고 나갔다가 혼쭐난 이가 있다. 이 남자, 목욕탕에서 습격당해 일단은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되찾고 도망쳐 나와 순찰 중인 경관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남자가 경관과 되돌아가 이 목욕탕을 수색하니 침상에서 아직 몸이 따뜻한 사체가 나왔다. 이 목욕탕은 적당한 손님을 죽여, 그 고기를 파는 곳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이야기가 아닐까?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1895~1990년)의 《역사의 도시, 내일의 도시》에서는 중세 유럽에서는 아침 일찍 젊은 남녀가 목욕탕에 가기 위해 벗은 채로 시내를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대체로 서구에서도 극히 최근까지 목욕의 광경은 남성에게 있어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약간 예전 시대의 그림을 보면, 식사하는 사람 옆에 욕통이 있고, 젊은 여성이 입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방파의 거물인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년)가 아름다운 암살자 샤를로트 코데(Charlotte Coday)에게 살해당했던 곳이 목욕탕이었다. 그 당시에는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사람, 특히 젊은 여성을 만나도 실례가 아니었던 듯하다. 이에 비하면 손님을 짓이겨 고기로 만드는 것 등은 대단히 살풍경한 이야기다.

목욕탕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 더하자면, 목욕탕에서 주운 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남자가 눈병이 난 집안 식구에게 그 약을 붙이게 했더니 금방 좋아졌다고 한다. 나중에 잃어버렸던 주인을 만나 그 이야기를 하니 눈병 약은커녕 극약이었다고 한다. 목욕탕에서 약을 보고 즉시 눈병 약을 생각한 대목을 보면 카이펑 시내에는 눈병이 유행했던 듯하다.

원래 송대의 목욕탕 기록은 많지 않다. 인종 황제가 황태자였을 때 경호원으로 루쭝다오(魯宗道)가 있었다. 그가 살고 있던 곳이 쑹먼(宋門) 옆 위탕샹(浴堂巷)이라고 했다. 이 지명은 아무래도 목욕탕 거리라고 하는 느낌이 든다. 목욕탕을 욕사(浴肆) 등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집 인근이 카이펑에서도 유명한 주루인 런허뎬(仁和店)이었다고 했기에, 이름 그 대로의 골목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의 경호원으로 근무할 정도의 고급 관료가 큰 요정 옆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재미있다. 일본으로 말한다면 아카사카(赤坂)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인근으로 술 먹으러 갔다가 급한 호출에 제때 맞추지 못해 질책 받았다는 말이 남아 있다.

이런 것들로 보면 시내에 목욕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호전》을 보면 영웅호걸이 대야에 물을 받아 철벅철벅 몸을 씻는 이야기가 나온다. 묘령의 여성이 대야에 물을 받아 몸을 씻는 거라면 우키요에(浮世畵)적인 풍경이지만, 마성(魔性)을 갖고 있는 108명의 호걸들이 대야에 몸을 씻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중국에는 유명한 상하이 목욕탕이라는 것이 있다.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1930~1989년)의 《구슬, 깨지다(玉, 碎ける)》가 아니더라도, 때 미는 기술과 손톱 깎는 기술의 굉장함은 많은 사람이 기록했다. 그 시원한 기분은 잊기 어렵다. 이와 같이 독특한 입욕술을 발달시킨 민족이다. 어디선가에서 송대 목욕의 기록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그럴듯한 사료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 4시경부터 시작된 소란스러움은 밤이 하얗게 밝을 무렵에는 사람들이 잇달아 나와 활기를 띠었다. 문을 연 점포는 먹을거리를 파는 곳만이 아니었다. 잡화점이나 헌옷을 파는 가게도 문을 열었다. 번화가에는 예인들도 나왔다. 카이펑의 시내에 숨어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잠을 깨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장사가 어떻게 활동한 것일까? 이것은 의외로 알 수 없다. 카이펑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록했던 멍위안라오(孟元老)는 한결같이 붓을 환락에만 할애했다. 그가 엮은 것은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와 요정, 유곽, 거리의 작은 장사이다. 아무래도 멍위안라오 자신이 거리에 몸을 둔 사람이었을 것이다. 고급 요정이나 유곽 이야기 등도 접하고는 있지만, 그만큼 속사정에 상세하지는 않다. 그는 고급 요정에서 마시고 먹는 것보다 적당한 가게에서 한 잔 하는 것이 성에 찼던 게 아니었을까?

분뇨의 수거

아침의 풍경으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게 하나 더 있다. 분뇨를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예전의 카이펑 시내를 이른 아침에 산보하다가 길고 깊은 나무 상자를 실은 큰 수레를 끌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거기에 사람들이 통을 가져와서 무언가를 들이붓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침에 전날의 분뇨를 모으는 풍경이었다.

중국인의 분뇨 처리에 관해서는 하야시 교코(林京子, 1930~ )의 《상하이(上海)》와 《미셸의 입술연지(ミッシェルの口紅)》에 상세하기에, 이것을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요컨대 집 안에 마통(馬桶)을 두고, 거기에 용변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모았다. 마통을 씻는 일은 여성들의 소임이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집 앞에 나무통을 말리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마통이다.

송대 카이펑의 아침 광경은 잘 알 수 없지만, 항저우(杭州)에서는 매일 인분을 치우는 이가 이것을 모으러 다녔다. 그들은 경각두(傾脚頭)라 불리고, 각자 조직을 만들어 영역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약 이것이 침범되면 재판을 일으켜서라도 권익을 지켰다고 한다. 아마도 송대의 카이펑에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마통의 내용물을 옮기는 광경이 목격되지는 않았을까?

한 마디 해둔다면, 송대에는 쑤저우의 예에서 밝혀져 있듯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구제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는데, 분뇨를 모아 팔아 광열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오늘날에야 분뇨를 수세식으로 흘려버리면 돈을 내고 넘기지만, 이것은 극히 최근의 습관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까지는 농가에 비료로 팔았던 것이다. 항저우의 운하에는 이것을 운반하는 배가 보였다고 한다. 지금의 흡입식 분뇨수거차 같은 것이었다. 에도의 스미다가와(隅田川)에서도 그런 비료 운반선이 많이 보였다. 대체로 수로가 도로의 역할을 맡은 이상 한가로운 뱃사람의 경물(景物) 등이 보일 리 없다. 라인강을 따라 내려가며 보는 듯한 관광적인 경관은 바로 오늘날의 경관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르내리는 비료 운반선을 생각하면, 《봄의 화창한 스미다가와》의 뱃사람의 모습 또한 한 차원 다른 풍경을 연상케 한다.

카이펑의 낮

이른 아침부터 카이펑의 부산함은 그대로 주간 활동으로 이어진다. 장사꾼의 활동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날이 밝았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 비해서] 등불은 역시 희미했다. 해가 떠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슬슬 일어나 밖으로 나와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노린 장사도 많았다.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활동이 개시된 것이다. 관리는 관청에 나가고 큰 상인은 카운터에 앉았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시내의 북적댐 그것이다.

도시에서는 갖가지 장사가 있다. 도시의 장사는 사치스러운 귀금속이나 고급 포목, 향신료나 보석류를 파는 상점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위한 필수품을 어느 정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과 한 가지 더해서 생활의 편리함을 들 수 있다.

이런 것은 카이펑에서 이미 진즉부터 볼 수 있었다. 특히 눈을 끄는 것은 다양한 장사의 출현과 서비스업의 발달이다. 말을 기르고 있으면 여물을 보낸다. 개를 키우고 있으면 먹이인 엿 지게미를 보낸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으면 먹이인 작은 물고기를 보낸다. 지금 말하는 애완동물 먹이(pet food)를 파는 장사도 생겼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문 앞에 붙이는 액막이 부적이나 간판, 갖가지 신불(神佛)의 그림을 보내주는 이도 있었다. 물을 팔러 온 이도 있었다. 이 물장사는 여러 단골집이 반드시 있어 모처의 시내는 아무개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 장사꾼들 사이에서도 담당자나 영역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리라.

장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땜장이, 꺽쇠 집, 통 수리점, 도구 수리점, 신기료 장수, 혁대 갈이, 모자 수선점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구입과 수리는 모두 전문적인 장사꾼이 있어 주문하면 해주었다. 그들은 시내를 배회하며 주문을 받았을 것이다. 걸으면서 장사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행상도 걸어다녔다. 아이들 주전부리나 완구를 갖고 걸어다닌 이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아이가 부모에게 사달라고 칭얼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장사는 아직 더 있다. 칠(漆)장이, 잠(簪)이나 완륜(脘輪) 등의 장신구를 만드는 이, 큰 도끼를 지고 다니면서 장작을 패주러 오는 이, 조개탄을 이기는 이, 부채 자루를 바꿔주는 이, 여름이 되면 카페트를 빨고, 우물 쳐내는 이 등 실로 많은 장사, 직인(職人)이 주문을 받으러 다녔다. 도시 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기본적인 장사는 서비스업이었는데, 이것들은 거의 확립되어 있었던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 사람들이 모두 정해진 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날그날의 일을 구해 날품에 온힘을 쏟았던 사람도 많았다. 또 도시에서는 그런 이들을 구하는 직종도 많았다.

집 수선이나 벽 수리를 하고 있을 때에는 어디서든 거리 모퉁이에 나와 있는 사람을 고용하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나 취직하러 시골에서 온 이가 고용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후세에 쑤저우에서는 옷감 짜는 여공이 하루 일감을 구하러 서 있는 장소가 있었지만, 그런 광경은 이곳 카이펑에서는 일찍부터 보였다. 보통의 집에서도 사소한 볼일에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것을 ‘잡화공장(雜貨工匠)’이라 부른다.

기다리는 것은 직인뿐만이 아니었다. 도사나 승려도 일을 기다렸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있어, 그들의 손을 빌리고 싶은 때는 역시 이곳에 왔다. 이것은 ‘나재(羅齋)’라 불렀다. 그들은 큰 점포를 세우는 직업이 아니었다. 에도(江戶)에서라면 서민 공동주택(裏長屋)에 살면서 해가 뜨면 일감을 구해 시내로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카이펑 시내의 또 한 가지 특색은 임대업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연회를 할 때, 모든 것을 업자가 도맡아 처리했다. 집을 장식하는 것부터 의자나 테이블 대여, 식기부터 주기(酒器)까지 전부 빌려주었다. 요리나 술도 보내주었다.

집에서 파티나 원유회를 해도 모두 빌릴 수 있었다. 초대장의 발송부터 연회석의 준비, 심지어 연회의 여흥까지 모든 것을 다 해당 업자에 의뢰했다. 1백 명 정도의 파티라 해도 곧바로 준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연회의 연출가들을 사사인(四司人)이라 불렸다. 술을 계속 서비스하는 이는 백석인(白席人)이라 불렸다. 오늘날의 컴패니언(companion)인 것일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것은 흉사도 마찬가지다. 장례식을 치를 때에는 순위가 있어 이것에 의해 격식이 달랐다. 액막이 신상(神像), 영구차, 장식, 모두 가격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렌터카 시스템도 있었다. 먼 곳으로 출타하는 이가 귀찮으면 말을 빌리면 되었다. 거리 모퉁이나 다리 옆에 말을 임대하는 이가 있어, 이것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도 이전에는 나귀였지만, 북송 말에는 말이 되었다. 대금은 1백 문이라고 했기에, 의외로 비싸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청명상하도》를 보면 일하고 있는 동물도 많다. 말, 나귀, 노새, 낙타. 현재 일본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처음에 중국에 갔을 무렵 시내에서 말이 화물을 가득 등에 진 채, 큰 수레를 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재미있게 생각했다. 시내에서는 자동차와 말의 통행에 관한 표지가 있었다. 이것은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