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헤겔(Robert Hegel)
강남 출판인 사이의 전문화와 판매 전략
난징 싼산졔(三山街)의 도서시장은 저명한 탕푸춘(唐福春)이 포함된 서상(書商) 가문인 탕 씨 집안이 소유한 푸춘탕(富春堂)과 스더탕(世德堂)의 주무대였다. 전자는 적절한 삽화가 들어 있는 희곡 작품들을 출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 몇몇은 그 가문의 다른 출판사에서 판각된 목판으로 중간된 흔적이 있다. 여기서는 또한 여러 고전소설과 의서, 시집들이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희곡의 경우, 종이 크기나 페이지 당 텍스트의 밀도, 삽화들이 모두 비슷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중간 정도의 독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푸춘탕에서 간행된 《금초기(金貂記)》가 바로 이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난징의 또 다른 서방(書坊)으로서 탕리야오(唐鯉耀)가 운영한 원린거(文林閣) 역시 희곡 분야로 전문화된 일련의 책들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탕 씨 판본들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푸춘탕 판본의 삽화와 비교해보면, 원린거의 삽화들에는 길고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가는 선과 장막 안에 장식된 별들과 같이 더욱 장식적 효과가 뛰어난 세부 묘사들이 담겨있고, 바위의 결과 인물들의 우아한 옷 주름을 통해 장면 전체가 성공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분명히 더욱 노동 집약적인 이 삽화들은 같은 내용을 인쇄한 푸춘탕 판본들보다 비쌌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고소득층의 구매자들을 겨냥했을 것이다. 원린거에서는 또 대규모의 송대 문집과 비파(琵琶) 교본(敎本; 저급한 품질의 푸춘탕 판본을 개정한 것), 양얼쩡(楊爾曾: 활동 기간은 대략 1600-1620년)이 편찬한 화가들을 위한 모사 화보집인 《도회종이(圖繪宗彛)》(1607년)를 출간했다. 이것들 역시 더 부유한 도서 구매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기획된 듯하다.
참고할 수 있는 사본들을 통해 판단컨대, 명대 후기에 강남에서 나온 소설 판본들은 대개 인쇄본의 형태를 다양화했던 출판인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것은 소설 출판인들이 고급스러운 희곡의 유통업자들이 그랬던 것보다 더 광범위한 도서 구매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판본 상황이 복잡한 《서유기》의 가장 초기 판본은 푸춘탕 출판사의 소유자가 운영하는 난징 출판사 스더탕에서 간행되었다. 그러나 두 서방은 경쟁관계가 아니었던 듯하다. 동일한 책을 두 출판사가 모두 간행했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스더탕에서는 비교적 적은 수의 희곡과 두 편의 제자서인 《충허지덕진경(沖虛至德眞經)》(《열자(列子)》)과 《순자(荀子)》를 간행했다. 그러나 스더탕에서는 푸졘의 출판인 위샹더우에게서 입수했을지도 모르는 몇몇 초기 역사소설들의 평점본도 출간했다. 《당서지전통속연의제평(唐書志傳通俗演義題評)》(1593년)은 1553년에 칭쟝탕(淸江堂)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난징 판본을 위해 그 본문이 다시 번각되었다. 본문 가운데 일부와 《남북양송지전제평(南北兩宋志傳題評)》의 몇몇 삽화들에는 상위안(上元: 난징) 왕사오화이(王少淮)의 서명이 들어 있다. 다예탕(大業堂) 본 《동서양진지전제평(東西兩晉志傳題評)》에도 왕사오화이가 그린 삽화가 들어 있는데, 이 또한 출간 연도가 1593년으로 되어 있다. 이 두 소설의 외양이 동일하기 때문에, 아마도 다예탕 판본을 스더탕에서 중간한 듯하다. 마찬가지로 다예탕에서도 스더탕에서 판각한 목판을 이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탕푸춘이 이 세 역사소설들을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서, 푸춘탕이나 좀 더 고가의 상품을 내놓는 경쟁자들이 세트로 간행한 희곡 작품들을 사는, 상대적으로 차별화된(안목이 있는) 구매자들의 흥미를 끌려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대 후기 강남의 다른 소설 출판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책을 간행하였다. 난징의 서상인 저우웨쟈오(周曰校)는 의서와 ‘유서(類書)’를 출판했다. 그는 또 공안(公案) 소설집(《신전전상포효숙공백가공안연의(新鐫全像包孝肅公百家公案演義)》와 《해강봉선생거관공안전(海剛峰先生居官公案傳)》)과 신마(神魔) 소설(《신전소매돈륜동도기(新鐫掃魅敦倫東渡記)》), 그리고 한(漢), 삼국(三國), 진(晉), 당(唐)과 관련된 역사소설들—스더탕 본과 유사한 양식의《삼국지전통속연의(三國志傳通俗演義)》—을 간행했다. 이 책들 가운데 일부는 처음에 난징의 다른 출판인이 간행한 책을 중간한 것이거나 혹은 저우웨쟈오가 (스더탕에서 간행한) 책들의 판형을 모방하고 똑같은 삽화가를 고용함으로써 스더탕이 성공한 것처럼 이익을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공안소설 및 신마소설의 일부가 처음에는 푸졘에서 비교적 저급한 품질의 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저우웨쟈오는 소설을 일반적으로 더 부유한 난징의 도서 구매자들에게 소개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진링의 출판인 가운데 몇 군데만을 간략하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명대 후기의 서상들이 어떻게 전문화되었는지를 일별할 수 있다(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의 세 번째 논문을 참조할 것). 그들 사이에는 경쟁뿐만 아니라 협력 관계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소설 텍스트들은 푸졘에서 난징으로 진출했고, 목판 틀은 아마 희곡이건 소설이건 일반적으로 같은 시장을 공유하는 출판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녔던 듯하다. 우리는 또한 출판인 탕 씨 집안에서 판매 전략을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전문화라는 문제가 전면에 대두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린거는 상대적으로 비싼 선본(善本)들을 간행했고, 그래서 비교적 부유한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에 비해 푸춘탕 판본들은 덜 비쌌던 듯하고, 스더탕에서도 비슷한 품질의 통속소설을 간행했다. 달리 말해서 탕 씨 가문은 몇 개의 다른 도서 틈새시장의 요구에 맞춰 나갔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난징의 환추이탕(環翠堂)이 도서시장의 고급품 시장을 주도했던 것은 명백해 보인다. 환추이탕의 작가이자 경영자인 왕팅나(汪廷訥: 대략 1569-1628년)는 거기서 출간된 모든 책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왕팅나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7장에서 더 전면적으로 다루어짐). 그의 문집인 《좌은선생전집[座隱先生全集]》(1609년)에는 자신의 원림(園林)을 그린 세련된 삽화가 들어 있는데, 같은 해의 얼마 뒤에 이 권(卷)은 《환추이탕원경도(環翠堂園景圖)》라는 제목이 달린 지금은 희귀한 긴 두루마리로 별도로 인쇄되었다. 이것은 목판인쇄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왕팅나의 필명은 다른 모든 환추이탕의 간행물들, 명대 개별 작가의 시집들, 그리고 그 자신의 희곡 작품들에서도 두루 나타난다. 아마도 그의 개인적인 명성이 도서 구매자들을 끌어들였거나, 아니면 그런 방식을 통해 장서가(藏書家)들에게 자신의 간행물들을 광고하려 했을 것이다. 난징의 출판인 탕푸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팅나의 모든 인쇄본들 역시 저자와 내용과는 상관없이 물리적으로는 유사했다. 이 환추이탕 판본들의 삽화들은 모두 최고급이었고, 도서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었다. 삽화들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세부 묘사의 정도이다. 예를 들어서 <그림 23>은 《의열기(義烈記)》의 삽화 가운데 하나로, 여기서는 삽화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이 깔끔한 선들로 다 채워져 있는데, 그 선이 대부분 곡선이었기 때문에 더 공들여 새겼을 것이다. 이런 삽화를 제작하는 데에 관여한 숙련된 노동자들을 감안하면, 이 책들은 오직 한정된 구매자 계층을 위해 제작된 매우 비싼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청대 소설 시장의 변화
명말은 목판 인쇄의 예술성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만력 연간과 그 이후에는 인쇄본의 수량이 증대되고 삽화 인쇄의 기술이 발전했다. 17세기에는 아직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그림들이 최초에는 도록이나 낱장 인쇄에만 나타나긴 했지만, 그 시기 동안 채색 인쇄의 수준은 거의 완벽한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가혹한 정치 경제적 격변을 거쳐 청대로 접어들자, 출판업에서는 여러 계층을 동시에 공략하던 이전의 시장 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소설 분야에서 청대의 출판인들은 아주 다른 두 개의 독자층과 도서 구매자들을 겨냥했던 듯하다. 하나는 값싼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급한) 판본만을 살 수 있었던 대다수의 제한된 경제력을 가진 소비자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쇄물과 텍스트의 무분별한 유통을 경멸했던 고급 문인 애호가들이었는데, 이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상류층 독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한 필사본을 만들어 냈다.
청대 상업 출판의 특징은 일반적인 구매자들을 차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중간 계층의 도서 구매자라 할 수 있는 생원(生員, 생원들의 도서 문화와 그것의 명대의 문학 작품 생산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는 조셉 맥더모트(Joseph McDermott)가 쓴 이 책의 두 번째 논문을 참조할 것)을 위해 제공되었던 중급 인쇄물의 양을 줄여 나갔다. 물론 출판된 서적의 양만 놓고 본다면 청대는 명대를 훨씬 초과했다. 그러나 명말에는 모든 분야의 서적에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데에 비해, 청대의 인쇄본들 가운데 상당수에는 삽화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청대에는 소설 삽화의 예술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오직 소설 분야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마찬가지로 저급한 종이에 본문을 빽빽하게 집어넣고, 대량의 조잡한 삽화를 그려 넣어 대충 판각한 소설 판본들이 예전보다 자주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명백하게 소득이 낮은 도서 구매자들을 위해 출간된 것들이었다. 청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늘어나고 있는 독자들과 도서 구매자들을 위해 새로운 통속 연애소설들이 지어졌는데, 명대의 ‘사대기서’와 같은 ‘고전’들을 포함한 이전 소설들은 이 통속 연애소설들과 동급으로 다루어졌다. 이것들은 모두 텍스트 자체의 예술성과는 무관한 값싸고 저급한 판본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청대에는 내면적 성찰을 다룬 새로운 문인 소설들과 문인 전기(傳奇)들이 수십 년 동안, 때로는 한 세기나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필사본의 형태로만 유통되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작품들이 통제할 수 없이 값싼 인쇄물로 나도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어떤 문인 소설가나 그에게 동조하는 친구들은 그의 작품이 오직 필사본의 형태로만 유통되도록 했던 듯하다. 이 때문에 이런 작품들은 텍스트의 예술적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폐쇄된 애호가 집단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런 범주의 작품들 가운데는 《유림외사(儒林外史)》(1750년 경)와 《홍루몽(紅樓夢)》 또는 《석두기(石頭記)》(1760년대-1790년대), 《야수폭언(野叟曝言)》, 《기로등(岐路燈)》(1785년 경) 등이 포함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대에는 많은 문인 전기들도 제한된 독자층 안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었다.
사실 청대의 저급한 소설 판본들의 예는 중국의 모든 장서 목록에서도 발견된다. 명대의 뛰어난 인쇄물에서 발견되는, 건물과 배경을 포함한 정교한 장면 구성 대신에, 같은 내용을 표현한 청대의 판본들은 그저 몇몇 주요 등장인물의 초상만을 거칠게 그려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등장인물들은 모든 배경이 삭제된 채로 책의 첫머리에 한꺼번에 실려 있다. 1859년에 우윈러우(五雲樓) 또는 광화탕(光華堂)에서 간행한 《홍루몽》을 보면 텍스트 자체의 인쇄 또한 저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다섯 번째 논문에서 브로카우가 논의하고 있는, 쓰바오(四堡) 출판인들이 간행한 많은 책들처럼 이 판본들은 실력이 떨어지는 각공(刻工)들이 만들었다(내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그들은 또한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작업했을 것이다). 각각의 사본들은 분명 상대적으로 값이 쌌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책의 외양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장서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구매자들을 위해 준비되었을 것이다.
청대에도 상대적으로 세련된 소설 판본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지만, 대부분은 이전 판본들을 단순히 중간(重刊)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창고에 있던 훌륭하게 판각된 목판을 꺼내 인쇄하거나 이전 판본을 모델로 다시 판각한 목판 틀을 써서 인쇄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두 경우 모두 인쇄의 품질은 원본보다 낮았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목판 틀이 닳았기 때문이거나 다시 판각하는 과정에서 원판을 재현한 정확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대에는 몇몇 예외적인 소설 인쇄본들이 나타났다. 17세기 후기에는 가끔 추런훠(褚人獲: 1630년 경-1705년 경)와 같은 문인 인쇄업자에 의해 만력 연간의 세련된 책들에 쏟아 부은 것만큼 많은 공을 들여서 만든 소설들이 간행되고 있었다. 추런훠의 《수당연의(隋唐演義)》(1695년)는 그 당시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출판업계의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는 한 예로 알려졌다. 그가 사치스러운 판본을 사기 위해 돈을 쓸 수 있는, 그리고 백화소설의 열렬한 애호가인 고급문화의 도서 구매자들을 겨냥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떤 문인 출판인들은 또한 좀 더 격식을 갖춘 저작들을 세련된 판본으로 출간하기도 했으나, 추런훠 자신의 필기집(筆記集)은 자신의 소설 인쇄에 사용된 것보다 크기가 더 작고 품질도 떨어지는 종이에 인쇄되었다.
청대 중엽의 상대적으로 활동적인 소설 출판인들을 검토해보면, 비교적 큰 판형의 책들에서도 인쇄 품질의 일반적인 저하가 드러난다. 현존하는 서목들을 통해 보건대, 수예탕(書業堂)은 수십 년 동안 쑤저우에서 성업한 인쇄소였다. 그들이 출간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유형의 책들에 대해 달리 알 수 있는 길은 없지만, 1775년부터 1820년대 초까지 수예탕의 마크가 찍힌 소설 작품이 적어도 14종이 출간되었다(대략 1830년 이후로 이 출판사의 명칭이 찍힌 판본들은 타이웬(太原)과 베이징(北京)을 포함한 다른 도시들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들에서 간행되었던 듯하다). 간편한 비교를 위해, 나는 쑤저우(蘇州)에서 간행된 그 14종의 인쇄본들을 <표 6.1>에 제시했다.
* 약호 설명: 동양=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 CU=콜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이 표에서 보면 수예탕에서 간행한 많은 책들이 큰 판형임을 알 수 있다. 《후서유기》와 《삼수평요전》은 모두 15.5×24㎝이고, 《영운몽전》은 14.7×23.6㎝(인쇄면은 12.8×19.5㎝)이다. 《운합기종》은 16.0×25.5㎝이다. 이 책들은 모두 청대의 세련된 소설 인쇄본의 표준이 되었던 《수당연의》의 크기인 17.0×24.5㎝에 거의 근접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청대 중엽에는 판각 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낮아졌다. 1695년에 나온 추런훠의 《수당연의》 초판본과 1812년에 나온 《삼수평요전》의 판본의 삽화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두 판본에서 본문 판각의 수준 차이 역시 매우 크다.
왕중민(王重民)은 이 출판사에서 나온 비 소설(non-fiction) 인쇄본들의 목록을 정리했는데, 간략히 살펴볼 만하다. 수예탕에서 간행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1782년 봄에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대략 《두붕한화》와 《후서유기》가 간행된 연도와 비슷하다. 이 책은 이전에 나온 수예탕본 소설 판본들과 마찬가지로 9행 20자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인쇄면은 14.0×22.3㎝이며, 종이는 소설 텍스트보다 겨우 조금 큰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출판사에서 간행한 소설 작품들에 비하면 세련된 판본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인쇄물들은 《홍루몽》(<그림 24>)과 같은 값싼 판본들보다는 훨씬 매력적이었지만, 수예탕은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이들만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좀 더 넓은 독자층을 위해 장편소설들과 단편소설집들을 간행하고 있었다. 그 출판사는 분명히 마음만 먹으면 세련된 판본을 출간할 수 있었으나, 거기서 간행된 소설들의 품질은 그런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 소설들은 아마 화보를 간행하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