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소설 서발문中國古代小說序跋文 《세설신어世說新語》

《세설신어世說新語》

류이칭劉義慶[1]

【原文】

裵郞作《語林》[2],始出,大爲遠近所傳,時流[3]年少,無不傳寫,各有一通。(文學)

干宝向劉眞長叙其《搜神記》[4]。劉曰:“卿可謂鬼之董狐[5]。”(排調)

【우리말 옮김】

  페이치가 《어림語林》을 지었는데, 처음 세상에 나오자 원근 각지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져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이를 베껴 각각 한 권씩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간바오는 류탄에게  《수신기搜神記》를 지어 보여 주었다. 그러자  류탄이 “경은 진정 귀신들의 훌륭한 사관이오”라고 말했다.

【해설】

  《세설신어》는 위진 시기 지인志人 부류의 대표작이다. 여기에 발췌한 두 구절로 보자면, 당시에는 소설의 이야기적 특성故事性과 진실성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이랑裵郞의 《어림》이 나오자마자  “원근 각지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진大爲遠近所傳” 까닭은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어림》에 나오는 그러한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으며時人多好其事”, 《어림」에 기록된 “한위漢魏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언어 응대로 이야기되어질 만한 것들漢魏以來迄于今時言語應對之可稱者” 가운데 일정한 이야기적 특성故事性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에 사람들은 《어림》에 기록된 “일이 실제와 다르다事不實”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타기해 버렸다. 지괴志怪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간바오의 《수신기》가 한때 풍미한 이유는 작자가 “귀신들의 진정한 사관鬼之董狐”으로서, 사람들은 그가 기록한 귀신 이야기가 진실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요구하고 있는 진실성이란 단지 그가 보고 들은 사실로 예술적 진실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주석]

[1]  류이칭劉義慶(403-444년)은 송 무제宋武帝 류위劉裕의 적자嗣子로 림천왕臨天王으로 습봉襲封되었다. 그는 문학을 애호하여 그 문하에 수많은 문사들을 불러들여, 책을 많이 저술케 했는데, 그중에서도 《세설신어》가 가장 유행하였다.  이 책은 아마도 그와 그 문하의 문인들이 공동으로 지은 것일 것이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서는 《세설世說》을 8권이라 하였는데, 량梁의 류샤오뱌오(劉孝標)가 주를 달고 10권으로 나누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3권 본으로, 안수晏殊의 손을 거쳐  교정·삭제된 것이라 한다. “신어新語”라는 두 글자를 누가 첨가했는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고증할 수 없다. 《세설신어》의 현존본은 모두 36卷으로, 덕행德行、언어言語、정사政事、문학文學 등 모두 36개의 분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한말漢末에서 동진東晉까지의 활동했던 사람들의 행적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遺聞軼事를 기록한 것으로, 형식은 짧지만, 그 문장에 힘이 있고, 언어에 생동감이 있는 명저이다.

[2]  페이랑裵郞은 페이치裵啓 또는 페이룽裵榮이라고도 부르며, 자는 룽치榮期이고, 동진東晉의 허둥河東(군의 관할지역은 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샤 현夏縣) 사람이다.. 그의 저작 《어림語林》은 원래 10권으로 현재는 이미 산일散佚되었다. 루쉰의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에 180則이 집록되었다. 《세설신어》<경저輕詆>편의 주에 인용된 《속진양추續晉陽秋》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晉의 융화隆和 연간에, 허둥 사람 페이치가 한위漢魏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언어 응대로 이야기되어질 만한 것들을 편찬해 《어림》이라 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림》에 나오는 일들을 무척 좋아 하였기에 《어림》의 문장은 곧 천하에 유행하게 되었다. 나중에 태부太傅(셰안謝安)에 관한 일이 실제와 다르다고 말하자,······이때부터 모든 사람들은 그 일을 비루하게 여겼다.晋隆和中, 河東裵啓撰漢魏以來迄于今時言語應對之可稱者, 謂之《語林》. 時人多好其事, 文遂流行. 後說太傅(謝安)事不實, ·····自是衆咸鄙其事矣.”

[3]  時流 : 그 당시 사람을 가리킨다.

[4]  간바오干寶, 《수신기서搜神記序》 주 1)을 참조할 것. 류전창劉眞長은 류탄劉惔으로, 자가 전창眞長이며,  진晉의 단양윤丹陽尹이라는 벼슬을 하였다.

[5]  둥후董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史官이다. 《좌전左傳》 선공 2년宣公二年의 기록에 의하면,  자오촨趙穿이 그 임금(진 령공晉靈公)을 시해하자, 자오둔趙盾은 오히려 이 일을 불문에 부쳤다. 태사공인 둥후董狐는 곧 “자오둔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趙盾弑其君”라고 기록하였다. 이 일을 두고 쿵쯔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둥후는 고대의 훌륭한 사관으로, 사가의 필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隱.” 이후로 둥후는 정직하고 진실하게 역사를 기록한 훌륭한 사관의 대명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