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29-가까운 오지2:먀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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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카이리시 외곽에 있는 시장이라는 먀오족(苗族) 마을 – 낮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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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카이리시 외곽에 있는 시장이라는 먀오족(苗族) 마을 – 밤 풍경

산등성이에 올라 맞은편을 바라보면 집집마다 하나씩 내건 백열등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야경. 힘들게 올라온 산등성이의 허름한 식당 평상에 백숙 한 냄비 끓여놓고 백주 한잔 곁들이면, 나의 십 수 년 중국 여행 가운데 최고의 한 장면이 완성된다. 구이저우성 카이리시 외곽에 있는 시장(西江)이라는 먀오족(苗族) 마을이다.

구이저우 동남부의 바사(岜沙)와 후난성 서부 봉황고성(鳳凰古城)도 잊을 수 없는 먀오족 마을이다. 바사의 먀오족은 오래도록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왔다. 이 마을 남자들은 지금도 구식 사냥총을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닌다. 봉황고성은 강변에 밀집된 조각루라는 이 지역 특유의 전통적인 살림집들의 야경이 유명하다. 급경사에 붙이듯 지은 집이라 경사면 아래로 몸체를 받쳐 촘촘하게 세운 나무 기둥[弔脚]이 독특하다. 이 기둥의 경관조명이 환상적이다. 여행으로는 매혹적이지만 그들이 견뎌온 수난의 세월과 오늘의 민족사 서술을 들여다보면 역사란 무엇인지 새삼 되짚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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먀오족의 전통 민속 행사

중국의 먀오족 인구는 940여만(2010년)으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네 번째이다.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미주에 걸쳐 3백여 만이 더 있다고 하니 ‘지구촌 소수민족’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넓게 퍼져 사는 먀오족의 역사는 수난이 점철된 역사로 읽힌다. 변방이란 애초에 버거운 생존의 노고 위에 중원의 압박에 시달리는 역사가 수천 년 이어져 왔다. 스스로 거두는 물산은 부족한데 황제와 관리들이 걷어가는 세금은 가혹하고, 저항은커녕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집단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원에서는 먀오족은 30년이면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60년이면 큰 전쟁을 일으킨다고 경계한다는 말이 있다. 반면 먀오족에게는, 돌을 베개로 쓸 수 없고 한족은 친구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이 전승되어 왔다.

먀오족은 문헌상으로는 송대부터 나타난다. 송대와 원대 중앙의 통치력은 구이저우 윈난 티베트 등 서남방 산골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토착민의 수장을 토사(土司)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를 하는 정도였다. 먀오족도 마찬가지. 그러다가 원나라가 기울고 명나라가 일어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명나라는 원의 잔여세력인 양왕(梁王)과 서남의 토착민이었던 단(段)씨 세력을 정벌하기 위해 1381년 30만 대군을 보냈다. 명군이 구이저우와 윈난으로 들이닥치면서 먀오족을 포함한 토착민들은 무지막지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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먀오족의 복장

먀오족의 수난은 청대에 극심했다. 청조는 토사 제도를 아예 폐지하고 중앙관리를 보내 직접 통치하는 강경책[改土歸流]을 폈다. 먀오족은 이에 반발했다. 강희제가 1703년 보낸 군대는 먀오족 40만여 명을 죽였고 3백 개 마을을 불태웠다. 옹정 연간에는 가혹한 세금과 정치적 박해로 인해 포리(包利)와 홍은(紅銀)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 다시 30만이 주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1855~72년 장수미(張秀眉)와 양대륙(楊大六)이 과도한 군량 징수에 반발하여 먀오족 최대 최장의 항전을 일으켰다. 17년 항전의 결과는 역시 참극이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먀오족의 반란은 다섯 차례나 더 있었다. 중원의 권력에 순치되지 않는 저항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난과 저항의 역사 그 이전의 고대사 내지 중고사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먀오족 마을에 들어가면 작은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그들 스스로 말하는 먀오족의 역사를 읽어볼 수 있다. 창세신화에서는 단풍나무와 나비가 등장한다. 송대 이전의 고대사는 먀오족-남만-삼묘-구려(동이)-치우(蚩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목에서 내 눈길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려와 치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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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고대사 인물이다. 대한민국 응원단 붉은 악마의 엠블럼에 그려진 도깨비의 원형이었다. 현대 먀오족의 역사가들은 치우가 이끌던 동이족의 일부가 남으로 이동하여 자신들의 선조가 됐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학으로 충분히 논증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과 <치우, 오래된 역사병>의 저자인 김인희 박사는 먀오족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다방면의 문헌 연구는 물론 1996~2009년까지 구이저우 윈난 광시 등지에서 먀오족 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저자는 춘추-전국-한대-당송-청대-중화민국까지, 문헌상의 치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신중국에서 치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치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상당한 변신과 비약을 거듭해 왔다는 것이다.

갑골문에서 치(蚩)는 재앙이란 뜻이고, 우(尤)는 욕심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치우는 춘추시대 문헌자료에서는 <상서-여형>편에서 황제(皇帝)와 전쟁을 한 인물로 등장한다. 전국시대 문헌에서는 기주 또는 탁록에서 황제(黃帝)와 전쟁을 한 인물로 출연한다. 한대에 들어 사마천이 <사기-오제본기>에서 황제를 모든 제왕의 시조로 선정하면서, 황제와 맞섰던 치우는 비중이 큰 악인으로 설정됐다. 사마천 이후에는 치우가 악인이라는 관념이 강화되었다. 치우는 청나라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근대 혁명파 지식인에 의해 조연으로 다시 소환됐다. 국가는 민족이 있어야 하고, 민족은 조상이 있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황제(黃帝)가 전체 한족의 조상으로 승격되고, 황제의 대적했다는 치우도 함께 주목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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먀오족이 조상으로 여기는 치우. 한국응원단 붉은악마가 사용하는 도깨비의 원형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황제와 치우의 선악 대치관계는 새로운 방식으로 리모델링되기 시작했다. 출발은 먀오족이었다. 1950년대 먀오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사를 쓰기 시작했다. 과거사에서나 현실에서나 가난과 고난에 시달려온 먀오족은 민족적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오래된 역사와 위대한 조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인접한 주변의 역사들을 꿰어 맞춰 먀오족-남만-삼묘-구려-치우라는 연결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송대 이전의 역사에 연결시킨 마디마디마다 학술적으로는 용인하기 어려운 무모한 비약을 거듭했다는 것이 김인희 박사의 지적이다.

치우는 현대 먀오족의 새로운 역사 기술에 등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신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후 빈부격차로 인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도포하기 시작했다. 한족만이 아닌 중국인 전체를 중화민족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조상으로 염제와 황제를 강조해왔다. 염황에 대한 역사연구를 지원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전개했다. 전세계 중국인을 한족보다 넓은 뜻의 중화민족으로서 모두 염황의 후손이라고 포장한 것이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도입한 애국주의 사상교육도 가속페달이 됐다. 중국 곳곳에 염제와 황제의 상이 세워지고, 사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 홍군 출신의 먀오족 학자 천징(陳靖)은 허난성 정저우의 염황 거상과 허베이성 탁록현의 황제사당 건립계획을 알고는 국무원 등에 심각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 먀오족이 중화민족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치우의 후손이지 염제 황제의 후손은 아니다. 만약 중국이 염황의 상을 세우고 치우를 악인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중화민족에서 마음이 떠나게 될 것이다.”

먀오족의 반발로 인해 CCTV의 드라마 <염황이제>는 사장됐다. 학술토론회에서는 염황에 치우까지 합친 ‘염황치 삼조’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민족분열에 대단히 민감한 신중국은 먀오족의 항변에 학술이 아닌 정치로 조응한 것이다. 그 결과 허베이성 탁록현에 치우와 염제 황제를 한 자리에 모은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건립됐다.

치우가 먀오족의 조상이라는 주장도 허구이지만, 5천 년 전 탁록대전에서 황제에게 패하여 죽었다던 치우가 20세기 말에는 염황과 나란히 앉아 삼조라고 명명되다니. 시대마다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가 온당한 것인지, 나는 갸우뚱할 뿐이다. 신중국의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저항적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김인희 박사는 역사를 이용하여 배타적 민족주의나 편협한 애국주의로 기울어가는 경향을, 니체를 인용하여 ‘역사병’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치우는 중국에서 역사병의 하나로 굳어지는 것 같다.

유의할 것은 역사병이 중국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안의 역사병도 떠올리게 된다. 역사를 스토리텔링으로 풀 수는 있지만, 역사학 내지 역사적 사실에서 두 발을 뗀 채 허공에서 지어낸 스토리를 역사라고 포장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적지 않다. 과연 우리 안의 역사병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