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의 24시간 1

카이펑의 아침

명절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온다. 카이펑 사람들의 평소의 생활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탐구해 보자.

카이펑 시내의 아침은 일렀다. 매일 아침 5경, 지금의 새벽 4시 무렵이 되면 ‘새벽을 알리는 승려(報曉頭陀)’라 불렸던 행자(行者)가 철패자(鐵牌子)라 불렸던 쇠로 만든 찰(札)이나 목어(木魚)를 두들겨 날이 밝았음을 알렸다. 아침의 시작인 것이다.

야간에 닫혀 있던 각 성문이 일제히 열린다. 멀리서 겨우 도착해 입성한 사람이나 여행을 나갔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근처에서 장사하러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특히 장사하러 입성한 이들의 행렬은 길게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거기다 카이펑의 밤 역시 늦었다. 전날 밤은 3경까지 장사가 이어졌고,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기에, 카이펑이 잠이 드는 것은 그저 몇 시간뿐이었다. 당에서 송에 이르기까지 도시 제도의 변화에 의해 생겨난 변화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런 밤의 경관이었다는 것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범야(犯夜)의 금이 소멸되고 방제(坊制)가 붕괴됨에 따라 야간 외출이 자유로워진 영향이 그런 곳에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장사하느라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활동을 시작하는 시내에서도 가장 이른 것은 역시 상인이었다. 성안에서는 저자(市)가 열렸다. 시내 곳곳에서 북적대기 시작한다. 이것과 함께 갖가지 장사가 시작된다. 대체로 먹을 것을 파는 집들이다. 죽을 파는 집, 과자를 파는 집, 술집도 그 무렵에 점포를 열었다. 아침을 파는 노점도 열려 여러 가지 물건 파는 소리가 시내에 들리게 된다.

가게를 내는 것은 먹을 것을 파는 집만이 아니었다. 얼굴 씻을 물이나 뜨거운 음용수를 팔러 다니는 이도 있었다. 카이펑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나빴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명대에는 구 궁성 이외의 물은 음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청명상하도》에는 우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강남에서 보는 우물과는 구조도 다르지만, 확실한 우물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을 읽으면, 카이펑의 우물이라는 것이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카이펑 시내는 그렇게 날이 밝으면서부터 떠들썩함에 둘러싸여 그런 북적거림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성내 곳곳이 시끌벅적해지지만, 역시 제일은 판러우졔(潘樓街)였다. 이곳은 궁성에서도 가까운 번화가가 이어진 곳으로, 점포가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은행가, 극장가와 여러 가지 저자(市) 등 도시적인 것들이 많이 모여 있어 카이펑에서 가장 번잡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판러우졔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곳저곳으로 나다닐 수 있었다. 쑹쟝(宋江)이 곧장 판러우졔를 목표로 삼은 것도 이곳이 최대의 번화가일 뿐만 아니라, 도심으로서 지리적 이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는 궁성과 관청가도 있고, 상점가와 유곽도 이어졌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큰 절인 샹궈쓰(相國寺)가 있었다. 강남에서 물자를 카이펑 안까지 운반하는 배는 이 절 부근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카이펑 시내를 형성하는 여러 곳으로 비교적 손쉽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호전》에 나오는 양즈(楊志)는 이 근방의 시내를 오가면서 칼을 팔러 다녔다. 팔지 못한 채 저우챠오(州橋)에 서 있다가 결국 칼부림 사태를 일으켜 사람을 죽이게 되고 이후 방랑이 시작된다. 볜허(汴河)에 걸려 있는 이곳 저우챠오 언저리는 아침 일찍부터 북적대기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번화가와 저자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무엇보다 카이펑다운 곳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판러우졔(潘樓街)라는 이름의 토대가 되었던 판러우쥬뎬(潘樓酒店) 아래는 날이 밝으면서부터 의류와 서화, 골동품 등의 저자가 섰다. 물론 먹을 것을 파는 점포도 나왔다. 오히려 이쪽이 많았다. 아시아의 도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노점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경관은 송의 도시에서도 보였던 것이다. 중국을 여행할 때는 나도 아침 일찍부터 되는 대로 그런 복닥거림에 몸을 맡겼다. 특히 재미있는 것이 저자였다. 인근의 농촌에서 야채나 물고기, 과일 등을 갖고 와서 파는 이, 고기를 솜씨 있게 팔고 있는 이 등등, 실로 많은 풍경을 목도했다. 그런 복닥거림은 일찍부터 도시의 아침 풍경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판러우졔보다 동쪽으로 가면 십자로가 있는데, 이곳은 투스쯔(土市子)나 주간스(竹竿市) 등으로 불렸다. 이곳의 칠석은 시끌벅적한 것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그림으로 그려졌다고 하는 기록도 있는데, 아쉽게도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칠석에 관해 한 마디 해두고자 한다. 칠석은 상당히 중요한 명절이었는데, 그 본질은 지금도 여전히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칠석의 전설은 천상의 직녀와 지상의 견우의 슬픈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날줄과 씨줄을 엮어 하늘에서 베를 짜는 직녀는 인간 세상의 운명을 짜는 여성이다. 그가 짜는 직물은 인간 세상의 변화무쌍한 운명을 시사한다. 베 짜는 것은 여성의 일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송대 여성에게도 큰 의미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은 성대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상업주의가 우선하는 명절이 되어가고 있지만, 칠석이 되면 카이펑 시민은 모두 치장을 했다.

마갈악(磨喝樂), 모호로라 불렸던 인형은 그때 팔렸다. 작은 조각이 있는 오채(五彩)의 난좌(欄座) 위에 올려져 갖가지 치장을 했다. 가격도 고가인 것은 한 쌍에 수천 문이나 했다고 한다.

시내 거리도 치장을 했다. 수레와 말들로 가득 차 번잡함이 한층 더했다. 사람들은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을 꺾어 장식을 했다. 상류 가정에서는 정원에 오채의 누각을 세웠다. 걸교루(乞巧樓)다. 여기에 마갈악과 화과(花瓜), 필연(筆硯), 침과 실을 늘어놓았다. 남자는 시를 짓고, 여자는 세공물을 갖추고 배례했다. 이것이 ‘걸교(乞巧)’이다. 일본의 칠석은 중국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이것으로도 납득이 된다. 우리 역시 조릿대(笹) 잎에 소원을 쓰는 게 생각나지 않는가?

특히 여자는 재봉 기술의 향상을 기원했다. 달빛에 비추어 바늘에 실을 꿰고 작은 거미를 손궤에 넣고 다음날 열었을 때 거미집이 펼쳐져 있으면 ‘기교를 얻었다’고 한 것은 그 때의 일이다.

자 이제 다시 동쪽으로 가면, 거기에도 큰 십자로가 있다. 이곳도 5경이 되면 점포가 나온다. 파는 것은 의류, 서화, 장식 류이다. 그런 장사는 날이 밝을 무렵에는 이미 종료되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저자를 ‘귀시자(鬼市子)’라 불렀다고 한다. 곧 ‘유령시(幽靈市)’라는 것이다. 아마도 아직 어두울 때 시장을 열고 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철시했기에, 그렇게 불렸던 것이리라. 수상쩍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맛갈진 호칭이라고 생각된다. 거래가 이른 아침부터 행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다시 동쪽으로 가면 그곳은 고급 주택가이다. 큰 저택과 사당(廟)이 늘어서 있다. 황후의 저택도 그 부근에 있다. 그 사이에는 상점도 있었다고 하는 경관이었다. 이곳은 굉장한 건물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저택이 있었던 듯하다는 것은 그대로 직진해 내성의 문을 나오면 거기에 식당이 있고, 양가의 규수가 출입했다고 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양가의 규수가 배회했다고 하는 것은 큰 저택이 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양가의 규수가 식당에 출입했는지 어떤지는 명확하지 않다. 모르긴 해도 기록을 남긴 수도의 건달 멍위안라오(孟元老)가 젊은 처자와 알고 지내려고 어정거렸던 가게였는지도 모른다. 출입했다는 이도 실은 그 부근의 행실이 좋지 않은 처자였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오늘날과 같은 풍속이다.

식료품점

가로에는 고기와 야채, 어패류 등, 하루의 식료를 사러 다니는 사람들의 무리가 이어졌을 것이다. 특히 도심부에서는 아침 시장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아침 시장이 일단락되면, 이번에는 세공물이나 식후의 디저트를 파는 점포가 나왔다. 아마도 달콤한 과자와 꿀 등일 것이다.

먹을거리의 종류는 그 무렵이 되면 상당히 충실해졌다. 갖가지 재료가 가게 앞에 늘어서 있었다. 두부나 면류는 그 이전인 당․오대 무렵부터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기록에 있는 먹을거리가 현재의 어느 것에 상당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도 많다.

이른 아침임에도 주점을 여는 이도 있었다. 한 사람 앞에 20문이라고 한다. 큰 거리나 관청가 가까운 곳에는 아침에 귀가하는 사람이 차를 마실 수 있는 곳도 있었다고 하는데,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재미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점포가 문을 열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물론 장사는 그런 것에 그치지 않았다. 외부에서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파는 이도 있었다. 물고기가 반입된 것은 대체로 카이펑 서쪽이었던 듯하다. 이것은 이해가 간다. 서쪽은 황허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못이나 양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도 있었다. 그런 담수어류는 신정먼(新鄭門), 시수이먼(西水門), 완성먼(萬勝門)과 같은 곳에 운반되었다. 카이펑 근처의 어촌에 살고 있는 이가 황허의 물고기 등을 반입해 팔았던 것이다.

일찍이 카이펑에서 황허의 잉어가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때 황허의 잉어가 가장 맛있었는데, 카이펑보다 북쪽의 잉어는 너무 작았고, 카이펑보다 남쪽의 잉어는 너무 컸기 때문에 카이펑 사람이 가장 맛있는 잉어를 먹었다고 하는 말이 나왔다. 모두 크게 웃었지만, 왕년의 카이펑 사람들도 그와 같이 “잉어는 카이펑이 제일”이라는 말을 하면서 황허의 물고기를 먹었던 것일까?

물고기는 바닥이 얕고 깨끗한 나무통을 사용해, 버들잎에 꿴 것을 맑은 물에 담궈서 가져왔다. 이것들은 허쳰허(何千河)와 시내로 반입되어 널리 팔렸다. 대체로 한 근, 곧 약 600g에 100문 정도였다. 이것은 루유(陸游)가 황저우(黃州)에서 구한 물고기의 가격에 비하면 상당히 비싼 것이다.

황저우에서는 100문에 스무 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만큼 살 수 있었다고 루유는 기록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루유도 지나치게 쌌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물고기의 가격은 땅처럼 쌌다고 썼다.

카이펑 물건의 가격은 대체로 수십 문 정도였다. 저우챠오(州橋) 부근의 식재료 점에서는 고기가 15문 정도였다. 작은 술집의 안주가 15문 정도였다. 훈둔 같은 것은 한 그릇에 10문 정도였다. 이것을 보아도 수십 문을 가지고 있으면, 귀가 길에 한 잔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극히 비싼 것도 있었다. 계절마다 처음 나온 햇과일이나 채소는 비쌌다. 가지나 조롱박 등의 햇물도 한 바구니가 30관에서 50관이었다. 그렇게 비싼 것임에도 후궁에서는 다투어 사들였다. 앞다퉈 제철 음식을 사들였던 것은 에도(江戶) 토박이뿐만이 아니었다. 수도 제일이라 칭해졌던 위셴정뎬(遇仙正店)에서는 은병주(銀甁酒)가 한 병에 72문이었다. 양고주(羊羔酒)의 경우에는 81문이었다. 사치를 부리자면 한이 없었던 것이다.

날이 밝으면 육류를 반입하는 이도 나왔다. 돼지나 양고기를 둘러메거나 수레에 싣고 찾아왔다. 모든 카이펑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위장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고기는 카이펑 안에서 해체된 것인 듯하다. 궁궐 정면에 마주한 난쉰먼(南薰門)에서는 저녁 무렵이 되면 수없이 많은 식료용 돼지가 수십 명의 사람들에 쫓겨 문을 통해 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