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세언型世言 제16회 2

제16회 내강현의 세 열녀가 수절하고,
성도군의 두 고아가 연속 급제하다
內江縣三節婦守貞, 成都郡兩孤兒連捷

후결(候缺)에 부임하고나서, 다행히 신임부지사(新任府知事)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소등(蕭騰)이 이전에 모시던 현지사(縣知事)였다. 그 부지사는 소등을 발탁하여, 그에게 자기 일을 대리하도록 맡겼다. 이년간을 그렇게 맡겼다가 소등에게 실제업무를 맡게 했다. 소등이 한떼의 강도를 잡아, 포도청에 보내지 않았는데, 이 사실이 밀고가 되어 포도청의 비위를 거스렀다. 그리고 또한 그 강도가 각처에 돈을 써서는, 소등이 공을 탐내 일을 만든다고 역으로 말하였다.<‘탐공생사(貪功生事)’ 이 넉자로 인해, 천하의 일이 억울함을 당한 경우가 많다. 윗자리에 있는 자는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만료되자, 승진시험(考滿)에 합격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형제가 서로 상봉하였다. 계택이 말했다.

“형, 우리들은 경작할 수 있는 밭이 있고, 가르칠 수 있는 아이들이 있으니, 이런 말단관리를 뭐하러 해요?”

그래서 곧 집에서 선생 한명을 청하여, 세건(世建)과 세연(世延)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했다. 두사람은 집에서 아이를 교육하고, 농사에 힘쓸 뿐이어서, 서로 지극히 안분자족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이 해에 천재가 발생하여, 먼저 소등이 병에 걸렸다. 그래서 의사를 청해왔다. 의사의 이름은 이대황(李大黃)이었는데, 대황(大黃)을 잘 썼다. 그 의사가 말했다.

“횡격막에 음식물이 걸려있어, 열이 나는 것인데, 그 음식물이 아래로 내려가면, 그 열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물이 언제 내려갈 지 몰랐고, 나쁜 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오히려 그 음식물은 복판에 걸려 있었다. 5,6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다른 의사를 청하였다. 이번 의사는 감마황(甘麻黃)이라고 하는데, 마황(麻黃)을 잘 썼다. 그가 물었다.

“오늘이 칠일째입니까?”

그래서 말했다.

“예,칠일쨉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이런 병은 마땅히 땀을 흘려야 합니다.”

말하고 나서 그는 마황을 한줌 움켜졌으나, 환자는 대황을 많이 먹은 나머지, 계속하여 땀을 흘리고 있었다.<의사는 자신의 처방을 우겨 약을 함부로 쓸 수 없다. 어찌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소중등은 낫지못할 것을 알고, 급히 붓과 연적을 갖고오게 하여, 몇 글자를 적었다.

“세건의 나이 이미 11살이고, 벌써 두각을 나타내니,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의 처는 나를 위해 괴로움을 참고 수절할 수 있을 것이다. 진씨는 나에게 시집온 지 7년이 되었으나, 아이가 없고, 나이도 아직 적으니, 다시 시집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집의 밭과 소작세는, 동생이 나 대신 알아서 처리해주게나.”

소중등은 이렇게 쓰고, 숨이 끊어졌다. 이 때 음씨와 자식들은 뒤엉켜서 곡을 하였고, 소계택은 형을 위해 납관과 출관을 처리했다. 바로 이와 같았다.

바람과 비 쓸쓸하고, 할미새 정적을 깨고,
처량함을 이기지 못해 목이매고 눈물이 흘러내리네.
삶이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니 정하기 어렵고,
유유하게 물위에 떠 있는 부평초를 슬프게 바라보네.

소계택이 형의 장사를 치루고 난 후, 십 여일도 되지 않았을 때. 뜻하지 않게도 이 병이 소계택에게 전염되는 바람에, 그는 병으로 쓰러져 누웠다. 집에서는 이전의 의사들이 신통치 못함을 알고, 다른 의사 두명을 청하였다. 한명은 고집(顧執)이라고 하는 의사인데, 그가 와서 보니 소계택 옆에 서 있는 처첩들이, 모두 미모가 뛰어났다. 그래서 이 같이 말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상(內傷)으로 인한 병인데, 즉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병인 음증(陰証)입니다.”

그러고나서 부자리중탕(附子理中湯)을 지어주었다.

다른 한명인 임의(任意)라는 의사가 와서는, 맥을 보더니만,

“이것은 소양(少陽)입니다.”

라고 말했다.

소계택의 처가 말했다.

“방금 고(顧)의사는 음증이라 말했는데요.”

임의(任意)가 말했다.

“허튼 소리! 그가 무슨 병을 볼 줄 안다고 그래요!”

그도 또한 한첩을 지어주었는데, 시호(柴胡)를 더하고 줄인 탕이었다. 집에서는 어느 약을 쓰는 것이 좋을 지 몰랐다. 다음날 할 수 없이 모두 오라고 했는데, 둘이서 왁자지껄 다투었다. 고집이 말했다.

“ 너는 내 사업을 망치는구나.”

임의가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싸우고 있을 때, 다행히 이씨집에서 하충(何衷)이라는 의사를 데리고 와서는 추천하였다.<병이 한번 들면 누차 의사를 바꾸는데, 십에 팔구는 모두 몸을 상한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의사가 말했다.

“두분은 이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남이 우리들보고 진찰하라고 청했지, 어찌 싸우라고 청했겠소. 모름지기 마음을 비워야 해요. 지금 이틀쨉니다. 체내의 독기를 발산시켜 병을 치료하는 약을 써야 해요. 약상자를 가져와서, 각각 몇가지씩 내봅시다.”

한명은 태음(太陰)이라 하고, 한명은 소양(少陽)이라 하고, 한명은 달고 마시기 쉬운 약을 내놓고는, 너 한줌 나 한줌하며 약을 지었다. 이렇게 하여 14일째가 되었다. 지금 또 인삼을 써야 한다, 안써야 한다로 다투었다.

옛날 한 지체높은 어른이 계셨는데, 웃기는 말을 정말 잘했다. 하루는 한 의사가 와서는 가르침을 청했다. 지체높은 어른이 말씀하셨다.

“무슨 할말이 있겠소. 단지 이 말밖에 없소. 우리집 아이종이 항아리 안에, 쌀을 담아두었소. 그런데 쥐가 그 안에 들어가서는, 끝내는 밖으로 뛰어나오지 못하게 되었소. 그래서 우리집 애가 부젓가락을 벌겋게 불에 지져, 쥐를 찌르려고 했소. 그런데 부젓가락을 넣으니, 그 쥐가 ‘억’하고 소리지르지 않겠소. 또 한번 부젓가락을 넣으니, 이번에도 같은 소리를 내고, 다시 한번 부젓가락을 넣으니, 또 같은 소리를 내지 않겠소.”

그 지체높은 어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의사가 또 물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그 지체높은 어른이 대답했다.

“세번 ‘억’했다는 것은 치료받다 죽었다는 뜻이요.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이것이 바로 소가(蕭家)의 이야기인 것이다.

소계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함을 예상하고, 먼저 오씨와 음씨가 함께 수절하면서, 소씨(蕭氏)의 두 아들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씨는 비록 자식이 있으나, 나이가 단지 26세에 불과해, 수절하기가 어려울 것같아, 개가에 대해서는 그녀의 의사대로 하게 하고, 그녀에게 돈을 요구할 수 없게 했다.

가련하게도 한달 사이에 두 형제는 이와 같았다.
나무는 사씨(謝氏)의 옥을 막고,
가지는 전가(田家)의 가시나무를 꺾네.
남은 두 구슬,
밤에 엉엉 슬피 우네.

오씨도 또한 예를 다 차려 납관‧출관 및 매장을 하였다. 두쪽의 과부들은 서로가 의지하며,백 여일을 지냈다. 음씨는 유언에 따라, 진씨를 출가시키려 했다. 진씨는 눈물을 흩뿌리며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소가의 사람이요, 죽어서는 소가의 귀신입니다. 하물며 큰언니가 병이 많은 지금, 저는 서로 돕고 싶고, 어린 도련님들을 보살피고 싶어요. 결단코 다른 마음이 없어요.”<가슴이 뜨겁다.>

음씨가 말했다.

“내가 자네와 서로 의지하며 산지가 오래지만, 차마 말을 못했네. 그러나, 자네는 자식이 없으니, 청춘을 허비하지 말고, 출가를 하게나.”

두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하다가, 한바탕 곡을 하였다. 한편 오씨는 이씨가 나이가 적고 기꺼이 수절하지 않을까 하여, 그리고 소계택의 유언도 있고 하여, 이씨보고 출가하도록 했다. 그리하고나서 매일마다 세연(世延)을 보고 통곡하며 말했다.

“이 어린 것,누가 보살피지?”

이씨가 듣고, 맹세하며 말했다.

“하늘에 해가 뜨는 한, 나는 결단코 재혼하지 않겠다. 소가의 창문 아래서 늙어 죽겠다.”

이씨는 오씨와 둘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붙어다니며,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을 보살핌에 있어, 피차를 나누지 않았다. 그 때 진가(陳家)와 이가(李家)의 집안에서는 두사람이 나이가 적고, 소가(蕭家)가 가난하니, 모두 몰래 그녀들에게 재혼하라고 권했다. 진씨에게 권하는 사람이 말했다.

“그의 집은 가난하여, 수절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넌 자식도 없으니, 수절해냈을 때에, 본처의 자식들이라, 반드시 너하고는 그리 친밀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늙으면 의지할만한 친자식이 없으니, 젊을 때 출가하는 게 낫다. 그러면 좋은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씨에게 권하는 사람이 말했다.

“결발한 부부라 해도, 반드시 수절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넌 모름지기 그의 첩이니, 자식들을 버려라. 오씨는 이 집 가산을 원해, 그녀는 남편친척들이 가산을 빼앗을 까봐 두려워, 용을 써서 그들에게 신경쓰고 있어. 넌 무었때문에 참고 견디는 생애를 보내며, 남의 목구멍 아래에서 숨쉬며 살려고 하니?”

한 매파가, 소가에 재혼할만한 첩 두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중매하여 돈 좀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는 와서 말했다.

“어느 집에서 짝을 잃었는데, 후처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지금 4‧5십인데, 후처는 나이는 삼십 여살에다가, 용모가 아름답고, 집안 일을 잘 하면 된답니다. 밭도 있고 땅도 있다고 그래요. 그는 지금 5,6명의 자식이 있는데도, 한두명만 더 낳았으면 해요. 그리고 시부모도 없어요. 갈 때 침실 장막을 걷어올리는 줄만 손에 들고 가면, 몸종이 일을 다 맡아하니 섬섬옥수는 움직이지도 않고,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 집 시골관리가, 현재 막 부임하러 가는 참인데, 본처를 데리고 가지 않고,첩을 취해 데리고 가려고 해요. 이것은 현임으로 가는 것이니, 여정이 아주 편안할 것입니다. 임지에 도착했을때는 단지 자기 혼자뿐이라, 본처처럼 예우도 받고 돈도 모을 수 있으니, 어디 간들 두렵겠어요? 게다가 공자(公子)도 없으니, 낳으면 공자(公子)가 되니 얼마나 좋아요.”<중매장이의 과장하는 능력, 그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 부자가 있는데, 본처가 병이들어, 일어나지를 못해, 집안에 집안사람들을 보살필 사람이 없어, 첩을 맞이하려고 해요. 명칭은 비록 첩이지만, 실제로는 본처나 마찬가지죠.”

“한 목재상이 있는데, 휘주(徽州)사람이예요. 수천냥의 은자를 가지고, 여기에서 벌재를 하고 있어요. 돌아가지 않고, 처를 새로 맞이 하려고 해요.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예요.”

두 세명의 매파가 부닥치자 서로 말했다.

“이것은 내가 먼저 알았던 거야.”

또한 이쪽의 가불가를 묻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을 대신해서 처리해 놨으니, 당신은 여자집을 맡고, 나는 남자집을 맡겠소.”

혹은 서로 다투면서, 모두 화려하고 부귀로운 것을 가지고 말했다. 또한 다투어 말했다.

“내가 말한 것은 좋지만, 네가 말한 것은 좋지 않아!”

음씨와 오씨는 진씨와 이씨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들을 거절하지 못했지만, 진씨와 이씨 두사람은 결연하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들먹여도, 나는 재가하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 말하러 오지 마소.”

한 입이 가벼운 사람이 말했다.

“두여자는 속으로 시집갈 ‘가(嫁)’자를 생각하지만, 입으로는 말하지 않는다.<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림> 이것은 단지 본처의 주장이니, 두사람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삼년만 수절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 그때는 단지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뿐이다.”

라고 귀찮게 굴며 가지 않아, 진씨와 이씨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의기양양해 하며 말했다.

“보소, 아마 몇개월만 지나면 다시 우리들을 부를 것이요! 억지쓰지 마소.”

이와 같이 하여 모두들 진씨와 이씨 두사람이 굳은 마음으로 수절할 것을 알고서, 마음을 놓았다.

음씨는 원래부터 몸이 약한데다가, 남편을 그리워하여, 그 슬픔이 지나쳐 몸을 망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끝내는 쇠약증이 되어버렸다. 진씨는 밖으로는 세건(世建)의 공부를 후원하고, 안으로는 음씨에게 영양분이 많은 약과음식을 들게 했는데, 전혀 나태함이 없었다. 오씨와 이씨도 시도 때도 없이 보살폈다. 음씨가 진씨에게 말했다.

“내병은 이미 깊었다. 약과음식으로도 좋아지지 않으니, 너무 신경쓸 필요가 없다. 내가 죽어 지하에서 남편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 단지 세건(世建)이 아직 나이가 어려, 너를 귀찮게 할 것이다. 만약 걔가 아무 탈 없이 어른이 되면, 내가 구천에서 편안히 눈감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의 남편도 너의 은덕에 감동할 것이니라.”

그리고 세건을 불러 말했다.

“네 운명도 기구하다. 먼저 아비를 여의고, 이제 애미마저 여의게 되었구나. 내가 병이 많아 평소의 넌, 내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했지. 지금 내가 죽을 때가 되니, 단지 진씨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넌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힘껏 온 마음을 다해 효도해야 하며, 커서는 그녀의 깊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현명하도다!> 열심으로 공명을 쌓고, 부모를 위해 분발하거라.”

또한 오씨에게 세건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서는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렀다. 며칠도 되지 않아, 음씨는 숨이 끊어졌다. 진씨가 또 납관과 출관을 행하였다. 그녀의 부모가 또 와서 말했다.

“소가의 재산은, 원래 아주 적었다. 지금 또 한명이 죽었으니, 점점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건이라 해도 그가 후에 어떻게 할 지 알 수 있냐? 그를 낳은 사람은 더우기 보살피지도 않고, 죽어버렸는데, 네가 어떻게 그를 보살필 수가 있겠느냐? 빨리 재가하는 게 낫다. 소가에 사람이 없고, 더군다나 너를 막을 사람은 더군다나 없다. 만약 더 지연한다면, 가산이 점점 줄어든 후에 가서는, 모두들 네가 무슨 사심을 가졌다고 말할 것이니, 그를 위해 수절할 수 없어. 혹 세건이 올바른 인간이 못되어, 불효하여, 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때엔 넌 나이들고 초췌해진 상태니, 그땐 정말 늦은 거야!”

진씨는 듣고, 통곡하며 말했다.

“세건이란 이 아이는 소가의 맥을 잇는 아이예요. 만약 그를 버리면, 그는 생존하여 살아갈 수 없거나, 혹은 비천해지고 말아요. 그러면 소가의 이 맥은 희망이 없어요.<영욕과 곤궁함을 돌아보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제가 세건의 몸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면, 내 몸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요. 지금 그 아이가 어떤 곤궁에 처해 있으면, 난 도와 주어, 결코 서로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거예요. 전 두명의 과부에게 의지하며, 될 수 있는 한 사이좋게 지낼거예요. 관여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시는 귀찮게 굴지 마세요!”

진씨는 오씨와 이씨와 더불어, 서로 보살피며, 살아가기에 충분한 양식을 생산했다. 그리고 친족의 관혼상제를, 빠뜨림없이 챙겼으며, 몇번인가의 흉작을 겪었지만, 모두 세사람이서 서로 도왔다. 매일 저녁 반드시 비단이나 삼베를 짰으며, 아이가 밤 2,3시까지 공부하도록 독려하였다. 마음 속으로는 아이를 동정하였으나, 공부할 때에는 아이를 가차없이 대하였다. 지금 남들은, 입만 벙긋하면 아이의 아버지가 없으면, 교육이 엄격하지 못해, 집에서 아이를 응석받이로 만들든가, 혹은 제멋대로 하며 못되게 굴며, 일자무식이 되어, 소와 말같이 되게 할 것이며, 14‧5살이 되면 그 아이는 밖에서 무뢰배들과 사귀며, 술마시고 창녀집을 드나들며, 여기저기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소란을 피우고 다니며, 불초한 자식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와 같았다.

낮의 물억새는 굳건한 마음을 나타내고,
웅담으로 만든 알약 먹으니 가슴이 쓰라린 것을 알겠네.
몰락하고 쇠잔한 가문으로 하여금,
당시의 힘을 다시 떨치게 하라.

두 아이가 좋은 서당에 가서 공부하게 하고, 그리고 두 아이의 학비, 친구교제, 회문(會文)공급들은, 이 과부들이 힘을 모아 협조하였다. 이 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게다가 밖에서 뛰어난 선생님을 모셔다 가르치고, 집에서도 또한 잘 교육시켜, 12‧3살에 글을 지을 줄 알게 되었고, 15‧6살때에는 문리가 크게 통했다. 그 당시는 여전히 가정(嘉靖) 때로, 관리마다 모두 공정하여, 직책수여할 때의 부정이 공공연히 행해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한번 시험치는 것과는 달랐다. 지금은 향신(鄕紳)과 거인(擧人)에 관한 명단이 있어, 현의 관리는 자기 앞사람이나, 부(府) 중의 동료를 추천하는데, 한사람이 여러 명을 추천하고, 성(省)의 최고 관청인 양사(兩司)와 그리고 도(道)에서도 각각 여러 명을 추천하며, 또한 삼원(三院)에서도 의견을 제시한다. 부(府)에서는 양경(兩京:南京과 北京)의 현직관리인 동년배친구들과 왕래교제 한다. 이리하여 부에서 이백명분의 인원을 배당받으나, 대기자들은 사백명이나 된다. 그래서 부의 관리는 명단을 임의로 정하지 않고 상급기관으로 발송하니, 어찌 가난한 자로 한번 기를 펴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두아이는 좋은 때를 만나, 모두 부로부터 추천을 받아, 도(道)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이 때에는 지금처럼 활절두(活切頭), 대리시험이나, 시험지 바꾸기, 혁대에 써 놓은 글보기 등의 폐해가 없었다. 옷 속에 글을 써 놓는 경우는, 검사를 철저히 하여 색출하여, 숨길 곳이 없었다. 그리고 시험지를 받을 때에도 하급관리들이 시험지면을 자르는 폐해도 없었다.

당시의 교육부 관리들은 모두 뛰어나, 삼원(三院)에서도 감히 공문서의 발송을 비준하지 않았고, 동료들도 감히 청탁하지 않았으며, 부하사관들도 감히 그들의 권세를 빌리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건(世建), 세연(世延) 두 어린 아이가 진학하게 되었다.

그 때 내강현(內江縣)에서는 시끌법적 그 세 과부를 단지 수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교육 잘 시켰다며 칭찬해마지 않았다. 많은 권문세가들이, 모두 자기네 딸을 그 아이들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세과부들은 기꺼워 하지 않고 말했다.

“권문세가의 딸들은 대부분 교만하고 어리석어, 가난한 것을 달게 여기지 않으며, 버릇이 없다.”

그래서 가문이 서로 비슷한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세건은 여씨(余氏)를 맞이했고, 세연은 양씨(楊氏)를 맞이하여, 모두 제각기 독립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이 세 과부는 그들이 성인이 되었고, 진학했고, 또 자신들이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었다. 더 열심히 그들을 독촉하며, 그들이 크게 성공하기를 바랬다.

세건의 처 여씨가 아들을 낳아, 소형(蕭蘅)이라고 이름지었다. 여씨가 죽었다. 진씨는 후처가 세건을 난처하게 할까봐, 세건의 면전에서 이 손주 하나면 됐다고 말하고, 손수 손주를 길렀다.<자식을 기르고, 또 손주를 기를 수 있다니, 소씨(蕭氏)의 충신이다.> 아이로 하여금 공부하는 마음을 방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이 두아들은, 모두 모친의 마음을 잘 헤아려, 분발하여 공명(功名)에 뜻을 세워, 계속하여 우등으로 뽑혔으며, 마침내 거인(擧人)에 급제하였다. 그들은 당(堂)에 올라가 모친에게 절을 했으며, 친한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수일이 지나 묘지에 가서 묘위에 기를 세우고 편액을 세웠다. 그때에 이 세과부가 그제서야 문을 나섰다. 산중에 이르렀을 때, 말했다.

“지금 우리들은 지하에 있는 그 세사람에게 면목이 서게 되었다.”

늦겨울, 두형제는 서울로 가서, 전후하여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돌아와서는 친지를 돌아보고,묘에서 제사지냈는데, 정말 떠들썩하였다. 바로 이와 같았다.

20년간 깊은 규방에서 미망(未亡)임을 슬퍼했지만,
어찌 느릅나무와 뽕나무에서 열매 거둔 것을 알았겠는가.
집 앞의 송백(松柏)은 함께 무성해짐을 기꺼워하고,
계단 아래의 지란(芝蘭)은 더불어 향내내는 것을 기뻐하네.

후에 세건은 현지사가 되었고, 세연은 어사가 되어, 모두 임명장을 부모에게 바쳤다. 산 자는 관직에 임명되고, 죽은 자는 제사받았다. 이 세명의 열녀는 모두 오래 살았는데, 마을 관리인 이체(里遞)가 공동으로 추천하여, 그것이 부(府)에서 현(縣), 현에서 사도(司道)로 신청이 전해져, 사도에서 종지를 내려 기로써 표창하기를 청했다. 이남주(李南洲) 소경(少卿)은 그들을 위해 󰡔쌍절전(雙節傳)󰡕을 지어 말했다.

“당전(堂前)의 진씨, 정절지켜 수절한 이씨, 청사에 길이 남고, 붉은 관 더욱 붉네. 이런 일 모두가 처된 자들이 하는 것, 첩이 그런 일 했다는 것 아직 듣지도 못하였네. 모두 다른 곳의 사람이로다. 아직 보지도 못한 일이다.<진실로 시대를 넘어 드물게 보이는 일이다.> 모두가 다른 때의 사람이로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실이다. 그 어려움에 감탄하며, 그들의 일을 펴서 전하리!”

그리고 양승암 태사(楊升庵 太史)가 그들을 위해 전(傳)을 지었다.

우후(雨侯)가 말한다.

“아아! 처와 첩의 사이란, 삶과 죽음의 사이 같은 것, 대해(大海)를 건너서 부드러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소나무와 대나무를 쥔다고 해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장차 그런 경우에 처한 것은 모두 합당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험담을 하여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즐거움을 잃지 않고, 끝까지 수절하였으니, 이것은 결국 그들이 결연함에서 힘을 얻었던 것으로, 부덕(婦德)이 오로지 부드러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말한다.

“나의 생모는, 친히 나와 누나,남동생 등 모두 5명을 낳으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본부인께서는 우리들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대하여, 우리들이 성인이 되도록 보살펴주셨다. 두 어머니께서는 정말 고생을 감수하며 사시며, 20년 동안을 수절하셨다.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번이나 이사가고, 맹자의 학습증진을 위해 베틀을 자른 맹자의 어머니 보다 못할 것이 없으며, 손님을 위해 머리를 잘라 음식을 마련하고, 돛자리를 잘라 손님 말의 먹이로 삼은 도간(陶侃)의 어머니 보다 못할 것이 없다. 지금 소씨(蕭氏)의 기록이 있지만, 나의 두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글을 읽으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초야에 묻혀 이름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이 더욱 많음을 알겠다.”

趙得昌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