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
2. 공부(孔鮒)는 천하를 위해 쓸모없는 책을 숨겨놓았다
공부가 책을 숨겨놓자 진여(陳餘)가 위험한 일이라고 하니, 공부가 말했다.
“내는 ‘쓸모없는 학문[無用之學]’을 하는데 나를 아는 이는 오직 벗뿐이다. 하지만 진시황은 내 벗이 아니니 내가 어찌 위태로워지겠는가?”
아! 쓸모없는 학문을 하고, 자기 마음을 넓혀 난세에 노닐 수 있다니, 성인 공자의 제자가 아니라도 이럴 수 있는 것인가?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곡식을 한 줌 쥐고 점쳐 보나니
어떻게 좋은 살 수 있을까?
握粟出卜, 自何能穀.
사는 것[穀]은 자기에게 달렸을 따름인데 무엇 하러 점을 친단 말인가? 자신의 도리를 굽혀서 천하에게 복종하면 이로움도 있지만 해로움도 잠복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천하에 대항하면 몸도 위태롭고 도리도 승리하지 못한다. 군자의 도리는 천하의 쓸모를 저장하는 것이지 천하에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걸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저 쓸모없다고 여길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체하는 것은 따라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도리를 고수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사귐을 신중히 하면서 사물을 멀리하면서 도적과 짐승이 횡행하는 와중에 황제(黃帝)와 신농씨(神農氏), 순임금, 하(夏)나라의 정신을 보존한다면 어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무엇 하러 점을 친단 말인가! 장주(莊周)는 난세를 꾸짖으며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어 ‘무용(無用)’을 얘기했으나 천하를 위한 큰 쓸모를 저장할 수는 없었다. 곡식을 쥐고 깊이 시름겨워하다가 예(羿)의 화살에서 도망치려 한다면 소인배의 정서가 아니겠는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살아남고 죽는 것을 결정함에 정도(正道)를 잃지 않으며 쉽고 간단하게 처리함으로써 천하의 험준한 장애를 없앨 줄 아는 일을 성인의 제자가 아니라면 누구와 함께하겠는가?
3. 호해는 형을 죽여서 망했다
상나라가 흥성하기 시작하자 태갑(太甲)이 쫓겨났고, 주나라가 흥성하기 시작하자 성왕(成王)이 위기를 겪었으며,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하자 부소(扶蘇)가 자살했고,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했으나 혜제(惠帝)는 후사를 잇지 못했고, 당나라 때는 이건성(李建成)이 칼에 맞아 죽었으며, 송나라 때는 조덕소(趙德昭)도 끝이 좋지 않았으며, 건문제(建文帝)가 변란을 당한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참혹했다. 천하가 막 안정되어 인심이 가라앉지 않았을 무렵에는 천명(天命)도 불안정해서 성탕(成湯)이나 주나라 무왕(武王)이라 할지라도 혼란을 끝낼 수 없었으니, 그 후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호해(胡亥)는 형을 살해했기 때문에 얼마 후에 죽었다. 태갑과 성왕은 종신토록 편안하게 그 지위를 누렸으니 이윤, 주공과 조고(趙高)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보다 크다고 하겠다.
진시황의 왕조가 단명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개중에 사람을 알지 못한 점이 가장 심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시황이 세심히 살피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아첨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조고의 손에 나라를 맡기면 훌륭한 군주라도 살아남기 어렵거늘, 하물며 호해임에랴! 한나라 고조(高祖)는 주발(周勃)을 알아보았고, 송나라 태조는 조보(趙普)를 신임함으로써 혼란을 끝내지는 못했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건문제가 등극했으나 외로운 몸을 의탁할 옛 신하가 없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앙이 얽혔으니, 더욱 큰 인륜의 변고가 일어났다. 서달(徐達)과 유기(劉基) 가운데 한 사람만 살아 있었더라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그럼에도 왕조의 운명이 기울지 않은 것은 아첨하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