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적사 3

신시아 J. 브로카우 Synthia J. Brokaw

언어

셋째, 시간이 갈수록 언어의 성격과 기능의 차이가 출판 산업의 조직을 유지하고 인쇄의 보급과 이용을 확산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에서는 라틴어와 각 나라의 자국어(vernacular)가 “경쟁”을 벌임으로써 출판과 문해력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15세기 중반에(대략적으로 이 기간은 “명말”에 해당된다) 라틴어는 여전히 유럽에서 지배적인 글말(文語)이었지만, 종교개혁 이후[그리고 구텐베르크(Gutenberg)가 인쇄를 발전시킨 이후]에는 차츰 자국어 글말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의 출판계를 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출판업자들은 언어적으로 통일된 유럽을 지향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자국어 공동체를 위해 책을 찍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중국인이라면 대부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글말이 있었다. 확실히 수백 가지의 방언(方言)이 있기는 했지만(그리고 방언으로 출판된 텍스트가 몇몇 있기는 했지만), 글말이 되었든 입말이 되었든 이들 방언들의 존재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던 글말의 주도권을 심각하게 위협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유럽에서는 도서 시장의 지리적 단일성이 15세기와 16세기에 라틴어의 침체로 점차 와해된 반면, 중국의 출판업자들은 나라 전체에 책을 공급하겠다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언어적 상황으로 인해 단일한 통합적 도서문화가 형성되었다거나, 문맹 소멸을 향한 단선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된 경로를 따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어 글말에는 종종 중복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 “영역”과 유형이 담겨 있다. 그러한 영역은 각각 특정한 한 가지 혹은 여러 글쓰기 장르와 연계되어 있으며, 또한 특정한 문학 가치나 어느 정도는 특정한 식자 수준과 학식에 연관되어 있다. 중국의 “현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언어개혁에 헌신했던 5·4 시기의 학자들은 근대 이전 과거의 모든 중국어를 인위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 분명한 구분법에 따르면, 하나는 “악”하고 엘리트적인문언으로 된 글말이고, 다른 하나는 “선”하고 대중적인 백화로 된 글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주의적 구분을 적용하면 고문과 백화문 양자 모두에 존재하는 풍부함과 다양성조차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고문과 백화문 사이에, 또 글말과 입말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상호 연관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현재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백화문에는 다양한 형식들이 포함될 수도 있다. 방언으로 씌어진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문학 형태도 있었다. 특히 우(吳, 蘇州), 민난(閩南, 푸졘 남부), 그리고 웨(粤, 廣東) 방언으로 씌어진 희곡 문학 작품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보편적으로 사용된 백화문은 북쪽 방언인 관화(官話)의 “어느 정도 표준화된 변형태”나, 또는 수도의 교육받은 이들의 말을 기초로 한 관리들의 언어였다. 관화(官話)는 관리나 “상인과 여타의 여행자들을 위한 공용어” 역할을 했는데, 서로 다른 방언 집단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관화가 글로 씌어지면서, 글렌 더드브릿지(Glen Dudbridge)가 광범위하면서도 비교적 동질성을 갖는 “대도시의 언어문화”라고 지칭했던 것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관화는 공식적인 문서와 법정 진술서에서 말을 문서화할 때 사용되었다. 또 관화는 종교와 철학에서 종사(宗師)의 가르침을 대화의 형식(語錄)으로 기록하거나, 단지 중간 정도의 교육을 받은 독자들이 고전을 읽을 때 필요한 주석을 첨부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관화는 스티븐 오웬(Stepen Owen)이 “소설적 백화”라고 딱지를 붙였던 것의 기초가 되기도 했는데, 명말의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에 보이는 “소설적 백화”는 구어적 요소를 풍부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상당히 세련되어 있다. 백화문은 명백히 말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언설을 기록한 작품이나 구두 공연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고, 혹은 그러한 작품 속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하여 차용되는 경향도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관화는 문학적 가치 체계에서 속(俗)으로, 즉 “통속성”이나 “대중성”으로 규정되었으며, 그리하여 통속소설이나 대중소설과 연관을 갖게 된다.

하지만 “대중성”이라 명명했다고 해서 “대중들”이 백화로 된 모든 텍스트에 쉽게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전 또는 문학 작품에서 중국어의 여러 영역들이 일반적으로 교양과 교육 수준의 증대와 연관이 있기는 했지만, 교육 수준이 낮거나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이 갖춰진 사람들이 고문으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초급 교육은 단순한 고문(이를테면, 《삼자경》과 같은 책 안에 있는 손쉬운 각운으로 된 대구들)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윌트 이데마(Wilt Idema)가 강조한 바와 같이, 그것은 가장 폭넓게 접근할 수 있는 문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잊혀진 청대의 수많은 영웅 전기소설들은 고문의 문체를 기본으로 하여, 완벽하게 글을 깨친 이들뿐 아니라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폭넓은 독자층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서게 했던 언어인 백화로 묘사된 수사가 간간이 섞여 있다. 이와 동시에 명말과 청대의 “문인소설”이었던 중국 소설의 위대한 걸작들 대부분은 “대중적인” 백화로 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 백화문은 고도로 세련되고 구어적 성분이 풍부한 것으로 교육 수준이 낮거나 반문맹인 사람들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또 당연하게도 고문으로 씌어져 상위 영역(大雅之堂)에 자리 잡았던 장르들(이를테면, 고풍스러운 문체, 화려한 수사의 변문(騈文), 혹은 순수한 고문(古文)으로 씌어진 텍스트들)의 경우는 어느 정도 글을 깨쳤다고 해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자나 편자, 그리고 출판업자들은 유럽의 경우와 달리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출판물이 지리적으로 닿을 수 있는 범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앤 매클라렌(Anne E. Mclaren)이 「명말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Constructing New Reading Publics in Late Ming China」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의 독자들을 헤아릴 때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 사회언어학적으로 도달할 범위에 대해서는 고려해야만 했다.

위에서 살짝 언급한 대로, 글말의 여러 언어적 영역 간의 경계가 꼭 견고하거나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빌려오거나 겹치는 부분도 많았는데, 영웅 전기소설의 단순한 고문은 약간의 백화 표현으로 더욱 풍부해질 수 있었고, 백화로 된 텍스트는 고문에서 간결한 구절과 표현들을 빈번하게 빌려왔다. 이를테면, 주시(朱熹, 1130-1200년)와 같은 인물의 철학적 대화 역시 고문과 백화가 반반씩 섞여 있는 언어로 구성되었다.

글말이 겹친다는 사실은 대중과 엘리트문화를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결합시켜주는 문화적인 판단기준의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독서층과 비독서층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작용을 했다. 19세기 말의 선교사 아더 스미스(Arthur Smith)는 고문으로 된 격언이 지식인이건 문맹인이건 모든 중국인의 자산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대인들의 고전적인 지혜는 황제로부터 나이든 여성들까지 한(漢)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공통적인 유산이며, 사회의 모든 계층이 그러한 고전적인 지혜를 인용할 수 있었다” 사실상, 라틴어가 우세했던 시기의 유럽과 비교해보면, 중국의 이러한 언어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여러 사회적 계층이나 문해력 층위 사이에 다소 유동적이고 비교적 개방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중국의 문인들이 “대중”소설을 탐독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반문맹 심지어 글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경우도, 비록 읽지는 못 했겠지만, 대량의 고전 산문이나 비유를 듣거나 말하는 데는 익숙했다고 가정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중국의 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유럽에서 민족 국가가 부상함에 따라 언어적인 지형도가 상당히 극적으로 변모했다는 것과 대비해서 보아야 한다. 중국에서의 보편적인 글말의 사용은(확실히 그들 자신의 용례 규칙에 따라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지긴 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유럽에서는 그 시기 이전에 이미 여러 가지 특정한 지역어가 승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 말하고 쓰고 있었다. 유럽에서 라틴어가 여전히 엘리트의 언어로 통용되고 자국어 글말(written vernacular)은 이제 막 발전하고 있을 어느 시기에, 중국에서는 특히 교육의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했던 분위기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계층이동(social mobility)할 수 있는 언어환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와 어느 정도 문자 교육을 받았거나 완전히 문맹인 비엘리트 사이에 문화적 소통을 원활하게 해 주는 언어환경이 존재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자국어 글말에 의해 라틴어가 빛을 잃은 이후에는 상황이 차츰 역전되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자국어로 텍스트를 인쇄하고 교육 시스템이 변화함에 따라 유럽의 인구 가운데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이들의 비율이 점점 더 커져갔다. 또한 중요한 라틴어 텍스트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역시 기왕의 엘리트 문화에서 확정된 텍스트가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게 만들었고,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의 격차를 줄여주었으며, 도서 문화가 여러 민족국가와 언어공동체 단위로 쪼개질 때 생기는 곤란함을 덜어주었다. 중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과거제도의 엄격한 언어적 요구로 인해, 과거시험에 급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있는 상위 영역의 중국어를 읽을 수 있는 이들과 단지 단순한 고문 정도만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혀 읽을 수 없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이의 구분이 계속 유지되었다.

게다가 과거시험과 출사를 중시한 결과 중국에서는 유럽에 비해서 글쓰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교육받거나 아무런 교육도 못 받은 사람들 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일상적 의사소통과 문화적 응집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을 하고 글을 쓸 때 고문과 백화문의 용법이 겹친다는 사실은 확실히 그러한 격차를 줄이는 가교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신분, 정치적 권력, 부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를 보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과거에서 합격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과 나머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여전히 컸던 것이다.

교육과 독서의 전통

네 번째, 중국에서는 다양한 교육과 주해(註解)의 전통이 인쇄본의 이용과 실제 독서 행위를 규정했다. 성인의 가르침을 담은 성스로운 보고(寶庫)로서, 또 과거시험의 기본 교재로서 오랜 기간 십삼경을 으뜸으로 여겨왔던 탓에 이런 유가 경전들은 확실한 베스트셀러였다. 원대 이래로 십삼경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텍스트로 여겨져 왔던 사서(四書)는 젊은 남학생들이 첫 번째로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 대상이었다. 공부에 입문하는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책들을 외우는 것이었다. 본문 암송에 성공해야만, 그 안에 담긴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었는데, 보통은 관에서 인정한 대량의 협주(夾注)의 도움을 받았다. 명청 시기에는 사서에 대한 주시(朱熹)의 주해인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과거시험의 기본서가 되었다. 그래서 매우 어린 나이부터 학생들은 주석이 달린 텍스트 읽는 법을 배웠는데, 주석은 본문 사이에 “끼어들어” 해석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러 학자들은 이런 식의 독서법이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주석은 독자가 텍스트에 참여하고 대화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의 해석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폐쇄적 성격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주석은 경서와 가장 밀접한 연관을 맺었는데, 비록 [그 틀에 맞게] 다듬어진 형태이긴 하지만 결국 아(雅)문학에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인 명말에는 소설과 희곡에도 적용되었는데, 명말의 예저우(葉晝, 활동 기간은 1595-1624년), 진성탄(金聖嘆, 1608-1661년), 마오쭝강(毛宗崗, 활동 기간은 17세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독서 행위를 규정하는 이런 방식을 통해 중국에서의 엘리트 교육에 대한 관심이 도서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독자가 자신이 읽는 책에 대한 사유방식을 정할 때, 아마도 그러한 독서법이 상당한 영향을 행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 속의 삽화의 역할 또한 독서 행위라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실용적인 입문서의 경우 분명 삽화는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용 설명에 도움을 주었다. 이를테면 명말과 청대 상업 출판에서 구급방(자가진단 치료안내서)는 주요한 부분이었는데, 질병의 증상을 그린 그림들은 이런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소설이나 문학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삽화들은 훨씬 복잡했다. 삽화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이야기를 읽고 이해할 때 독자가 받는 영향이 달랐다. 아래에는 본문 내용을 인쇄하고 위에는 삽화를 그려 넣은 상도하문(上圖下文)의 형식도 있었고, 한 쪽 전체나 반 쪽에 “삽화를 끼워 넣는” 방식도 다양했으며, 삽화를 텍스트의 시작 부분에 모두 모아 놓는 관도(冠圖)와 같은 형태도 있었기 때문이다. 앤 버커스 채슨(Anne Burkus-Chasson)은 자신의 「시각적 해석학과 페이지 넘기기 행위: 류위안(劉源)의 능연각(凌煙閣)의 계보(Visual Hermeneutics and the Act of Turning the Leaf: A Genealogy of Liu Yuan’s Lingyan ge)」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고상한 문인 독자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 분명한 특정 텍스트를 이용해, 삽화와 본문이 독자를 안내하면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쇄본 서책의 교훈적인 삽화들(Didactic Illustrations in Printed Books)」에서 줄리아 머레이(Julia Murray)는 약간 다른 접근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다른 형식의 시각적 재현의 맥락에서 삽화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모델이 되어 그림으로 재현될 때, 인쇄본에 나오는 모습과 다른 매체가, 이를 테면 석각 부조나 회화에 나오는 모습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명청 시기 시각 문화에서 목판 삽화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따져 물었으며, 그림이 어떤 방식으로 보편 문화의 전파에 기여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서적사를 연구할 때는 손으로 베껴 옮긴 텍스트나 필사본[抄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명말과 청초에 인쇄본이 중국의 독자들을 “정복한” 다음에도 필사본의 생산과 이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서구의 책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경우에도 문제가 된다. 즉, 비교적 늦은 시기인 15세기 유럽에서 활자가 발명된 뒤에도 필사본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예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으로 옮겨 쓰거나 필사한 텍스트의 중요성이 중국에서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서 수집가들은 훌륭한 필치로 교감(校勘)까지 거친 필사본을 소장하기 위해 돈을 썼는데, 이 경우 필사본은 여타의 열등한 인쇄본에 비해 훨씬 높은 가치를 지녔다. 서구의 도서와는 달리, 중국의 목판 인쇄본은 사실상 필사본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아하면서도 매력적인 붓글씨로 작성되어 필사본의 모습으로 재 탄생한 책을 최고로 치는 경우가 많았다.

필사본 전통의 지속과 필사 행위 자체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었는데, 이는 서구의 도서 문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돈이 없어서 손으로 베껴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너무 가난해서 책을 구입할 수 없었던 독자들은 (드문 경우지만, 자신의 책을 빌려줄 정도로 충분히 관대한 수집가를 찾을 수 있다면) 책을 빌려서 필사해야만 했다. 책을 베껴쓰는 것은 존경을 표하거나 공덕을 쌓는 방법이기도 했다. 불경을 베껴 쓰거나(때때로 자신의 피를 이용했다) 돈을 줘서 불경을 베끼게 하는 행위는 확실히 흔한 일이었는데, 이는 부처에게 귀의했다는 것을 천명하거나 종교적인 공덕을 쌓는 대중적인 방법이었다. 공부의 일환으로 경전과 같은 텍스트들도 필사했는데, 이것은 개인적으로 텍스트를 재생산함으로써 거기에 몰입하거나 “소유하는” 방법이었다.

엘리트 계층에게 특정한 유형의 필사본은 인쇄본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다. 이를테면 개인적 성향이 강하고, [흔히 회도(誨盜)라 일컫는] 불온한 성격이 잠재해 있거나, 또는 [회음(誨淫)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성(性)적인 묘사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허구 작품들을 들 수 있겠다. 인쇄본으로 만들어지면 유통이 통제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제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게 되는데, 과연 엘리트들의 눈에는 인쇄본이 잠정적으로 위험하고 막되먹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로버트 헤겔(Robert E. Hegel)은 「명청 시기 소설의 틈새시장(Niche Marketing for Late Imperial Chinese Fiction)」에서 손으로 베껴 쓴 “사적인” 필사본이 명말과 특히 청대 문인소설의 유통에서 선호되었던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송대(宋代)이래로 많은 문인들이 인쇄본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글쓰기가 갖는 특별한 지위를 지켜내고 싶었던 작가들은 인쇄본에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 필사를 선호하는 때도 많았다. 기술상의 비밀이나 집안의 의술, 또는 이단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종교적 교의를 전수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 경우 필사를 이용하여 후손이나 동료 신도들 위해 비기(秘技)를 보존하고 신앙을 기록하면서, 그러한 비법과 믿음이 널리 퍼지는 것을 제한했던 것이다. 필사문화가 지속되었던 이유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들자면, 조셉 맥더모트(Joseph McDermott)가 「중국에서의 인쇄본의 우세(The Ascendance of the Imprint in China)」에서 지적한 대로, 심지어 출판 붐이 가장 고조되었던 시기인 명말에도 인쇄본을 구하기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유한 독자나 수집가들조차도 구하기 어려운 텍스트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필사를 포기할 수 없어, 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끼거나 사람을 고용해 베껴야 했다. 최소한 명청 시기 전체를 통틀어 중국의 도서 문화는 사실상 인쇄와 필사가 공존했던 것이다.

출판에서의 조정의 역할

다섯 번째, 유럽은 정치적인 분열로 말미암아 정부와 출판 산업 사이의 관계가 중국과는 사뭇 달랐다. 중국의 경우 15세기 중엽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비록 명과 청 두 왕조로 나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제국의 조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송조(宋朝) 이래로, 중국의 조정은 출판과 관련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비교적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법전과 법령, 과거시험 문제와 합격자 명단, 그리고 공식적인 달력과 같은 필수적인 정부 문서들을 만들었고, 6부 아문에서 필요한 서식이나 방문(榜文), 등기부 등을 인쇄했으며, 종종 지방의 관청과 학교에 공급할 중요한 텍스트의 공식 판본을 확정했다는 사실이다. 각 성과 현의 정부에서는 책임지고 지방의 관학에서 필요한 책이나 지방지 등을 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정은 출판 산업의 중요한 부문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과연 대부분의 중국 출판 연구자들은 출판업을 관각(官刻)과 사각(私刻) 또는 가각(家刻), 그리고 방각(坊刻)이라는 세 가지 분야로 나눈다.

그러나 명청 시기에는 조정이 이렇게 깔끔한(사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한) 삼각구도를 통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어떤 종류의 책을 출판할 수 있고 출판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중앙 정부가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명백하게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정 단위의 관청에서는 명백하게 상업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에 판매하여 돈을 벌기 위해 특정한 대중 서적을 출판했던 것이다. 이렇듯 정부는(또한, 캐서린 칼리츠(Katherine Carlitz)가 이 책에 실린 논문에서 분명하게 밝힌 대로, 문인 출판업자들도) 도서 시장에 참여했다. 이를테면 난징의 국자감(國子監)과 베이징의 사례감(司禮監), 도찰원(都察院)에서는 명의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여러 판본들을 찍어냈다. 비록 이 책에서 드러나는 충성과 정통성이라는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상업적인 목적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위해 조정에서 이 작품의 유포에 관심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를 관통하는 동안 유럽의 정부가, 또는 피터 코르니키(Peter Kornicki)가 일본의 책에 대한 백과전서식 연구에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일본의 정부가 수행했던 역할보다, 중국의 조정은 훨씬 더 능동적으로 활약했던 것 같다. 전성기의 청 왕조가 대대적으로 도서를 수집하고 간행했던 프로젝트는(이를테면, 《사고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그리고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板叢書)》 등과 같은) 조정이 인쇄의 힘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으며,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 얼마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는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출판 사업 참여는 모든 행정 단위의 관청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정점에는 중앙정부의 출판 담당 부서가 있었다. 바로 청대의 무영전(武英殿)에 있던 수서처(修書處)가 그 유명한 예이다. 여기에는 수백 명의 일꾼들이 고용되어 당대 최고의 판본들을 찍어내었는데, 활자로 인쇄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板叢書)》도 포함되어 있다. 명대에는 왕부(王府)도 중요한 출판업자 가운데 하나였다. 명대 왕부에서 펴낸 책의 숫자는 250에서 350권에 그칠 정도로 그리 많지 않지만, 선본을 구할 수 있는 그들의 재력과 출판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펴낸 많은 책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나온 것 가운데 최고의 판본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이를테면 이 책의 논문 가운데 한 편에 실려 있는 삽화를 볼 것. 왕부본(王府本) 《성적도(聖蹟圖)》(1545년경)에 실린 것이다].

성과 현 수준의 인쇄소에서도 경전이나 지방지, 《강희자전(康熙字典)》과 같은 사전, 그리고 황실에서 지원한 《의종금감(醫宗金鑒)》과 같은 의료 지침서, 또는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심지어 아(雅)문학이나 소설 작품 등에 대한 표준판을 펴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많은 텍스트가 지방의 향교나 사설 학당에 배포되어 정부에서 공인한 주요 텍스트를 확실하게 학습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출판은 부분적으로 교육의 정통성과 통합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능하였다. 19세기 말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뒤, 동치제(同治帝; 재위 기간은 1861-1875년)는 난리 통에 훼손된 저작들을 관리와 학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각 성의 출판 담당 부서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 요컨대 서적의 생산과 보급이 적절한 교육과 훌륭한 조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조정이 출판에 대해 열성적인 관심을 보인 데에는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가혹한 문자옥이 바로 그것인데, 강희제(康熙帝; 재위 기간은 1661-1722년)와 옹정제(雍正帝; 재위 기간은 1723-1735년) 때도 진행되었고, 건륭제(乾隆) 때 가장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유럽과 심지어 일본과 대비해보면 규제와 검열에 이르는 방식의 측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대나 청대에는 텍스트에 대한 체계적인 사전 검열을 진행할 효과적인 정부 기구도 없었고 통상적인 절차도 없었던 데 반해, 이를테면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검열을 위해 필사본을 검열 위원회에 제출해야 했다. 1778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새로운 책이 출판되기 전에 지방의 교육 담당 관리가 필사본을 심사해 승인을 하도록 했지만, 이러한 규정이 지속적이고 그리고 조직적으로 강제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인되지 않은 달력, 예언서, 반정부 불온문건, 정부의 비밀 문서, “음란한” 문학 작품 등 특정한 유형의 텍스트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 조치는 확실히 있었지만, 출판 전에 이런 범주에 포함될 수도 있는 책들을 통상적으로 걸러내기 위한 시스템이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적용된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청의 조정은 사후에, 곧 이런 책들이 출판되고 유통된 이후에야 불법화했다.

프랑스 정부의 출판 통제가 더 조직적이었다고 해서, 그렇다고 반드시 더 잔혹했다는 것은 아니다. 청조의 문자옥이 야만적이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유럽에는 복수의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정부가 어떤 개체에게 통제를 가하려 할 때 그 개체는 해당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 뇌샤뗄의 인쇄공 협회(Société typographique de Neuchâtel)의 사업이 번창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된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금지되었지만 국경 너머 스위스에서는 합법적으로 출판될 수 있는 책들을 다시 프랑스에 공급했던 것이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단일한 정부가 통괄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단속 회피 수단을 사용하기가 더 어려웠다. 중국정부의 입장에서는 검열과 처벌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활동에서 주요한 표적은 청의 통치를 뒤엎으려 하거나 만주인들에게 적대적인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문자옥이었다.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는 검열이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중국은 땅이 넓기도 하거니와 목판인쇄는 확산과 이동이 비교적 용이해서 내부적인 통제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확실히 정부가 아무리 철저한 방식을 사용한다 해도 달력이나 예언서, 또는 “비도덕적이고 음란한 대중소설”의 출판을 제한할 수 없었다.

유럽의 경우 정부는 단속에 힘을 들였고, 국외 출판업자들은 “스캔들이 될 만한” 텍스트 출판에 강렬한 욕망이 있었으며, 작가들은 지금 우리가 지적 재산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요구를 키워나가면서, 그 사이에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그 특수한 긴장 상황으로 인해 종국에는 저작권과 판권과 연결된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그럴 정도로 [출판이나 저작권에 대한] 법이 발달하지 않았다. 작자들은 물론 해적판이 나오는 것을 우려했다. 이를테면, 주시(朱熹)는 자신의 《사서혹문(四書或問)》을 조악하게 펴낸 해적판의 목판을 없애줄 것을 현승(縣丞)에게 탄원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저자들이 자신의 저작을 조잡하게 펴낸 해적판에 대해 분노를 표했다. 출판업자들 역시 자신들이 펴낸 책을 허락받지 않고 다시 찍어내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어, 명청 시기에 출판된 책에는 “번각을 금한다(翻刻必究)”는 경고문이 포함된 채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가 어떤 법령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으며, 중국의 작자와 출판업자들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작자나 출판업자들에게 제공되었던 것과 같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보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저작권이나 판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한 법적 규정이 발달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에 대한 일반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 책 가운데는 확실히 개인 저자가 “지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서(類書)나 대련(對聯) 선집, 경전 주해본과 같은 그렇지 않은 책들도 많았다. 이 경우 그 역할을 정확히 규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군의 사람들의 이름을 달고 출판되었다. 중국 책의 제목이 있는 페이지를 보면, 출판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쭉 적어내려 간 명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저자 혹은 편집자의 친척이나 친구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들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몇 가지만 들자면 평선(評選), 교정(校訂), 증석(增釋), 참열(參閱) 등이다. 그런데 해당 텍스트의 출판에서 그들의 역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그러한 역할의 성격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데 어느 정도까지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작자”, 또 그 밖의 모든 참여자들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책” 자체에 대한 개념만 해도 이와 유사한 혼란이 존재한다. 맥더모트(McDermott)가 이 책에 실린 그의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20세기 이전 중국 책들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잡록(雜錄)이었다. 다시 말해 다양한 범주의 다른 책들에서 발췌한 인용문을 대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상태로 짜깁기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용문들 역시 같은 제목의 새로운 판에서는 삭제되거나 다른 인용문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짜집기 방식은 확실히 저작권이나 저작 과정에 연관된 여타의 기능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또한 한 권의 책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같은 제목과 같은 저자나 편자로 되어 있는 외견상 동일한 책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그다지 같지 않을 수 있었다. 상당히 다른 인용문과 문장의 결합, 그리고 변화의 폭이 상당히 넓은 다양한 권수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출판업자들은 동일한 책을 일련의 다른 서명으로 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연달아 나온 각각의 서명은 새롭게 개정하고 확장하거나 참신하게 삽화본으로 펴낸 것이라 광고했는데, 사실상 같은 책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한 권의 텍스트는, 혹은 동일한 서명으로 된 텍스트의 연합체는 정확하거나 고정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해적판 편집자뿐만 아니라 원래의 저자나 편자들까지도 상당히 자유롭게 텍스트의 구성 요소들을 조합하고 재조합할 수 있었다. 저작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권의 텍스트에 열거되어 있는 다양한 참여자들이 수행한 기능을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가? 한 권의 텍스트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중국의 서적 발전에 대해 연구할 때는 이 모든 문제들을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