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적사 2

신시아 J. 브로카우 Synthia J. Brokaw

중국의 책 역사에서의 여러 문제들: 중국과 서유럽

우리는 중국의 서적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지금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이 주제가 유럽과 미국에서 서적사를 연구하는 이들이 쌓아올린 커다란 학문적 성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도서 문화에 대해 그들이 제기했던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질문을 놓고 볼 때, 이 책에 글을 기고한 거의 모든 이들이 서적사 중에서도 서구 쪽 연구 성과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도움 받았다는 사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서적사와 중국의 서적사를 구분 짓는 매우 실제적인 차이들이 가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책에 관한 연구에서 나타나는 주제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 특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기술적인 조건들에 의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주제들은 강조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종종 서구의 역사에서 빌려온 역사 기술의 개념을 통해 수행된) 중국에 관한 연구의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책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중요한 주제들과 유럽이 겪었던 경험의 특수성 모두를 반영하는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쇄 기술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하며 또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인쇄 기술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서구와의 차이점은 꽤나 분명하다. 20세기 이전의 중국 인쇄는 주로 목판 기술이 우세했는데,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그것을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인쇄했다. 확실한 것은 목판 인쇄가 중국의 인쇄업자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술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친족의 유대를 유지하기’ : 청(淸)과 민국 시기 쟝쑤(江蘇)와 저쟝(浙江) 지역의 족보 전문가와 족보 생산(‘Preserving the Bonds of Kin’: Genealogy Masters and Genealogy Production in the Jiangsu-Zhejiang Area in the Qing and Republican Periods)」이라는 글에서 쉬샤오만(徐小蠻)의 설명에 따르자면 중국에서는 11 세기 이전에 이미 활자 인쇄가 발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목판 인쇄는 여전히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 수 천 개의 글자 모양을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는 중국어의 속성 상 대부분의 인쇄업자에게 활자의 사용은 재정적으로 실용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금속 활자로 찍어낸 텍스트의 양이 매우 방대했으며, 조정에서 이것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데, 개별적인 인쇄업자와는 달리 조정에서는 (최소한 20만 개의 글자체를 요구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반드시 필요한 막대한 양의 글자체를 생산하기 위해 자본을 댈 수 있었다. 목활자 인쇄는 그보다는 조금 더 매력적인 것이어서, 실제로 명말 이래로 인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은 족보와 같이 다른 글자를 비교적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주 되풀이해서 찍어냈던 매우 정형화된 텍스트를 인쇄할 때 널리 사용되었다. 판각 비용이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한, 목판 인쇄는 경제성을 염두에 두는 출판업자들에게는 좀 더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이러한 기술의 차이가 일련의 또 다른 차이들을 만들어내었다. 15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구에서 지배적인 기술이었던 활자 인쇄는 단일한 텍스트에 대한 복수의 복사본을 신속하게 인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활자인쇄가 중국의 조정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신속한 인쇄 속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판을 짜는 업무(組版)를 고려한다면, 활자인쇄는 단일한 텍스트에 대한 꾸준한 수요가 존재할 때 적합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책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전체 텍스트를 한 장 한 장 다시 짜야하는, 힘도 들고 돈도 드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활자 인쇄 방식을 사용하는 인쇄업자는 자신의 사업체를 세우고 활자를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우선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새로운 책을 인쇄할 때마다 당장 필요한 수량보다 더 많이 찍어야 했기 때문에 비용이 늘어났고, 또 보관비용이나 판매부진의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어떤 책의 대중성과 “시장성”을 예측하고, 그러한 예측에 맞춰 자금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수지타산도 엄청나게 잘 해야만 했다.

목판 인쇄의 경우는 문제가 약간 달랐다. 초기의 판각 비용이 확실히 인쇄 과정에서 가장 큰 지출이었다. 하지만 이 비용이 너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는데, 판각 작업에는 오랜 숙련 기간도 필요 없었고 심지어 글을 몰라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판각을 마치면 책의 인쇄량이 많건 적건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수량이나 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을 딱 그만큼만 찍어내면 되었다. 어떤 책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도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큰돈이 들지 않았다. 원래의 판목에 단순히 종이를 대고 찍어내면 끝이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인쇄 방법에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 즉 일단 서판이 만들어지면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고, 텍스트에 수정할 곳이 생기면 그때마다 고쳐서 쓸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인쇄업자와 저자는 과도하게 많은 양을 지금 당장 억지로 찍어내지 않고, 많건 적건 그때 필요한 수요를 충당할 만큼의 수량만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서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관이라는 문제는 피할 수 없었는데, 판목은 완성된 책보다 훨씬 부피가 컸기 때문이다. 목판 인쇄 사업에서는 판목 보관이라는 문제가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대상이자 잠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목판 인쇄 기술의 경우 서구의 인쇄업자들이 직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일련의 경제적인 고려를 해야만 했다. 이것은 또 여러 방면에서 서적 산업의 구조와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 목판 인쇄는 인쇄 산업의 조직 안에서 더 큰 이동성과 분산을 허용하게 되었다. 판목은 운반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각공들은 단지 손쉽게 휴대할 수 있는 공구 세트만 필요했기 때문에 쉽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나의 텍스트 혹은 한 벌의 텍스트를 출판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개별적인 문인들이나 경전과 종교적인 소책자의 출판을 후원할 뜻이 있는 종교 기관에 자신의 용역을 제공하였다. 출판 주체(문인이나 종교 기관)가 적절한 단단한 나무(배나무, 대추나무, 개오동나무, 녹나무 등)와 종이 그리고 인쇄용 먹(소나무 숲이 있는 곳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먹)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 많든 적든 그가 만들 수 있는 수량에 맞추어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명청 시기에는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출판사도 존재했지만, 중국에서는 인쇄 작업, 특히 소규모의 인쇄 작업이 확산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았다.

둘째, 유럽의 15, 16세기에는 인쇄 모형을 만들어냈던 일련의 노동자들(활자 제조공, 조판공, 인쇄 총감독)에게 전문적인 기술이나 교육 수준 같은 것이 요구되었지만, 목판을 새기는 일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었다. 활자 제조공은 숙련된 주물공이어야 했던 반면에, 목판을 새기는 데에 전제 조건으로 무슨 대단한 손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물론 고급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매우 숙련된 각공이 요구되기는 했지만, 중국의 각공은 아마도 2-3년 정도의 짧은 수습기간을 거친 후에 바로 작업에 뛰어들 수도 있었다. 종교 기관에서는 싼 값에 판목을 새기기 위해 심지어 미숙련공(신자나 여성, 농한기의 농민)을 고용하기도 했다. 각공은 충분히 글을 읽고 쓸 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몇 가지 글자만 알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판목을 새기는 데에는 이런 정도로 글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불필요했다. 물론 각공이 자신감을 갖고 일을 하고 나아가 각공 스스로 잘못을 잡아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바람직한 것이긴 했지만, 기술 자체만 놓고 본다면 글을 아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목판 위에 글자가 입혀지면, 각공은 그 글자 모양대로 나무를 새기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인구통계학적인 변화

독특한 방식으로 중국의 인쇄업을 틀 지운 두 번째 요인은 인구 통계학이었다. 명말에 중국은 엄청난 인구 증가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로 인한 인구 통계학적인 변화는 1500년과 1650년 사이에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남으로써 최고치에 이르게 된다. 인구 증가만이 책의 수요를 증가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국의 사회 정치적인 맥락에서는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련의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 확실한 경로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교육은 출세의 길로 나아가는 수단으로서 높이 그리고 폭넓게 평가되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것에 대한 엄격한 사회적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15세기까지 이론적으로나 법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사회 계층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교육열이 고조되었다. 명말에는 엘리트들이 대중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서와 같은 “더 쉬운” 경전을 확대 보급하기 위한 텍스트들도 저술했는데, 이 역시 교육열을 자극하는데 어느 정도 일조했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시기에도 사설 학교(書院), 지역의 학교(社學), 무상 혹은 자선 학교(義學)와 같은 교육기관이 성장하고 더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에 따라 책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인구 증가는 인건비를 억누르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수요가 많아진다고 해서 책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이들 두 가지 요인(안정적이거나 더 낮은 인건비와 결합된 수요의 증가)은 명말에서 청대에 이르는 동안, 출판업이 눈에 띄게 팽창하게 된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반면에 그 당시 유럽의 인구는 상당히 적었고, 사회 구조는 더 견고했다. 중국의 과거 시험과 같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대중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바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또 시골과 도시간의 문화적인 분할이 비교적 확연하게 이루어져서, “교육과 도서 구입은 주로 도시 거주민에게 한정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최소한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 동안에는, 중국의 도서 시장이 유럽의 경우보다 상당히 더 크고 더 넓게 퍼져 있었던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