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 쑤저우蘇州 4

성 남쪽으로

쑤저우 중심부에 들어가려면 쑨라오챠오(孫老橋)라는 곳에서 우회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칭으로 보아 인명에서 유래한 다리인 듯하다. 근처에는 쑨쥔팡(孫君坊)이라는 방표도 서 있다. 쑨 아무개라는 노인에서 유래한 것인지, 쑨 씨와 연고가 있는 다리인지, 땅인지. 쑨라오챠오 일대에도 유력자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일대는 1등지이다. 쑨라오챠오에서 동쪽은 번화가이다. 요정도 있고, 예의 모든 이가 돈을 갹출하여 가로를 포장했다고 하는 일대에서도 가깝다. 다리 서쪽은 관공서이다. 조금 북쪽은 과거시험장이었다. 과거 시험을 치를 때는 지사(知事) 주최의 파티가 있었는데, 그 회장도 시험장에 인접해 설치되었다. 이것이 빈싱관(賓興館)이다. 옆에 걸쳐 있는 밍쩌챠오(明澤橋)는 놀랍게도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걸쳐 있다. 두 개가 아니면 사람들을 다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일까? 쑤저우에서도 진기한 케이스이다.

그 인근은 1등지 가운데서도 특히 빼어난 토지답게, 북송 말 휘종 황제가 집착해서 유명해진 화석강(花石綱)에 손을 대 한 몫 잡은 주몐(朱勔)이 인가를 내몰고 매점(買占)을 꾀했던 곳이다. 내몰린 집이 500을 넘었다고 한다. 지도에서는 보고 알아낼 수 없지만, 상당한 인가 밀집지이다. 생각해 보면 관청가와 문교 지구, 환락가와 상업 지구에 인접한 듯하다. 인기가 있는 게 당연하다.

지금 우리가 떠있는 디이즈허(第一直河)에서 직진하면, 금은 세공물에 관한 지명이 나온다. 졘진챠오(翦金橋)이다. 송대에는 금은 세공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은제품이 진귀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은 발굴품에 은제품이 많은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정부에서 그런 풍조가 퍼지는 것을 간과했을 리 없다. 사치 금지령을 내려 사치스러운 풍조가 국민에게 침투하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금은의 세공 기술이 향상되어 그에 따라 제품이 민간에 유포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시대는 경제 발전이 현저했던 시대였다. 금은 세공사들은 복잡한 생산 조직을 만들어 제품을 내보냈다.

금은은 제품의 성격상, 대도시에서 수요가 많았다. 직인은 대도시에 이주해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이 발전을 도모했던 것은 카이펑, 항저우, 쑤저우와 같은 대도시였다. 남송의 수도인 항저우, 즉 린안(臨安)에서는 수십, 수백 집이 밀집해 있었던 것으로 그 번영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일종의 직인(職人)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듯하다. 직인 마을이 있었다면, 당연히 지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쑤저우에는 인딩챠오(銀錠橋) 등과 같은 지명도 있다. 이와 같이 금은 세공에 관한 지명과 다리 이름이 있었던 것은 직인 마을이 출현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앞서의 운하를 북상해서 과거 시험장인 공원(貢院)을 거쳐 직인 마을을 바라보면, 이윽고 창먼(閶門) 근방에 이른다. [이쯤 되면] 이곳은 이미 성 밖으로 향하는 코스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직진하지 않고 우회전한다. 마을의 중심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회전하면 정관(亭館)이 늘어서 있다. 앞서 서술한 요정가이다. 운하를 따라 요정이 이어졌다. 그런 경관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다. 도쿄의 수로를 배로 돌 때 천변에서 똑같은 경관을 보았다. 안으로 깊숙한 일본의 가옥과 버드나무가 살짝 수면에 비쳤다.

이 일대는 술집과 화류계가 있는 곳이었다. 명대가 되면, 쑤저우에도 거룻배가 떴고, 유녀(游女)와 관현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형형색색으로 치장한 여성을 태운 배는 이곳에서 배를 저어나갔던 듯하다. 그 모습은 《쑤저우화방록(蘇州畵舫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화방은 거룻배이다. 이 책은 환락의 세계에 몸을 맡긴 유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도시가 있으면 환락가가 있고, 환락가가 있으면 여성과 폭력이 준동한다. 에도(江戶)의 오가와바타(大川端)에도 많은 배가 뜨고, 환락을 즐기는 모습이 있었다. [호객꾼들이] “요시와라로 모시겠습니다(吉原へ御案內)”라는 소리를 한 층 더 내지르고, 뒤돌아 버들을 바라보는 것이 에도의 오가와바타(大川端)의 경물이었다. 똑같은 풍경이 여기에서도 보여졌던 것일까?

환락가는 상업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일대에서 쑤저우 중심의 다리인 러챠오(樂橋) 일대까지 곳곳에 그런 주루가 있었던 듯하고, 이것을 짐작케 하는 건물과 지명이 있다. 고층의 주루도 있는 번화가는 또한 서민의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카이펑의 시내에 거대한 주루가 몇 개 있었는지 모르지만, 《청명상하도》에는 주루의 본점과 지점이 그려져 있다. 지점은 당시에는 각점(脚店)이라 불렸다. 어느 것이든 독특한 장식을 붙이고 있었다. 쑤저우는 천국으로 비유되었던 풍요로운 도시였다. 그 번화함에 우미(優美)함도 더해져 문인 묵객이 노닐던 곳이었을 것이다. 운하를 배로 유유히 가노라면, 술에 취해 유녀와 웃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성의 북쪽으로

이 일대에서 좌회전할 수 있다. 디얼즈허(第二直河)에서 북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곳은 번화가이다. 이제 우리가 나아가는 코스는 번화가를 누비며 나아가는 것이다.

일단 상륙해 보기로 하자. 인마챠오(飮馬橋)에서 배를 내린다. 양측에는 방표가 서 있다. 이곳이 후룽졔(護龍街)이다. 북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는 쑤저우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바오언쓰(報恩寺)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 현재 베이쓰타(北寺塔)라 불리는 거대한 탑을 보는 것은 조금 무리일지도 모른다.

조금씩 북쪽으로 향해 걷는다. 이 쪽도 관청가와 가깝다. 핑쟝부(平江府), 당시에 쑤저우를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이 핑쟝부의 창고도 있다. 부창(府倉)은 큰길에 면해 있지는 않은데, 오른쪽에는 차장(茶場), 염창(鹽倉)이 보인다. 북상하면 큰 누각이 있다. 콰졔러우(跨街樓)이다. 이름은 ‘거리를 가로지르는(跨街)’ 것이지만 가로에 걸쳐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요정일까? 부근에는 굉장한 건물들이 많은 듯하다.

어쩌면 관청이나 상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 사이로 틀림없이 소성(小城)의 성벽이 언뜻언뜻 보였을 것이다.

보통의 인가도 많았다고 생각되는데, 지도에는 별로 나와 있지 않다.

여행할 때 한손에 들어가는 현지 작성의 지도를 생각하면 좋겠다. 기념비적인 건물과 도로 표지가 되는 것 이외의 일반적인 것은 거의 그려져 있지 않다. 송대의 지도도 마찬가지였다. 쑨라오챠오(孫老橋) 근방의 500여 가구가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다. [중국은] 유명한 관료 국가이다. [그런 만큼] 관청에 관계된 것이 먼저 우선적으로 기입된다.

러챠오(樂橋) 일대

북으로 나아가면 러챠오 일대가 나온다. 쑤저우 최대의 번화가이다. 뿐만 아니라 도심이기도 하다. 성 안이 이 다리를 기점으로 나뉘고 호칭될 정도의 장소이다. 단순히 지형적인 도시 한 가운데라고 부르는 것만이 아니다. 이 일대에도 경제적인 지명이 많다. 아무래도 당대에 저자(市)가 있던 장소인 듯하다.

당은 도시의 상업구를 정해 놓았다. 이것을 시제(市制)라 했다. 이것은 꼭 당 고유의 제도는 아니다. 옛날부터의 중국 전통의 도시제도 가운데 하나로서 엄격하게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창안(長安)의 경우, 동서 양시(兩市)가 있었다. 쑤저우의 경우, 러챠오 옆에 두 개의 시가 있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이제 탐방하고 있는 곳이다. 지명에 경제 관계의 어휘가 많은 것은 그러한 현상의 하나이다. 시와 길드를 나타내는 항(行) 자가 붙은 지명도 많다. 간선 도로도 복잡해서 점포가 북적댔을 것이다.

당의 방제(坊制) 붕괴는 당연히 시제(市制)의 붕괴를 초래했다. 일찍이 구획 안에 갇혀 있던 경제는 시제의 붕괴에 발맞추어 도시 전체로 흩어져 갔다. 지리적인 이점을 구해서, 이익을 꾀하기 쉬운 곳으로 점포가 옮겨갔던 것이다.

하지만 상인들은 장사를 위해 예전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이것이 항(行)이라 불렸던 길드이다. 이것은 예전의 저자(市) 안에서 동업자가 하나의 장소에 모여 공동 행위를 행하는 것에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던 듯하다.

시제의 붕괴가 도시 안에서 상점을 흩어놓았다. 그래서 성 안의 여기저기에 경제적 용어에서 파생된 지명이 빈번하게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저자(市) 거리 뒤쪽에 여전히 경제 용어와 관계있는 지명이 많고, 점포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물며 그 지역이 경제적 번영을 이어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러챠오 근방에는 많은 점포가 집중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모항(某巷) 모시(某市) 등으로 부르는 지명, 다리 이름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인가가 없을 리 없다. 구리를 중시했던 송은 번번이 구리의 무제한적인 사용을 금하는 동금(銅禁)을 내놓았다. 이때에 동을 묻어 숨겼던 이가 조화를 부린 사물에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러챠오 근방의 전설로 전해진다. 묻어놓았던 방울이 변해 아가씨가 있는 곳에 몰래 왔다고 하는 것이다.

쑤저우는 대체로 각 시대를 꿰뚫어 볼 때 서쪽이 번성했다. 서쪽에 대운하가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창먼(閶門) 부근이 번화해서 많은 상점과 인가가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서 동쪽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뒤에 창수 현(常熟縣) 일대의 개발이 진척되어 쌀 생산량이 오르면서 이 일대도 성황을 보였지만, 지금 우리가 방문하는 시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쪽 특히 북서부가 번화했던 것이다.

그런 번영의 방식 차이는 주민의 기질의 차이로도 드러난다. 명대의 사람들은 말한다. 서쪽 사람들은 경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고. 이에 비해서 동쪽 사람들은 착실한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장사로 이익을 꾀하는 사람들과 토지와 농업의 경영으로 생계를 도모했던 사람들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차이는 성 안의 구조로까지 발전했다. 지도를 일별하면 알 수 있듯이, 남서부와 북서부의 구조가 뒤얽혀 있다. 그만큼 번화했을 것이다. 남동부도 뒤얽혀 있었지만, 관청이 많은 것과 선착장 등과 관계있는 지명이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일대에서 북상할 때는 디싼즈허(第三直河)와 디쓰즈허(第四直河)를 사용했는데, 도중에도 경제 용어를 지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북상한다. 여기는 이미 러챠오 북부이다. 왼쪽은 일종의 절이 밀집한 곳이다. 오른쪽은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모가교(某家橋)라는 지명이 많은 것을 보면, 예상외로 신개발지역인 지도 모른다. 간선 도로도 정연하게 되어 있다. 당대의 도시 형태에서 그다지 손보지 않은 듯하다.

이전의 러챠오 주변으로 되돌아가자. 북서부로의 회유(回遊)다. 이 일대에도 절 등이 많다. 길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메인 스트리트인 후룽졔(護龍街)의 양측에 줄줄이 방표가 서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대의 간선 도로와 방의 구획을 복원해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 메인 스트리트에 방표가 서 있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이 일대에는 우 현(吳縣)의 관청이 있다. 유명인도 살고 있다. 송을 대표하는 판중옌(范仲淹)과 관계있는 지명과 쑤저우를 대표하는 주창원(朱長文)의 집 등도 있다. 어느 것이든 그들의 이름이 지명에 붙어 있다.

그런 경향의 방 이름(坊名)은 성 남서부에도 약간 있다. 문교 지구가 가까워서 그런지 예의 스치 씨(侍其氏)가 이름을 남긴 지명도 이 일대이다. 송대의 소설 등을 읽으면 그들의 집에도 정원이 있어, 채소를 경작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쑤저우를 방문해 판중옌과 관계있는 지명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감격했다. 그렇게 넓지 않은 길이지만,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성이 서 있고, 세탁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던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