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탁오를 논한다卓吾論略

탁오를 논한다卓吾論略―전남滇南, 雲南에서1)

다음은 공약곡(孔若谷)이 말한 것이다.

나는 탁오거사(zhi)를 만났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 대략 논하게 되었다.

거사의 별호는 하나가 아니다. 탁오(卓吾)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탁’(卓) 또한 쓰는 사람마다 일정하지 않다. 거사는 자칭 ‘탁’(卓)이라고 하고, 관청의 인명 기록에서는 ‘독’(篤)이라고 했다. 그의 고향 사람들도 어떤 사람은 ‘독’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탁’이라고 하여, 일정하지 않다.

거사는 “우리 고향 방언에서는 ‘탁’과 ‘독’을 똑같이 발음한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고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건 쉬운 일이지요. 명주실 5천 근을 직공들이 모여 사는 거리의 인쇄 기술자에게 갖다 주고 부탁하기만 하면 바르게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거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 자네는 내가 쓸모가 많은 돈을 갖다 쓸모없는 것과 바꾸게 하려고 하는가? ‘탁’이 본래 나라면, ‘독’ 역시 나이다. 나를 ‘탁’이라고 한다 해도 나는 ‘탁’의 의미처럼 탁월하지 못하고, 나를 ‘독’이라고 한다 해도 나는 ‘독’의 의미처럼 독실하지 못하다. 어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가?”

그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사를 ‘탁’⋅‘독’ 두 가지로 병칭한다.

거사는 명(明)나라 가정(嘉靖) 정해년(丁亥年, 1527년) 10월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모친 태의인(太宜人) 서씨(徐氏)가 세상을 떠나서,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누구에게 의탁하여 자라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7세 때 부친 백재공(白齋公)의 가르침으로 책을 읽고 시를 지었으며, 예의범절을 익혔다. 12세 때 ‘노농노포론’(老農老圃論)2)을 주제로 글을 써보게 했는데, 여기서 거사는 “나는 그 때 이미 번지의 마음이 삼태기를 메고 가던 은자(隱者)3)나 지팡이를 짚고 가던 은자4)의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공구(孔丘) 어르신5)은 이를 참지 못해 ‘소인이로다! 번수야’라고 말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이 글이 나오자 동학들의 칭찬을 받았고, 사람들은 “백재공이 쓸 만한 자식을 두었구나”라고 했다.

이에 대해 거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때 비록 어렸지만 그런 억지 논의가 아직은 아버님께서 ‘쓸 만한 자식을 두었다’는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그들이 칭찬을 한 의도 역시 너무 천박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언변에 아주 뛰어난 것을 보고, 혹시 내가 장성하여 글 잘 하는 것으로 세상의 부귀를 빼앗아와서 빈천한 자기들을 구제해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 우리 아버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몰랐다. 우리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가? 신장은 일곱 척에, 눈은 이것저것 구차하게 넘보지 않으시고, 비록 매우 가난할지언정 때때로 나의 계모, 태의인 동씨(董氏)의 비녀나 귀고리를 벗겨 가지고 친구의 혼인에 급히 달려가도 모친 동씨는 말리지 못하셨을 정도이다. 속세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이것저것 예측하고 따져보아 미리 축하하는 것에 어찌 연연하시겠는가?”

조금 더 자라서 주희(朱熹)가 주석을 단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읽었는데, 어리벙벙하여 이해되는 것이 없어, 주자(朱子)의 깊은 마음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괴이하게 여겨, 더 이상 과거 시험에 전념하지 않고 그만 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너무 한가로워 세월을 보낼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탄식하며 “과거시험 보는 것은 단지 장난일 뿐이다. 그저 표절이라도 해서 남의 눈에 들기만 하면 충분할 뿐이다. 시험 담당관이 어찌 성인 공자의 심오한 정수에 일일이 통달한 사람이겠는가?”라고 생각하여, 당시 문장 중에서 참신하고 재미있는 것을 골라 날마다 몇 편 씩 암송하여, 시험장에 들어갈 때에는 500여 편을 암송하게 되었다. 시험 문제가 나붙자 외웠던 것을 깨끗하게 잘 베껴 내니, 높은 점수로 합격하였다. 거사는 “나에게 이런 행운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또 아버님은 연로하시고 남녀 동생들도 각각 장가가고 시집가야 할 때가 되었다”라는 생각 끝에 결국 벼슬길에 올라서, 아버님을 봉양하고, 남녀 동생들도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다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거사는 생각했다.

“나는 애초에 강남(江南)의 편한 곳에 일자리 하나 얻기를 원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 리 머나먼 공성(共城)으로 가게 되어, 도리어 아버님께 걱정만 끼쳐드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공성은 송(宋)나라 때 이지재가 부임했던 곳이요, 소요부의 안락와가 있었다.6) 소요부는 낙양에서 살게 되었을 때,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지재를 찾아가 도에 대해 물었었다. 우리 부자(父子) 역시 혹시 이곳에서 도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 비록 만 리 길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또한 듣자 하니 소씨는 각고 노력하여 학문에 힘써서, 만년에 성취한 바가 있어, 낙양으로 돌아온 이후에 혼인을 했다고 하는데, 이미 나이 40세였다고 한다. 만약 학문에 성취가 없었다면 그는 종신토록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29세 때 큰아들을 잃고 매우 슬퍼했다. 학문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단지 죽은 아들을 향한 애틋한 정만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면 강절(康節)을 보기가 더욱 부끄럽지 않겠는가!”

안락와는 소문산 백천(百泉) 근처에 있다. 거사는 천주(福建省 泉州)에서 태어났으니, 천주는 온릉선사(溫陵禪師)의 성장지이다. 거사는 “나는 온릉 사람이니 나의 호를 온릉거사(溫陵居士)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날마다 백천 근처에서 노닐면서 “나는 천(泉)(주)에서 태어났고, (백)천(泉)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으니, 천(泉)은 원래 나와 인연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기는 백천 사람이라고 했고, 또 백천거사(百泉居士)라고 호를 지었다. 5년 동안 백천에 있었지만 끝내 처음에 뜻했던 훌륭한 스승을 만나 도를 배우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남경(南京)의 국자감(國子監)으로 옮기게 되었다.

몇 달 후, 부친 백재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사(喪事)를 치르기 위해 관직을 사퇴하고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왜구가 날뛰어서 바다 근처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거사는 중간중간 위험을 무릅쓰고 밤에 다니고 낮에 숨으며, 여섯 달 남짓 지나서야 가까스로 고향 집에 도착했다. 고향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부친의 상사(喪事)를 치르는 자식의 도리를 다 할 겨를도 없이, 검게 물들인 상복을 입고7) 동생과 조카들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언덕에 올라가 딱다기를 치며 성을 수비했다. 성 밑에서는 화살과 돌이 끊임없이 날아다녀, 만 냥을 주어도 쌀 한 섬 들여올 상황이 못되었다. 거사의 가족은 30여 명으로, 살아갈 방도가 까마득했다. 결국 3년 상을 끝마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온 식구를 데리고 북경으로 이주했다. 그저 난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북경 사저에서 산 지 열 달이 되도록 부임할 결원 자리가 생기지 않아서, 가산이 바닥나 주머니가 텅 비었다. 그래서 건물을 빌려서 학생을 받았는데, 건물을 빌려서 학생을 가르치며 생활한 지 10여 개월만에 결원이 생겨서, 국자선생(國子先生, 즉 國子監博士)의 직함을 받아 복직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조부 죽헌(竹軒)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부음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거사의 차남 역시 병으로 북경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아아! 인생이 이토록 괴로운 것이란 말인가! 그 누가 벼슬살이는 즐겁다 했는가? 거사처럼 벼슬살이한다면 더욱 괴롭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조문하러 가서, 문을 들어서 거사를 보니,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거사가 말했다.

“내가 자네와 한 가지 상의할 것이 있네. 나의 선조․ 증조부․증조모께서 돌아가신 지 50여 년이 지났다네. 그런데 아직 고향 땅으로 유해를 모시지 못했네. 가난해서 장지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이번에 조부를 고향으로 모셔가지 못함으로써 거듭 미풍양속을 어기게 되면, 불효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을 걸세.

사람의 자손 된 자로서, 부모를 편하게 하는 것이 효도이지, 좋은 땅을 골라 자기만 위하고 조상의 유골이 노천에 드러나 비바람을 맞게 하는 것이 효도라는 말은 듣지 못했네. 하늘의 도는 신명스러우니, 결코 불효를 저지른 사람에게 길한 땅을 남겨 주려고 하지 않지 않겠나. 그러면 나의 불효의 죄는 속죄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무척 걱정된다네.

이번에 고향에 돌아갈 때 반드시 위로 3대(代) 조상의 유해가 고향 땅에 돌아가 편히 쉬시게 하고 싶네. 임시로 집안 식구들은 하내(河內)에 있게 하여, 부의금의 반을 가지고 밭을 사서 경작하며 먹고 살게 하고, 내가 나머지 반을 가지고 돌아가서 처리하면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네. 다만 집사람이 내 말을 따르지 않을까 염려될 뿐이라네. 내가 들어가 설득할테니, 그래도 혹시 듣지 않으면 자네가 이어서 설득해줄 것을 부탁하네.”

말을 마치고 거사는 안으로 들어가 거듭 설득을 했다. 부인 황의인8)이 말했다.

“그건 결코 옳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저의 어머니께서 연로하신데, 과부로 사시면서 저를 지키고 키우셨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잘 살고 있지만,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울면서 저를 그리워하시어, 두 눈이 안 보이게 되셨을 정도랍니다. 만약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필시 더 이상 살지 못하실 것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거사는 정색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황의인은 끝내 거사의 뜻을 어길 수 없음을 알고, 눈물을 거두며 안색을 고치고 작별의 말을 했다.

“그래요, 좋아요! 다만 저희 어머니께 나는 별 탈 없이 잘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머지 않아 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이장하는 일 잘 마무리되도록 힘쓰시고, 저는 돌아가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거사는 마침내 행장을 꾸리고, 밭을 사서 갈아 먹으면서 살고 있으라고 황의인에게 당부했다. 결국 그가 바라던대로 되었다.

그 때 권세를 휘두르던 탐관오리가 부자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으려고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수로를 개척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논밭에 물을 대던 수원지(水源池)를 터서 수로로 흘러나가게 하여, 논밭에 단 한 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게 했다. 거사가 그 때 관리를 만나, 있는 대로 사정하며 간청을 했지만 논밭에 물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사는 자신의 몇 무(畝) 정도 밭에 만이라도 물을 대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필시 허락해줄 것을 짐작했었지만, “아아! 하늘이여! 내가 어찌 온 마을 만 경(頃)의 논밭이 말라붙은 것을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서 나의 몇 무(畝) 밭에만 물을 대달라고 해서 풍작을 거두려고 할 수 있겠는가! 설령 내 밭에만 물을 대게 해준다고 해도 필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데, 어찌 나서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까지 하겠는가!”라 하고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해에 과연 크게 흉년이 들었다. 거사가 마련해주고 간 밭에서 거둔 수확이라고는 겨우 피 몇 곡(斛) 뿐이었다. 큰딸은 따라다니며 오랫동안 고생을 해보았기 때문에 밥을 먹듯 피를 먹으며 견디었지만, 둘째 딸과 세째 딸은 결국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병에 걸려 연달아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거사의 부인에게 어떤 노파가 한 가지 소식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는 터라 관청에서 곡식을 배급한다고 하는구려. 듣자 하니 그 일로 온 분이 등석양(鄧石陽) 추관(推官)이라는데, 그 분은 거사와 옛 친분이 있으니 한 번 부탁해봐요.” 그러나 황의인은 “아녀자는 바깥 일에 관여하는 법이 없으므로 안됩니다. 또 그 분이 만약 저의 남편과 옛 친분이 있다면, 어찌 꼭 부탁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뿐이었다.

과연 등석양은 자기 봉급에서 2성9)을 쪼개고, 동료들이 각각 두 냥 씩 갹출한 것을 편지와 더불어 두 번 보내왔다. 황의인은 그 반으로 양식을 사고 반으로 면화를 사서 옷감을 만들었다. 이렇게 3년 동안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모두가 등석양의 도움 때문이었다.

거사는 말했다. “그 때 집안 조상의 유해를 고향에 모시는 일을 무사히 마침으로써 3대 동안 쌓였던 숙원이 마무리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벼슬할 뜻이 없게 되었다. 고개 돌려 하늘 끝 저 먼 곳을 바라보면, 만 리 먼 곳에 있는 처자식을 향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공성(共城)으로 갔다. 문에 들어서서 식구들을 만나니 너무도 기뻤다. 두 딸 소식을 묻고서, 그제서야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 지 채 몇 달이 안 되어 모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황의인은 눈에 눈물이 마를 날 없이 살고 있었는데, 돌아온 거사를 보자 안색이 변했다. 이어서 인사를 하고, 이장은 잘 되었는지 묻고, (황의인의) 어머니는 편안히 잘 계신지 물었다. 거사는 말했다. “그 날 저녁, 나와 아내가 촛불을 켜고 마주 앉았는데, 그야말로 꿈만 같았다. 그동안 아내의 형편과 사정을 알게 되어, 나는 다정하게 위로해주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막신 굽이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10)

북경으로 가서, 예부사무11) 자리에 충원되었다. 거사에게 어떤 사람이 “사무라는 자리에 있어도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어, 국자감박사 때보다 더욱 심합니다. 당신은 참고 견딜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어느 곳에 간들 빈천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을 모르오?”라는 말을 했다. 이는 아마 거사가 관직을 그만 두지 않는 것을 비난한 것인 듯하다. 거사는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곤궁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곤궁하다는 것과 다릅니다. 곤궁함을 따지자면 도(道)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 더 곤궁한 것이 없고, 즐거움을 따지자면 자신의 처지를 편안히 여기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소. 내가 10년이 넘도록 남북으로 분주하게 다닌 것은 오직 집안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그래서 그동안 온릉(溫陵)⋅백천(百泉) 등의 편안함과 즐거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았지요. 듣자 하니 북경은 훌륭한 인물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하니, 이제 그들을 찾아가 배우겠소.”

그 사람은 “당신은 성격이 너무 좁아, 항상 남들에게 스스로 허물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잘 보니, 정말 도를 듣거든, 자신의 도량을 넓히는 것이 마땅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거사는 “그렇다, 사실 나는 좁다”라고 생각하고, 넓어지라는 뜻에서 스스로를 굉보(宏父)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또 굉보거사(宏父居士)가 되었다.

거사는 5년 동안 예부에 있으면서, 도의 묘한 이치를 탐구하는 데 전념했다. 그러면서 백재공이 구원(九原)12)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는 것을 한스러워 하며, 백재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로 인하여 스스로 사재거사(思齋居士)라는 호를 붙였다.

어느 날 나에게 “자네는 나를 안 지 오래 되었으니, 내가 죽거든 묘지(墓誌)를 좀 써주게. 그렇지만 내가 만약 친구 곁에서 죽거든, 모든 것을 친구가 하는대로 따라야 하네. 만약 길에서 죽거든, 반드시 수장(水葬) 또는 화장(火葬)을 할 것이요, 내 유골의 처리 문제로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되네. 그럴 경우 묘지는 쓸 수 없을 테니, 전(傳)을 쓰면 될 걸세”라는 말을 하기에, 나는 “제가 어떻게 거사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고호두13)같이 거사를 알아줄 사람이 있겠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략의 내용을 일단 쓰게 되었다.

그 후 내가 사방으로 돌아다닌 탓에, 오랫동안 거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금릉(金陵, 南京)에 있을 때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서술할 수가 없다. 혹자는 “거사는 남경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죽지 않고 아직도 전남(滇南, 雲南)에 살아 있다”고도 한다. (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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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의 내용은 공약곡(孔若谷)이 남경(南京)에서 이지를 만나고 그에 대해 논한 것을 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공약곡이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남경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까지를 이지가 쓴 자전(自傳)으로 볼 수도 있다.
2)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내용이다. 번지(樊遲)가 곡식을 기르는 것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나는 경험많은 농부[老農]만 못하다”라고 대답했고, 채소를 키우는 것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하자 공자는 “나는 경험많은 채소 농부[老圃]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번지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소인이로다, 번수야!……농사짓는 것을 배워서 무엇 하리오?”라고 말했다.
3) 《논어》 <헌문>(憲問) 참조.
4) 《논어》 <미자>(微子) 참조.
5) 원문의 호칭은 ‘상대인구을기‘(上大人丘乙己)이다. ‘상대인’(上大人)은 극존칭이고, ‘구’(丘)는 공자의 이름이며, ‘을기’(乙己)는 개인으로서의 한 사람을 의미한다(‘乙’은 ‘一’의 차용). 실명으로 호칭하지 않고 존칭 ‘공자’(孔子) 또는 극존칭 ‘공부자’(孔夫子)로 호칭하는 통례와 달리, 극존칭과 실명을 혼용하였다. 공자를 존중하기는 하되, 맹목적으로 신성시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려는 입장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6) 이지재(李之才)의 자는 정지(挺之)이다. 소옹(邵雍, 1011~1077)은 자가 요부(堯夫)이며, 시호를 강절(康節)이라고 했다. 원래 범양(范陽) 사람으로, 부친 때 공성(共城)으로 이주했다. 공성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휘현(輝縣)의 옛 이름이다. 소문산(蘇門山)은 휘현(輝縣) 서북쪽에 있고, 백천(百泉)은 그 정상에 있는 샘 이름으로, 백원(百源)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소옹 학파를 백원 학파라고도 한다. 이지재가 공성의 태수로 부임했을 때 소옹이 백천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지재는 소옹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명성을 듣고 찾아가 ‘물리’(物理)나 ‘성명’(性命)의 학문을 전수하여, 소옹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나중에 소옹은 송대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후 소옹은 하남(河南)의 낙양(洛陽)으로 가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거처를 정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안락와(安樂窩)라고 일컬었다. 여기서 안락와가 백천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착오인 듯하다.
7) 상중(喪中)에 종군(從軍)할 때는 상복(喪服)에 검은 물을 들였다.
8) 황의인(黃宜人)은 이지의 부인 황씨이다. 의인은 문무 관리의 부인을 부르는 봉호이다.
9) 성(星)은 돈의 액수나 은(銀)의 중량에 쓰이는 단위인 듯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0) 극치지절(屐齒之折), 즉 ‘나막신 굽이 부러지다’라는 말로, 말할 수 없이 기쁜 심정을 형용할 때 사용하는 성어이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에서 유래했다. 사안이 손님과 바둑을 두다가 기쁜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오는데, 너무 기쁜 나머지 문지방을 넘다 나막신 굽이 부러진 것도 몰랐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11) 예부사무(禮部司務)는 예부(禮部)에서 문서의 출납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는 자리이다.
12) 춘추시대에 진(晉) 경대부(卿大夫)의 묘지가 있던 땅으로, 이후 전하여 묘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13) 진(晉)의 고개지(顧愷之)가 호두장군(虎頭將軍)의 직임을 맡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일러 고호두(顧虎頭)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지의 지기(知己)인 고양겸(顧養謙)을 가리킨다. 고양겸(1537~1604)의 자는 익경(益卿), 호는 충암(冲菴)으로 강소(江蘇) 통주(通州) 사람이다. 고호두(顧虎頭)라는 별칭이 있다.

卷三 雜述 卓吾論略滇中作

孔若谷曰:吾猶及見卓吾居士,能論其大略云。居士別號非一,卓吾特其一號耳。卓又不一,居士自稱曰卓,載在仕籍者曰篤,雖其鄉之人,亦或言篤,或言卓,不一也。居士曰:“卓與篤,吾土音一也,故鄉人不辨而兩稱之。”余曰:“此易矣,但得五千絲付鐵匠胡同梓人,改正矣。”居士笑曰:“有是乎?子欲吾以有用易無用乎?且夫卓固我也,篤亦我也;稱我以‘卓’,我未能也;稱我以‘篤’,亦未能也。余安在以未能易未能乎?”故至于今並稱卓、篤焉。

居士生大明嘉靖丁亥之歲,時維陽月,得全數焉。生而母太宜人徐氏沒,幼而孤,莫知所長。長七歲,隨父白齋公讀書歌詩習禮文。年十二,試《老農老圃論》,居士曰:“吾時已知樊遲之問,在荷蕢丈人間。然而上大人丘乙已不忍也,故曰‘小人哉,樊須也。’則可知矣。”論成,遂為同學所稱。眾謂“白齋公有子矣”。居士曰:“吾時雖幼,早已知如此臆說未足為吾大人有子賀,且彼賀意亦太鄙淺,不合于理。此謂吾利口能言,至長大或能作文詞,博奪人間富與貴,以救賤貧耳,不知吾大人不為也。吾大人何如人哉?身長七尺,目不苟視,雖至貧,輒時時脫吾董母太宜人簪珥以急朋友之婚,吾董母不禁也。此豈可以世俗胸腹窺測而預賀之哉!”

稍長,複憒憒,讀傳注不省,不能契朱夫子深心。因自怪。欲棄置不事。而閑甚,無以消歲日。乃歎曰:“此直戲耳。但剽竊得濫目足矣,主司豈一一能通孔聖精蘊者耶!”因取時文尖新可愛玩者,日誦數篇,臨場得五百。題旨下,但作繕寫眷錄生,即高中矣。居士曰:“吾此梓不可再僥也。且吾父老,弟妹婚嫁各及時。”遂就祿,迎養其父,婚嫁弟妹各畢。

居士曰:“吾初意乞一官,得江南便地,不意走共城萬里,反遺父憂。雖然,共城,宋李之才宦游地也,有邵堯夫安樂窩在焉。堯夫居洛,不遠千里就之才問道。吾父子倘亦聞道于此,雖萬里可也。且聞邵氏苦志參學,晚而有得,乃歸洛,始婚娶,亦既四十矣。使其不聞道,則終身不娶也。余年二十九而喪長子,且甚戚。夫不戚戚于道之謀,而惟情是念,視康節不益愧乎!”安樂窩在蘇門山百泉之上。居上生于泉,泉為溫陵禪師肛。居士謂“吾溫陵人,當號溫陵居上。”至是日游遨百泉之上,曰:“吾泉而生,又泉而官,泉于吾有夙緣哉!”

故自謂百泉人,又號百泉居上云。在百泉五載,落落竟不聞道,卒遷南雍以去。

數月,聞白齋公沒,守制東歸。時倭夷竊肆,海上所在兵燹。居上間關夜行晝伏,除六月方抵家。分家又不暇試孝子事,墨衰率其弟若侄,晝夜登陴擊柝為城守備。蓋下矢石交,米斗斛十千無糴處。居士家口零三十,幾無以自活。三年服闋,盡室入京,蓋庶幾欲以免難云。

居京邸十閱月,不得缺,囊垂盡,乃假館受徒。館複十余月,乃得缺,稱國子先生,如舊官。未幾,竹軒大父訃又至。是日也,居士次男亦以病卒于京邸。余聞之,歎曰:“嗟嗟!

人生豈不苦,誰謂仕宦樂。仕宦若居士,不乃更苦耶!”吊之。入門,見居士無異也。居上曰:“吾有一言,與子商之:吾先大父大母歿五十多年矣,所以未歸土者,為貧不能求葬地;又重違俗,恐取不孝譏。夫為人子孫者,以安親為孝,未聞以卜吉自衛暴露為孝也。天道神明,吾恐決不肯留吉地以與不孝之人,吾不孝罪莫贖矣。此歸必令三世依土。權置家室于河內,分賻金一半買田耕作自食,余以半歸,即可得也。第恐室人不從耳。我入不聽,請子繼之!”居士入,反覆與語。黃宜人曰:“此非不是,但吾母老,孀居守我,我今幸在此,猶朝夕泣憶我,雙眼盲矣。若見我不歸,必死。”語未終,淚下如雨。居士正色不顧,宜人亦知終不能迕也,收淚改容謝曰:“好好!第見吾母,道尋常無恙,莫太愁憶,他日自見吾也。

勉行襄事,我不歸,亦不敢怨。”遂收拾行李托室買田種作如其願。

時有權墨吏嚇富人財不遂,假借漕河名色,盡徹泉源入漕,不許留半滴溝洫間。居士時相見,雖竭情代請,不許。計自以數畝請,必可許也。居士曰:“嗟哉,天乎!吾安忍坐視全邑萬頃,而令余數畝灌溉豐收哉!縱與,必不受,肯求之!”遂歸。歲果大荒,居士所置田僅收數斛稗。長女隨艱難日久,食稗如食粟。二女三女遂不能下咽,因病相繼夭死。老媼有告者曰:“人盡饑,官欲發粟。聞其來者為鄧石陽推官,與居士舊,可一請。”宜人曰:“婦人無外事,不可。且彼若有舊,又何待請耶!”鄧君果撥己俸二星,並馳書與僚長各二兩者二至,宜人以半糴粟,半買花紡為布。三年衣食無缺,鄧君之力也。居士曰:“吾時過家畢葬,幸了三世業緣,無宦意矣。回首天涯,不勝萬里妻孥之想,乃複抵共城。入門見室家,歡甚。問二女,又知歸未數月,俱不育矣。”此時黃宜人,淚相隨在目睫間,見居士色變,乃作禮,問葬事,及其母安樂。居上曰:“是夕也,吾與室人秉燭相對,真如夢寐矣。

乃知婦人勢逼情真。吾故矯情鎮之,到此方覺‘屐齒之折’也!”至京,補禮部司務。人或謂居士曰:“司務之窮,窮于國子,雖子能堪忍,獨不聞‘焉往而不得貧賤’語乎?”蓋譏其不知止也。居士曰:“吾所謂窮,非世窮也。窮莫窮于不聞道,樂莫樂于安汝止。吾十年余奔走南北,祗為家事,全忘卻溫陵、百泉安樂之想矣。吾聞京師人士所都,蓋將訪而學焉。”

人曰:“子性太窄,常自見過,亦時時見他人過,苟聞道,當自宏闊。”居士曰:“然,余實窄。”遂以宏父自命,故又為宏父居士焉。

居士五載春官,潛心道妙,憾不得起白齋公于九原,故其思白齋公也益甚,又自號思齋居士。一日告我曰:“子知我久,我死請以志囑。雖然,余若死于朋友之手,一聽朋友所為,若死于道路,必以水火葬,決不以我骨貽累他方也。墓志可不作,作傳其可。”余應曰:“余何足以知居士哉!他年有顧虎頭知居士矣。”遂著論,論其大略。後余游四方,不見居士者久之,故自金陵已後,皆不撰述。或曰:“居士死于白下。”或曰:“尚在滇南未死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