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론: 허위 진술과 실제 역사
주목할 만한 것은 비평가가 비록 “정말 본 적이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그래도 가보옥이라는 인물을 정말 만나 이런 말을 진짜 들은 것 같다.”고 했다는 점이다. 이런 정황은 바로 가보옥의 일각에 ‘예술적 진실성’은 갖추고 있으되 반드시 ‘역사적 진실성’ 또는 ‘과학적 진실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신비평가 리처즈(I. A. Richards: 1893~1979)는 《문학비평의 원리(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에서 언어 사용을 ‘과학적(scientific)’인 것과 ‘정감적(emotive)’인 것으로 나누었다. 과학적 언어란 객관적인 사물에 대응하는 진실한 사물과 정보를 진술하는 것이고, 정감적 언어란 객관적인 사물과 완전히 대응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감정을 격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전자는 진실의 진술 즉 과학적 진실의 진술이고 후자는 ‘허구적 진술(pseudo-statement)’ 즉 예술적 진실의 진술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지연재 비평의 수용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홍루몽》 연구자들이 지연재 비평을 다룰 때 모두들 ‘과학적 진실’을 무척 중시했기 때문에 지연재 비평과 ‘전기설’이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서전설의 완성은 당연히 지연재 비평에 의존하는 바가 컸으며, 합전설(가보옥=조설근과 지연재)이나 다른 사람의 전기라는 설(가보옥=지연재)과 같은 여타의 ‘전기설’들 역시 지연재 비평에 의지해서 탄생했다. 물론 우리는 가보옥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서 소재를 취해 만들어진 형상인지 확정할 방법이 없지만, 이 인물에 허구적 성분이 들어 있음은 정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이 사실의 기록이라면 비평가가 왜 “실제로 경험한” 일임을 내세웠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홍루몽》이 조씨 가문의 사적을 얼마나 채용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 작품이 조씨 가문의 일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작품에 서술된 내용이 모두 조씨 가문의 일이라면 비평가도 어떤 사건이 “정말 실제의 사실[嫡眞事實]”이라고 특별히 지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홍루몽》에 서술된 것이 모두 ‘과학적 진실’임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은 ‘내재적 필연성(internal necessity)’만을 필요로 할 뿐이며, 독자가 정서와 이치에 맞는다고 느끼면 ‘내재적 수용 가능성 또는 설득력(internal acceptability or convincingness)’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가보옥의 언행에 ‘내재적 필연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비평가는 비록 실제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걸 다른 사람이 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문장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移至第二人萬不可, 亦不成文字矣]”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주 많은 연구자들은 지연재 비평에서 ‘실제의 인물[眞人]’이랄지 ‘실제 사실[眞事]’를 언급한 점을 중시하면서 《홍루몽》이 ‘진실’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 소설 읽기의 ‘역사화(historicised)’ 경향을 다시 보는 듯하다. 사실 지연재 판본의 몇몇 비평들 역시 이런 역사화 경향의 독법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홍루몽》은 결국 문학 작품이기 때문에 그저 그 자체의 논리를 갖추고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세계를 형성할 수만 있으면 곧 예술적 진실성을 즉 존재의 이유를 갖추게 되므로 여타의 역사 문헌(가령 지연재 비평과 같은)에 의지해서 그 역사적 진실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우리는 리처즈의 말을 인용한 바 있는데, 그는 독자 반응의 관점에서 진실성을 논의한 것이다. 그런데 《홍루몽》의 첫 번째 독자로서 지연재 등 비평가들은 연구자들에게 수많은 ‘과학적 진실’과 ‘역사적 사실’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예술적 진실’과 ‘허구적 진술’을 제시해 주었다. 만약 우리가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는’ 자세로 지연재 비평과 《홍루몽》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이 두 측면에 대해 정말 어느 한 쪽을 소홀히 취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서 우리는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가 불안정함을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지연재와 기홀수의 역사적 지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하다. ‘중평(重評)’의 극성(極盛)에서 갑진본(甲辰本)의 뚜렷한 수정에 이르기까지, 위핑보와 저우루창의 옹호에서 어우양졘(歐陽健)과 커페이(克非) 등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성쇠를 반복하는’ 운명의 궤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지연재 판본의 비평은 대단히 난잡하고 무질서해서 온전히 믿을 수 없고 완전히 파기해 버릴 수도 없다. 홍콩의 《홍루몽》 연구자 메이졔(梅節)는 ‘구분[區隔]’(작자와 비평가를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는 위핑보의 태도와 유사하다. 나는 이런 입장을 중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20세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지연재 타도’ 운동은 극단에 이르자 지연재 비평 가운데 일부를 뽑아 비판하면서 ‘황당한 말’이라거나 ‘거짓을 지어낸 것[作僞]’, ‘저급한 취미’,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면서 지연재 비평의 가치를 단번에 말살해 버렸고, 결국 지연재라는 인물의 존재적 지위를 취소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예를 들어서 커페이는 지연재가 단지 ‘지연재 판본’에만 존재할 뿐이지 현실 세계에는 그런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은 지연재 비평의 난잡함과 앞뒤 말이 맞지 않는 등의 ‘병폐’는 한편으로는 그 비평이 여러 사람(이른바 ‘여러 선생들[諸公]’)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비평의 원본은 개인의 사적인 소유물로서 작은 그룹 안에서만 전해졌을 뿐 광범하게 유통되어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출판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 비평들은 대단히 어지럽고 비평에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언어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서 한 말은 본서에서 얘기하는 affective / associative response와 같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 비평을 정식 출판물에 대한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에 들어서 학계에서는 ‘지연재 타도’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대해 보편적으로 무관심했다. 그 원인을 탐구해 보면 똑같이 ‘지연재 타도’를 주장하는 이들의 ‘선택적 중시’와 ‘선입견’, ‘순환적 해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택적 중시’와 ‘선입견’, ‘순환적 해석’은 해석 활동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문제는 단지 우리가 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결국 일부러 그 극단을 추구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종합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