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 《홍루몽》의 특수 독자와 《홍루몽》의 해석 4-7

4. 지연재 비평의 해석 문제: 자서전설과 반(反)자서전설의 대립

2) 색은파의 반격: 색은파의 ‘수정설’과 ‘암합설’

신홍학 연구자들 가운데 저우루창은 지연재 비평을 가장 깊이 연구했으며, 그의 결론은 자서전설과도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만 저우루창의 결론은 학계 전체의 결론이 되지 못했고, 나중에는 오히려 자서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 이외의 연구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색은파 연구자 판중궤이(潘重規)가 바로 좋은 예이다.

저우루창의 《홍루몽 신증》(棠棣版)은 1953년에 출판되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에 판중궤이가 《홍루몽 신해(新解)》를 간행했다. 거기에 들어 있는 〈지연재 비평 《홍루몽》에 대한 새로운 고찰[新探]〉(이하 〈새로운 고찰〉로 칭함)은 바로 신홍학 연구자들의 지연재 비평 연구의 결론에 대해 뚜렷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은 그의 논문 구조에서도 알 수 있다. ‘새로운 고찰’의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낡은) 자서전설에 대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고찰〉은 지연재 비평이 들어 있는 판본의 개략적인 정황을 소개한 후, 제2절에서는 “지연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내걸었지만 실제 내용에서는 후스와 위핑보, 저우루창의 주장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제3절 “지연재 비평에 대한 나의 견해[看法]”에서는 자신의 ‘새로운 고찰’을 전개했다. 이 절에서 지연재 비평에 대한 연구는 자서전설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판중궤이는 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신홍학 연구자들의 지연재 비평에 대한 연구를 비판했다.

첫째, ‘반만설(反滿說)’을 주장하는 색은파의 논박 1: 비평가의 신분에 대한 의문 제기

앞서 우리는 이미 지연재 비평의 권위가 비평가의 특수한 신분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이 비평가 지연재의 신분에 대한 결론은 일치하지 않지만, 그들 모두 지연재가 최소한 작자의 친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연재 비평을 지극히 귀중한 역사 자료로 간주했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색은파 연구자들은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비평가의 신분에 대해 내린 결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의 권위도 그에 상응하여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판중궤이는 “지연재는 그저 《홍루몽》의 보통 독자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그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비평가의 어투를 근거로 그가 작품 속의 인물과 각종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하여 작자 자신이라거나 작자의 가족, 작자의 후처라는 등의 갖가지 추측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사실 비평가가 최면상태에서 내뱉은 잠꼬대[囈語]를 사실적인 말이라고 오해한 것으로서……

그러나 지연재는 대체 누구인가? 판중궤이의 결론은 그가 만주 기인(旗人)이라는 것이다. 지연재의 개인적 배경에 대한 판중궤이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귀결된다. 가) ‘기인 귀족세가의 자제’이다. 나) “글[文墨]에 대해 조금 알지만” “한학(漢學)에 대한 조예는 사실 아무 많은 한계가 있다.” 다) “지연재의 관점과 식견은 사실 대단히 평범하다.” 이 때문에 그는 ‘지연재 비평 속의 견강부회’와 지연재의 주석과 글자의 발음 및 뜻에 대한 설명, 전고(典故)의 인용은 ‘억지로 끌어 붙인 것[穿鑿]’이거나 ‘착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해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극히 중시하던 지연재 비평의 가치가 판중궤이에 의해 크게 깎아내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 ‘반만설’을 주장하는 색은파의 논박 2: 지연재 비평을 통해 보는 저작권 문제

‘자서전설’은 ‘저자가 조설근’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비평에서도 여러 차례 ‘설근’을 언급하고 있다. 저우루창 〈지연재 비평을 통해 보는 《홍루몽》의 사실성〉이라는 절에서 여덟 개 항목의 비평을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즉 “이런 단순한 문제(저자가 조설근이라는)는 단번에 알 수 있으므로 본래 길게 쓸 필요도 없다.” 그는 자신이 인용한 비평들이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확고부동한 증거라고 간주했다. 색은파 학자는 “지연재 비평 판본이 발견된 뒤로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는 견해가 갈수록 정론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색은파 학자들이 자서전설을 부정하려면 ‘저자가 조설근’이라는 주장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자서전설의 이론적 근거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색은파 학자들은 작자 문제와 관련된 비평들을 달리 해석한다. (다음의 비평들은 저우루창이 ‘저자는 조설근’이라는 논점을 지원하기 위해 인용한 것들인데, 비평의 번호는 그가 인용할 때의 순서에 따라 붙였다. 출처는 이미 앞에서 밝혔으므로 다시 중복하지 않는다.)

3. 제1회 갑술본 미비: 책이 완성되기도 전에 조설근이 눈물이 다 말라 세상을 떠났다!
4. 제22회 말미 경진본 회말총평: 이 회가 완성되기 전에 조설근이 세상을 떠났다. 아아, 안타깝구나! 정해년 여름, 기홀수.

저우루창은 이 두 가지 비평을 가지고 작자가 조설근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판중궤이는 ‘완성되기 전[未成]’이라는 말이 아직 보충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첫째, 비평에서 이미 “이 책 100회”라고 말한 바 있으니, 100회의 작품[百回大文]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조설근은 그저 다른 사람이 쓴 그 ‘100회의 작품’에 내용을 더하거나 삭제하여 수정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회(제22회)가 완성되기 전에 조설근이 세상을 떠났다.”라는 구절에 대해 판중궤이는 “원작은 완성된 작품인데 그것을 수정한 조설근이 제22회까지만 작업을 완성하고 죽었다.”라고 해석했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판중궤이는 ‘100회의 작품’이 조설근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조설근은 ‘100회의 작품’을 쓸 수 없었을까? 하지만 판중궤이는 이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았다.

조설근이 작품을 수정한 증거에 대해 판중궤이는 갑술본 제13회 말미와 경진본 제75회 말미의 지연재 비평 두 항목을 인용했다.

7. 제30회 말미 갑술본 회말총평: ‘진가경이 음란함 때문에 천향루에서 죽다[秦可卿淫死天香樓]’라는 부분은 작자가 역사가의 필치로 쓴 것이다. 다행히 혼령이 왕희봉에게 가씨 가문의 뒷일 두 가지를 부탁한 일은 편안히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면 어찌 생각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은 비록 누설되지 않았지만 그 말과 그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한 감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잠시 용서해 주어서 근계(芹溪)로 하여금 삭제하게 했던 것이다.
8. 제75회 경진본 회전총평: 건륭 21년(1756) 5월 7일 대조해 보니 중추절의 시가 빠져 있어서 조설근의 처분을 기다린다.

판중궤이의 견해에 따르면 첫 번째 항목은 “(조설근이) 원본을 삭제했다는 명확한 증거”이고, 둘째 항목은 “일부러 원본의 내용을 보충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판중궤이가 이 두 가지 비평을 이렇게 이해한 것은 당연히 그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문제는 ‘원본’을 조설근이 쓴 것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판중궤이는 ‘원본’과 조설근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문은 그가 왜 조설근이 ‘원본’의 작자가 아니라고 한마디로 단정해 버리느냐는 것이다. 그는 ‘원본’의 작자가 ‘돌[石頭]’라고 주장하면서, “돌은 바로 이름을 숨긴 작자의 가명”이라고 했다. 이것은 소설 본문(《홍루몽》 제1회의 본문)을 사실이라고 간주하여 얻어낸 결론이다. 이런 견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돌’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일 뿐이니 반드시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쑨쉰(孫遜)은 《홍루몽 지연재 비평 초탐》에서 지연재 비평에 쓰인 ‘돌 형[石兄]’이라는 어휘의 용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그 단어가 사실 청경봉 아래 있던 돌 즉 나중의 통령보옥을 가리킨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돌이 《홍루몽》 이야기를 기록했으므로 비평가가 돌을 작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쑨쉰의 견해는 판중궤이의 주장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정말 ‘돌’이 가리키는 실제 인물이 있었고, ‘돌’은 원작자의 가명이라는 주장을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즉 ‘돌’이 절대 조설근의 가명이 아닌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 판중궤이의 주장은 치밀하지 못함이 드러난다. 다시 다음을 보자.

1. 제1회 갑술본 미비: 조설근이 읽고 수정했다면 작품 첫머리의 이 설자(楔子)는 또 누가 쓴 것인가? 이로 보건대 작자의 문장이 대단히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뒤쪽 문장에도 이와 같은 것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바로 작자가 화가가 안개와 구름으로 흐릿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운용한 것이다. 독자는 절대 작자에게 속지 않아야 큰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제1회 갑술본 미비: 조설근에게 옛날에 《풍월보감》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아주 당촌(棠村)이 서문을 쓴 것이다. 이제 당촌이 이미 죽어서 내가 새 필사본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것을 따랐다.

“조설근에게 옛날에 《풍월보감》이 있었다.”는 구절에 대해 판중궤이는 새롭게 해석한다. 즉 “조설근의 《풍월보감》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홍루몽》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평에서 분명히 ‘새 필사본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것을 따랐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설근의 옛 작품이 《석두기》와 별칭이 같았기 때문에 죽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중복된 작품 제목을 고치지 않았던 것이지, 조설근이 쓴 《풍월보감》이 바로 《홍루몽》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을 그림으로 풀이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명씨 저작 → 《석두기》 (별명 《풍월보감》)

조설근 저작 → 《풍월보감》

판중궤이의 이런 주장에 대해 위잉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위잉스는 조설근이 ‘예전에 갖고 있던 《풍월보감》’이 《홍루몽》이 아니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판중궤이는 자기 견해를 변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위잉스와 판중궤이의 논쟁은 두 가지 층위로 진행되었다. 첫째 층위의 논거는 《홍루몽》 본문에서 나왔다. 갑술본 설자(楔子)에는 “오옥봉(吳玉峰)이 《홍루몽》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동로(東魯)의 공매계(孔梅溪)는 《풍월보감》이라고 제목을 붙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위잉스는 《홍루몽》과 《풍월보감》이 분명 동일한 작품에 대한 다른 두 가지 명칭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판중궤이는 이렇게 회답했다.

원래의 《석두기》는 제목이 오옥봉에 이르러 《홍루몽》으로, 공매계는 《풍월보감》으로, 그리고 조설근에 이르러서는 《금릉십이차》로 바뀌었다. 이 책은 당연히 당계(棠溪, 棠村을 잘못 쓴 것으로 보임)가 서문을 쓴 《풍월보감》과는 다르니, 그렇지 않다면 오옥봉이 앞서 제목을 붙이고 조설근이 나중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두 책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판중궤이가 제시한 이유는 매우 불충분하다. 위잉스와 판중궤이 모두 소설 본문과 결합해서 비평을 이해했지만, 위잉스는 하나의 책에 제목만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고, 판중궤이는 제목을 붙인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책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여러 정황을 따져 보면 제목을 붙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 다른지 여부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원명청삼대금훼소설희곡사료》에 따르면 《홍루몽》은 《금옥연(金玉緣)》이라는 제목으로도 간행된 바 있는데, 제목을 붙인 사람은 달라도 책의 내용은 같았다(줄거리가 거의 똑같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을 붙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증거로서 부족하다.

위잉스와 판중궤이 사이의 논쟁에서 둘째 층위는 비평 속의 ‘신(新)’, ‘구(舊)’라는 글자와 “인지(因之)”라는 문장에서 ‘지(之)’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있다. 판중궤이는 ‘신’ 자는 《풍월보감》이라고도 불리는 《홍루몽》을, ‘구’ 자는 조설근이 ‘옛날에 지은’ 《풍월보감》을, 그리고 ‘지’ 자는 ‘중복된 제목’ 즉 《풍월보감》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위잉스는 “같은 책이 선후로 개정되어서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경우에만 ‘신’이니 ‘구’이니 하고 구별하여 부를 수 있다. 작자와 내용이 모두 완전히 똑같은, 같은 제목의 두 저작은 결코 ‘신’이니 ‘구’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신구의 문제에 대한 판중궤이의 답변은 이러하다. “바로 당촌이 조설근을 위해 서문을 쓴 《풍월보감》을 옛 것[舊]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나중에 조설근이 수정한 《석두기》에 나타나는 《풍월보감》이라는 제목은 자연히 새 것[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위잉스가 힐난하는 초점은 ‘신’과 ‘구’를 내용의 신구로 이해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비해 판중궤이는 조설근이 옛날에 지은 《풍월보감》이 ‘옛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조설근이 나중에 수정한 《홍루몽》도 《풍월보감》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 것’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판중궤이의 이런 설명은 당연히 내용이 전혀 다르지만, 이걸로는 “인지(因之)”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할 방법이 없다. 생각해 보자. 《홍루몽》에 이미 《풍월보감》이라는 별명이 있다면 이른바 ‘조설근이 옛날에 지은 《풍월보감》’이라는 제목을 따라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풍월보감》이 내용적으로 《홍루몽》과 전혀 다른데(이것은 판중궤이의 주장임) 같은 제목을 쓴다면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일반 연구자들은 모두들 조설근의 《풍월보감》이 《홍루몽》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초고(初稿)’와 ‘흡수[吸納]’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전자는 《풍월보감》이 《홍루몽》의 초고라는 것인데,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로는 후스와 우스창(吳世昌) 등이 있다. 후스는 《풍월보감》이 바로 조설근이 《홍루몽》을 창작할 때 쓴 초고라고 했고, 우스창 역시 ‘새 것’이란 다섯 차례의 ‘수정[增刪]’을 거친 새 원고이고 ‘옛 것’은 바로 (비평의) 위 글에서 얘기한 ‘예전에 있었던 《풍월보감》’이라는 구절에 보이는 ‘예전’의 원고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흡수’설이란 예를 들어서 장서우핑(張壽平)이 〈《홍루몽》 지연재 비평 평의(評議)〉에서 주장한 것처럼, “원래의 《풍월보감》은 이미 조설근에 의해 《홍루몽》에 섞여 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원래의 《풍월보감》은 결코 《홍루몽》의 초고와 함께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수민(皮述民)의 의견도 장서우핑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조설근에게 옛날에 《풍월보감》이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있었다[有]’라는 글자를 ‘저작’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옛날 글에도 그런 용례가 없지 않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안시중(段熙仲)과 판쥔자오(潘君昭)의 〈《풍월보감》의 작자〉에 열거된 많은 예들을 참조할 만하다. 이 때문에 저작권에 대한 판중궤이의 설명에는 갖가지 파탄이 드러나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없었다.

셋째, ‘반만설’을 주장하는 색은파의 논박 3: 사실성 문제

판중궤이의 〈지연재 비평 《홍루몽》 신탐〉에는 “지연재 비평의 ‘적진실사(嫡眞實事)’”라는 절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지연재 비평에 대해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달리 해석한다. 즉 “사실 지연재 비평에서 얘기하는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이란 그저 《홍루몽》 작자의 붓끝에서 묘사된 인물과 사건이 사실에 가까움[逼眞]을 과장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지연재 비평을 잘못 읽었다고 주장한다.

《홍루몽》의 작자는 세상을 깊이 읽고 자료를 풍부하게 갖추어서 비록 허구적인 이야기이지만 문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사실적(寫實的)이어서 지연재 비평의 비평가들이 보기에는 ‘진짜 사실[嫡眞實事]’처럼 여겨졌다. 후스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지연재 비평을 쓴 비평가들의 인상을 근거로 가보옥이 실은 조설근이고, 가씨 집안이 실은 조씨 집안이라고 여기는데 사실 지연재 비평을 쓴 비평가의 의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저우루창 같은 연구자들의 지연재 비평에 대한 해석에 편파적인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 제2회에서 냉자흥(冷子興)의 얘기에서 가보옥의 몇몇 훌륭한 자매들을 처음 언급하는 장면에 대한 갑술본의 측비(側批)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작자가 반드시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實點一筆, 余謂作者必有]”라고 되어 있다. 저우루창은 이 비평을 통해서 《홍루몽》이 “모두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 허구가 아님”을 증명한다. 사실 “나는 작자가 반드시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긍정적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라고 생각한다[余謂]”와 “반드시 있다[必有]”라는 표현은 비평가도 실은 추측을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는 표현은 그저 비평가 개인의 견해를 대표할 뿐이며, “반드시 있다.”라는 표현은 대단히 긍정적이지만 앞쪽의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는 표현의 제약을 받는다. 또한 제39회에서 유 노파[劉姥姥]와 태부인[賈母]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부르는 호칭에 대해 기묘본에는 다음과 같은 두 줄로 된 협비가 있다.

신묘하기 그지없다. 독자 여러분은 여기에 이르면 분명 태부인이 뭐라고 부를까 걱정했을 텐데, 뜻밖에도 태부인은 공공연하게 ‘친척 어른[老親家]’이라고 부른다. 이 얼마나 안성맞춤 격이고 시원스러우며 정리(情理)에 맞는 호칭인가! 이것을 작자가 마음속에서 엮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 믿지 않겠다. 왜냐? 대개 엮어낸 것은 절대 이처럼 정리에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神妙之極, 看官至此, 必愁賈母以何相稱, 誰知公然曰老親家, 何等現成, 何等大方, 何等有情理. 若云作者心中編出, 余斷斷不信. 何也? 蓋編得出者斷不能有這等情理.

저우루창이 보기에 이 또한 《홍루몽》이 “진실을 써서 전하는[寫實傳眞]” 책이라는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 “若云作者” 이하의 내용은 비평가가 얘기하는 것이 그저 ‘믿느냐 믿지 않느냐’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 준다. 비평가 본인은 그런 경험을 직접 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또는 그녀)도 “나는 절대 믿지 않겠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저우루창의 지연재 비평 연구가 비록 주도면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판중궤이가 주장한 이른바 정리(情理)의 ‘사실에 가까움[逼眞]’이 비평의 실제 정황에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연재 비평이 가리키는 ‘실제 사실’ 가운데 일부가 확실히 정리(情理)로 볼 때, 또는 예술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위에 인용한 비평에서 “대개 엮어낸 것은 절대 이처럼 정리에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부분은 분명 정리의 측면에서 사실에 가까움을 가리키고 있다. ‘예술적 진실성’을 언급한 비평에 대해서는 예랑(葉朗)이 《중국소설미학》에서 여러 예를 나열하여 자세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불필요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판중궤이의 주장에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은 이런 이론이 지연재 비평에 대해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견해를 지나치게 적대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그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린다. (저우루창과 같이)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비평에서 제기한 ‘실제 사실’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판중궤이는 이 비평에서 제기하는 사실이 모두 실제 사실이 아니라 문학 작품의 ‘진실’이자 등장인물의 언행이 신분에 부합해야 한다는 ‘진실’일 뿐이라고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사실 지연재 비평의 많은 부분은 전혀 이렇게 해석할 수 없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제25회: 여도사 마씨는 태부인에게 되는 대로 지껄이는 장면.
[갑술본 측비] 이치에도 맞지 않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말이지만 구구절절 모두 직접 보고 들은 것이지 허황되게 지어낸 것이 절대 아니다. 작자와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다.
一段無倫無理信口開河的渾話, 卻句句都是耳聞目睹者, 並非杜撰而有. 作者與余實實經過.


제28회: 가보옥이 왕 부인에게 ‘금강’이니 ‘보살’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정신이 흐려졌다고 하는 장면.
[경진본 협비] 아주 맞는 말이다. 내가 여렸을 때 들은 말과 부합한다! 슬프구나!
是語甚對, 余幼時所聞之語合符! 傷哉!


제74회: 평아가 왕희봉과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마련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 장면.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 대개 이런 일들은 작자도 비평가도 겪어 본 일이다. 실제로 지난 일을 그대로 쓴 것이지 일부러 지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 글을 써서……
蓋此等事, 作者曾經, 批者曾經, 實係一寫往事, 非特造出, 故弄新筆……

이런 비평들은 소설의 소재가 작자와 비평가의 공통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작자의 묘사 기교가 뛰어나서 ‘자취가 사실에 가깝다[形迹逼眞]’고 칭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판중궤이의 이론은 이런 비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판중궤이는 소설 가운데 작자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소재를 취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비평에 대해 다른 식의 해석을 시도했다.

제17회: 가보옥이 유모와 하인들을 데리고 몰래 대관원을 빠져나오는 장면.
[경진본 측비] 못난 자제들이여, 와서 이 모습을 보라. 처음 보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작자가 내 어린 시절의 지난 일을 묘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찌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신뢰성 있는 문장으로 그 일을 써서 많은 이들이 함께 한바탕 웃을 수 있도록 보여 준 것이다.
不肖子弟來看形容. 余初見之, 不覺怒焉, 謂作者形容余幼年往事; 因思彼亦自寫其照, 何獨余哉. 信筆寫之, 供大衆同發一笑.


제21회: 사아(四兒) 역시 아주 영리한 계집애임을 묘사한 장면.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 또 한 명의 유해무익(有害無益)한 인물이다. 작자는 이런 이들 때문에 평생을 그르쳤고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책을 펼쳤을 때 이런 인물을 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야 물론 즐거워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원한을 품게 된다.
又是一個有害無益者. 作者一生爲此所誤, 批者一生亦爲此所誤, 於開卷凡見如此人, 世人故爲喜, 余反抱恨.


제48회: 설보차가 설반(薛蟠)에게 밖에 나가 손해를 보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게 낫다고 얘기하는 장면.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 작자도 이런 손해를 본 적이 있고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에 밝힘으로써 후세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말없는 경계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지연재.
作書者曾吃此虧, 批書者亦曾吃此虧, 故特於此註明, 使後人深思默戒. 脂硯齋.


제77회: 왕 부인이 가보옥에게 일 년 뒤에 대관원 밖에서 나와 살라고 지시하는 장면.
[경진본의 두 줄로 된 협비]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끝내 이야기의 마무리 국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리에도 그다지 맞지 않다. 게다가 이 또한 내가 옛날에 직접 보고 들은 일이고, 작자가 직접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써 낸 문장이지 들은 이야기를 수집하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다.
若無此一番更變, 不獨終無散場之局, 且亦不大近乎情理. 況此亦此[是]余舊日目睹親問[聞]、作者身歷之現成文字, 非搜造而成者.

이런 비평에 대한 판중궤이의 견해는 “지연재의 유년 시절 정황 가운데 작품 속의 이야기와 은연중에 부합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평가의 경력과 작품 속 줄거리가 은연중에 부합한다는 이런 견해는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첫째, ‘은연중에 부합’하는 것이 단지 몇 군데뿐이라면 판중궤이의 주장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실제로 비평가의 경험이 작품 속 줄거리와 부합하는 부분이 위에서 인용한 몇 군데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둘째, 일단 판중궤이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비평가의 경력은 그저 작품의 줄거리와 은연중에 부합할 뿐이고 작자는 비평가의 경력에서 전혀 소재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쓴 것[彼亦自寫其照]”이라는 문제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위에 예로 든 네 가지 비평은 모두 작자 자신이 작품 속에 쓴 것과 같은 경력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비평들은 ‘은연중에 부합’한다는 판중궤이의 주장을 훨씬 넘어서서 오히려 자서전설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지연재 비평에 대한 판중궤이의 연구에 합리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전반적인 고려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판중궤의 저작은 1959년에 출판되었는데, 《홍루몽》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그는 지연재 비평을 이용해 자서전설을 반박한 선구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탐구[新探]’는 지연재 비평에 대한 신홍학 연구자들의 연구를 근본적으로 뒤집지는 못했다. 1961년에 이르러 우스창이 영문으로 《홍루몽 원류 탐색(紅樓夢探源, On The Red Chamber Dream)》을 출판했다. 그의 연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자서전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