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 쑤저우蘇州 2

하수도

카이펑의 메인 스트리트였던 위졔(御街)는 궁전 앞에서 곧장 남쪽으로 수 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는 큰 가로였다. 이 위졔에는 측구(側溝)가 있는데, 연꽃이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 여기에 잇대어 복숭아, 오얏, 배, 살구 등의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아마도 봄은 아름답고 여름은 시원한 나무 그늘의 산책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봄과 여름은 비단같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길은 한 가운데에 주홍색으로 칠을 한 울짱이 2열로 들어서 있었는데, 여기는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황제가 다니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 경관에 하나 더 부수된 것이 하수구였다.

하수구가 가장 먼저 완비되었던 곳은 역시 카이평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암거(暗渠)로 만들어진 하수구는 실로 거대했던 듯하다. 악당이 여자를 납치해 살기도 했는데, 카이펑에서 가장 큰 요리집 이름을 따다가 구이판러우(鬼礬樓) 또는 우유둥(無憂洞) 등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기에, 그 거대함을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을 근거로 암약했던 악당이 많아, 민완가였던 카이펑 시장으로서도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영화 《제3의 남자》를 떠올렸다. 《제3의 남자》에서 홀리 마틴스가 옛 친구의 소식을 찾아 헤맸던 비엔나의 하수구.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 코제트의 연인을 안고 도망쳤던 파리의 하수구. 어느 것이든 도시의 지하에 뻗어 있는 장대한 암거였다. 카이펑 지하의 하수구도 그와 같았던 것일까?

하수구에는 뚜껑이 있고, 초봄에는 대대적으로 오니를 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는 뚜껑을 열고 검사가 끝날 때까지 뚜껑을 닫아서는 안 되었다. 이 때문에 하수구에 떨어진 이도 있었는데, 심한 경우 행방불명이 되는 이도 있었다.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메이야오천(梅堯臣)은 그 모습을 “우리 영감님이 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네. 어쩌면 하수에 떨어진 것일지도”라는 시로 노래했다.

뚜껑을 개방한 채로 오니는 그대로 두었다. 하수구를 대청소할 때는 대체로 이런 풍경이었던 듯한데, [당시] 사람들의 어려움을 엿보는 한편, 어떤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관청 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정비된 형태의 것만 하수구 역할을 다했던 것은 아니다. 운하가 많은 거리는 운하가 그런 하수구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송대의 쑤저우(蘇州)

당대부터 송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 가운데 도시가 크게 변모해 온 것을 조망해 왔다. 마침내 지도를 한 손에 들고 송대의 도시를 방문해 보자. 방문할 도시는 강남의 대표적인 도시인 쑤저우(蘇州)이다. 동양의 베네치아로 이름이 높은 물의 도시이다.

쑤저우가 생긴 이래로 이미 2천 수백 년이 지났다. 춘추시대의 오나라 수도로 건설된 것이다. 그 뒤로 대체로 그 터는 변하지 않았다. 수대(隋代)에 일시적으로 터를 옮겼던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원대에 되돌려졌다. 그럼에도 대략적으로 도시의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건도 이래로 형태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된 데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는] 믿기 어렵다. 하지만 13세기 초 무렵부터 본질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다고 하는 게 맞다. 이것은 이미 내세웠던 《송평강도》와 근대의 지도를 비교하면 일목요연하다. 따라서 [쑤저우는] 적어도 7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구조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 참으로 별난 도시인 것이다.

물론 쑤저우 자체는 역사의 거친 파도 한 가운데를 헤쳐 왔다. 부유한 강남 언저리에 위치한 쑤저우였기에 몇 차례의 전란을 만나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오와 월의 전쟁, 당말 오월의 건국과 명초 태조 홍무제의 쑤저우를 둘러싼 공방 등의 전란이 쑤저우를 지나갔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큰 변동의 한 가운데를 헤쳐 왔다. 경제의 중추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 변동을 온몸으로 체험해 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당 이래로 송말에 걸쳐 곡창지대로서 알려졌던 쑤저우도 명대가 되면 경공업지대가 된다. 예로부터 쑤저우의 비단은 유명했지만, 그 성가는 한층 높아져 갔다. 2백 수십 년 동안 계속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실로 두려워할 만한 쑤저우의 조숙성(早熟性)이다.

이것만이 쑤저우의 가치는 아니다. 풍부한 경제력 덕에 많은 문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오늘날에도 모습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풍광과도 맞아떨어져 많은 사람들을 유인해 왔던 것이다. 일찍이 송대에 문인들이 모이는 살롱이 문을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관료에서 퇴임한 문인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집을 지은 케이스도 있었다.

이와 같이 풍요로운 쑤저우의 모습을 오늘에 전한 것이 《송평강도》이다. 지도를 봤으면 한다. 당당한 성벽와 성문, 정연한 가로, 종횡으로 달리는 운하. 길을 따라서 가로수가 있는 곳도 있었다. 놀랄 만한 경관이 아닌가? 약 반 세기 후에 이 도시를 찾았던 마르코 폴로가 감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쑤저우의 외관

우리도 송대의 쑤저우에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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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남부의 성문인 판먼(盤門)(《송평강도》). 당당한 성벽과 돌출한 마면, 포장된 가로는 당시의 쑤저우의 번영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쑤저우를 높이 둘러싼 성벽은 아득히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성벽 높이와 두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세의 기록과 다른 예로 미루어 보면, 높이는 대략 7미터로 추정된다. 성벽이 7미터였다면, 성문 근처는 더 높았을 것이다. 졘캉부(建康府)의 예로 알 수 있듯이, 성문에는 정자와 망루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기록과 보고를 읽으면, 근세의 남쪽의 판먼(盤門)은 그 위에 건물을 들여 21미터 높이였다고 한다.

이것은 상당히 높은 것이다. 통상적인 높이의 인가라면, 바깥에서 일체 보이지 않았다. 현재 보통의 쑤저우 민가의 높이가 3미터 내지 6미터라고 한다. 송대에는 단층집이 많고 이층은 드물었다고 생각되지만, 설사 이층 건물이었다 하더라도 성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청시대의 도시 그림에는 성문 부근에 이층 건물이 몇 개 그려져 있는 게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성벽보다 높았을 리는 없다. 만약 통상적인 집이 성벽보다 높았다면, 성벽이 쓸모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으로 생각해 보아도 성벽 위에 민가의 지붕이 이어졌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높게 솟아있는 성벽 위로 돌출해 위용을 과시했던 것은 관청 건물과 절과 도교 사원(道觀)의 건물이나 탑 등이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당시 큰 건물이라고 하면 극장이나 주루(酒樓)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건물은 도시에서 아주 안쪽에 자리했을 것이다. 결국 성벽이 길게 뻗어 있는 위에 탑과 몇 개의 고층 건축이 보였다고 하는 것이 당시의 도시 경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성벽은 거대했다. 내가 처음 창안(長安), 곧 현재의 시안(西安)의 성벽을 보았을 때도 그 거대함에 아연했었다. 현재의 시안의 성벽은 물론 당대의 것은 아니다. 명대에 건축된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한층 형태가 정돈되고 위압적이다. 우뚝 솟은 성벽과 성문, 그 위에 세운 망루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런 감개는 날마다 성벽을 보았던 송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수면에 모여 있는 배에서 보는 성벽은 한층 더 높게 보였을 것이다.

높은 성문은 틀림없이 이것이 도시와의 경계라는 인상을 새삼스러운 듯 남겼을 것이다.

또 지금보다 숫자가 많았을 몇 개의 탑이 솟아있어, 틀림없이 성벽의 높이를 한 층 더 느낄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내가 쑤저우를 여행했을 때도, 거리의 허공에 몇 개의 높은 건물이 솟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경치는 똑같았을 거라 생각되기에 송대의 쑤저우 교외의 사람들도 성벽 위에 솟아오른 탑을 아침저녁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점을 다시 상상해 보자. 현재의 쑤저우에는 송대 이후의 유래를 자랑하는 탑이 네 개 있다. 구성(舊城) 내 최대를 자랑하는 것은 베이쓰타(北寺塔)로 78미터이다. 송대에는 바오언쓰(報恩寺)라 불렸던 절이다. 이 절은 일본의 유학승도 들던 곳으로 북송 무렵 중국에 유학 왔던 죠진(成尋)도 들렀다.

지도에서 보여지듯이 바오언쓰의 앞에는 쑤저우를 동서로 나누는 가로가 남북으로 죽 뻗어 있다. 후룽졔(護龍街)라 불렸던 가로다. 이 후룽졔의 서쪽이 우 현(吳縣)이고, 동이 창저우 현(長洲縣)이다. 그리고 이 대가(大街)의 중간 정도에 있는 러챠오(樂橋)가 쑤저우 성내의 온갖 분기점이 되었다.

쑤저우 성내의 구분은 우선 후룽졔로 동서가 나뉘고, 러챠오로 남북이 나뉜다. 이렇게 사분할 된 쑤저우 성내를 러챠오둥베이(樂橋東北), 러챠오둥난(樂橋東南), 러챠오시베이(樂橋西北), 러챠오시난(樂橋西南)으로 나누어 부른다.

이길 위에 서면 멀리 아득하게 거대한 탑이 보인다. 성내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큰길 위에 솟아오른 이 베이쓰타는 사람들을 위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탑은 성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위용을 자랑했다.

쑤저우에는 이밖에도 탑과 몇 개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송평강도》에 그려져 있다. 오늘날은 대부분 볼 수 없지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쑤저우 최대의 번화가에 있는 쉬안먀오관(玄妙觀)은 높이가 24미터이다. 쿵쯔(孔子)의 이른바 원먀오(文廟)는 19미터라 한다. 성벽 위에 관청과 절, 도관 등의 건물이 우뚝 서있고, 그 용마루가 번쩍번쩍 위압적으로 빛을 내며, 별세계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쑤저우뿐만 아니라 송대의 일반적인 도성의 외관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