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중세의 여행 1

제1부 중세의 여행

입촉기(入蜀記)

건도(乾道) 6년(1170년) 윤5월 18일, 한 사람의 관료가 쿠이저우(夔州,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펑졔현(奉節縣))의 통판(通判)으로 임명되어 고향인 산인(山陰, 지금의 저쟝성(浙江省) 사오싱현(紹興縣))을 출발했다.

통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부지사로 주지사의 전횡을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지만, 얼마 안 있어 그 권한이 축소되어 건도 연간 무렵에는 감시라고 하는 역할의 권한이 미약해졌다. 자기 자신을 주의 책임자로 자부했던 주지사에 대하여 대항하는 자세는 진즉이 희미해져 버렸던 것이다. 북송 무렵 게를 좋아했던 관료가, “게를 먹을 수 있게, 통판이 없는 곳에 부임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쓰촨에 부임한 그 통판은 여행의 양상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입촉기(入蜀記)》다. 중국의 문인은 일본의 문인과 달리 일기를 쓰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 일기야말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여행기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시 사회를자세하고 꼼꼼하게 기술한 내용 덕분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기술된 내용은 여행의 코스, 타고 간 배의 모습, 선상의 생활, 각지의 명소와 유적들,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그 당시의 경관과 풍속 등 여러 가지 방면에 걸쳐 있었다. 일기는 그로부터 7년 뒤 거꾸로 쓰촨에서 강남으로의 여행을 기록한 판청다(范成大, 1126~1193년)의 《오선록(吳船錄)》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꼼꼼했다.

일기를 기록한 이는 루유(陸游, 1125~1210년)로 호는 팡웡(放翁)이었다. 그는 남송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 이름은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고, 평생 1만 수가 넘는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엄격했던 그였기에, [실제] 작품은 2만 수를 넘지 않았을까 한다.

중국의 문인은 대다수가 관료였다. 그 역시도 임지에 부임하느라 전국을 다녔다. 그렇게 남아 있는 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입촉기》였던 것이다.

중국의 여행자와 기록

어느 시대건 여행을 한 이는 많았다. 지금보다 훨씬 교통이 불편했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여행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먼 곳으로의 여행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던가? 그러한 사실은 일본의 고대인들이 구만리 파도 길을 넘어 머나먼 중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중국을 여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 많은 기록을 남겼다. E. O. 라이샤워에 의해, 마르코 폴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행가로 소개되었던 엔닌(圓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중세에도 여행자는 있었다. 모자간의 깊은 정을 뿌리치고 송대의 중국을 여행했던 죠진(成尋, 1011~1081년)의 일기가 《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이다. 같은 시대에 송나라에 들어갔던 가이카쿠(戒覺)도 있다. 그 역시 일기를 남겼다. 송대 이후에는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가 있는데, 그의 일기가 희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대로다.

루유(陸游)의 여행

루유는 고향을 떠나, 느긋하게 강남을 여행했는데, 교통수단은 배였다. 그가 묘사한 그 당시 도시의 모습 등은 실제로 깊은 흥미를 자아낸다.

그는 고향인 사오싱(紹興)을 떠나면서 가까운 커챠오(柯橋)에서 전송 나온 사람들과 헤어졌다. 그곳은 운하 마을로 운하가 마을 한 가운데를 흘렀다. 루유가 건너갔을 무렵의 다리는 부교였다. 이것은 배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 다리로 삼은 것이었다. 많은 배들이 오가고 운하와 밀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생활은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예전에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운하의 물로 빨래를 하고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을 사람과 화물을 가득 실은 배가 다녔다. 그런 강남의 토지 경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기본적인 변화가 없다. 드넓게 퍼져 있는 논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운하, 그리고 그곳에 점철되어 있는 많은 인가들이 그렇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강남은 진정 수향(水鄕)이었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루유는 항저우(杭州)에 도착했다. 당시의 이름은 린안(臨安)으로 남송의 수도였다. 8년만이었다. 형과 친구들과 재회하고 시내와 시후(西湖) 등지를 유람했다. 기나긴 여정을 앞두고 일시적인 휴식을 취하고는 마침내 길을 떠났다.

여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덥다고 생각하면 폭우도 내렸다. 풍부한 물의 혜택을 입고 있는 드넓게 펼쳐져 있는 강남에는 모기도 많았고, 가족 중에는 병자도 생겼다.

그런 가운데 루유는 꾸준하게 일기를 썼다. 슈저우(秀州) 일대는 운하의 물이 범람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가족이 모두 나와 물을 퍼서 빼내느라 분주했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들이건 필사적이었다. 특히 여성이 일을 더 잘 해서 놀랐다. 다리로 수차를 밟으면서 손으로는 삼베 짜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이 일하는 모습이 그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남겼던 것일까? 오지에서는 직물 짜는 일로 통근하는 여인들을 서술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행상 일에 열심인 모습도 보았다. 중세의 사람들 역시 일상생활의 양식을 구하느라 필사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가까워지면서 행상이 늘었는데, 대부분 소상(小商)이었다. 뱃전을 두드리며 손님을 불렀는데, 팔고 있는 것은 작은 물고기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鮓)였다. 소금에 절인 물고기는 술지게미와 소금으로 절인 것으로, 일본말로 ‘츠게우오(漬け魚)’라고도 하는 ‘후나즈시(ふなずし)’와 비슷한 것이다. 양쯔강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다신커우(大信口)까지 가면, 아이들이 마름 열매와 연근, 머위 등을 팔러 왔다.

경물(景物)도 기록하고 있다. 수향 강남이라고 하는 것도 장소에 따라 경물이 달라졌다. 슈저우(秀州)에서는 쟈스민이 활짝 피었는데, 우시(无錫)에 가까워지면 대두와 밤이 심어져 있었다.

루유의 기록에는 경물뿐 아니라 사람도 있었다. 양쯔강에 들어서서 과저우(瓜州)에서는 많은 군인이 보였다. 화북 지역을 잃은 남송이었기에 양쯔강을 건너면 그곳은 곧 숙적인 금나라 땅으로 이어졌다. 전선에 가까웠던 만큼 군인이 많았던 것이다.

진기한 것도 있었다. 우후(蕪湖)에서는 녹색 털 거북(綠毛龜)과 민물 돌고래인 양쯔강 돌고래(江豚)를 보았다. 녹색 털 거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온몸에 녹조가 붙어 있는 거북을 본 적이 있다. 중국에서는 인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아마도 녹색 털 거북은 이것을 말하는 것 같다.

양쯔강 돌고래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은데, 검은 것과 누런 것이 있다고 적혀 있다. 특히 아주 빨갛고 길이가 수 척이나 되는 놈이 나와 간이 콩알만 해 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기록한 그 당시의 광경은 [이토록] 풍요롭고 한가했다.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는 나무 뗏목을 보았는데, 폭이 십여 장에 길이가 오십여 장 정도 되었다. 송대의 도량형에서는 환산하는 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지금은 편리하게 찾기 위해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사서인 역대 도량형 일람표가 실려 있는 《한화중사전(漢和中辭典)》(가도카와서점(角川書店) 간행)을 이용해 환산하기로 한다. 이후의 환산은 모두 이 표에 의한 것이다.

이 표에 의하면, 1장은 3.07미터이니, 폭이 30미터를 넘고, 길이는 족히 1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 위에 30에서 40여 가구가 살았는데, 그 사이에는 좁은 길이 종횡으로 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에서 사당도 발견했다. 하지만 이 뗏목은 작은 축이었고, 큰 것의 경우 그 위에 흙을 덮어 채소밭(菜園)을 만들거나 술집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루유의 일기는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은 풍경이나 풍속만이 아니라 도시의 경관도 묘사되어 있다. 그의 일기에는 많은 도시가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졘캉부(建康府)의 모습만 압축적으로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