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무지한 ‘오랑캐’로 태어났으나 끝없는 상쟁 속에 창업에 성공했다. 그의 후예들은 중원을 삼키고, 서와 남의 또 다른 변방까지 병합해 자기 몸집의 100배나 되는 대청제국을 세웠다. 만주족의 역사를 밟아갔던 15일간의 여행에서, 오늘은 대청제국의 창업주 누르하치를 대면하러 가는 길이다.
누르하치와의 첫 대면은, 당시에는 피로 물들었을, 지금은 숲만 울창한 사르후 전투 현장이었다. 누르하치가 이 전투에서 전대미문의 대승을 거두었고 백여 년이 지나 이곳을 찾아온 건륭제는 <사르후 전투 서사비>(薩爾滸之戰書事碑)를 세웠다.
나는 빗방울이 후둑후둑 들이치는 전동차를 타고 숲길을 올라가면서 당시의 피바다를 잠시 상상했다. 누르하치는 명-조선 연합군을 격파하여 10만 가운데 4만을 살상함으로써 ‘빛나는 역사’를 새겼다. 역사에는 황제도 있고 백성도 있다. 백성은 땀 흘리는 일상 속에 가는 모래로 역사를 채워왔고, 황제는 권력을 휘둘러 굵은 획으로 역사를 썼다. 같은 역사라지만 황제의 역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전장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역사는 때로 깊은 회의감을 떨치기 힘들다.
서사비는 랴오닝성 푸순현에 있는 훈하(渾河)의 다훠팡(大伙房) 저수지 서안에 세워져 있다. 사르후 풍경구로 입장해서 전동차를 타고 2킬로미터 숲길을 올라가야 한다. 비석은 정자 안에 세워져 있다. 사르후 전투는 누르하치가 1616년 금나라를 세우고 3년이 지난 1619년에 벌어졌다. 국가를 선포할 정도로 흥기한 누르하치를 명나라가 강력하게 견제하려고 벌인 것이 사르후 전투이다. 명나라는 조선을 강박해서 동원한 1만3천과 해서여진 여허부의 2천을 포함해 10만여 병력으로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명-조선 연합군은 10만 병력을 동서남북 4로군으로 나눠 후금의 수도 허투아라를 향해 진공해왔다. 누르하치는 병력 상으로는 4만을 넘지 않는 열세였다. 서로군이 제일 먼저 공격에 나섰으나 누르하치는 치고 빠지면서 유인하다가 8기중 6기를 동원한 야간기습으로 서로군을 궤멸시켰다. 북로군은 서로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진영을 단단히 구축한다고는 했으나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못한 상태에서 병력을 셋으로 분산시키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팔기는 북로군을 한 갈래씩 쳐내면서 섬멸했다. 그 다음 쉴 틈 없이 전군을 집결시켜 북상해오던 동로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했다.
이로써 4일만에 4로군 가운데 3로군이 전멸됐다. 남로군은 심각한 전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퇴각했다. 명의 기록에 따르면 4만5천 이상의 장졸이 전사했다. 결정적인 패배였다. 사르후 전투로 인해 국제정세는 크게 뒤집어졌다. 여진인들을 교역권과 군사력 두 카드로 어르고 달래다가 불시에 뺨을 치면서 통제해오던 명나라는 방어태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명-조선 연합군에 파병했던 해서여진의 여허부는 사르후 전투 얼마 후에 누르하치의 보복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후금은 명나라를 직접 넘보는 우세한 고지를 확보한 것이다.
한편 동로군 후위에는 조선군도 있었다. 조선군은 전투가 불리해지자 ‘명의 요구에 마지못해 출병했다’고 알리고는 투항해 버렸다. 포로가 된 강홍립의 조선군 병졸들은 1년 뒤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강홍립은 인질로 잡혀 있다가 정묘호란(1627)에서 후금군의 선도를 맡았고, 후금과 조선과의 화의를 주선했다.
답사일행이 모두 귀국하고 필자 혼자 조선군이 포로로 잡혀있던 철배산(鐵背山)을 찾아갔다. 다훠팡 저수지 동쪽 끝이다. 사전준비를 하는데 신춘호 박사(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가 철배산을 직접 찾아가기는 쉽지 않고, 저수지 북안에 있는 원수림(元帥林, 장쭤린의 假墓)에서 조망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원수림에서 오솔길을 따라 저수지 쪽으로 빠져나가니 철배산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철배산은 허리춤까지 수몰되었다. 동네 중년 남자들이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정경일 뿐이다. 조선군의 수난은 기록으로 기억될 뿐, 현장에는 표지 하나 없고 찾는 이도 일년에 한둘이나 있을까.
사르후에서 나와 누르하치의 출생지이자 후금의 수도였던 허투아라성(赫圖阿拉城)으로 갔다. 사르후 전적비에서는 80여 킬로미터, 선양에서는 150여 킬로미터 떨어진 푸순시 신빈(新濱) 만주족자치현에 있다. 입구에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 진군하는 누르하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장수의 날렵함과 창업자의 강건함이 진하게 느껴진다. 성 안에는 누르하치의 집무실 한궁대아문(汗宮大衙門)과 생가, 우물, 성벽 등을 복원해 관광지로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1603년에 최초 수도였던 퍼아라에서 허투아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진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리고 팔기(八旗)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장정 300명을 하나의 니루로 묶고 25개 정도의 니루를 하나의 구사[旗]로 조직했다. 구사의 수장은 버일러[王]이다. 구사와 니루는 전통적인 부족이나 씨족을 해체하고 행정 납세 군역 등을 하나로 통합한 민정-군정 통합조직이었다. 1615년에는 여덟 개의 구사 곧 팔기 조직을 완성했다. 이로써 1만 군사만 모이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던 여진인들이, 1만 군사를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여덟 개의 상설 조직을 골간으로 하는 강력한 병영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누르하치 이외에도 한을 자처한 여진족 수장들이 있었지만 누르하치가 그들을 누르고 성공한 것은 팔기라는 혁신적인 조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을 통일하여 국가를 세우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사르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누르하치의 빛나는 업적이다. 고작 30여 명으로 기병한 누르하치는 당대에 이런 성취를 함으로써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누르하치는 두 가지에서 실패했다. 새로 흡수한 한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융합해내지 못했고, 군사적으로는 중원으로 가는 길목인 영원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허투아라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한인 정책 실패의 현장, 랴오양(遼陽)의 동경성이었다. 누르하치는 1621년 수도를 랴오양으로 옮겼다. 기존의 랴오양성에 여진인을 이주시키는 한편 그 동쪽에 동경성을 새로 세워 자신의 치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정문이 남아 있고 성안의 유지는 발굴을 거쳐 보존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랴오양에서 여진인과 한인을 동거하게 했는데,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집집마다 들어와 동거하는 여진인은 한인에 대해 점령군 행세를 했고 한인들은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날카롭게 저항했다. 우물에 독을 푼다든지 야간에 여진인을 하나씩 살해하는 사건이 끊어지지 않았다. 한인을 포섭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1625년 랴오양의 한족 상당수를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복으로 강등시키고는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말았다.
영원성 공략도 성공하지 못했다. 영원성은 진저우(錦州)에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산해주랑 중간에 있는 군사요충이다. 지금의 후루다오시(葫蘆島市)에 있는 싱청고성(興城古城)이다. 성문과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옹성 위에는 홍이포가 전시돼 있다. 누르하치는 1626년 이곳을 공격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이었다. 명나라 문관 출신의 원숭환(袁崇煥)은 포르투갈 대포를 모방하여 명나라가 자체 제작한 홍이포를 배치하여 영원성을 사수했다. 이 포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공성 전투 중에 누르하치가 대포의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해 9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미 칠십 가까운 나이였다.
누르하치는 선양으로 수도를 옮겨오면서 새로운 궁성을 짓도록 했다. 그게 지금의 선양 고궁이다. 그러나 새 궁성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가 세운 후금이란 대업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궁성과 함께 여덟 째 아들 홍타이지에게 계승되었다. 홍타이지는 미완의 선양 궁성을 완성시켰고 누르하치의 대업을 업그레이드하여 만몽한의 대청으로 키웠다. 누르하치와 견주어 음미할 수 있는 홍타이지의 역사는 선양 고궁에서 건축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를 찾아 선양의 고궁으로 간다.
도움말 이훈 만주사 연구자, 《만주족 이야기 》 저자
중국여행객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