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 제27권 1

제27권 고아수는 기꺼이 시주물을 기부하고
최준신은 공교롭게 부용병을 만나다
顧阿秀喜舍檀那物 崔俊臣巧會芙蓉屛

먼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부부란 본디 일심동체라 하지만
환난이 닥치면 각자 헤어진다네
허나 잃었던 구슬 되찾으면
더욱 빛나게 닦기 마련이리

이야기를 하자면, 송(宋) 나라 때 변량(汴梁)에 왕종사(王從事)1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인과 함께 임안(臨安)으로 전근을 가서 여염집을 빌려 며칠 묵게 되었다. 그런데 집이 좁고 불편했던 지라 왕종사는 큰길가에서 집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넓고 깨끗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집값을 내고는 돌아와서 부인에게 일러주었다.

“집이 아주 좋더라구. 내 내일 먼저 물건들을 옮겨가고 일이 끝날 때쯤 해서 가마를 불러 당신을 데려오겠소.”

이튿날 옷궤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잘 묶은 다음, 왕종사는 짐을 가지고 먼저 가서 정리를 하기로 하고 집을 나설 때 다시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먼저 갈 테니 당신은 여기서 좀 기다리다가 가마가 도착하는 대로 오면 되오.”

왕종사는 분부를 마치고 새집으로 가서 정리를 한 후, 곧 가마 한 채를 불러 옛집으로 가서 부인을 모셔오도록 했다. 그런데 가마가 간 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왕종사는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다가 다시 옛집으로 와서 물으니 옛집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리께서 가신 지 얼마 안돼서 가마 한 채가 부인을 모시러 와서 부인께서는 벌써 그 가마를 타고 가셨어요. 그런데 뒤에 또 가마 하나가 모시러 왔길래, 제가 그 부인께서는 벌써 가마를 타고 가셨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빈 가마를 메고 돌아갔는데, 어떻게 아직도 도착을 안 했습니까?”

왕종사는 깜짝 놀라 새집으로 되돌아와 보니 두 가마꾼이 와서 돈을 달라며 말했다.

“저희가 가마를 메고 부인을 모시러 갔더니, 부인께서는 벌써 가셨더라고요. 저희가 모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마 삯과 수고비는 주셔야죠.”

“내가 부른 것은 너희들 가마인데, 어떻게 또 다른 사람의 가마가 먼저 가서 데리고 갈 수가 있단 말이냐? 게다가 지금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건 저희들은 모르지요.”

왕종사는 하는 수 없이 몇 십 전을 내주었는데, 마음이 뒤숭숭하고 속이 끓어올랐지만 풀 길이 없었다.

다음날 임안부(臨安府)로 가서 고소장을 올려 옛집의 주인을 잡아왔으나, 그저 전에 했던 말 그대로일 뿐 다른 말은 없었다. 다른 이웃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또 나중에 왔던 두 가마꾼을 데려다 물었더니

“단지 빈 가마만 메고 한 차례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그건 그곳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그 외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임안부 역시 어쩔 방법이 없어 그저 체포문서를 발부해 먼저 왔던 두 가마꾼을 수색해서 잡아오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도 주소도 몰랐고 종적도 없었으니, 마치 바다 속에서 달을 건지는 셈이었다. 멀쩡하게 눈앞에 있던 한 부인이 감쪽같이 어디론가 납치돼 버린 것이었다. 왕종사는 슬프고도 당황해서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부인을 잃게 되었지만, 그는 다시 아내를 맞아들이지는 않았다.

5년이 지난 후 왕종사는 구주(衢州)2의 교수3로 선발되었다. 구주의 소재지는 서안현(西安縣) 교외였는데, 그 현의 현지사는 왕교수와 자주 왕래하였다. 하루는 현지사가 왕교수를 초대하여 관아에서 술을 마시는데, 한창 마시던 중에 안주로 자라를 내오는 것이었다. 왕교수는 두어 젓가락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흐느껴 울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현지사가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왕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맛이 잃은 처가 요리한 것과 너무나 비슷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부인께서는 언제 작고하셨습니까?”

“차라리 죽었다면 그래도 천명이라고는 하겠지요. 그러니까 임안에서 이사를 할 때 가마를 불러 맞이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어떤 못된 놈인지 먼저 가마를 메고 와서 사기를 쳤답니다. 제 처는 제가 보낸 가마인줄로 잘못 알고 그걸 타고 가버린 거지요. 당시에 고소를 했지만 지금까지도 해결이 안됐습니다.”

현지사는 낯빛이 바뀌어 이렇게 말했다.

“제 첩이 바로 임안에서 삼십만 전을 주고 맞아들인 타향사람입니다. 마침 그 사람에게 부엌일을 시키고 있는데, 이 자라도 그 사람이 요리한 겁니다. 그러니 좀 이상한 일이군요.”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첩에게 물었다.

“당신은 타향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임안에 있다가 이리로 시집오게 된 거요?”

그러자 첩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본래 지아비가 있었으나 간인에게 속아 팔아넘겨졌습니다. 그런데 지아비의 체면을 손상시킬 것 같아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당신 남편의 이름이 어떻게 되오?”

“왕아무개라고 하는데 임안에서 전근 발령을 대기하던 종사(從事)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현지사는 대경실색하여 다시 나와 왕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어떤 분이 뵙고 싶어 합니다.”

왕교수가 그를 따라 들어가니 현지사가 부르는 곳에서 한 부인이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왕교수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잃어버렸던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잠시 후 왕교수가 물었다.

“당신 어떻게 해서 여기 있게 되었소?”

“당신이 그날 밤 저에게 이야기할 때, 허름한 동네라 아마도 누군가가 가마로 데려간다는 말을 엿들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간 지 얼마 안돼서 어떤 가마가 와서 저를 데리고 갔던 거예요. 저는 그저 당신이 보낸 줄로만 알고 곧장 차비를 해서 가마를 타고 갔어요. 저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빈방이었어요. 그 안에는 두세 명의 부녀자들이 있었는데, 함께 갇힌 채로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저를 관선(官船)에 팔았어요. 그때서야 속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전근될 분이어서 사실을 말했다가는 당신께 수치스런 일이 될까봐 꾹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오늘에 와서 뜻밖에도 여기서 서로 만나게 되었군요.”

현지사는 무척 미안해하며 이 소식을 바깥채에 전하고 급히 당직 가마꾼을 불러 부인을 왕교수의 관아로 보냈다. 왕교수가 삼십만 전의 몸값을 갚으려 하자 현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동료 관리의 아내를 첩으로 삼은 데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잘못을 탓하지도 않고 용서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거기다 어찌 감히 몸값까지 요구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왕교수는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 기쁘게 재회한 두 부부는 현지사에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원래 임안의 무뢰한들이 왕교수가 먼 타향사람이라 그를 속인 것이었다. 그날 밤 부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쁜 마음이 생겨 그녀를 유괴해다가 관선에다 판 것이다. 또 나중에 부임해 간 곳도 먼 타 지역이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교롭게도 구주로 발령이 날 줄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두 부부가 헤어진 지 5년 만에 다시 다른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하늘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아 이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깨진 거울이 다시 합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이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도 흠이 있으니, 그것은 왕부인이 비록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이기는 하나 다른 사람의 첩이 되어 이미 몸을 더럽혔고 또 악당의 자취를 찾아내지 못하여 원수를 갚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최준신(崔俊臣)의 부용병풍(芙蓉屛)’ 이야기에서 절조를 온전히 하고 원수도 갚고 또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만은 못하다.

이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지요. 독자 여러분 이제 제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보겠습니다. 먼저 <부용병가(芙蓉屛歌)>라는 노래 한 수를 보시면서 대강의 흐름을 파악해보시지요.

부용꽃 그려진 병풍에 차마 글을 적으니
병풍에 떨어진 피눈물은 새빨간 능금 빛
떨어진 잎이나 마른 가지나 다 처연한데
비단 폭도 먹자욱도 모두 빛이 바랬네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생사가 갈려
혈혈단신 떠돌게 되었구나
떠돌다 죽으면 누구에게 의탁할고?
떠도는 혼 저승서도 끝내 못 돌아갈 텐데
그림 속의 요염한 자태 마치 어제 같구나
어제 같아 마음 저미니
가을비 견뎌내자 또 다시 가을 서리 내리는 듯
어찌 강호에서 뱃사공이나 좇겠는가
기꺼이 출가하여 부처님께 배례하리
부처님은 본디 자애로우시고
그 자애로움 뭇 사람에 비할 바 아니라
죽은 넋이라도 원컨대 거두어 주신다면
미망인 다행히도 인도될 수 있으련만
부용꽃 고운 색깔은 지아비 손수 그린 것
꽃이 시드는 건 꼭지가 꺾인 탓
줄기가 죽는 건 싹이 병든 탓
꽃술 마르니 마음 더욱 쓰리지만
뿌리 썩어도 정한(情恨)은 가시지 않으리
장대(章臺)에서 한익(韓翊) 그리며 울던 일만 말해서야4
갑장(甲帳)에서 문소(文簫)5 만나길 어찌 기대하랴?
부용꽃엔 깊은 뜻 담겨있으니 결코 버려서는 안 되리
다행히 둥근 달처럼 단원(團圓) 이루거들랑
서로 사랑하고 내버리지 마시길
그 누가 나의 부용가를 들을 수 있을까?
세상의 부부들이여 반목하지 마시고
이 부용꽃 얼마나 가련한가 보소서

이 노래는 원대(元代) 지정(至正) 년간에 진주(眞州)6의 재사(才士) 육중양(陸仲暘)이 지은 것이다. 그가 이 노래를 지은 사연은 이러하다. 당시 진주에 성이 최(崔), 이름이 영(英), 자(字)가 준신(俊臣)인 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집안이 부유하고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서화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왕씨(王氏)를 처로 맞아들였는데, 젊고 아름다웠으며 글도 읽을 줄 알고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두 내외는 그야말로 재자가인(才子佳人)이었으니 서로 너무도 잘 어울리고 그 사랑도 남달랐다. 이때는 신묘(辛卯) 년이었는데, 최준신이 아버지의 공덕으로 벼슬을 얻어 절강성(浙江省) 온주부(溫州府) 영가현(永嘉縣)의 현지사로 발령이 나 아내와 함께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진주갑(眞州閘)에 다다르니 늘상 항주 길을 다니는 소주(蘇州)의 대선(大船)이 있었다. 뱃사공은 고씨(顧氏)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최준신은 그 배를 빌리기로 하고 짐들을 실었다. 그리고는 가노와 계집종들을 데리고 장강을 따라 출발하여 항주로 부임의 길을 떠났다. 그런데 소주 지방을 지날 때 뱃사공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리께 알려드립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벌써 문턱까지 온 겁니다. 그러니 나리께서는 상금을 좀 내려주시고 공물(供物)과 지전(紙錢) 따위를 좀 사서 강호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준신이 그 말에 따라 돈을 얼마간 내주고는 관례대로 물건을 사다 일을 잘 처리하도록 하였다. 뱃사공이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제사에 썼던 음식과 술을 선창으로 보내왔다. 최준신은 머슴아이더러 받아다가 탁자 위에 차려놓게 하고는 왕씨와 함께 술을 데워 조금 마셨다. 최준신은 관리 집안의 자제인지라 강호의 금기를 알지 못하여, 술을 마시다 흥이 올라 궤 속에 넣어가지고 온 금은 술잔 등을 꺼내다가 왕씨와 함께 즐겁게 마셨다. 그런데 뒤편 선창에 있던 뱃사공이 그것을 보고는 나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때는 음력 7월, 한창 더운 때였으므로 뱃사공은 선창 안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리와 부인께서 이렇게 소란한 곳에서 쉬시니 너무 덥고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배를 좀 더 시원한 곳으로 옮겨서 정박하려고 하는데 어떠신지요?”

그러자 최준신은 왕씨에게 말했다.

“우리가 배 안에서 너무 더워 참기 힘들었으니,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소.”

“밤에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곳은 틀림없는 내지 운하이니 양자강 한가운데와는 달라요. 게다가 뱃사공이 여기 사람이니 틀림없이 이곳 사정에 훤할 터인데 안 될 게 뭐 있겠소?”

최준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공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그가 알아서 이동하도록 하였다. 본래 소주는 서쪽으로 태호(太湖)에 가까워서 수면이 넓은 큰 강들이 많아, 가는 길은 아직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만약 항구를 끼고 가면 온통 도적의 소굴이었다. 최준신은 북방 사람이라 그저 양자강에 강도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내지는 뱃길도 작은 데다 도적들이 들끓는 그런 곳과는 전혀 다르다고만 생각했으니 어찌 이런 사정을 알았으랴? 그날 밤 사공은 배를 갈대밭 사이에 정박시키고 어두컴컴한 틈에 왼편에서 칼을 들고 선창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먼저 하인 하나를 죽였다. 최씨 부부는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가진 것은 다 가져가도 좋으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뱃사공은

“물건도 가져갈 것이고 목숨도 앗아갈 것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사공이 칼로 왕씨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당황해 하지 마라, 난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용서할 수 없다.”

최준신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재삼 애걸했다.

“저는 불쌍한 서생입니다. 그러니 그저 죽이더라도 시신만은 온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칼을 쓰지는 않을 테니 어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하고는 최준신이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허리를 잡아 풍덩 하고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나머지 가동과 시녀들은 모두 죽이고 왕씨 하나만 살려 두었다. 그리고는 왕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를 살려준 이유를 알겠느냐? 내 둘째 아들이 아직 장가를 들지 못했는데, 지금은 뱃일로 항주에 가있다. 한 달쯤 있다가 돌아오거든 바로 너와 혼인을 맺어줄 것이다. 너는 우리 집안사람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머물러 있으면 자연히 좋아질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사공은 왕씨와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배 안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점검하고 정리하게 하였다. 왕씨는 처음에는 그가 괴롭힐 것 같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마음이 약간 놓여 속으로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해 봐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그 후 과연 사공은 왕씨를 며느리라고 불렀고, 왕씨는 거짓으로나마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사공이 그녀에게 무얼 하라고 시키든 그대로 순종하여 잔일을 거드는 등 정말로 집안 살림을 하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모시듯 시중을 들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적극 나서서 하나같이 척척 잘 해내었다. 뱃사공은 며느리 하나 참 잘 얻었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대해주었고, 보아하니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해서 그녀가 딴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 종사(從事): 주(州), 현(縣)의 수령을 보좌하는 동지(同知), 현승(縣丞), 주부(主簿 등의 관원을 가리킨다.

2 구주(衢州):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구주시(衢州市).

3 교수(敎授): 주학(州學), 부학(府學)의 교관.

4 장대(章臺)는 한대(漢代 장안(長安)에 있던 거리의 이름이다. 한익(韓翊)은 당대(唐代 남양(南陽 사람으로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는 한익의 애첩 유씨(柳氏)가 장대에서 한익을 그리며 슬피 우는 것을 전고로 삼은 것인데, 이 이야기는 당전기(唐傳奇 <유씨전(柳氏傳)>에 보인다.

5 배형(裴鉶)의 󰡔전기(傳奇)󰡕 중 <문소(文簫)>에 나오는 이야기로, 서생인 문소가 우연히 선녀인 오채난(吳彩鸞)을 만나 결국 부부가 된다는 내용이다. 갑장(甲帳)은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장막으로,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6 진주(眞州): 지금의 강소성 의징시(儀徵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