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3-1

제3장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 관통론, 유기설, 우열론, 구조학, 탐일학(探佚學)

3. 앞쪽 80회의 이문(異文) 연구에 관한 각종 문제

《홍루몽》 텍스트의 문제는 작품의 형성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현존하는 앞쪽 80회가 모두 원작자의 손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은 80회 내부의 문제이다. 둘째, 작자는 작품 전체를 완성했는가? (아니면 앞쪽 80회만 조설근에 의해 지어졌는가?) 이것은 스토리 전후의 문제이다. 셋째, 작자의 원래 의도를 계승한 판본은 어느 계열인가? 이것은 판본과 판본 사이의 문제이다.

이 ‘80회 내부’와 ‘120회 전후’, ‘판본들 사이’라는 세 가지 범주는 모두 작자와 작품 형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책의 형성 문제는 이미 선즈쥔(沈治鈞: 1960~ )의 《홍루몽 형성 연구》와 차이이쟝(蔡義江)의 《홍루몽은 어떻게 지어졌나?》, 궈하오(郭浩)의 《홍루몽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론》, 그리고 일본의 후나고시 다치시(船越達志: 1969~ )의 《홍루몽 성립에 대한 연구》까지 모두 4편이 전문 저작이 있다. 이 외에도 장이링(張愛玲: 1920~1995)의 《홍루몽의 악몽》과 류스더(劉世德)의 《홍루몽 판본 탐미(探微)》에도 작품 형성의 문제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이 있으므로 본서에서는 작품 형성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해석 활동에서 텍스트의 문제와 작자 관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해도 될 것이다. ‘작자 관념’이란 작자에 대한 신념을 언급한 각종 논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형성된 ‘작자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이 둘은 모두 연구자의 해석 방향과 가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1) ‘작자의 원본’과 ‘작자의 최종 완성본’

《홍루몽》의 각종 판본에서 앞쪽 80회의 문장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청나라 때의 논자들도 이미 주목하기 시작했다. 1911년에서 1912년까지 디바오셴(狄葆賢: 1873~1939)의 유정서국(有正書局)에서 척서본(戚序本)을 석인(石印)했는데, 척서본과 정고본(程高本)을 비교해 보면 앞쪽 40회 가운데 미비(眉批)가 적힌 것이 총 238항목 있는데, 그 가운데 226항목의 내용은 착서본과 정갑본의 대비에 관한 것이다. 그는 척서본이 정갑본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위핑보의 《홍루몽변》에는 〈고악본과 척료생본의 대체적인 비교〉라는 장이 들어 있는데, 여기서도 판본 사이에 차이가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후세에 필사본이 잇달아 나타나면서 필사본의 계통 자체도 ‘작자의 원본’ 또는 ‘작자의 마지막 완성본’이라는 문제에 근접하게 되었다.

‘작자의 원본’과 ‘작자의 마지막 완성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탠설은 〈편집에서 작자 최종 의도의 문제(The Editorial Problem of Final Authorial Intention)〉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두 가지 기본적인 상황에서는 특별히 더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는 편집자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행해진 개조에서부터 작자에 의해 행해진 개조를 구별하고 당시에 ‘작자의 의도’를 결정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음으로 여러 가지 개조가 의심할 바 없이 작자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편집자는 어떤 문장이 작자의 ‘최종 의도’를 대표하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첫 번째 상황은 대개 《홍루몽》 연구에서 ‘작자의 원본’을 결정하는 문제에 해당한다. 비교적 통용되고 있으며 학자들에게 중시되는 두 가지 《홍루몽》 교정본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홍루몽 80회 교본〉(1958년 출판)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필사본에는 어지럽고 빠진 부분이 있고 판각본(板刻本)은 또 후세 사람이 개편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 가지 목적을 가져야 했다. 첫째, 최대한 조설근 원작의 본래 면모에 근접하게 한다.

1982년과 1998년 중국예술연구원 《홍루몽》 연구소에서 교주(校注)한 《홍루몽》(일반적으로 ‘신교본[新校本]’이라고 부름) 역시 이것을 목표로 삼았다. 린관푸(林冠夫: 1936~ )는 〈낙엽을 쓰며 떨어진 것을 줍다: 《홍루몽》 새 판본의 교감을 회고하며〉에서 이렇게 밝혔다.

교감은 저본(底本)을 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글자를 교감할 때에도 기본적으로 지연재 비평 판본 계열의 각 텍스트 안에서 고려했는데, 그 목적은 조설근 원작의 원래 모습에 근접한 판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학자들이 필사본을 연구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모두들 ‘조설근의 저작의 원래 모습’과 ‘후세 사람들의 개편’을 고려한다. 서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있었다. 코헨(Philip Cohen)이 편집한 《악마와 천사: 텍스트 교정과 문학이론》에 수록된 실링스베리의 〈주체적 작자, 텍스트의 사회학, 그리고 텍스트 비평의 논증법〉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기되어 있다.

갈림길에서 고심하는 편집자와 비평가들은 어떤 법칙에 따를 수 있는 해석과 편집의 문제에 대한 답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해 보자. 예술 작품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혹은 예술 작품이 존재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존속하도록 하는 것은 어떤 권위 또는 권위들인가? 우리는 예술 작품을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편집하는 바른 길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들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편집 방법들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홍루몽》 판본 연구자들은 작자(author)와 권위(authority)를 동등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위핑보가 《홍루몽 80회 교본》에서 추구한 두 가지 목적 가운데 “조설근 저작의 본래 면모에 접근하는 것”이 “문장과 스토리가 비교적 완정하고 읽기 좋게 만드는 것”보다 우선한다. 《홍루몽》 연구소에서 교주한 판본도 “조설근 저작의 원래 면모에 접근하는 것”을 대전제로 내세우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일반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 두 가지 교정본은 각기 1958년과 1982년에 간행되었다.

그 후에 ‘작자의 원본’ 문제는 줄곧 학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차이이쟝(蔡義江)의 ‘절강판(浙江版)’ 《홍루몽》의 주요 정신은 그의 논문 제목이 〈조설근 원작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홍루몽》 절강판의 전언(前言)〉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같은 해에 강소고적출판사(江蘇古籍出版社)에서도 류스더(劉世德: 1932~ )가 교정한 《홍루몽》을 출판했는데, 그 역시 “조설근의 원문”을 추구한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정칭산(鄭慶山)의 《지연재본 휘교(彙校) 석두기》와 저우루창의 《석두기 회진(會眞)》 역시 마찬가지로 ‘진정한’ ‘원래 모습’을 표방했다. 저우루창은 스스로 “이 책의 원고를 쓴 목적은 우리 중화민족의 위대한 문학 거성(巨星)이 남긴, 오랫동안 어지럽게 수정된 《홍루몽》의 원래 면모와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양추안용(楊傳鏞: 1931~2006)의 《홍루몽 판본 변원(辨源)》과 린관푸의 《홍루몽 판본론》 역시 ‘조설근 원작에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红楼梦戚序本, 출처 孔夫子旧书网

일반 연구자들도 모두 현존하는 필사본이 판각본(정고본)에 비해 ‘작자의 원본’에 근접했다고 믿고 있지만, 우리 앞에 있는 많은 필사본 가운데 어느 판본을 택해야 하는가? 근대의 학자들은 필사본들을 몇 개의 계통으로 나누어서 기묘본과 경진본, 열장본, 몽고본을 포함하는 ‘사열정리본(四閱整理本) 계열’과 몽부본과 척호본(戚滬本), 척정본(戚正本), 척녕본(戚寧本)을 포함하는 ‘입송헌(立松軒)’ 계열 같은 호칭이 생겨났으며, 동시에 그 가운데서 ‘작자의 마지막 정본(定本)’ 즉 ‘권위 있는 텍스트’를 찾으려 했다. 이런 방법은 판본학자 맥간(Jerome J. McGann)이 《현대 텍스트 비평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한 서양 ‘고전문헌학(Classical Scholarship)’과 무척 유사하다. 맥간은 이렇게 지적했다.

작자의 원고가 없이 그저 후세 필사본의 어느 정도 확장된 문헌만 갖고 있는 고전 문헌학자들은 나중에 나온 이들 필사본들의 내적 역사를 추적하기 위한 절차들을 발전시켰다. 그 목적은 그것들이 나타난 역사를 밝힘으로써 텍스트 상의 오류들을 판별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그 방법은 텍스트에서 잘못 변조된 부분들을 ‘청소’하고, 그럼으로써 ……잃어버린 원고, 즉 ‘권위 있는 텍스트’를 생산(또는 거기에 접근)하는 것을 추구했다.

펑치용(馮其庸: 1924~ )은 《경진본을 논함》에서 현존하는 경진본의 저본이 아마 최후의 정본(定本)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잉비청(應必誠: 1936~ )도 《석두기 경진본을 논함》에서 “‘경진본’은 조설근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온 정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펑치용와 잉비청은 각기 경진본에 대한 전문 연구서를 간행했으니 당연히 그들 나름의 일리가 있다. (또 어떤 논자는 경진본이 “신뢰할 만한 필사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진본은 미완성이고, 회가 나뉘지 않았으며, 문장이 빠진 부분이 있으며, 다른 필사본의 해당 부분과 비교했을 때 문장과 단어의 차이가 아주 크다. 이 외에도 현존하는 경진본의 저본 역시 몇 개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척서본(戚序本)을 “조설근이 임종할 때 남긴 원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대담하게 ‘임종’이라는 말을 써서 논자가 조설근이 죽을 때의 모습을 목격한 것처럼 쓰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잠시 이 주장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 홍콩의 연구자 송치(宋淇: 1919~1996)가 이미 척서본이 “원본에 가장 근접한 필사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다른 판본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완정한 필사본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경진본보다 반드시 아래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러하다. 각 판본의 문장은 남아 있기도 하고 빠져 있기도 하며, 같거나 다르기도 해서 어느 것이 작가의 원고(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원고를 포함해서)이고 어느 것이 후세 사람에 의해 보충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두 연구자의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구자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이 기준은 공동으로 준수해야 할 관행인가, 아니면 각자의 준칙인가? 이런 준칙들은 어떤 문학적 신념을 반영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신념은 또 전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갖가지 문제들은 모두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각종 《홍루몽》 필사본의 앞쪽 80회에 들어 있는 이문(異文)들은 모두 옳다. 분량의 제한과 논의 문맥에 제한을 받아 이문과 관련된 문제를 전체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문 전체에 관심이 있다면 펑치용이 주편(主編)하고 《홍루몽》 연구소 휘교(彙校)한 《지연재중평석두기휘교(脂硯齋重評石頭記彙校)》(이하, 《휘교》로 약칭함)을 참조할 만하다. 그러나 해석의 문제는 단순이 이문의 휘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아래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판본 연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2) 텍스트의 불안정성과 해석의 관계

필사본 계통 가운데 제1회에는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두 전제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하나는 여와(女媧)가 하늘을 보수하고 남은 돌이고, 다른 하나는 신영시자(神瑛侍者, 변장본[卞藏本]에는 ‘신영시자[神英侍者]’로 되어 있음)이다. 구체적인 상황은 이러하다. 첫째, (필사본 가운데 갑술본[甲戌本]이 대표적인데) 여와가 하늘을 보수하고 남은 돌이 승려(망망대사[茫茫大士])와 도사(공공도인[空空道人])에 의해 인간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둘째, 신영시자의 이야기. 진사은(甄士隱, 즉 진비[甄費])이 꿈속에서 어느 승려와 도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가운데 적하궁(赤瑕宮)의 신영시자가 강주선초(降珠仙草)에 감로수(甘露水)를 뿌려 준 덕분에 강주선초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신영시자가 인간 세상에 내려가고 싶어 하자 강주선자도 인간 세상의 사람으로 태어나 감로수를 뿌려 준 은정에 보답하려 했다고 한다. 작품에서 그 승려는 “이 풍류 원귀들은 아직 인간의 태로 들어가지 않았네. 이 기회에 이 어리석은 것(돌: 역자)을 그 사이에 끼워 넣어서 경험해 보게 하세.” 라고 말했다. 나중에 진사은이 그 ‘어리석은 것’을 찾아보니 “바로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옥”이었는데, 그 위에 ‘통령보옥(通靈寶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통령보옥이 바로 하늘을 보수하는 데에 들어가지 못했던 돌이었다. 주의할 점은 ‘물을 뿌려 주고[灌漑]’ ‘눈물로 갚는[還淚]’ 것은 신영시자와 강주선자 사이의 일이지 통령보옥(돌, 어리석은 것)과는 무관하며, 통령보옥은 그저 ‘그 사이에 끼워 넣어’져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고본(程高本)의 문장은 필사본 계열과는 아주 달라서, 인간 세계로 내려가는 이야기가 하나만 들어 있다. 정고본에도 돌이 아름다운 옥으로 변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만, 돌이 바로 신영시자라고 했다. 그러면 (갑술본을 대표로 한) 필사본과 (정갑본을 대표로 한) 판각본의 문장을 비교해 보자.

[갑술본]: 只因西方靈河岸上三生石畔, 有絳珠草一株, 時有赤瑕宮神瑛侍者, 日以甘露灌漑, 這絳珠草始得久延歲月……

[정갑본]: 只因西方靈河岸上三生石畔, 有絳珠草一株, 那時這個石頭因媧皇未用, 卻也樂得逍遙自在, 各處去遊玩, 一日來到警幻仙子處, 那仙子知他有些來歷, 因留他在赤霞宮居住, 就名他爲赤霞宮神瑛侍者. 他卻常在靈河岸上行走, 看見這株仙草可愛, 遂日以甘露灌漑, 這絳珠草始得久延歲月……

정고본에 따르면 돌이 이미 아름다운 옥(통령보옥)으로 변했는데 여기서 또 신영시자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뚜렷한 내재적 모순이 있다. 이에 비해 필사본에서는 신영시자와 돌의 신분이 각기 분명하다. 필사본에서 신영시자의 화신(化身)은 가보옥이며, 돌의 화신은 통령보옥이다. 신영시자와 가보옥의 이야기는 돌이 들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은 소설에서 하나의 서술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필사본에 따르면 돌이 처음으로 망망대사와 공공도인을 만났을 때 이미 자신을 ‘어리석은 것[蠢物]’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진사은의 꿈속에서 승려와 도사도 돌을 ‘어리서은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될 때에도 돌은 늘 ‘어리석은 것’이라고 자칭하며 독자에게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제6회에서 천리 밖에서 겨자씨만큼이나 보잘것없고 자잘한, 그래도 영국부와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는 어느 집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돌은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너무 자잘하고 상스러운 얘기라고 마음에 들지 않거든 얼른 이 책을 내던지고 눈에 띄는 다른 좋은 책을 찾아보시구려. 그런대로 심심풀이라도 할 만하다고 생각하시거든 이 어리석은 것이 자세히 얘기해 드릴 테니 들어보시구려.” 그리고 원비(元妃)가 가족들에게 인사[省親]하러 와서 가마를 타고 대관원에 들어가 화려한 풍경을 보았을 때, 돌이 또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

이때 내 자신(돌: 역자)은 대황산 청경봉 아래의 그 처량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떠올랐소. 만약 머리에 부스럼이 난 그 스님과 절름발이 도사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런 세상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겠소?

작품에서는 또 대관원 안의 편액과 대련을 모두 가보옥이 지었는데 “가씨 집안은 대대로 시서(詩書)를 익힌 선비 가문 출신인데 ……어째서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쓴 것으로 구차하게 땜질을 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다시 돌을 내세워 설명해 준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어리석은 것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여러분도 그 사연을 알게 될 것이오. 옛날 가(賈) 귀비가……

필사본에서는 신영시자와 돌이 따로 나뉘어 있으며, 가보옥과 통령보옥도 따로 나뉘어 있다. 신영시자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가보옥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돌을 끼워 넣었으니, 통령보옥이 가보옥의 신변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고본에서는 이 점의 구별이 애매해서 둘을 하나로 합쳐 놓았다. 정고본에서는 돌이 끼어들어 한 논의들을 삭제해 버렸지만, 이야기가 시작될 때 이미 돌과 신영시자, 통령보옥, 가보옥이 뒤섞여 버려서 내재적 모순을 피하지 못했다. 가장 뚜렷한 예는 가보옥이 통령보옥과 한 몸이라면 어떻게 가보옥이 통령보옥을 차고 다니고 내던지는 상황이 생기겠는가? 이것은 또 둘이 하나로 합쳐진 적이 없는 듯한 서술이다. 그 외에 앞뒤가 어울리지 않는 부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앞쪽에서는 돌이 “하늘을 보수하는 데에 뽑히지 못해서 스스로 원망하고 탄식하며 날마다 구슬피 울고 부끄러워했다.”고 해 놓고 뒤쪽에서는 “당시 이 돌은 여와씨에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스스로는 느긋하게 각지를 돌아다니며 놀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은 대체 슬퍼한 것인가 기뻐한 것인가?” 둘째, 앞쪽에서는 돌이 승려와 도사를 만난 후 그 머리에 부스럼이 난 승려의 소매로 들어가 버렸는데, 나중에 또 부스럼 난 승려가 절름발이 도사와 함께 “경환선고의 궁으로 가서 이 어리석은 것을 깨끗이 건네주세.” 하고 말했고, 정고본에서는 나중에 그 돌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자기 스스로 “경환선고의 거처에 가서” ‘신영시자’가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자들은 이렇게 내재적 모순이 있는 판본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판중궤이(潘重規)의 경우를 보자.

어떤 이는 보옥을 전국옥쇄(傳國玉璽)로 풀이하는 것이 견강부회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작자가 곳곳에 은밀하게 끼워 넣은 이야기로 독자에게 알려 주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은 바로 가보옥이고, 가보옥은 바로 전국옥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제1회에서 청경봉에 있는 한 덩이 돌이었다가 단련을 거쳐서 신령과 통하는 능력이 생겨서 “다시 몇 글자를 새겨야 기이한 물건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또 진사은의 꿈속에서 돌이 알고 본 아름다운 옥이었다고 했다. 제8회에서는 더욱이 설보차의 말과 시선을 통해 이 아름다운 옥에 대해 상세히 묘사했는데, 생김새와 크기가 《삼국지》 〈손견전(孫堅傳)〉의 주석에 기록된 한(漢)나라 때의 전국옥새와 같다. 옥 위에 “잃어버리지도 잊지도 말지니, 신선 같은 수명을 누리며 영원히 창성하리라.[莫失莫忘, 仙壽恒昌]”이라고 새겨 놓은 것은 더욱 한나라 때의 전국옥새에 새겨진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장수 누리며 영원히 창성하리라.[受命於天, 旣壽永昌]”이라는 구절을 복제한 것이다.

판중궤이는 “돌이 보옥”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인상과 믿음은 정고본 계열의 판본을 읽음으로써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정고본 계열의 판본에 다민 문장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필사본 제16회에는 진종(秦鍾)이 중병으로 죽어갈 때 도판(都判)이 귀신들에게 진종의 혼을 놓아 주라고 명령하며 이렇게 말한다. “헛소리! 속담에도 그러지 않더냐? ‘벼슬아치는 온 세상의 일들을 다 관장한다[天下官管天下事]’고 말이다. 예로부터 사람과 귀신의 길은 마찬가지이고, 이승과 저승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 분이 이승에 있건 저승에 있건, 이 도령을 돌려보내는 게 실수하지 않는 길이야!” 이에 대해 판중궤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보옥의 위력은 저승사자까지 놀라게 하는데, 바로 그것이 전국옥새이기 때문이다. 왕은 천하를 관장하기 때문에 “벼슬아치는 온 세상의 일들을 다 관장한다.”고 한 것이다. 이는 바로 작자가 보옥이 전국옥새로서 정권을 대표하는 천자의 신분임을 밝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보옥이 무슨 벼슬을 했다는 것인가? 조설근은 또 무슨 벼슬을 했는가? 책 전체에서 이렇게 드러내 놓고 또는 암중으로 얘기하거나 간접적으로 계시하여 눈에 띄게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나는 보옥이 전국옥새를 은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라는 주장을 감히 믿을 수 없다.

판중궤이의 주장은 “벼슬아치는 온 세상의 일들을 다 관장한다.”는 구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경진본과 기묘본, 갑술본, 몽부본, 척서본, 척녕본까지 다섯 개의 필사본에서만 보이고 몽고본(夢稿本)과 서서번(舒序本), 갑진본, 열장본에는 모두 이 구절이 없다. 정갑본에도 도판이 꾸짖는 말이 없고, 정을본(程乙本)에는 단지 “그 도판이 더욱 초조해져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那都判越發著急, 吆喝起來]”라고만 되어 있지 위 구절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판중궤이는 텍스트의 이문(異文)을 이용하여 이론을 설립했다. 가보옥과 통령보옥을 합일시키기 위해 정고본의 문장을 이용하고, 보옥이 바로 천하의 벼슬아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필사본 계열의 문장을 채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텍스트의 불안정성(textual instability)이 그의 이론을 설립하는 데에 편리한 통로를 제공했던 셈이다. 맥라버티(James Mclaverty)는 특성과 발언의 문제: ‘텍스트의 불안정성’에 대한 의도론자의 반응〉에서 “같은 작품에 속하는 몇 개의 판본을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지적했다. 사실상 근래의 판본 연구는 이미 “두 가지 판본 계열(필사본과 판각본)과 두 가지 《홍루몽》”이라는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두 가지 계열의 판본을 혼합하여 이론을 세우는 바람에 이따금 “앞에 한 말이 뒤에 한 말과 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필사본에서 유오아(柳五兒)는 제77회에서 이미 죽었지만, 판각본에서는 일찍 죽지 않고 제77회에서 가보옥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다시 뒤쪽(제109회)에는 “향기로운 영혼 기다리다가 유오아가 잘못된 사랑을 이어 받다[候芳魂五兒承錯愛]”라는 한 회 분량의 이야기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로 보건대 필사본과 판각본은 각기 고유의 일관성(consistency)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뒤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유(Steven Mailloux)는 〈판본학과 ‘작자의 최종 의도’〉에서 ‘작자의 원본’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 텍스트 결정(textual decisions)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바로 “한 작품의 다른 판본들을 구별하여 절충적인 의미로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유의 말은 원래 편집과 교감에 관한 것이지만 텍스트 비평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2007년 보충] 선즈쥔(沈治鈞)의 《홍루몽 형성 연구》 제2장과 제3장은 작품 형성의 각도에서 ‘돌과 신영시자, 가보옥’을 해석한다. 즉 돌의 신화는 옛날 원고이고 신영시자 이야기는 새 원고라서 작자가 이어서 엮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즉, 텍스트의 불안정성 역시 작품 형성의 과정에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반드시 필사나 편집자가 만들어낸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